[지스타] 니시키 야스노리, 추억보정을 넘어선 게임 음악 작곡하기
바야흐로 뉴트로(New+Retro) 전성시대다. 1980~90년대 콘텐츠를 향유하며 자란 세대가 구매력 큰 3040이 되고 창작자로서도 프로젝트 주도할 위치에 오르며 이러한 흐름은 급물살을 탔다. 그런데 ‘옥토패스 트래블러’ 음악을 담당하며 그 중심에 선 어느 1985년생 작곡가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요즘 게임 음악은 왜 옛날만치 좋지 않나? 그저 추억보정(思い出補正)인가? 아니면 어떻게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주제로 작곡가 니시키 야스노리가 'G-CON 2024'서 강연을 진행했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를 비롯한 대표작을 소개하며 스퀘어에닉스가 자신의 프리랜서 생활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너스레를 떤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패미컴이든 슈퍼 패미컴이든 뭐든 괜찮아요. 어린 시절 즐겼던 게임 음악과 요즘 게임 음악 중 어느 쪽이 더 좋나요?” 결과는 역시나라면 역시나, 옛날 게임 음악이 좋다는 쪽이 훨씬 많았다.
'옥토패스 트래블러' 음악으로 유명한 작곡가 니시키 야스노리
거수 결과를 확인한 그는 자신도 레트로 게임 음악을 즐겨 듣는다며 이러한 취향은 각자가 지닌 추억과 개성에 깊이 연관된다고 설명했다. 10대 시절에 좋아했던 음악이 평생의 취향을 결정하고 뭔가 새로운 음악을 발견할 수 있는 건 대략 30대가 끝이라는 것. 요컨대 추억보정이 맞다는 걸까. 혹은 단순히 게임 음악의 완성도가 해마다 떨어지는 건 아닐까. 최근 ‘별의 커비’ 아버지 사쿠라이 마사히로도 비슷한 문제 제기를 했었다고.
추억보정이 맞을 시 그처럼 신진 작곡가가 옛 명인을 넘어설 방도는 없고 대신 다음 세대에게 기억될 게임 음악을 만들면 그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과거보다 게임 음악이 두각을 보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니시키 야스노리가 꼽은 네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다. ▲포토리얼한 영상 표현 ▲해외-일본 기준에서- AAA급 타이틀의 영향 ▲영화적인 연출 기법 ▲대사 및 효과음과의 음량 관계.
어째서 최근 게임 음악은 예전처럼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가
소싯적 게임은 도트 그래픽이라 캐릭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게임 음악이 단순한 BGM에 그치지 않고 현 상황의 분위기가 검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즉 지금 캐릭터가 슬픈지 기쁜지 격양됐는지 BGM으로 보충 설명하는 식이라 필연적으로 게임 음악의 자기 주장이 강해진다. 이게 점차 포토리얼한 영상 표현이 도입되며 과거의 BGM은 지나치게 설명조라는 그다지 좋지 못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영화적인 연출 기법이 게임 개발에 침투하며 음악이 캐릭터의 대사나 다른 환경 효과음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음악적으로는 오스티나토(Ostinato, 동일한 선율의 저음 악구를 반복하는 기법)라 하는데, 대사나 효과음에 방해되지 않는 앰비언트 사운드라 과거의 멜로디컬 BGM가 크게 차이가 난다. 요즘은 작곡가가 아무리 열심히 음악을 만들어도 대사나 효과음에 묻혀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 정도다.
포토리얼한 영상과 영화적인 연출이 많아지며 게임 음악의 역할은 축소
포토리얼한 영상 표현이나 영화적인 연출 기법은 모두 해외 AAA급 타이틀이 유행시킨 바다. 이를 일본 스튜디오들이 무작정 따라가는 과정에서 게임 음악의 입지가 좁아졌는데, 그 멜로디 자체가 일본 게임의 중요한 정체성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스스로 매력을 내버린 꼴이 되었다. 필요에 따라 작곡가와 디렉터가 서로 협의하여 대사, 효과음, BGM간 음량 관계를 뒤집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작금의 게임 산업은 소통이 점차 어려워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니시키 야스노리 본인의 대표작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어떨까. 팀 아사노의 목표는 HD-2D 기술을 활용해 어린 시절 가슴을 설레게 했던 RPG를 현세대에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게임 음악 역시 일부러 자기 주장이 강한 멜로디컬 BGM으로 작곡해달라는 의뢰가 왔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 스승인 우에마츠 노부오나 이토 켄지 등 옛 명인들과 경쟁하는 데 부담을 느끼면서도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라 여기며 의뢰를 수락했다.
고전 명작의 재현을 추구한 '옥토패스 트래블러', 음악적 목표도 같았다
니시키 야스노리는 우에마츠 노부오나 칸노 요코가 만든,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환상계로 데려가는 강렬한 멜로디를 들으며 자랐다. 자신도 언젠가 그런 작업을 해내리라 꿈꾸며 도쿄음대에 진학했고 마침내 ‘옥토패스 트래블러’로 기회가 닿았다. 여기서 그가 세운 다섯 목표가 있다. ▲통속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설명적인 것도 두려워하지 않기 ▲멜로디는 간단명료하게 ▲잊지 않을 만치 짧게 ▲효과를 알기 쉬운 인터랙티브.
여기서 통속적(下世話)이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란 뜻이다. 그처럼 명문대서 공부하고 고도의 작곡을 할 수 있게 된 이들은 통속적인 음악을 만드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나 대중에게 잘 와닿는 곡이 지닌 파급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일례로 ‘사쿠라 대전’과 ‘원피스’로 유명한 작곡가 다나카 코헤이는 칸노 요코를 가리켜 ‘세련된 통속적임’이라 칭찬한 바 있다. 그것이 니시키 야스노리가 도달하고픈 목표다.
사실 작곡할 당시에는 너무 통속적이라 부끄러웠다는 '보스배틀2'
보다 구체적인 예시로 ‘옥토패스 트래블러’ BGM 가운데 특히 인기가 많은 ‘보스배틀2’를 들 수 있다. 어찌 보면 정말 뻔하디 뻔한 멜로디인데, 통속적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뭇 게이머의 마음이 불타오를만한 전개를 택했다. 너무 긴 곡은 그다지 기억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부분 길이도 1분 28초로 짧게 잡았다. 이게 2회 반복 후 약간 지루해질 즈음 색다른 전개가 나오며 전체 곡이 마무리는 상당히 예스러운 게임 음악이다.
다음으로 설명적이란 건 앞서 이야기한 BGM의 자기 주장이다. 포토리얼한 영상 표현이 유행하며 음악이 차츰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지만 영화와 게임은 다르다.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게이머와 콘텐츠의 상호작용, 즉 스스로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강렬히 몰입한다는 거다. 따라서 때로는 지나치게 설명적인 음악도 필요하고, 혹은 앰비언트 사운드라 할지언정 그 게임의 킬러 튠이 되길 의식하며 작업해야 한다.
캐릭터 테마를 듣기만 해도 그 성격과 출신 배경이 떠오를 수 있도록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경우 일부러 도트 그래픽을 택했기에 자연스레 음악의 역할이 커졌다. 각기 다른 배경설정을 지닌 여덟 여행자에 대해 명확히 전달할 캐릭터 테마가 필요했기 때문. 가령 약사 아펜은 리버랜드 출신의 선량하고 심지 곧은 남성이고 오필리아는 사막 지방인 선랜드서 비극적인 과거를 극복하려 애쓰는 열정적인 여성이다. 이 캐릭터 설정이 멜로만으로 와닿도록 만드는 게 작곡가와 게임 음악의 역할인 셈이다.
소싯적 게임은 기기 사양상 동시에 출력 가능한 음향이 적어 자연스레 간단명료한 곡이 쓰였다. 특히 신시사이저의 강렬한 8bit 사운드는 유일무이한 독자적이 매력을 지녔다. 게임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알려주면 “아, 그 삐빅삐빅- 하는!”라 반응할 만치 대중에게 친숙한 쪽은 신시사이저 사운드다. 어쩌면 오케스트라 같이 호화로운 음향을 무한정 넣을 수 있게 된 현 상황이 되려 게임 음악의 정체성을 흐리지 않았을까.
용량 제한 탓에 짧고 강렬해진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매력으로 정착했다
음악의 길이와 분량도 비슷한 맥락이다. 레트로 게임은 용량이 제한되어 적은 곡이 들어가고 그나마도 한 루프가 짧은 편이다. 즉 역으로 곡 하나하나가 게이머에게 들리는 시간 자체는 상대적으로 많다. 당연히 그 인상 또한 강해진다. ‘옥토패스’ 역시 이를 감안하여 일부러 긴 곡을 넣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배틀의 전주로 편곡되었을 때 존재감이 살아나야 했다. 그래서 알펜의 테마는 인트로 없이 곧장 멜로디로 넘어가는 기법을 썼다.
기기 성능이 발전하며 예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인터랙티브 음악 연출이 가능해지고 작곡가라면 누구나 그러한 기법을 활용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구나가 인터랙티브 음악 연출을 즐기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인터랙티브 기법은 저마다 각기 다른 경험을 주므로 자칫 그 음악이 전하려는 본연의 목적과 멀어질 수 있다. 따라서 너무 복잡하고 현란한 익터랙티브 음악 연출보다 추구하는 효과를 알기 쉬운 편이 낫다.
인터랙티브 음악 기법은 꼭 필요한 부분에 알기 쉬운 효과로 사용했다
아쉽게도 니시키 야스노리에게 ‘옥토패스 트래블러’가 그랬듯 젊은 작가가 작품 전체를 담당할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오늘날 게임 개발은 점점 더 대규모 작업이 되며 작품 하나당 필요한 음악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자연스레 여러 작곡가가 분업하는 방식이 정착돼 예전처럼 한 사람의 개성과 취향을 작품 전체에 투영하긴 어려워졌다. 디렉터로부터 어떤 음악이 필요하다, 지시가 떨어지면 다들 수동적으로 업무에 임할 따름이다.
과거 우에마츠 노부오가 ‘파이널 판타지’ 음악을 만들 당시 게임 디렉터인 사카구치 히로노부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적이 한 차례도 없다고 한다. 대신 시나리오를 통째로 넘겨받아 읽고 스스로 재해석하며 어디에 어떤 곡이 쓰일지 정했다고. 음악에 한하여선 작곡가가 디렉터 이상으로 훌륭한 연출을 구상할 수도 있으므로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게 좋다. 그래야 작곡가의 개성이 충분히 녹아든 걸작이 탄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젊은 작곡가가 오롯이 한 작품을 맡아 작곡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 됐다
근 몇 년간 뉴트로가 대세로 떠오르며 예전처럼 멜로디 강한 게임 음악이 각광받는 건 반가운 흐름이다. 다만 그게 아예 고전 IP를 재차 끄집어내기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게임 개발의 위험부담이 날로 커지면서 적잖은 스튜디오가 신규 IP에 투자를 줄이고 이미 자리잡은 시리즈 속편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 경우 젊은 작곡가가 음악을 담당하더라도 사실상 기존 작업물에 종속된 채 어레인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저 유명한 미츠다 야스노리가 ‘크로노 트리거’ 음악을 담당한 게 스무 살 때다. 본래 효과음 담당이었는데, 제대로 작곡 업무를 시켜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사카구치 히로노부와 담판을 지은 게 잘 풀렸다. 그렇게 젊은 작곡가의 감성이 잔뜩 들어간 ‘크로노 트리거’는 모두가 알다시피 걸작이 됐다. 토리야마 아키라, 호리이 유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그때도 거물이었다. 그 사이에 겨우 스무 살 신예가 껴드는 일은 이제와선 불가능하다.
기존 IP를 재활용하면 아무래도 선배의 작업물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과거보다 게임 음악의 존재감이 없고 새로운 스타 작곡가가 탄생하지 않는 게 비단 추억보정 탓만은 아니다. 게임 산업은 크게 번창했을지언정 작곡가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을 투영하긴 어려워졌다. 영화적 연출 기법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대사, 효과음 다음에야 음악이 들리는 음량 관계 역시 바꿔야 할 인식이다. 무조건 호화로운 오케스트라 녹음과 복잡한 인터랙티브 연출 기법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도 꼭 기억해야겠다.
끝으로 미츠다 야스노리는 자신 역시 문제의식을 공유할 뿐 해결책은 아직 모른다며, 게임 음악의 미래를 위해 한국과 일본서 모두 함께 노력하자고 독려했다. 예전처럼 매력적인 멜로디의 게임 음악이 많이 작곡되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게이머에게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고. 그러려면 작곡가들 스스로 단순히 좋음 음악을 쓰는 것 이상의 노력과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강연 후 짧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앞으로 '크로노 트리거' 미츠다 야스노리 같은 사례가 늘어나기 바라며
●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음악의 차이는 뭘까
: 쉬이 답하기 어렵다. 역시 그 시절에는 작곡가가 자신이 하고픈 음악을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려나. 물론 게임을 위한 곡이니까 관련 내용에 대해 알긴 해도 그렇게까지 구애받지 않았다. 반면 지금은 프로듀서나 디렉터의 연출 의도가 너무 확고해서 작곡가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쫓기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작곡해봐야 오랫동안 기억될 음악이 나오겠나. 꼭 게임뿐 아니라 영화쪽 제작 비화를 들어봐도 감독과 작곡가가 아주 친밀하다든지 작곡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때 좋은 음악이 탄생하더라. 결국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에서의 어레인지 작업이 크게 호평 받았다
: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음악이 호평 받은 건 1997년 원작서 우에마츠 노부오 씨가 만들어둔 매력적이 멜로디가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 토대 위에 우리가 지닌 젊은 감성을 얹었기에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만약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음악을 완전히 처음부터 작곡해야 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힘들지 않을까. 언젠가 그걸 해내는 게 나 자신에게 주어진 큰 과제이지 싶다.
● 게임 음악과 ‘블랙록슈터’, ‘샤인포스트’ 등 TVA 작업은 어떻게 다른가
: 게임과 달리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경우, 음악이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해 작품을 가려버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초기에는 기존 영상 음악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개인적으로 실패했다고 여기는 작업이 적잖았다. 스스로 게임 음악 출신의 작곡가라는 정체성에 비추어 봤을 때 말이다. 우리가 자라며 들었던 멜로디의 자기 주장이 강한 음악이 다시금 일상에 받아들여져 계속 듣고 싶다고 여겨지기 바란다. 최근 이른바 포토리얼하고 메시지가 풍부한 영상에서 거기에 지지 않을 만한 음악을 내놓고자 여전히 노력 중이다.
|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