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스타] 체험이 경험으로 깊어질 때, 아틀러스가 추구하는 ‘JRPG 3.0’
오늘날 JRPG를 이끄는 일본 유수 게임사 중에서도 아틀러스처럼 고유의 작품관을 우직하게 관철해온 곳은 드물다. 이는 과거 ‘진·여신전생’의 창조주라 불렸던 오카다 코지, 이토 류타로, 카네코 카즈마나 바통을 넘겨받은 하시노 카츠라, 소에지마 시게노리처럼 재능 넘치는 크리에이터가 늘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페르소나 3·4·5’로 아틀러스의 중흥기를 연 하시노P 최근 ‘메타포’를 통해 스스로 거장임을 재차 입증했다.
아틀러스 하시노 카츠라 디렉터 겸 프로듀서, 소에지마 시게노리 디자이너
그런 그가 13일(목), 'G-CON 2025’ 연사로 무대에 올랐다. 강연 주제는 「체험이 경험으로 깊어질 때 - 아트와 구조로 남기는 기억의 설계론」이다. 출세작이라 할 만한 ‘페르소나 3’부터 4, 5편과 ‘캐서린’, ‘메타포’까지 오랫동안 나름의 스토리텔링을 이어온 경험을 전하고 싶다고. 뿐만 아니라 하시노PD 곁에서 늘 각종 일러스트를 책임진 디자이너 소에지마 시네노리까지 동석해 과거 작품 속 주인공 및 표지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첨언했다.
가장 먼저 강연 주제에 대한 얘기로, 하시노P는 관객석을 향해 체험과 경험의 차이를 생각해본 적 있느냐? 고 물었다. 그가 볼 때 체험은 게임을 하는 동안만 즐거울 뿐 끄고 나면 금세 잊혀지는 것이다. 반면 경험은 게임을 마친 후에도 마음 속에 무언가 남아 떠올리게 되는, 요컨대 기억에 새겨지는 것이다. 게임 크리에이터로서 자신은 늘 단순 체험이 아닌 경험으로서 소중히 남겨질 게임을 내놓고자 애쓴다는 게 하시노P의 설명이다.
체험은 일시적인 재미에 그치는 것, 경험은 깊이 기억되는 것으로 구분했다
'페르소나 3'부터 '메타포'까지 다섯 작품을 예시로 들어 그 방법론을 풀어냈다
2006년작 ‘페르소나 3’는 하시노P가 본격적으로 타로 카드의 모티프를 활용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특히 ‘페르소나 3’의 경우 메이저 13번 카드, 죽음(Death)이 핵심 테마로 쓰였다. 죽음이라면 짐짓 무거운 인상이 앞설 텐데, 그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끝이나 마냥 슬픈 일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단초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매 순간의, 시간의 유한성이 단적으로 와닿는 것 또한 죽음이란 개념이 품은 힘이라 봤다.
소에지마D는 ‘페르소나 3’ 주인공의 원안을 꺼냈다. 본래 머리가 삐쭉하고 표정도 풍부한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으나, 시간의 유한성을 표현하고자 좀 더 내성적인 스타일로 바꿨다고. 헤드폰을 씌워 자신의 세계에 머무는 인상을 살렸다. 패키지 일러스트는 컨셉 컬러인 파랑을 바탕에 깔고 주인공과 타나토스로 죽음, 재생이란 테마를 나타냈다. 실제 게임은 학원 생활처럼 밝은 내용도 있으나 패키지 일러스트는 단순, 직관을 추구했다.
두 사람의 출세작 '페르소나 3', 첫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시간의 유한성을 표현하고자 좀 더 조용하며 내밀한 디자인을 택했다
본작의 테마인 죽음과 재생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패키지 이미지
2008년작 ‘페르소나 4’는 도쿄서 펼쳐졌던 전작과 달리 시골 마을로 배경을 크게 바꿨다. ‘페르소나 3’ 테마가 죽음과 재생이었다면 그 다음은 스스로 진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언젠가 누구나 끝을 맞는다 것을 자각하고 각오한 뒤에 생각해야 할 것들. 뭘 믿어야 좋을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뭘 믿어야 좋을지,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등 정보의 취사 선택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시노P가 ‘페르소나 4’서 추구한 새로운 주제의식이다.
소에지마D는 이번에도 ‘페르소나 4’ 주인공의 원안을 보여줬는데, 지금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꽤 다른 인상이다. 시골 마을이 무대인 만큼 교복도 얌전한 디자인을 골랐는데, 그게 너무 과했는지 우등생 같아졌다고. 나름 강인한 일면을 지닌 캐릭터이므로 교복 자체를 화려히 꾸미는 대신 앞섶을 확 텄다. 패키지 일러스트는 살인 사건을 쫓는 긴박감, 그 와중에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의 두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담아내고자 했다.
시골 마을로 배경을 크게 바꾸며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페르소나 4'
정석적인 디자인의 교복을 택하되 앞섶을 터 너무 단정한 인상은 피했다
살인 사건의 조사와 우정 가득한 고교 생활을 한 장에 담아낸 패키지 이미지
여기까지 작품이 소위 쥬브나일 판타지였다면 2011년작 ‘캐서린’은 어른의 사정에 주목했다. 슬슬 ‘페르소나’의 팬들도 성인이 많아졌다고 판단했기에 바람 피우기처럼 보다 농밀한 소재를 고른 것. 테마는 유혹과 타락으로, 계속 어딘가 올라가는 게 목표인 게임인데 실은 추락하는 얘기인 셈이다. 주인공 빈센트가 참회실서 고르는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며, 이를 통해 자신의 연애관은 물론 인생관까지 되돌아봤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소에지마D는 보여준 빈센트의 원안은 앞서 두 주인공과 달리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르소나’의 경우 이른바 히어로상을 그려내야 하는데, 이쪽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저씨라 되려 수정이 적었다고. 매번 상황에 휘둘리는 어찌 보면 나약한 인간이 비일상적인 사건에 휘말림으로써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않았나 싶다고도 첨언했다. ‘캐서린’부터 본격적으로 멀티 플랫폼을 지원하며 패키지 이미지는 PS3, XBOX360이 각기 다르다.
빈센트는 원안부터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는 아저씨가 컨셉
본격적으로 멀티 플랫폼 지원에 나서며, PS3와 XBOX360의 표지가 달랐다
‘캐서린’으로 색다른 크리에이티브를 발산한 하시노 P는 다시금 쥬브나일 판타지로 돌아와 2016년작 ‘페르소나 5’를 내놨다. 이때부터 월드와이드 전개를 통해 판매량이 크게 늘어 지금도 시리즈를 대표하는 넘버가 됐다. 본작의 테마는 희망이며 서사 자체는 전작들 이상으로 암울한 내용을 많이 넣었다. 그토록 어두운 세계가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가운데 과연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라고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당초 소에지마D가 떠올린 ‘페르소나 5’ 주인공 원안은 반역의 의지를 표현한 상당히 도발적인 모습이다. 뭔가를 훔친다는 행위가 단순한 악이 아니라 되려 선하게 느껴지도록 더 올곧은 눈빛을 그렸다고. 다만 이대로는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아 안경을 쓴 조용한 고교생과, 대담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괴도로 나눠 변신의 쾌감을 주기로 했다. 패키지 이미지는 전작의 파랑, 노랑과 달리 빨강, 검정을 대비시켜 괴도단의 열정을 나타냈다.
반역의 의지를 표현한 원안, 저 도발적인 눈빛은 게임 본편으로 계승
다만 일상감을 살리는 차원에서 평소와 괴도복을 분리하는 식으로 풀었다
빨강과 검정을 대비시켜 열정을 표현, 시리즈서 가장 화려한 표지라고
그리고 딱 1년 전, 하시노P의 최신작 ‘메타포: 리판타지오’가 세상에 나왔다. 테마는 우리 모두 누구나 느끼는 감정인 불안. 또한 그와 대비되게 정의란 이래야 한다고 선언하는 영웅성. 그것이 최종적으로 심판 받는 판타지 RPG를 목표로 내러티브를 구축했다. 금번 강연 주제이기도 한, 어떻게 체험이 경험으로 깊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집대성 같은 작품이라고. 다행히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 무척 기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소에지마D는 현대극 ‘페르소나’와 달리 판타지 세계를 표현하려면 일종의 공기감을 제대로 담아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인공의 경우 어딘지 불안하면서도 결국 해낼 것 같은 모습을 추구했는데, 복장은 붉은 망토와 검을 쥔 전통적인 히어로상에 가까웠다. 여기서 추후 좀 더 현실적인 시각이 반영돼 코트, 크로스백 등이 생겼다. 패키지 이미지는 주인공 일행만 그려선 주제의식이 묻히는 듯해 경쟁자뿐 아니라 군중까지 모두 담아냈다.
'페르소나'와 달리 현대극이 아니므로, 작중 세계의 공기감을 살리고자 노력
주인공 역시 코트와 사이드백을 두른, 좀 더 현실적인 디자인이 됐다
작품의 테마를 살리기 위해 주인공 일행은 물론 군중을 등장시킨 표지
이렇게 ‘페르소나 3·4·5’와 ‘캐서린’, ‘메타포’의 다섯 작품을 되돌아보며 하시노P는 자신도 미처 몰랐던 어떤 큰 흐름이 있음을 깨달았다. 다섯 작품에 담긴 테마를 발매 순서로 나열하면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와 절묘히 대응된다는 것. 죽음과 재생, 절제, 악마와 탑, 희망의 별, 불안, 영웅성, 심판까지. 물론 각 게임은 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볼 때 그 테마와 주제의식을 연결시켜 해석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시노P가 신설한 스튜디오 제로의 모티프기도 한 메이저 0번은 바보(Fool). 정말로 멍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무(無)로서의 0번이다. 갓 태어난 존재는 자라며 갖은 경험을 쌓는다. 그러다 12번 매달린 사람(Hanged Man)에 이르러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데, 젊은이가 선대로부터 기성 관념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살아갈 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르소나 3’의 테마이기도 한 13번 죽음과 재생이 필요하다.
꼭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되돌아 보니 다섯 작품이 연결되는 흐름이 있다고
타로 카드를 모티프로 한 따온 각 작품의 테마가 더 큰 주제의식을 낳는다
그렇게 어른으로서 다시 태어난 존재는 절제와 조화의 묘를 터특하거나 희망을 찾고 미혹에 휩싸이거나 불안을 느끼며 최종적으로 심판의 순간까지 나아간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세계를 마주함으로써 인생은 결론을 맺는다. 그래서 마지막 메이저 아르카나, 21번이 다름아닌 세계(The World)다. 하시노P는 자신이 어디까지 의도했는지 밝히고 싶지 않다면서도, 결국 13번부터 이어진 타로 카드의 모피트가 작품관을 형성했다고 술회했다.
꼭 타로 카드가 아니더라도, 이처럼 여러 작품 이면에 자리잡은 더 큰 흐름의 내러티브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따라서 기획자든 원화가든 작가든 각자 자신이 품은 화두, 테마를 되돌아보며 작품의 내러티브로 녹이길 추천했다. 과거 어떤 일을 겪었고 지금은 무엇과 맞서며 이 다음에 어디로 나아갈지, 개인 혹은 조직이 스스로 자각하고 크리에이티브로서 발산할 때 단순 체험이 아닌 경험이 되는 작품을 만들어낼 터다.
요컨대, 기성의 관념 속에서 성장하지만 그 틀을 깨고 다시 태어나 자신의 세계를 얻으리라
끝으로 하시노P는 ‘JRPG 3.0’란 말을 꺼냈다. 초창기 JRPG가 1.0이라면 아틀러스 작품을 포함해 여러모로 스타일의 발전을 거듭한 현대 JRPG가 2.0. 그리고 지금까지의 틀에 갇히지 않고 플레이 방식이든, 연출 방법이든, 볼륨이든 더욱더 체험을 경험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한 결과이자 목표가 바로 3.0이다. 언젠가 그 때가 되면 자신이 소중히 여겨온 내러티브가 전세계 게이머에게 한층 더 가닿지 않을까, 꿈꾸며 그는 강연을 마쳤다.
아쉽게도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려준 건 아니지만, JRPG 3.0을 목표한다는 결론
|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