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愉悅)은 거들 뿐, 본편이 더 즐거운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에픽세븐’으로 2D 모바일 게임 연출의 극한을 보여줬던 슈퍼크리에이티브가 차기작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를 연내 선보인다. 최근 대다수 서브컬처 게임이 3D화되는 흐름을 거슬러 이번에도 2D 그래픽. 심지어 기존보다 몇 단계나 더 발전시킨 모양새다. 배경 설정의 경우, 왕도 판타지풍 ‘에픽세븐’과 확실히 차별화하여 코스믹 호러에 가까운 암울한 SF 세계관을 택했다. 단순히 게임 내 대사나 상황 묘사로 인류의 위기라 떠드는 게 아니라, 진짜 캐릭터가 정신 붕괴되는 시스템을 구현한 점 역시 퍽 인상적이다.
제목의 첫머리기도 한 카오스는 검은 연기 또는 별의 암세포라 불리는 범우주적 대재앙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퍼져나가 수많은 행성을 감염시키고 그곳에 사는 지적 생명체를 괴물로 바꿔버렸다. 인류 또한 별다른 방비 없이 카오스와 맞닥뜨려 36시간 만에 지구를 상실, 방주라 불리는 일종의 이민선을 거점 삼아 간신히 연명하는 중이다. 다만 저항 의지가 완전히 꺾인 건 아니라 카오스의 정신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특수 혈청 아담을 개발했고, 그것을 주입 받은 존재가 바로 나이트메어 호의 함장이자 퍼스트인 주인공이다.
[인터뷰] 미소녀가 절망하도록 만든 까닭은,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에픽세븐'을 만든 슈퍼크리에이티브의 야심작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코스믹 호러 SF, 코스믹 호러도 한 수 접어줄 2D
이런 게임이 대저 그렇듯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의 첫 장면은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미소녀들 사이에서 깨어나며 시작된다. 기억 상실은 유저와 주인공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한 방편인데, 본작의 경우 여기에 추가로 숨겨진 설정이 있는 듯 단서를 흘린다. 분명히 오프닝서 카오스마저 정복한 인류는 또 한 번 진보를 이뤘다~ 고 하더니 갑자기 작전 실패 안내가 뜨고, 멀쩡히 항행 중인 나이트메어 호가 오래된 폐허로 발견되는 등. 카오스로 인한 시공간 왜곡이 어떤 식으로든 메인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룰 것으로 추측된다.
기억을 잃은 건 잃은 거고, 특수 혈청 아담의 결실인 퍼스트이자 함장이기도 한 주인공은 즉시 일선에 복귀한다. 정신 오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가 전투원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 감염원을 없애는, 이른바 카오스 제로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 나이트메어 호 함교가 곧 본작의 로비 화면이며 임무가 메인 스토리, 시뮬레이션이 그 외 전투 콘텐츠, 카오스가 후술할 로그라이트 모드, 구출이 전투원 및 파트너 뽑기, 방주 도시가 내정, 전투원이 보유 캐릭터를 확인하는 메뉴다. 이 중 몇몇은 얼마간 스토리를 진행해야 열린다.
늘 그렇듯 기억 상실로 눈을 뜬다. 이제 지휘관 겸 선생 겸 코치 겸 여행자 겸…
함장으로서 이끄는 나이트메어 호 함교가 로비, 살짝 심심한 감이 없지 않다
상술했다시피 슈퍼크리에이티브는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서 자사의 전매특허 2D 그래픽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크고 작은 애셋의 품질도 품질인데 분량까지 과연 혀를 내두를 만하다. 캐릭터 하나당 대강 헤아려도 라이브 2D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전면 일러스트, 실제 전투를 치르는 데포르메 모델, 카드 사용 시 뒷모습 컷인, 그리고 물론 필살기 격인 에코 스킬의 화려한 연출이 들어간다. 참고로 데포르메 디자인을 택한 이유는 딱히 귀여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적과의 격차를 벌려 크기부터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고.
캐릭터 너머로 펼쳐진 배경들 또한 여느 턴제 2D 게임서 접하는 심심하고 정적인 묘사와 완전히 다르다. 라이트 리소스에 의한 광원 효과와 능동적인 그림자 표현은 물론 액체로 덮인 곳은 표면 반사가 적용됐다. 사막이면 사막, 늪지면 늪지에 어울리는 환경 필터 역시 몰입감을 높이는 요소. 심지어 식물, 신호등처럼 자잘한 오브젝트도 개별 애니메이션이 존재하는데다 2.5D 액티브 카메라를 통해 보다 심도 깊은 화면을 구현했다. 이 정도면 2D 그래픽으로 어디까지 가능한가 보여주는 일종의 개발 차력쇼라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에 하나에 들어가는 2D 리소스가 품질과 분량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
아직 초반이라 그렇겠지 싶기는 한데, 애니메이션 컷신 역시 풍성한 편이다
수집형 RPG + 덱빌딩, 너무 얕지도 어렵지도 않게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의 파티는 전투원 셋, 파트너 셋으로 구성된다. 다만 파트너는 기존의 장비를 인간형으로 풀어냈을 뿐이니 본고는 전투원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모든 전투원은 타고난 성(星)으로 나뉘는 등급과 스트라이커, 뱅가드, 레인저, 헌터, 사이오닉, 컨트롤러의 다섯 직업 그리고 열정, 정의, 질서, 본능, 공허의 다섯 속성 중 하나에 속한다. 이들은 저마다 약 25종의 고유 카드를 지녔는데, 여기에 150종 이상의 공용 카드를 적절히 섞어 전투에 쓸 덱 하나를 만드는 식이다. 요컨대 본작의 정체성은 덱빌딩 RPG다.
덱빌딩 RPG서 캐릭터의 성능은 공, 방, 체가 얼마냐로 평가받지 않는다. 고유 카드를 뭘 지녔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가령 트리사는 단검 꺼내기-핸드로 그림자 단검 2장을 가져온다-와 그림자 장전-핸드의 그림자 단검을 소멸 후 그 수만큼 모든 적 피해 80% 반복-처럼 알기 쉽고 강력한 콤보를 자랑한다. 소멸시킨 카드가 많을수록 이로운 효과를 얻는 카일론 같은 경우도 있고. 방어치를 잔뜩 높였다가 반격으로 되받아치는 마리벨, 도박사답게 무작위성이 도드라지는 카시우스 역시 흥미롭다. 물론 각자의 에코 스킬도 같은 맥락이다.
그림자 단검을 늘리고 다시 소모하며 이득을 취하는 트리사의 고유 카드 연계
방어력을 늘린 후 반격 위주로 싸운다든지, 무작위성이 도드라진 캐릭터도 있다
만약 일전에 ‘슬레이 더 스파이어’나 그로부터 영향 받은 덱빌딩 RPG를 즐겼다면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역시 금세 적응될 터다. 매 차례마다 핸드로 카드가 들어오고 제한된 행동치 내에서 적을 공격할지 아군을 치료할지 혹은 전혀 다른 효과를 노릴지 판단해야 한다. 대다수가 25종의 고유 카드만으로 콤보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서로 속성을 맞춰 둘 이상의 전투원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신 전투원 셋 다 동일 속성으로 맞춘 파티는 적과 상성상 열세에 놓였을 때 타계책이 궁색해지니 주의하자.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덱빌딩 RPG와 비슷하나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에는 일찍이 화제를 모은 정신 붕괴 시스템이 있다. 파티 전체가 공유하는 HP바 아래로 전투원 각자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존재하며, 갑작스레 적과 조우하거나 아군이 쓰러지는 등 온갖 이유로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 임계치에 다다르면 현혹, 죄책감, 공포 등 각자가 지닌 트라우마가 터지며 결국 허물어지는 것. 다만 전투서 완전히 이탈하는 건 아니라 붕괴 카드를 소모해 회복 가능하고, 그와 함께 에코 스킬이 활성화돼 일발 역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카드풀이 늘면 늘수록 전략의 재미가, 그리고 어쩌면 복잡성도 점차 커질 구조
의외로 정신 붕괴는 게임 구조의 일부로 여겨질 뿐, 도드라지는 요소는 아니다
정신줄 부여잡고 헤쳐가자, 의외로 본격 로그라이트
이렇듯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의 메인 스토리나 여타 전투 콘텐츠는 준비된 덱을 잘 운용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러나 본작의 핵심 콘텐츠, 카오스만은 예외인데 로그라이트의 문법을 차용했기 때문. 여러 갈래로 뻗은 이 길, 저 길을 전전하며 적과 싸우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려 풍성한 보상 혹은 뼈아픈 상흔을 얻는 바로 그 로그(Rogue) 장르 말이다. 물론 본작은 어디까지나 수집형 RPG이므로 로그라이트의 탐험 결과가 다른 콘텐츠까지 그대로 이어지진 않으며, 세이브 데이터란 형태로 부분 반영되는 식이다.
카오스가 창궐한 구역에 들어서면 먼저 세 가지 운명이 제시된다. 이는 그 탐험 내내 파티에 적용될 일종의 규칙이자 강력한 패시브 효과다. 밸런스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결핍-치명타가 발생하지 않는 대신 적 강인도 30% 감소-, 보상과 관련된 가학-미확인 구역에서 승리 시 50 크레딧 획득-, 주사위 굴림을 조정하는 열정-아군이 속임수, 손재주 주사위 효과 보유 시 굴림 3 증가-이 대표적이다. 보다시피 자신이 어떤 컨셉의 파티, 덱을 꾸려왔느냐에 따라 쓸만한 운명이 달라진다. 치명타 덱이면서 결핍을 고르는 실수는 하지 말자.
로그라이트 장르 문법을 빌린 카오스 모드, 상당히 본격적인 분량과 구성이다
탐험을 완료하면 확률적으로 그간의 성장치가 세이브 데이터에 기록되는 식
카오스 구역을 전전하다 보면 꼭 전투가 아니라도 퍼즐 풀이, 노점상, 휴식처 등 다양한 구역과 맞닥뜨린다. 심지어 웬 거유여신이 나타나 보살핌을 주는 경우가 있다. 주위 서너 칸까지 지도에 표시되니 현재 전력과 상태를 고려해 좀 더 과감히 나아갈까 몸을 사릴까 잘 판단하자. 간혹 전투 도중에 캐릭터 머리 위로 전구가 번뜩이는데 그 탐험 내내 카드 효과가 강화되므로 반드시 챙기자. 이외에 한 명당 세 부위의 장비와 각종 공용 카드를 얻어 곧바로 써먹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확률적으로 세이브 데이터에 담긴다.
카오스나 다른 콘텐츠서 정신적 충격이 지나치게 누적된 캐릭터는 따로-전투 시 붕괴 카드를 소모하는 것과 별개로- 에피오네 센터에 입원한다. 그런데 부러 이 환자를 파티에 데려다 딥트라우마 모드를 켤 수도 있다. 딥트라우마 모드로 카오스에 진입할 시 정신 붕괴가 빈번하고 탈출-탐험 도중에 구역을 벗어나기-할 때 세이브 데이터가 아예 남지 않는다. 대신 번뜩임 확률, 세이브 데이터 용량이 동반 상승하는지라 일정 수준 이상으로 파티를 육성하려면 늦든 빠르든 반드시 딥트라우마 모드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로맨싱사가?카드 효과를 영구히 강화하는 번뜩임이야말로 육성의 주된 목표
때문에 무거운 패널티를 감수하더라도 딥 트라우마 상태로 카오스에 향하는 것
차별화된 재미와 완성도, 운영 악재만 해소된다면…
작년 4월, 뜬소문 무성하던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을 때 필자의 관심을 끈 건 눈이 풀린 채 주저앉아 흐느끼던 어느 미소녀였다. 아니, 우리나라 게임사가 신작의 주요 시스템으로 이렇게나 본격적인 유열(愉悅)을!? 솔직히 덱빌딩이니 로그라이트니 다른 무엇보다 정신 붕괴에 꽂혀 관련 정보가 더 나오길 내내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직접 시연한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는 캐릭터와 서포터를 짝짓고 카드 뭉치를 뒤지며 느끼는 덱빌딩의 재미가 훨씬 컸다. 유열은 무슨… 콤보 짜느라 그거 볼 정신도 없다.
올해 몇몇 해외 행사에 다니며 ‘승리의 여신: 니케’와 ‘블루 아카이브’을 향한 뜨거운 열기에 새삼 놀랐다. 전세계 게임 산업 규모와 매해 출시되는 무수히 많은 신작 수를 고려할 때 국산 서브컬처 RPG가 둘이나 그 최상위권에 오른 건 예삿일이 아니다. 아마도 두 작품 모두 대체불가능한 게임성을 지녔기에 이룬 쾌거일 터. 같은 맥락에서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역시 확실히 차별화된 매력을 갖췄다. 앞으로의 성패는 게임성뿐 아니라 스마일게이트 운영에 뿌리깊게 박힌 불신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관건이겠지만 말이다.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던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정식 출시가 기다려진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