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고 경쾌히 다시 그려낸 추억의 첫 장, 하늘의 궤적 the 1st
이 세상에 20년 넘은 게임 시리즈야 꽤 많겠지만, 그 모든 내용이 단일 세계관으로 이어지며 최소 2~3년에 한 편씩 총 17작을 뽑아낸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JRPG의 정수를 맛보고 싶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궤적’을 추천하고 싶다. 단지 시리즈 첫 작품이 나온 지 20년이 흘러 정주행을 하려야 하기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이에 마침내 9월 19일, 니혼팔콤의 최신 기술과 여태껏 회자되는 고전의 감성이 합쳐진 리메이크 ‘하늘의 궤적 더 퍼스트(the 1st)’가 정식 발매된다. 과연 어언 20년된 명작이 오늘날에도 유효할지, 초반부를 즐기며 느낀 감상과 확인한 바를 정리했다.
[인터뷰] ‘하늘의 궤적’ 새 목소리, 타카야나기 토모요 & 후지와라 나츠미
[인터뷰] 가슴 펴고 권하는 ‘궤적’ 입문작, SC도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
오는 9월 19일 한국어화 정식 발매될 '하늘의 궤적 더 퍼스트(the 1st)'
감동의 스토리, 새로워진 그래픽으로 즐긴다
리메이크란 한 마디로 옛 게임을 재창조하는 일이지만 과연 어느 정도까지 뜯어고치냐는 저마다 기준이 다를 터다. 가령 ‘FF7 리메이크’는 ‘어드벤트 칠드런’ 같은 비주얼을 구현하자는 대전제가 있었고 ‘페르소나 3 리로드’ 역시 ‘페르소나 5’를 일종의 목표로 삼았다. 니혼팔콤의 경우 작년에 낸 ‘계의 궤적’이 기준이었을 텐데, 일단 척 봤을 때 인상은 ‘하늘의 궤적 더 퍼스트’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겨우 1년 사이 그래픽이 좋아졌다기보다 셰이딩, 라이팅 변화가 자못 큰 차이를 만든 것. 채도가 낮은 ‘계의 궤적’ 느낌을 선호하는 분도 없잖겠으나 ‘하늘의 궤적’는 역시 화창한 풍광이 어울리니까.
취향차야 있겠지만 '계궤', '이스 X'에 비해 화창한 느낌을 주는 건 분명하다
배경보다 캐릭터에 리소스가 집중됐는데, 서로 거슬리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특히 캐릭터에 주목한다면 차이가 더욱 도드라진다. 비교적 근작인 ‘이스 X’와 ‘계의 궤적’은 물론 채도가 높았던 ‘라크리모사 오브 다나’ 시절과 견줘도 확연히 다르다. 원화 색감을 거의 그대로 텍스처에 입힌 덕분에 일러스트와 일체감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배경은 좀 아쉽지만 그만큼 캐릭터로 시선을 쏠려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밀한 동작이나 손짓, 표정 등 데포르메로 적당히 넘기던 묘사가 훨씬 풍성해졌다. 다채로운 구도로 잡아주는 화면 연출 역시 소싯적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 이외에 옷 색깔만 적당히 바꿔 흩어놨던 마을 주민들이 조금씩 다른 얼굴이 된 것도 조그마한 발전이다.
다양한 구도와 강화된 연출이 주는 표현의 차이가 이토록 거대하다, 거대ㅎ…
대다수 NPC는 일러스트가 없었던지라 과연 이렇게 생겼었구나, 싶을 때도
이처럼 대폭 일신된 그래픽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게임의 흐름은 원작과 동일하다. 필자는 카시우스가 어린 요슈아를 데려오는 도입부터 말가 광산 사태까지 2~3시간 가량 ‘하늘의 궤적 더 퍼스트’를 즐겼는데, 달리 특기할 만한 내용 변화는 찾지 못했다. 퍼젤 농원의 마수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광산서 적절한 순서로 지렛대를 당겨 원하는 위치에 도달하는 등 자잘한 요소가 빠짐없이 있다.
삭제되지 않을까 싶던 시간 제한 의뢰와 브레이서 포인트(BP) 역시 건재하다. 대신 언제든 가능한 세이브/로드, 주요 장소로의 자유로운 빠른 이동, 구체적인 목표 대상/위치 제시로 달성 난이도를 낮춰줬다.
조금 구닥다리 퍼즐 아닌가? 싶은 부분도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의뢰 기한도 건재, 대신 전체적인 편의성이 크게 향상돼 달성하기 쉬운 편
배경은 어떤 맵이냐에 따라 변화의 폭이 상당히 다르다. 브라이트 저택이나 롤렌트 시내는 캐릭터 비율 상승에 맞춰 축척이 조정됐을 뿐 구조 자체는 그대로다. 반면 마을과 농원, 광산 사이를 잇는 필드는 원작보다 몇 배쯤 커졌다. 화면 시점이 캐릭터 후방으로 내려오며 게이머가 느끼는 거리감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막 나서자마자 목적지가 지척에 보여선 곤란하니까.
필드가 확장되며 자연스레 이동 시간도 늘었는데, 오가며 지루하지 말라고 동료들끼리 소소히 떠드는 액티브 보이스란 요소가 생겼다. 덕분에 에스텔 담당 성우인 타카야나기 토모요의 녹음량이 폭주했다는 후문.
마을은 기존 구조를 유지, 필드는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감을 보정하려 확장
물론 무작정 넓히기만 한 게 아니라 적절히 콘텐츠와 액티브 보이스를 넣었다
경쾌한 필드 & 커맨드 배틀과 브레이브 어택
‘하늘의 궤적’ 원작은 심볼 인카운터, 커맨드 배틀을 기반으로 한 소위 정통 JRPG다. 여기서 선보인 플레이 메커니즘은 시리즈가 열 편 넘도록 이어져 일종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그 안에서도 액티브 턴(AT), 필드 액션, 샤드 등 시장 동향에 발맞추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다 틀 자체를 부순다고 할만한 변화가 찾아온 게 신형 엔진으로 개발된 ‘여의 궤적’. 이때부터 필드 액션과 커맨드 배틀을 결합한 필드 & 커맨드 배틀이 도입됐으니까. 즉 ‘여궤’, ‘계궤’에 이은 금번 리메이크 역시 기본적으로 필드 & 커맨드 배틀을 채택했다. 단지 ‘계의 궤적’보다 여러모로 경량화된 느낌이다.
필드 & 커맨드 배틀는 턴제의 고질적인 게임 템포 저하를 해소하자는 취지다
'계궤'에서 덕지덕지 붙은 요소는 덜어내고 선제 이득을 취하는 수준으로 정리
필드 & 커맨드 배틀의 발상은 딱히 어려울 게 없다. 아군보다 확연히 약한 적은 실시간 액션 게임마냥 필드에서 곧장 처리함으로써 턴제 전투의 고질적인 템포 저하를 해소한다는 것. 그런데 ‘여궤’, ‘계궤’를 거치며 온갖 요소가 덧붙어 이건 이거대로 비대한 시스템이 되고 말았다. 퀵 아츠부터 시간 흐름을 늦추는 Z.O.C, 그렌델 변신, 능력 해방까지 필드 액션의 비중이 지나쳤다.
이에 ‘하늘의 궤적 더 퍼스트’는 필드 & 커맨드 배틀의 본질로 돌아와 실시간 공격, 막기, 모으기와 스턴 후 커맨드 배틀로 이행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도만 남겼다. 이제 필드 액션으로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건 잔챙이뿐이다.
커맨드 배틀 역시 '계궤'에 비하면 담백하다. AT와 스킬 범위만 신경을 쓰자
필살기 격인 S크래프트, CP를 모두 소모해 차례를 무시하고 발동할 수 있다
전술 전환(듀얼센스 기준 □)을 통해 돌입하는 커맨드 배틀도 근작들보다 담백하긴 마찬가지다. 사실 그건 ‘계의 궤적’이 지나치게 복잡한 탓이지만. 행동력(SPD)에 따라 차례가 돌아오는 액티브 턴제이며 피해를 입히거나 입으면 CP가 상승, 이를 소모해 크래프트를 쓴다. 어떤 크래프트는 적 측면이나 후면을 맞춰 추가 효과를 내기도.
무엇보다 칭찬하고픈 점은 에스텔과 요슈아의 연계 시스템이 잘 갖춰졌다는 거다. 마치 ‘이스 X’ 아돌, 카자의 연계를 다시 보는 듯하다. 크리티컬이 터지거나 적을 스턴 시켰을 때 브레이브 어택이 발동하는데, 여기다 추격을 걸어 훨씬 큰 피해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단지 아군 캐릭터가 두 명인 게 아니라, 둘이서 '함께' 싸운다는 감각이 좋다
크리티컬 또는 스턴 후 브레이브 어택을 발동해 동료와 연계 공격이 가능하다
크리티컬이나 스턴이 드문 일은 아니다 보니 실제로 플레이하면 정말 둘이 힘을 합쳐 싸운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전투당 두세 번씩 추격이 나올 정도니까. 브레이브 포인트(BP)란 자원은 있으나 그리 섭섭잖게 수급되는 편. 거기다 크래프트 세트 자체가 조정돼 에스텔이 기합 넣기, 도발보다 선풍륜을 먼저 배운다드디어알챔라인탈출인가.
마법에 해당하는 아츠는 의외로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 전술 오브먼트의 슬롯을 뚫고 일곱 속성 쿼츠를 장착, 그 누적치에 따라 아츠가 해금되는 팬들에게 자못 친숙한 시스템이다. 아쉽게도 밸런스 붕괴기로 유명했던 어스월이 여전한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크래프트 세트가 조정돼 선풍륜을 먼저 배우는 에스텔, 이것 참 감개무량…
전술 오브먼트는 세계관 설정과도 맞물려서 그런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20년치 여행길,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시라
본지 인터뷰서 니혼팔콤 콘도 토시히로 대표가 직접 토로했듯 당초 ‘궤적’은 ‘영벽’, ‘섬궤’, ‘시궤’, ‘여궤, ‘계궤’까지 줄줄이 이어질 계획까진 아니었다. 그런데 갈수록 캐릭터가 늘고 크고 작은 설정이 추가되며 더는 가볍게 잡기 부담스러운, 일종의 진입장벽을 쌓아버린 게 사실이다. 이제와 되돌아보면 ‘하늘의 궤적’이야말로 복잡함도 복작거림도 과하지 않아 참 좋았다.
신출내기 유격사 에스텔, 요슈아가 리벨 왕국을 한 바퀴 돌며 점차 큰 사건에 휘말리는 흐름은 왕도 모험물의 전형. 그렇기에 누구든 ‘궤적’의 이야기 속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더 퍼스트’가 더없이 좋은 입문작이 되어주리라 본다.
오늘(21일) 체험판이 배포된다, 본편과 데이터 인계도 지원하니 꼭 즐기시라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