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인 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단상에 오르시죠"
"......그러지"
하크라이트가 길을 비켜주자, 슬레인은 그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 장소는 버스 제국의 황족이 주로 서서 연설을 하는 자리. 그리고, 지금부터 이곳에서 퍼져나가는 방송은 버스 제국 뿐만이 아닌 지구연합에게도 흘러들어갈 것이다
'상관없어. 어차피 선전포고의 의미이기도 하니까'
단상 위에는 선객이 있었다. 어세일럼 버스 앨루시아. 아니, 그녀의 연기를 하고 있는 렘리나 버스 엔버스다
"저, 어세일럼 버스 앨루시아는 슬레인 자츠바움 트로이어드 백작을 남편으로 맞이해, 이 지구권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을 선언합니다"
준비된 대본. 준비된 대사. 준비된 상황. 모든 것은 미리 짜놓아진 판의 위
"현재, 여러분의 용감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은 길어질 걸로 보입니다. 우린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궤도기사끼리 공을 다툴 때인가요? 한 깃발 아래에 모여, 버스의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울 때가 왔습니다"
지구와 화성의 기술력은 차이가 없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알드노아의 유무. 즉, 궤도기사들끼리 힘을 합쳐 싸운다면, 지구연합에게 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 제가 가진 모든 권한을, 새로운 양륙성을 얻은 영주이자, 이윽고 제 반려가 될 트로이어드 백작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알드노아의 기동권을 누구에게 대여해 줄 것인지, 그 지시에 관한 것까지 그 모든 것을,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트로이어드 백작의 말을 제 말로 알고, 그의 곁에 모이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로서 준비는 끝났다. 궤도기사의 정체성과 그 힘은 알드노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그들에게서 알드노아의 대여권을 손에 쥔다는 것은 그들의 생사여탈권 또한 그 손 안에 쥐고 있다는 뜻
지금 이 순간, 슬레인 자츠바움 트로이어드 백작은 버스의 지배자가 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
슬레인은 렘리나의 옆에 서, 단상 앞에 있는 마이크를 들어올렸다
"슬레인 자츠바움 트로이어드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들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버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때, 양아버지였던 자츠바움 백작과 버스 제국에 대해 논의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은 절대로 잊고 있지 않다. 그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정신과 사상을, 그대로 이행할 생각이다
"우리는 이 화성이라는 대지를 신성한 대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허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정복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군대와 군사적 요소를 국가적 정책이나 제도의 제1순위로 위치시켰고 그 결과 국민의 생활은 파괴되고 국가의 생산도 아무 것도 안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궤도기사들이나, 화성의 국민들이나 전부 당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들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쉬쉬하며 묵인하고 있던 것을, 새로운 지배자가 대놓고 모두가 볼 수 있는 방송을 통해서 말하고 있으니까
"힘 없는 국민이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는 사회.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서 식민지 경영으로 타국을 약탈하며 경제력을 충당하는 수밖에 없지만서도, 그로 인해 생기는 부(富)는 계급이 높은 자에게 편중되고 국민의 생활이 윤택해지는데에 이르지 못 할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설령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버스는 결국 내부에서 무너져 내려갈 것이다
"이 모든 원흉에는 알드노아가 있습니다. 알드노아가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거머쥔다. 그 불평등하고, 불공평하며, 부조리한 현실은 지금의 버스 제국을 만들어냈습니다"
문제의 근원은 알드노아. 하지만, 이는 위험한 발언이다. 본인이 말한대로 버스 제국은 알드노아라는 반석 위에 세워진 제국. 그것을 부정한다면 제국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알드노아를 발굴한 레이리게일리아 버스 레이버스 황제 폐하의 공적은 분명 위대하신 것입니다. 허나, 그 힘을 독점하여 힘 있는 자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선대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 후손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것은 지나치게 불합리합니다. 시대는 흘러가고, 사람은 변해갑니다. 이제, 우리는 변해야 할 때가 온 겁니다. 과거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새로운 버스로 다시 태어난다!"
알드노아가 있는 이상 바로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내세울 수는 없다. 아마 지구연합과 같은 위치에 서려면 최소 100년은 필요하겠지
"모두가 행복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혈통이나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 삶이 보장받을 수 있는, 적어도 지금의 버스보다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고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슬레인 자츠바움 트로이어드는 지구인의 신분으로 작위를 얻고, 기어이 제국의 지배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크라이트를 비롯한 화성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하층민들에게 있어 그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성공신화의 주인공. 그의 말은 화성의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다
"제로(0)부터 다시 시작한다. 화성기사든, 어떤 신분이든, 설령 지구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버스의 깃발 아래에 모여, 우리들이 꿈꾸는 사회를 함께 만들고 이뤄나갈 동지들이여! 일어서라!! 우리가 바로 '버스'다!!"
분명 화성기사들을 비롯하여 기존의 기득권층은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슬레인에게는 그들 모두를 묵살시킬 수 있는, 알드노아 기동권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 적어도 그들과 따로 만나 새로운 왕국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면 불만은 사그라 들 것이다
......물론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고 난 뒤에는, 화성기사들 전원이 물갈이 될 테지만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은, 슬레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이렇게 되기를 바랬다
결과물이 어째 일본식 입헌군주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부탄의 사례도 있으니까 차후를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