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9년 4월19일 오전 9시27분]
"포도선 6번 블록 입주자 여러분께서는 입장 통로에서 한 줄로 대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주정거장 뭉게구름의 플랫폼은 사람들의 머리로 새카맣게 채워져 있었다. 방송에서 말하는 줄이란 것이 대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어디에 있어야 제대로 줄을 선 것인지 전혀 감도 못 잡을 정도로 미어터진 상태였다. 내기 순환 장치가 고장난 것처럼 플랫폼 안은 덥고 습해서 사람들의 불쾌지수는 극도로 올랐다. 줄을 찾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서로의 살이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이 인상이 구겨질 정도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밀집했기 때문인지 통신불량이 생겨 단말기까지 먹통이 되어버렸다. 짜증 섞인 고성과 웅성거림이 홀을 가득 메워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문화인입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이 곳 뭉게구름에서 정돈된 질서 의식을 통해 선진국의 면모를 보입시다. 가니메데 시대를 여는 여러분들의 선진 시민 의식을......"
플랫폼의 소음 위로 끊임없이 안내방송이 내달린다. 안내방송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힌 사람들은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가며 옆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뭉쳐버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음 덩어리가 되어 플랫폼을 가득 채운다. 플랫폼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식구들에 앞서 먼저 플랫폼 상황을 보러 내려왔던 현은 아연실색하고 자리를 떴다. 도떼기 시장도 이렇지는 않으리라. 큰 형과 작은 형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수라장에 식구들을 밀어넣은 것일까.
- 삼촌, 어때요?
플랫폼을 빠져나오자 통신이 정상화 되었는지 미아의 메시지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다. 현은 회신하는 대신 식구들이 기다리는 로비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에비!"
현의 뒤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오면서 매달린다. 현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천진난만하게 까르륵 웃는 소년이 있었다. 로아였다.
"이눔시키!"
현이 꿀밤을 먹이는 척 하자 로아가 겁먹은 척하며 뒤로 물러난다. 현은 잽싸게 물러나는 로아에게 다가서선 팔로 목을 휘감았다. 로아가 그대로 현의 품에서 버둥거린다.
"요녀석!"
현은 손으로 로아의 머리를 마구 휘저어 머리를 까치집으로 만들었다. 로아가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지만 소용 없었다.
"아아 삼촌! 내가 졌어, 내가 졌어요!"
로아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삼촌의 팔을 치며 항복 선언을 하자 현이 슬그머니 로아를 풀어준다. 로아는 현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쪼르르 앞으로 달려나간다. 혹시나 현이 또 잡을세라 내달리는 모습이 삵을 피해 달리는 고라니마냥 껑충이다. 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로아의 하얀 운동화에 매달린 파란색 큐빅이 흔들리며 현의 눈을 현혹한다. 지난 경기에서 받은 트로피에서 뽑아준 바로 그 큐빅을 운동화에 매달아둔 것이다. '나도 삼촌처럼 빨라질 거에요.' 라면서 당장은 발이 빨라야하니 신발에 묶어두겠다는 엉뚱한 말이 떠오르자 실소가 절로 터진다.
[2069년 4월19일 오후 12시 5분]
XD500급은 기본적으로 수송선이지만, 자기 방어 전투가 가능하도록 무장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나린호의 전신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호가 진수되던 시기에는 화성에서 패권을 놓고 몇몇 나라들이 무력충돌을 불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린호는 수송선으로선 드물게 제대로 된 전투정보실(CIC)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군 소속의 전함이 아니라 민간 우주선이다보니 군인 대신 민간 무기전문가가 탑승해 CIC 통제권을 가지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번 항해에 탑승하기로 했던 무기 전문가가 가정사로 인해 화성을 떠날 수 없게 되면서 CIC 통제권이 기관장인 제헌에게 돌아왔다. 덕분에 겸직을 하게 된 제헌은 기관 통제실과 CIC를 오가며 출항 전 시스템 체크에 정신없이 바빠 승선 후 개인시간을 일절 갖지 못했다.
오전 11시 즈음에서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시스템 체크가 마무리 되고, 제헌은 뒤늦게 식구들과 연락을 취해봤지만 통신 상태 불량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식구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혹시나 안전하지 않은 곳에 있는 건 아닌지, 탑승절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오만가지 걱정에 사로잡혔다.
답답한 마음에 선외카메라로 배 밖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CIC로 한 달음에 달려왔지만 개미 떼가 가득 차 있는 것마냥 새카만 플랫폼의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허탈감에 빠져 있던 제헌은 CIC 구석에 자리한 의자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바로 그 때 기관부 승무원 회선을 통해 정욱이 연락해왔다.
"기관장님."
"말해"
제헌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화면 속 까만 머리들에 쏠려 있었다. 혹여나 식구들과 비슷한 머리를 발견할까 싶은 마음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던 중이었다.
"미처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9번 기관실의 냉각 촉매제 잔량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정욱의 보고를 들으며 제헌은 눈 앞에 매달려 시야를 가리는 눈물 덩어리를 훔쳐냈다. 그리고 냉각촉매제를 체크했을 때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가뜩이나 까만 머리통들만 들여다보고 있느라 신경이 곤두선 찰나, 늘 일처리를 잘하던 정욱이 갑자기 엉뚱한 보고를 하자 제헌은 화가 치밀었다.
"천 부기관사. 냉각 촉매제는 내가 아까 확인했을 때 말이야......"
제헌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회신을 하자, 정욱이 그의 말을 자른다.
"죄송합니다. 기관장님, 제가 미처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양을 뭉게구름에서 수급해 올 수 있도록 착륙선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헌에게 메시지가 하나 날아든다.
- 공용 채널이니 육성으로 보고 드리지 못할 것 같아 송구스럽게도 메시지로 대신 전달 드립니다. 아마 냉각 촉매제가 부족한 정도가 아마 사람 예닐곱 명 중량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정욱의 은밀한 제안에 제헌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크흠, 그래 모자라다면 별 수 없지. 확인 미흡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귀책을 따지기로 하고 우선 부족량에 대해 보충을 하도록 하게."
제헌은 헛기침을 곁들이며 별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잇는다. 직접 착륙선을 타고 식구들에게 가고 싶었지만 기관장인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간 선장이 난리법석을 칠 것이 분명했으므로 대리인을 내세워야 했다.
"착륙선 사용을 위해서는 부문장인 내가 선탑을 해야지만...... 내가 지금 CIC 확인으로 바쁘니..... 대신 함께 갈 사람이 필요한데 부기관장을 붙여주지. 부기관장 듣고 있......"
"부기관장님은 연료 농도 체크를 하시는 중이라 바쁘신 것 같았습니다. 다른 이와 동행하겠습니다."
제헌이 부기관장을 부르기 전에 또다시 정욱이 말을 싹둑 잘랐다.
"부기관장이 바쁘단 말이지......"
연이어 그의 말을 끊어내는 정욱의 반응에 의아해진 제헌은 말꼬리를 흐렸다. 처음에는 분명 제헌의 식구들을 실어올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끊었다. 두번째는 단지 부기관장과 함께 나가지 않기 위해서 말을 자른 것이다. 어째서 부기관장이랑 함께 나가려고 하질 않는걸까. 부기관장 김태영도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닌데. 게다가 제헌이 기억하기로는 정욱은 딱히 부기관장하고 반목이 있진 않았다. 오히려 딱부러진 일처리 스타일이 닮아 서로를 높게 평가하는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제헌은 혹시나 정욱이 다른 용무를 위해 자신의 식구를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았다.
사람을 몰래 더 태우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욱이 그를 속일 이유가 없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태우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제헌의 식구들을 태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 게다가 제헌도 편법을 쓰는 마당에 정욱이 한두 명 정도 더 싣는다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밀반입할 물건이 있는 것일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제헌의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착륙선은 데크를 통해서 들어올 것이고 데크 보안 시스템에 의해 금지 물품은 자동 스캔되어 적발될 것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제헌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 와서 의구심을 가지는 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어쨌든 정욱이 무슨 생각을 하던 그가 혼자 착륙선을 운행하는 일은 생길 수 없었다. 착륙선은 반드시 2인 이상의 탑승자가 있을 때만 동작하도록 되어 있다. 1인 탑승 시에 탑승자에게 불의의 사고가 생겼을 때 착륙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시스템적으로 규제된 사항이라 예외란 있을 수 없다.
"그래 그럼 다녀오도록. 단......"
식구들을 위해 편법을 쓰기로 한 이상 제헌이 결정할 것은 누구를 함께 보낼 것이냐 뿐이다.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내야한다. 제헌은 금방 마음을 정했다.
"탑승 및 운행은 9기관실 견습기관사와 한다. 운행을 마친 후에는 두 사람 반드시 나를 찾아와 경과 보고를 하기 바란다."
제헌은 유나를 선택했다. 평소에도 그를 아찌라고 부르며 따르는 그녀라면 최소한 거짓을 고하진 않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잠깐만! 저요?"
정욱의 대답과 동시에 승무원 통신을 타고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헌은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님에도 무의식적으로 양 귀를 손으로 막았다.
"장 견습. 승무원 회선으로 고함 지르지 마라."
제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아니...... 그게...... 소리질러서 죄송합니다."
유나는 당황했는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들었다니 잘 됐구나. 천 부기관사와 장 견습사는 기관부에 배정된 착륙선 123호를 12번 데크에서 함께 탑승, 부족한 냉각 촉매제를 실어서 복귀할 것. 이상."
"저...... 기관장님. 저 말고 다른 분은 안 될까요?"
제헌의 명령에 유나가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절 의사를 밝히자 그는 마음 속에서 또다시 짜증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식구들을 태워와서 안심하고 싶었고 이런 소모적인 대화는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왜?"
제헌이 퉁명스럽게 내뱉자, 유나는 망설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건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겠다."
"......네"
제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겁을 먹은 유나는 개미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2069년 4월19일 오후 12시19분]
"아아아아아악."
유나는 승무원 통신 송신 모드를 끄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제 그 사건 이후로 줄곧 잘 피해왔는데 이런 식으로 단 둘이서 착륙선을 타야하다니!
"미쳤어! 미쳤어! 제헌 아찌 완전 나빠!"
유나는 앞에 높인 책상에 머리를 쿵쿵쿵 찧으며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서는 어제 정욱과 마주치던 그 장면이 빙글빙글 맴돈다.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잊는 건 무리더라도 최소한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줘야하는 거 아니냐고. 이게 대체 뭐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화끈거린다. 유나는 재차 머리를 책상과 주변 벽에 냅다 박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단기기억상실증이라도 와야 정욱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데나 쉬지 않고 열심히 머리를 찧는 와중에 무언가 뾰족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깊숙히 찔렀다.
"악!"
그녀는 뇌속까지 찔러오는 듯한 깊은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파서 더 서글프다. 그래도 온통 정욱과 대면에 집중되어 있던 신경이 분산되어서인지 머리가 개운해진 것만 같았다. 아픈 부분의 머리를 쓰다듬자 볼록 튀어나온 혹이 느껴진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는듯 했다. 그녀는 벽에 기대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어?"
유나는 정신이 들고서야 주변에 생긴 변화를 눈치 챘다. 원래 주변의 계기들이 모두 녹색으로 빛나고 있어야하는데 머리를 부딪히는 중에 버튼 하나가 잘못 눌렸는지 어느새 계기가 전부 노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등짝이 순간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출항하기도 전에 엔진에 문제가 생기는 날엔...... 유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장 견습.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즉시 12번 데크로 오길 바랍니다."
승무원 회선을 통해 정욱이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유나는 그걸 듣고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계기들을 살펴나가기 시작했지만 아직 견습기관사에 불과한 그녀가 제대로 아는 계기는 몇 가지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뺨에는 식은땀이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론 안된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사람을 불러야하나? 그랬다간 크게 혼날 텐데...... 자력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던 찰나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