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린다면 제일먼저 무슨 생각이 들까? 공부 하라는 말만 듣고 사는것이 지겨워 아포칼립스를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정부 사태에 일어날 온갖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곤 했다. 경찰의 부재로 일어나는 각종 범죄와 소방서의 부재로 일어나는 화재사건의 연쇄반응. 무엇보다도,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가 사라졌는데 누가 가르칠 것인가? 하지만 그런 상상도 공부에 시달리던 청소년 시절 뿐. 사회인이 된 지금은 세상이 망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국가 라는건 그 어떤 회사보다도 강건하고 안정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속해있고, 살아오며, 보아온 나라.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 드는 나라. 쉽게 말해, 나와 같은 어른들은 ‘세상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린다면 제일먼저 무슨 생각이 들까?’ 에 대한 답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인 것이다. 그렇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국가가 사라졌다.
징조는 있었다. 첫 번째는 세계 시장의 붕괴. 과거 몇몇 국가에 있었던 버블 경제라던가 IMF와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경제 붕괴로 미국과 같은 대국은 국가적 차원으로 세계시장을 포기. 국내의 유통만으로 경제회복을 노렸다. 하지만 그만한 자본이 없던 많은 국가들은 도산하기에 이르러 심한 경우 국가 자체를 포기하였다. 몇몇, 기업이 국가보다 더 강력했던 곳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 대기업이 나서 국가를 구매 하였고,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상황을 뉴스로 전해 들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 이곳과는 머나먼 곳의 이야기였고, 그런 일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당시의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경제회복을 위해 수를 써왔고, 덕분에 전 세계가 그런 난리를 겪는 중에도 이렇게 앉아 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위기가 우리나라에도 찾아왔다.
자원 고갈.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멍청했다. 세계시장의 폐쇄, 국가가 사라지고 기업이 휘청거리는 이 상황에 현재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자원들이 이전과 같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석유를 채굴하는 것 또한 기업이고 타국이었다. 자원의 부족현상은 간신히 살아남은 국가들에게 다시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 강대국이었던 미국은 엄청난 수를 내세웠다.
신 연합 국가 창설.
경제의 큰 타격을 수습한 미국은 빠르게 캐나다, 멕시코를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과 회담을 가지고 큰 결단을 내렸다. 전 국가의 주권 포기와 연합체제의 형성. 만일 그것이 예전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절대 일어날리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회담 내에서 극비리의 정보를 풀고, 그 정보를 들은 다른 아메리카 국가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어 주권포기를 선언하였다. 주권이 없어진 각 국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연합인 ‘연합제’에 소속되어 이전의 국가에서 지원하던 모든 일들을 연합제를 통해 행동하게 되었다. 회담 이후의 인터뷰에서 전 미국 대통령은 ‘목표는 세계의 안전과 통일’이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이 최초의 연합제, ‘지구 공화국 연방, Union of Republic for Earth(U.R.E)’의 등장일 이었다. U.R.E는 가장먼저 “연합제의 가입은 언제나 자유로우며, 가입을 위한 조건은 국가의 포기. 단 한가지, U.R.E의 소속만을 가질 것.”이라는 이념을 내걸으며 다른 국가들에게 가능성을 내비쳤다. 아메리카 대륙의 U.R.E설립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유럽이었다. 미국의 연합제 형성 이전부터 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E.U는 외부로는 세계시장의 포기를 선언했지만 내부로는 E.U를 포함한 유럽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비밀리에 경제연합을 창설했었다. 때마침 연합제 U.R.E의 등장에 비밀리에 경제연합에 가입했던 북아프리카, 유럽, 중동의 일부 국가는 ‘신 유럽 연합, Neo European Union(N.E.U)’의 설립을 선언. 사실상 경제연합을 인정함과 동시에 U.R.E를 견제하는 제2의 연합제를 표명했다. 그러나 N.E.U의 첫 번째 행동은 U.R.E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N.E.U의 전신이던 비밀경제연합이 주도하던 사업은 군사사업. 전쟁을 위한 무기와 물자를 만들고, 그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자발적인 흡수’와는 다른 ‘강제적 흡수’를 선택하기로 한 N.E.U는 ‘경제적 위기 상황의 국가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가장먼저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가장 먼저 침략을 당한 서아시아의 일부 국가는 경제가 무너지기 이전에 축적해온 부를 이용해 용병을 고용한 방위전을 시도하였고, 일부 국가는 이미 무정부상태에 들어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뒤늦게 N.E.U의 행보를 파악한 U.R.E는 서둘러 태평양을 통해 아시아에 지원군을 보내고, N.E.U의 침략에 방위하기 위한 임시 연합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임시 연합은 대부분 무정부상태가 아닐 뿐, 이미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국가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의 나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임시 연합에서 실질적으로 힘을 가진 국가는 중국과 러시아, 통일한국, 인도, 일본 정도였다. 임시연합군과 U.R.E의 지원군은 중앙아시아까지 넘어온 N.E.U로부터 인도를 탈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당시엔 자원고갈의 여파로 인해 제대로 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공무원과 같이 정부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평범한 중소회사였던 직장은 진작에 도산한지 오래되어 백수가 되었던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마음에 군에 지원했었다. 어찌 보면 군 지원은 멍청하기 짝이 없던 내 인생에 유일한 성공이 아니었나 싶다. 일반 보병인 내가 전장에 투입되어 한 일은 텐트를 치고 밥을 먹고 진지를 짓고 밥을 먹는 것뿐이었지만, 장교들의 이야기 틈에 들리는 말로는 전쟁은 순조롭게 승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에도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하루 대화 량이 고작해야 인사말 세 마디 정도였지만, 나와 같이 자원입대를 한 동기와 친해진 것을 계기로 그들 그룹에 낄 수 있었다. 내가 가장먼저 놀란 것은 그룹의 가장 어린 청년이 의외로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군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하게는 우리와 적이 사용하는 무장부터 현재 우리 군이 N.E.U를 상대하는 전술들까지. 생각해보니 처음 이곳, 코히마에 도착하여 텐트를 세울 때도 병사들 사이에서 진두지휘한 사람도 그였다. 이때까지도 나는 우리가 전쟁터에 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렸을 적 몇몇 친구들과 떠났던 캠핑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심지어 나를 그룹에 초대한 동기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통기타를 꺼내 즉흥 연주를 하며 다른 그룹들과 함께 축제와 같은 밤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전황은 바로 그 다음날에 큰 폭풍을 몰며 바뀌었다. 평소와 같이 장교들의 이야기에서 전황 소식을 듣던 나는 우리 군이 작전의 실패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갑작스레 전 병사에게 탄약 재보급이 주어진 후, 한 장교가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자신을 작전참모라 소개한 장교는 전황에 대해 설명을 하더니 우리 중대원들을 모두 차량에 태웠다. 나는 직감적으로 우리가 전장에 투입되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앞에 세워진 다수의 차량에 올라타 옆자리 병사의 얼굴을 보니 그는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놀랍게도, 떨고있던 그는 그룹에 있던 어린 청년이었다. 군 경험이 있는 그 이니 이러한 상황일수록 침착할거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보다. 아니, 군 경험이 있으니 우리 앞으로 있을 전장의 경험도 겪었을 테고, 그 공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겁에 질린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차량을 타고 도착한곳은 서벵골의 하우라였다. 우리는 생각 외로 최후방에 투입되어 안전한 생활을 해온 것이었다. 전장에 투입된 부대에 편입된 나는 새로 배치받은 분대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나를 그룹으로 이끌어준 동기와 같은 차량을 타고 온 어린 청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동기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우리 부대가 코히마에 있었던 이유는 내 아버지가 중장이셨기 때문이야.”
동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영향력으로 아들이던 그가 소속된 부대가 최후방에 배치되도록 조정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작전의 실패로 작전의 책임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장군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어 더 이상 아버지의 가호가 없는 동기와 우리 부대는 원래의 목표였던 전장에 투입되게 된 것이다. 우리 분대에서 우리 셋을 제외한 분대원들은 인터넷으로 접했던 진짜 병사들을 닮았었다. 그들을 보니 새삼 ‘나도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에 들려 하는 때에도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에 나는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군 생활을 하느라 세계의 변동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이후 알게 된 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U.R.E에 가입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U.R.E는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오스트레일리아에게 주권포기를 요청하였고, 이를 쉽게 승낙하였다. N.E.U는 정복한 아시아대륙을 과거 아프리카 대륙처럼 식민지화 하였으며, 전쟁에 투입되는 인원들도 대다수 징집된 아시아인이었다고 한다. 최전방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 겪은 어떠한 것보다도 괴롭고 힘들었다. 항상 정해진 이른 시각에 일어나야 했으며, 그렇다고 잠을 푹 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들던 도중에도 서로 번갈아가며 깨어나 불침번을 섰으며, 언제 전장에 투입되더라도 싸울 수 있게 전투 훈련을 받았다. 동기의 통기타 소리가 그리웠으며, 회사를 다니던 경제 불황 이전이 그리웠고, 세상이 멸망하길 바라던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웠다. 실질적인 전투가 일어나지 않고 정체된 나날이 지속되어가던 와중, 나는 점차 분대원들과 닮아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가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한밤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우라는 최전방에 속해있지만 실질적인 전투가 일어나는 곳은 아니었다. 전선의 유지와 물자 보급을 위한 라인에 속해있었다. 그러한 이곳에 U.R.E소속의 헬기가 추락하였다. U.R.E의 점령 지역인 하우라에 추락한 헬기이기에 별 문제 없을거라 여긴 작전장교는 우리 분대만을 투입시켜 생존자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야간이었던 상황을 고려하여 야간투시경만을 추가 보급하였다. 그 때문에, 나의 동기는 죽게 되었다. 헬기에 타고 있던 것은 헬기 조종사와 N.E.U의 내부스파이였고, 그들은 U.R.E가 비밀리에 공유한 어떠한 정보를 빼내어 N.E.U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U.R.E는 마침 헬기의 이동경로에 위치한 인도 주둔군에게 연락하여 헬기 파괴를 명령, 대공미사일의 직격에 헬기가 반파되어 추락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를 받지 못한 우리 군, 우리 분대는 한밤중에 헬기로 투입되어, 헬기를 구출하기 위한 N.E.U의 특수부대에게 괴멸 당했다.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 같은 건 아니었다. 한 인물의 큰 도움이 있었던 덕분일 뿐이다. 처음 투입되고 생존자를 찾았을 때 그는 기절해있었다. 겉으로는 NASA의 로고가 쓰인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으로 보여, U.R.E의 인물일거라 짐작하고 그를 보호해 돌아가려 했다. 가장먼저 집에 가고 싶어 하던 내 동기가 차량으로 돌아가던 중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이후 여섯 발의 총알에 몸이 꿰뚫릴 때까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나와 다른 분대원들은 재빨리 몸을 숨기고 총 일곱 발의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주시했다. 야간투시경 덕분에 쉽게 적의 위치를 발견하고, 아군이 사격을 시작하자 나도 분대원들을 따라 사격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목덜미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이전 부대에도 함께 있었던 어린 청년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나에게 엎드리라고 한 뒤 낮은 포복으로 어딘가를 향해 기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전에 보여주었던 공포심에 몸을 떨던 모습과 달리 침착한 모습을 보고 그가 군 경험자라는 것이 떠올라 나도 그를 따라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어둠을 이용하여 먼 거리를 돌아 적의 배후로 돌아갔다. 적과 아군의 사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적의 모습에 적이 전멸했다는 긍정적인 가능성은 있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반대일 것이다. 어째서인지 청년은 적의 배후임에도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청년이 움직인 것은 적이 헬기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을 때였다. 이후 보여준 그의 모습은 암살자 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어떠한 무리가 있더라도 그 무리가 이동할 때는 틈이 생긴다. 더군다나 이들은 훈련되지 않은 징집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 수 있었지만. 가장 뒤쳐진 병사의 숨을 일순간 막으며 지급된 나이프로 목숨을 끊어버리며 차근차근 전진한 그였지만 설마 우리가 구하려 했던 연구원이 스파이일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깨어난 연구원이 우리에게 총을 쏘고, 그 총에 청년이 맞아버렸으니까. 나는 총에 맞은 그를 데리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다행히도 스파이는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부대로 복귀한 것은 해가 밝은 뒤였다. 예상 작전 시간이 초과되어도 연락조차 없자 작전장교가 새로이 분대를 투입시켰고, 그들과 합류에 성공한 우리 둘은 작전장교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지원분대와 합류한 장소는 헬기추락장소에서 40km나 떨어진 장소였다.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쉬고 싶은 생각만이 들었다. 헬기 추락장소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U.R.E부대의 말에 따르면 스파이와 우리 분대가 타고 왔던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나는 새삼 그 청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와 청년은 각각 다른 분대로 편입되었지만, 나는 그 청년에게 부탁하여 몇 번씩 개인적인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생존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법, 숨는 법, 상황에 따라 가장먼저 우선시해야 할 것 등등. 청년과 사적인 이야기들도 몇 번 하였다. 그는 통일한국에서 온 지원병이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중시했다. 그것이 내가 인도 탈환전에서 얻은 모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탈환전은 실패했으며, 아시아 임시 연합은 중앙아시아까지 N.E.U에게 빼앗기고 U.R.E의 산하가 되었다. 임시 연합의 주축 국가들은 처음부터 U.R.E의 가입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원병력 파견을 얻게 된 것이었다. 유일하게 중국과 대만, 통일한국만이 이에 가입하지 않고 U.R.E와 N.E.U사이의 중립지역이 되었다. 나는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U.R.E의 정식 군인으로 채용되었다. 솔직히 그 전쟁에서 내가 한 것은 한국인 청년병사에게 배운 생존기술 뿐이었지만, 전장에 투입되어 살아 돌아왔을 뿐인 내게 공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듣고는 어리둥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은 숱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비록 힘을 잃었지만 돌아갈 곳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상의 소멸. 그것은 연합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은 새로운 구도로 변화한 세계에 한 차원 위의 누군가가 던지는 거대한 돌덩어리로 일어난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U.R.E 군의 소위로 임관했을 때였다.
태양의 소멸.
8년전, 아직 연합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미국에 존재하는 전 세계의 최고 우주기관인 NASA는 태양의 수명 자체와는 별도로 10년 내에 혜성의 충돌로 인해 태양이 소멸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과학자들은 혜성의 충돌로 태양이 소멸한다는 말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실제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소멸하는 것은 태양이 아닌 혜성이었기에 해프닝으로 끝날 뻔 했다. 이 혜성이 프록시마를 파괴하기 전 까지는. 표면적으로는 프록시마의 소멸은 수명이 다해 백색왜성화 된 것으로 발표했지만, 미국은 혜성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존에 관측되던 혜성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이 혜성은 앞으로 10년 내에 태양과 충돌한다는 결론이 나며 이를 막아낼 기술은 현재로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에 봉착한 미국은 태양의 소멸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태양이 사라진 이후, 태양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한 인공 별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연합제를 표명한 것이었다. 비록 아시아 대륙을 인공 별 계획에 포함시키기 위해 N.E.U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1년이란 시간을 허비하였지만 그들의 계획은 순조롭게 느껴졌다. 별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수소나 헬륨과 같은 원소들의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거대한 물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U.R.E는 이러한 사실을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태양이 소멸했다. 이 세상 어떤 빛보다도 화려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혜성의 충돌은 생각외로 강력했다. 태양에 충돌한 혜성은 그대로 태양의 내부를 꿰뚫고 거대한 핵폭발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U.R.E는 지난 9년간 준비해온 인공 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우주선을 보냈다. 제2의 태양을 지켜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TV앞에 모였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도 태양은 다시 빛나지 않았다. 돌아온 우주선이 가져온 정보는 심각했다. 별을 이루고 있는 요소 중 현재의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실험을 했고, 실험은 성공적이었지만, 실제 우주에서 태양을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 그것이 내가 말했던 ‘세상의 소멸’이었다.
태양의 소실 사건 이후로, 대부분 인간의 생활은 지하로 옮겨졌다. 의외인 것은 태양이 사라진 당시의 일이었다. 현대과학이론으로는 태양의 소멸이 일어날 경우 태양이 지니던 중력이 사라져 태양계가 사라질 것이라 했지만, 태양계는 존속되고 있었다. 태양이 위치하던 장소에 보이지 않는 힘이 이전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역시 태양열과 같은 에너지는 사라져있었다. 태양과 혜성의 충돌 당시 폭발의 여파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태양을 파괴한 혜성은 태양이 폭발하는 에너지를 모두 빨아들이며 사라졌었다. 덕분에, 거대한 폭발로 인한 극심한 폭열의 폭풍이 대지를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현재 지구의 상황을 쉽게 말하자면, 빛과 열이 사라진 죽음의 땅 이라고 볼 수 있었다. U.R.E는 주도했던 인공 별 계획의 실패로 인해 입지를 잃은 상태였으며, 인도탈환전 시절, 스파이를 통해 인공 별 계획을 알게 된 N.E.U는 인공 별 계획의 실패 이후 U.R.E에게 공동전선을 제의, N.E.U의 각종 분야의 학자들에게 인공 별 계획의 일부 자료가 주어지게 되었다. 대립을 하던 연합제의 흐름이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U.R.E 동아시아 지부의 비상 쉘터에 거주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U.R.E 소속 국가는 일본이 유일했고, 작은 규모인 탓에 쉘터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만 존재했다. 이곳에는 나 이외에는 장교로 통신장교가 있었고, 통신장교와 내게 각각 5명의 부하들이 배치되었었다. 총 12명인 우리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인원수에 맞는 만큼의 보급물자가 도착했고, 다소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현지의 사람들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점 정도였다. 그들은 근처 지하 어딘가에 모여 사는 듯 했다. 수송기를 통해 전달된 우리의 보급물자를 얻으러 나를 포함하여 한명의 하사, 두 일등병이 쉘터를 나와 지정지점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현지 민간인들이 여럿 모여 우리의 물자를 강탈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쇠파이프나 야구배트와 같은 무장을 한 민간인들은 화기를 들고 있는 잘 훈련된 우리 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치며 현지어로 무엇인가 말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중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전에는 본토로부터 도착한 화기물자를 일부 강탈당하고, 지휘를 담당했던 통신장교 직속의 하사관이 부상을 당한 채 돌아오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쉘터 생활이 계속될수록, 무장을 한 현지인들은 조금씩 조직적이고 위협적으로 행동하며 우리의 물자를 노렸다. 쉘터 생활이 1년에 다다를 즈음, 우리 앞에 사건이 터졌다.
“이런, 저들 모두 재패니즈인가?”
훈련받은 군인답게 건장한 체구에 195cm라는 큰 키를 지닌 금발의 남성. 구 미국 출신인 통신장교 제임스가 쉘터 밖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는 방금 막 일어났는지 러닝 차림인 채로 다가와 쉘터 입구에 설치된 CCTV와 연결되어있는 모니터를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반 U.R.E 집단인 것 같아. 이렇게 많은지는 몰랐는데.”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무장을 한 동양인 집단과, 그들 사이로 보이는 한자가 섞인 현지어를 보며 내가 대답했다. 조약 체결 당시만 하더라도 U.R.E에 가장 우호적인 아시아 그룹이었던 일본이지만, 태양 소실 사건 이후. 정확히는 인공 별 계획의 실패 이후로 일본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반 U.R.E 집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봐 친구. 저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나도 저들의 글자는 모른다고. 하지만, 몇몇 글자는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군. 흠....... U.R.E 반대. 즉시 철수.”
“그 정도는 원숭이도 알거라고 친구. 흠, 원숭이는 당연히 아나?”
반 U.R.E 집단이 들고 있던 팻말을 간신히 읽어 보았지만, 제임스는 핀잔을 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굳이 읽지 않아도 그들의 표현이 느껴질 정도였다.
“U.R.E 반대. 즉각 철수하라. 너희들 때문에 세계가 망했다.”
그런 우리들의 뒤에서 내 휘하의 하사, 칼이 대답했다.
“아, 예전에 일본어 공부를 조금 했었습니다. 두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나와 제임스가 그를 너무 빤히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그는 착각한 듯 차렷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젠장 칼. 그게 아니야. 이봐 친구. 자네는 부하와 계급장이 바뀐 것 같군?”
“그러게 말이야 제임스. 왜 이런 인재가 이제야 나타났는지 모르겠네.”
제임스가 칼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두드리는걸 보고 나도 맞장구쳐 주었다.
“이봐 칼. 자네 공적을 쌓고 싶나?”
“아, 저.......”
“난 자네가 자네의 노모와 본국에서 편안히 살며 근무하고 싶냐고 물었네 하사.”
“예, 옛! 그렇습니다!”
칼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그대로 그의 어깨를 쥐며 말을 잇는 제임스를 보며 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가만히 그가 하는 것을 보았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하사.”
다음날 오전 6시. 쉘터 앞에 진을 쳤던 집단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저들은 어디서 자원을 얻어오는지 이 추운 대지를 넘어 올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작전이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준비되었나 하사?”
“Yes Sir.”
나는 하사의 대답을 듣고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저격총의 탄약을 확인한 후 쉘터의 문을 열었다.
“알파분대, 돌격!”
열린 쉘터의 문을 향해 칼 하사와 휘하의 병사 4명이 돌진했다. 지금까지 쉘터는 한 달에 한번 보급물자가 도착할 때만 열렸기에, 저들은 쉘터가 열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혹은 아직 그들이 모두 모이지 않은 이른 시각이기에 준비가 덜 되었는지 반응이 상당히 느렸다. 그들의 당황을 틈타 하사와 병사들은 열 명 남짓했던 그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시켰다. 이제부터가 작전의 시작이었다. 나는 하사가 작전을 수행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3분가량 지났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는지 알파분대의 움직임에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그들을 철수 시킬 수밖에 없었다.
“작전 변경. 플랜 B. 신속히 이동하라.”
하사에게 무전기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자, 알파분대는 무장해제를 시킨 몇 명의 민간인을 붙잡고 쉘터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 너머로 무장을 한 수십 명의 현지인들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엉덩이에 바람구멍을 내기 전에 뛰어오라고 하사.”
나는 홀로 중얼거리며 허공에 한 발 위협사격을 하였다. 첫 발은 공포탄으로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실탄을 낭비하진 않았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공포탄 소리에 그들 중 몇 명은 들고 있던 쇠파이프도 집어던진 채 근처의 엄폐물로 달려가 숨어들었다. 덕분에 부하들은 도중에 놓친 민간인을 제외하고 세 명의 민간인을 붙잡아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죄송합니다. 시간 내에 해낼 수 없어서.......”
“플랜 B는 7살 꼬마의 스케치북이 아니야 하사. 어서 들어오게.”
제임스와 나의 작전은 이러했다. 반 U.R.E집단이 돌아간 후, 재집결 할 시간에 먼저 집결에 온 소수의 현지인들을 제압, 상황과 정보를 얻어내는 것. 만일 정보 습득에 실패하고 현지인의 수가 많아질 경우 플랜B로 변경. 플랜B는 현지인을 포박하여 쉘터로 이동, 정보를 캐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중심은 역시 현지인과의 대화가 가능한 칼 하사였다. 데려온 세 명의 반 U.R.E 인물은 쉘터 내부의 작은 방에 공간을 마련해 심문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무언가 이야기 하는 소리가 궁금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내겐 그들의 말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 차차 정보를 캐면 될 것이다.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신 뒤, 낮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가 잠에서 깬 것은 약 4시간 후였다. 아침부터 총을 사용하고 난 뒤라 그런지 피곤했지만 누군가가 급하게 깨우고 있었기에 모른 척 하고 잘 수만도 없었다.
“누구야?”
“접니다 작전장교님.”
소리 없이 나를 흔들어 깨우던 인물은 칼 하사였다.
“무슨 일인데?”
“그게, 일본인들로부터 정보를 얻었습니다만,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곤조곤 말하는 칼 하사를 따라 내 개인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후,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무슨 문제야?”
“저들의 말에 따르면 U.R.E가 일본을 철수했다고 합니다.”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그건 문제가 아니네 하사.”
“진심입니까? U.R.E가 철수했다면 저희가 이곳에 주둔할 이유도 없습니다. 장교님!”
하사의 말대로, 현재의 상황만 보았을 때는 U.R.E가 일본을 버린 것으로만 볼 수 있었다. 일본에 정식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은 12명뿐인 작은 소대. 그것도 쉘터에 틀어박힌 채 정보교신만 하며 본국으로부터의 물자를 받아 생활하는 고난을 겪는 소대다. 일본을 위해 U.R.E측에서 무언가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라는 존재가 없다면 사실상 일본은 U.R.E와 아무런 접점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일 뿐이었다. U.R.E 측에서 비밀리에 행하는 일들은 기밀이기에, 위관급 이상인 나와 통신장교만 알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칼 하사는 민간인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을 품었으리라. 나는 우선 하사의 정신을 다잡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이보게 하사. 자네는 국가에 의심을 품나?”
“아,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네. 파견부대라고는 하나 12명뿐인 파견에 추가 지원 병력도 없고. 나라도 의심할 만하지.”
“.......”
“괜찮네 하사. 하지만 명심하게. 국가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네. 국가 기밀이기에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자네는 자네의 국가와 상관을 믿으면 된다네.”
“옛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들에 대한 정보는 그것뿐인가?”
“아, 아닙니다. 제가 자료로 정리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칼 하사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얼추 넘어간 듯 했다. 음....... 하지만 이대로 라면 또 엉뚱한 정보를 캐 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칼 하사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하사. 저들, 반U.R.E의 세력과 무장, 위치, 그리고 리더와 관련된 것들을 알아보게. 우리에게 중요한건 저들의 군대화를 막는 것이니까.”
하사는 내게 경례를 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잠시 통신장교에게 이 일을 이야기 할까 생각을 하다 관두곤, 개인 침대에 누워 못 다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돌연 어떤 생각이 스쳐,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나와 포로가 잡혀있는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좋은 낮이야 재패니즈.”
내 인사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무언가 이야기 했지만, 역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떠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흠, 알아볼 수 있나?”
그것은 한자를 써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일본인들은 한자를 읽을 줄 알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는지, 그들은 내가 쓴 글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까와 같이 격양된 반응만 보여주고 있었다.
“아, 깜박했네. 여기 펜하고 종이.”
그들의 행동에 곰곰이 생각해본 나는 그들이 글을 쓸 도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효과가 있었는지, 그들 중 하나가 종이에 무언가 써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한자는 내가 쓰는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기에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도 나도 서로의 종이를 아주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 한자는 뭔가 다르군.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어는 못하나? 잉글리시?”
“엿 먹어 U.R.E. 너희들은 우리를 버렸다.”
오, 이건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 과거부터 미국의 우호국이었기 때문인지 짧지만 영어는 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전부 알아듣고 있던 것인가?
“영어 할 줄 알잖아? 그래 너. 이름이 뭐야?”
“좆까. 조센징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 따윈 없다.”
다른 둘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지 가만히 있었고, 처음 말을 꺼낸 가장 왼쪽의 젊은 청년이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나름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려 한 것 같지만 그는 틀렸다.
“이봐 원숭이. 누가 위인지 굳이 말로 해야 아는 건가?”
나는 그놈을 발로 차 넘어트리며 말했다.
“큭........민간인을 감금한 것도 모자라 폭행하다니. 네 녀석들의 실태는 언젠가 알려질 거다!”
“이 세상에서 군대를 적대하는 커다란 무장집단을 민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이름은 됐고. 네녀석들의 목적과 수단을 말해라.”
나도 모르게 성격 나쁘게 행동해버렸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그놈은 아까와는 달리 직접적인 반항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행동 때문에 녀석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뭐, 뒤는 칼에게 맡길까.”
어디까지나 목적은 군을 위협하는 무장집단의 파악 및 집단 해체.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칼이 있을거라 짐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하사. 안에 있나?”
“예, 작전장교님. 들어오시죠.”
그를 찾은 곳은 그의 개인실이었다. 쉘터에는 비교적 방이 많은 편이어서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개인실이 주어질 수 있었다.
“이봐 칼. 다름이 아니고....... 저 일본인들을 상대할 때 최대한 부드럽게 대하게. 아마 효과가 있을 거야.”
나는 이 한마디만을 한 후, 어리둥절해 하는 칼을 뒤로한 채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하군.”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나는 이번에야말로 못 다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마도 칼은 유능하니 녀석들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칭 민간인을 지칭하는 무장집단의 일원 세 명을 구속한지 5일째 되던 날, 드디어 우리는 그 세 명을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정도로 위험했고, 그들이 살아 돌아간다면 그들이 얻게 된 우리의 정보와 적의 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들을 더 이상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다는 칼 하사의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칼 하사는 의외로 심문에 능한 인물이었다.
“역시 이 친구는 우리를 엿먹일줄 안다고.”
제임스의 말에 나 또한 동의했다. 제임스는 항상 오해할 만한 발언을 하지만, 그와는 본토에서부터 같이 지내왔기 때문에 그 말이 칭찬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칼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반 U.R.E 집단은 현재 대형 쇼핑몰의 지하에 터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는데, 좋은 소식은 이전에 모여들었던 군중은 모두 반 U.R.E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쇼핑몰에 자리 잡은 반 U.R.E 집단은 구 일본군의 중화기를 보유하였으며, 다음 보급물자가 도착할 시기에 맞춰 우리를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위험하군. 이봐 제임스. 이 건은 상부에 보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 친구. 저들은 총을 애니메이션으로 배운 놈들이라고. 자네의 한방이면 저들이 개틀링건을 꺼내기도 전에 바닥에서 브레이크댄스를 출걸?”
“하지만 혹시 모르니 ‘호크아이’에게 연락을 해봐.”
“그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아무리 자네여도 동시에 여럿을 뚫어버릴 수는 없으니.”
나는 제임스가 통신용 무전기기가 있는 무전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작전 브리핑 준비를 하였다. 반 U.R.E 집단이 그들뿐 일거란 안일한 생각은 없지만, 안전을 위해 섬멸작전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히어로께서 저 빌런을 물리치기 위해 시간을 내 주신다고 하는군.”
‘호크아이’와 연락에 성공했는지, 어느새 돌아온 제임스가 OK사인을 보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병사들을 소집했다.
“반 U.R.E 무장집단의 위치가 파악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물자를 강탈하여 무장을 하고, 스미스 하사를 부상 입혔던 위험한 존재들이다. 현재 그들은 조직화되어 우리를 급습할 계획을 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구식 중화기를 다량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U.R.E군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며,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적을 섬멸한다. 그럼 작전을 설명하도록 하지.”
섬멸작전의 개요는 간단했다. 우리 소대의 유일한 저격수인 내가 적의 중화기병을 우선적으로 처리, 이후 두 개 분대로 나뉘어 한 개 분대가 진압돌격을, 나머지 한 개 분대가 퇴로차단을 맡는다. 이 작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을 한명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돌격부대의 지원은 나와 ‘호크아이’가 대신할 것이었다.
“알파분대의 지휘는 칼 하사가. 브라보 분대 지휘는 제임스 소위가 맡는다. 저격분대는 이몸이 맡는다.”
1명뿐인 저격수로 농담을 하여 병사들의 긴장을 풀어주려 한 내 노력이 먹힌 듯, 브리핑을 듣는 이들의 얼굴이 약간 풀어진 것을 보았다.
“이상, 작전 설명을 마친다. 뭔가 질문이 있나?”
형식적인 마무리멘트에 모두들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는 뒤를 돌아서 먼저 작전실을 나왔다.
“작전장교님.”
개인실로 돌아가려는 내 뒤에서 칼 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사.”
그의 표정이 뭔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그를 무시하지 않고 대답했다.
“작전을.......재고해주실 수 없습니까?”
그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하사?”
“그들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위님. 무장해제를 한 후 차근차근 설득을 한다면.......”
뒤이어 나온 하사의 말에 나는 입 꼬리가 비틀려 가는 걸 느꼈다.
“하사. 자네의 동기인 미첼 하사가 중상을 입었던 것은 그들 때문이었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무기도 약탈해 우리를 위협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어.”
“.......알고.......있습니다.”
내 분노가 느껴졌는지, 아니면 자신의 실언을 이해했는지 칼 하사는 점차 고개를 떨구며 어깨를 움츠렸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우리는 우리와, U.R.E에 위협이 되는 외부, 그리고 내부의 위험분자를 철저히 배제해야 하네.”
“.......”
“더 이상 질문이 있나?”
“아닙니다.”
“돌아가서 작전을 준비하도록.”
“옛.”
문을 닫고 돌아간 칼 하사를 보며 나는 심란함에 빠졌다. 지금으로는 그가 필요하지만, 이대로 작전에 투입시키는 것은 뭔가 불안했다. 나는 작전실행까지 남는 시간동안 무언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로 하였다.
[알파분대. 준비 완료.]
[브라보 분대. 준비 완료.]
[이쪽은 스나이퍼. ‘호크아이’의 연락을 대기.]
다음날 05시경. 우리는 작전을 시작했다. 당초에 준비했던 계획 시간으로부터 1시간 늦어졌지만, 전력부족을 메꾸기 위한 지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 보니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일순간 붉은 빛이 잠시 눈에 보였다. 약속된 위치에 레이저를 발산하는 것으로 도착을 알리기로 한 ‘호크아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호크아이’의 연락을 확인. 지금부터 작전을 개시한다. 알파. 돌격!]
05시 5분. 알파분대가 쇼핑몰의 정면을 향해 돌입했다. 나는 스코프로 눈을 돌렸다. 쇼핑몰이 모두 보이는 높은 빌딩 창가에서 쇼핑몰 창가를 통해 내부를 주시하며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알파분대가 정문을 통해 돌입한 후, 일사분란하게 쇼핑몰 내부의 주요 이동구역인 에스컬레이터와 골목을 점거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겐 안 된다고 재패니즈!”
푸드코트와 의류점 사이의 무너진 잔해 내부로부터, 구식 중화기로 무장한 반 U.R.E 집단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잔해 밖으로 나온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묵직한 발사음이 보호를 위해 끼고 있던 방음용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것을 느끼며 다음 목표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흠, 의외로 겁쟁이들인걸.”
첫 발의 총알이 가장 재빨리 나선 적의 머리통을 뚫자, 따라 나오던 다른 적들은 그보다 더 빨리 잔해 속으로 도로 숨어버렸다. 덕분에 푸드코트를 점거하던 알파분대원이 안전히 점거를 완료했다.
[A구역 점거 및 소탕 완료. 브라보 돌입 명령 대기.]
완벽한 섬멸을 위해, 쇼핑몰을 정면으로부터 A, B, C, D구역으로 나누어 구역 완전 점거 및 섬멸을 명했다. 정문과 푸드코트, 메인 로드. 의류점이 A구역이었으며, A구역의 안전이 확보된 후에 A구역 내에 있는 2층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지하로 통하는 지하매장 입구를 특수 구역으로 설정, 브라보 분대가 진입하여 퇴로 차단을 위해 항시점거를 맡았다.
[브라보. 점거 완료. 알파의 B구역 점거 실행 요청.]
제임스의 무전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칼에게 돌입을 명했다.
“Nippon!!! Banzai!!!!”
순간, 반 U.R.E 집단에서 군복을 입은 한 남성이 온몸에 폭발형 무기를 두른 채 엘리베이터의 문에서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의 등장에 내 저격총의 반응이 늦어버렸다.
“젠장!!!”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의해 군복의 적은 몸에 두르고 있던 무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기 전에 쓰러졌다. 아마도 ‘호크아이’의 지원사격이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 덕분에 아군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전기는 살아있는건가. 제임스에게 알려야겠군.”
나는 무전을 꺼내 제임스에게 엘리베이터 구역 점거를 추가로 명하고, 다시 알파의 지원에 집중했다.
[B구역. 점거 완료.]
B구역은 쇼핑몰의 2층과 옥상 전체였다. 전기가 살아있을거란 생각은 못했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지하생활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비교적 안전할거라 생각했기에 2층 이상을 모두 B구역으로 설정했었다. 예상외로 전기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 쇼핑몰이었지만 다행히도 알파분대는 무사해 B구역 점거에 성공한 것 같았다.
[이제부터 위험하겠군.]
[저격 위치 변경. ‘호크아이’에게 전달.]
나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준비해둔 레이저사이트를 이용해 ‘호크아이’에게 연락했다. 이것으로 이 구역에서 할 일은 끝났다. 지하 요격을 위해 가능한 구역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빌딩에 미리 준비한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총격음 소리가 들렸다. 사격음으로 보아 ‘호크아이’는 아니기에 내 연락이 전달된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현재 알파 혹은 브라보 분대가 교전중이라는 것을 뜻하기에 나는 서둘렀다. 나는 준비해둔 오토바이를 타고 쇼핑몰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 쇼핑몰의 서쪽에는 지하 내부를 볼 수 있는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지역이 있어, 위험을 최소화 하여 지원을 할 수 있었다. 쇼핑몰 서쪽 도로 건너편의 작은 빌라 옥상에 올라가니, 거기에는 한명의 여성이 먼저와 있었다.
“늦는군 소위.”
“죄송합니다. 호크아이 대위.”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기에 ‘호크아이’가 여성일거라는 생각은 못하였다. 남미 계열인종인지, 간이 후레쉬로 비친 그녀의 모습은 까만 피부가 매우 건강해 보이는 섹시한 몸매의 인물로, 저격에 방해받지 않게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남자도 못되는군.”
나를 처음 바라본 그녀가 나를 보고 대뜸 그런 소리를 하자, 나는 멍하니 그녀의 눈이 향한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향한곳은 내 바짓가랑이 사이였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야. 소위.”
내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바라보니,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마도 현재 내 얼굴은 심하게 빨갛게 변했을 거라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은 없는 이 태양에 작게나마 감사했다.
“자네의 작전을 보고 말한 거야 소위. 적의 섬멸을 바라면서도 아군의 안전을 최우선시한 배치. 남자라면 배짱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마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저격수의 배치를 안전만을 중시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 같았다. 확실히 정상적인 작전이라면 적이 가장 많을 지하매장 입구에 저격수를 배치했을 것이다.
[이런, 적들이 못 참고 나오기 시작했다고!! 아직 이야 스나이퍼?]
나와 호크아이는 제임스의 무전을 듣고 서둘러 쇼핑몰로 눈을 돌렸다. 적들은 마치 광전사와 같이 동료의 시체로 피를 뒤집어 쓴 채 지하매장 입구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천천히, 확실하게 처리하던 방식이 긴 시간을 소모하여 적들에게는 심한 압박감으로 작용해버렸고, 그로인해 적들이 수를 이용한 집단돌격을 강행했던 것이었다. 2층의 안전이 확보되어, 현재 지하매장 돌입을 준비하던 알파분대 5명과 입구를 지키던 브라보분대 2명만이 그들과 교전을 하고 있었다. 브라보분대 2명 중 한명은 제임스였다.
[스나이퍼 배치 완료. 지하매장 입구를 지원한다.]
나는 무전을 보내고 가장 위협이 되는 적들 위주로 사격했다. 그 기준은 적들의 무장이었다.
“이봐 애송이. 우리가 가장먼저 잡아야 할 놈들은 그런 놈들이 아니라고.”
그런 내 옆에서 호크아이가 비아냥거리며 사격을 가했다. 그녀의 비아냥거림에 대꾸는 안했지만, 그녀의 사격을 보곤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까지 보이던 적들의 행동과는 달리 훈련받은 병사와 같이 엄폐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적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지하매장 입구에서 그들이 쓰는 엄폐물은 쓰러진 동료였다. 그녀는 이미 피를 흘리며 기절한 동료를 방패삼아 들어 올려 총알을 막으며 응사하는 적의 가슴에 구멍을 냈다. 그 녀석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방아쇠로부터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명사수들 처리는 매의 눈이 처리해 줄 테니, 저는 화끈한걸 든 놈들의 머리를 식혀주죠.”
나는 그녀의 말에 그렇게 대꾸하고 사격에 집중했다.
[이봐 작전참모. 뭔가 좋은 생각 없어?]
이대로는 소모전만 될 뿐이기에 우리에게 무척이나 불리했다. 여기는 적진이고 우리는 소수였다. 적들의 공세에 지하매장 입구를 봉쇄하던 분대원들은 의류점 구역으로 후퇴했다. 그들의 후퇴를 스코프 너머로 지켜보던 내 눈에 잔해더미와 한 시체가 보였다. 푸드코트와 의류점 사이에 있던 잔해더미였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파. 지금부터 의류점 잔해더미를 통해 지하로 잠입. 브라보는 쇼핑몰 입구에 배치한 2명을 제외하고 집결 후 지하매장 입구로, 양동작전을 실시한다. 엘리베이터 및 지하에 대한 요격은 스나이퍼가 전담한다.]
지하매장이 전부 스나이퍼의 영역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잔해더미 너머는 지원사격이 가능했다. 대충 보이는 적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병력이 입구에 몰려있는 것 같았다. 나의 명령에 알파분대는 잔해 밑을 통해 지하매장에 들어갔다. 우습게도 적들의 덕분에 활로를 찾은 것이다. 나는 호크아이에게 엘리베이터 감시를 부탁하고, 지하매장에 돌입한 알파분대원을 지원했다. 갑작스런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적들이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1층의 적 병력이 분산되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노련함을 과시하듯 그 틈을 노려 곧바로 자신의 분대를 2개조로 분리, 사방팔방으로 분산된 적을 각개격파 하였다.
“끝이 없군.......”
이 쇼핑몰은 그리 큰 구역은 아니었다. 때문에 많아봐야 50명 남짓할 거라 생각한 적이 그 수를 넘기고 있는 지금, 나는 지치고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이미 작전 개시한지 5시간이 지나있었다. 당황한 적들의 바보같은 행동 덕분에 우리는 아무런 피해 없이 C구역 확보를 할 수 있었다. C구역은 지하매장 입구부터 저격가능지점 까지였다.
[작전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C구역 점거 및 섬멸 완료.]
“그럼, 대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직접 싸우러 가죠.”
나와 호크아이는 짐을 챙기고 쇼핑몰 입구로 갔다.
D구역은 저격이 닿지 않는 지하매장 창고였다. 쇼핑몰 전체의 물류창고를 겸하는 지하매장 창고는 상당히 넓어서, 사람이 거주한다면 이곳에 거주할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이상하지 않나 소위?”
“어떤 점이 말입니까 대위.”
호크아이가 쇼핑몰에 들어서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적들의 행동 말이야. 어떤 때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게 상당히 위협적이면서, 지금의 모습은 또 오합지졸이 따로 없지.”
그녀의 말대로, 나는 적들의 움직임에 이상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적이라 규정한 이곳의 반 U.R.E집단은 대다수가 전투 훈련조차 받지 않은 미숙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머릿수 채우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그들 사이에 있던 몇몇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적들.......호크아이가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던 자들인 그들은 동포의 시체마저 활용하는 위험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온 것은 그 때문이야. 알아뒀으면 좋겠군.”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의구심을 가지고 경계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우리는 지하창고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칼과 제임스, 그리고 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혹시 모를 대비를 하여 소리 없이 신호를 주고받은 후, 창고의 문을 열었다.
“여자들?”
창고 내부에는 일본 여성이 열댓명 있었다. 그녀들은 무장을 하고있는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여기는 칼이 나서야 할 차례군.”
제임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에게 손짓했다. 칼은 무기를 부하 병사에게 맡겨놓은 뒤, 여성들을 향해 다가가 대화를 나눴다. 비록 나는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여성들이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비키게 소위.”
그런 나의 어깨를 잡아채며, 호크아이 대위가 허리춤에 끼고 있던 권총을 꺼내 칼 하사에게 겨누었다.
“무슨.......짓이죠. 호크아이 대위?”
그녀의 행동에 칼 하사는 침착하게 대화를 요청했다.
“두 손 들어. 움직이지 마.”
“대위, 동료에게 무슨 짓입니까? 총을 내려놓으세요.”
진심으로 하사를 노리는 그녀를 보고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녀의 행동에 열댓명의 반 U.R.E 집단 생존자는 창고에 쌓인 상자더미 뒤로 숨어버리고, 칼 하사는 묵묵히 그녀의 말대로 두 손을 들었다.
“됐습니까? 손....... 들었습니다. 왼손, 오른손 둘 다. 진정하세요.”
“거기, 상자 뒤에서 나와. 3초안에 나오지 않으면.......”
하사가 차근차근 말을 하는 것을 무시하고, 호크아이가 상자더미 뒤로 숨은 여성들에게 시선을 옮기고 소리쳤다. 나는 불현 듯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호크아이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무슨......!”
그녀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 뒤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창고 안을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피해 제임스!”
생각나는 대로 일단 외친 나는 곧바로 호크아이와 옆에 있는 철제 판넬 뒤로 숨었다. 판넬 너머에서 상자 뒤로 숨어버렸던 여성들이 어느새 총기로 무장한 채 우리를 향해 난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부하 운이 없군 소위.”
“칼 하사가 왜 저러는 거죠?”
“내가 알 리가 없지. 다만, 저 여성들에게 자신이 살려주겠다더군. 우리를 배신한다 길래 총을 겨눴지. 그 다음은, 보다시피지.”
호크아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나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의감이 강한 칼 하사였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처를 입으셨군요.”
대응사격을 위해 총을 꺼내려던 나는 호크아이가 붙잡고 있던 옆구리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면 병원비를 자네에게 청구하지.”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칼의 배신을 밖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릴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전뿐이기에 불가능했다. 알파 분대의 무전을 담당했던 게 칼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총을 빌려주게.”
아까 전, 내가 넘어뜨리는 바람에 총을 놓친 호크아이가 내가 들고 있던 총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아, 이걸로 병원비를 대신하죠.”
나는 한마디 덧붙이는걸 잊지 않았다. 총을 건네받은 그녀는 전투조끼의 주머니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꺼내 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방법도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내 코드네임이 왜 ‘호크아이’인지 보여주겠어 소위.”
순간 선글라스 너머였지만 그녀의 눈이 빛났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권총의 탄창을 빼고 자신의 탄띠에서 푸른색 띠를 두른 탄창을 꺼냈다.
“설마 도탄?”
사각에 숨어있는 우리가 적을 공격할 특수한 탄이라고 생각하니 가장먼저 도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혀를 찼다.
“쯧쯧. 그거라면 ‘호크아이’가 아니라 ‘리코셰’라고 불리는 게 맞겠지.”
그녀는 잠자코 보고 있으라는 듯 다시 말을 꺼내려는 내 입을 왼손으로 막고는 오른손으로 우리가 등지고 있던 두터운 철제판넬을 겨눴다.
“그러면 위험할 텐데요.......”
“조용히 하게 소위.”
내 입을 막던 왼손으로 권총을 받치는 덕분에 입이 자유로워진 나는 그녀의 행동에 경고를 했지만, 그녀는 쿨하게 무시하며 판넬을 노려보았다.
“아 그리고, 귀를 막게.”
-탕
그녀의 한마디에 서둘러 귀를 막았지만 고막이 찢어지는 듯 한 폭음을 들었다. 나는 내가 귀를 막는 것이 너무 늦은 건가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입증시켜주듯 그녀의 탄환이 뒤를 이어서 사출되었다.
-탕, 탕, 탕
두발, 세발, 총구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며 총알을 발사할 때마다 바로 옆에서 전차의 포격을 맨몸으로 겪는 듯 한 소음이 이어졌다. 여러 겹으로 세워져있어 든든한 엄폐막이 되어주던 철제 판넬은 호크아이의 총구가 닿는 부위마다 연필로 종이를 꿰뚫듯이 구멍을 숭숭 뚫어내었다. 소음 투성이의 창고 속에서 그녀의 포구가 사격을 멈추자, 일순간 들려온 이명이후 마침내 침묵이 찾아왔다.
“끝났네 소위. 열 여섯의 적 섬멸 완료. 바깥에 있는 동료를 부르게.”
잠잠했던 창고의 침묵을 깨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내게 말한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반 U.R.E 집단 무장 단체의 소탕을 끝내고 쉘터로 돌아온 우리는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을 우선했다. 적의 무장이 구형 중화기뿐이었으며, 오랜 물자부족현상으로 인해 지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수가 많았기에 우리도 피해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저격수였던 나를 노리는 사격은 없었기에 나 자신은 피해가 없었지만 제임스는 어깨에 탄환이 박혀있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호크아이 대위였다. 그녀는 상당히 피를 흘린 상태였기에 생명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나 또한 인도전 시절 습득한 약간의 의학적 지식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일 뿐,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부대에는 의무병 대신으로 배치받은 제임스의 부하 병사가 있었다. 그는 전투병이었지만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나름대로 이름있는 의사였다고 했다. 나는 그를 도와 제임스와 호크아이의 수술을 보조했다. 제임스는 부상을 당한 것 치고는 상당히 터프했다. 마치 삼국지에 등장한 관우처럼 의연한 목소리로
“탄환을 빼는 동안 체스나 두자고 친구. 별거 아니잖아?”
라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의무병 역할을 하던 병사인 실버가 주사를 한번 놓자마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문제는 호크아이쪽이었다. 그녀를 치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녀가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위한 수혈팩이 쉘터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혈을 해주면 되는거 아니야? 내가 피를 주지.”
마취가 풀린 제임스가 말을 꺼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호크아이의 혈액형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 부대원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