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9년 4월18일 오전 11시34분]
코너를 돌자마자 유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느라 거칠어진 숨을 씩씩 내쉬었다. 아무리 능숙하게 달릴 수 있다지만 실제로 53 킬로그램이 넘는 우주복을 입고 뛰는 것은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천선배님이......'
달리기를 멈춘 그녀는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을 떨쳐버리고자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기억 대신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들이 헬멧 속에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우주복 안에서 땀방울들이 방울방울 무리지어 그녀를 비웃듯 맴돈다. 그녀는 둥둥 떠다니는 땀방울들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잠시 후 흘러내린 땀방울들이 우주복의 내기 순환 시스템에 의해 빨려나간다. 자신도 정욱의 눈에 빨려나간 땀방울 같아 보였을까? 잠시동안 멍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정욱이 곧 이 곳에 도착할 거란 것을 떠올렸다.
그가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 싶다. 아직까지 진정되지 못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서둘러 데크 출입구 앞에 섰다. 그러자 출입구 위에서 노란 불빛이 아래로 내리 쏘아진다.
- 보안 절차에 따라 데크 출입구는 1인 1문으로 운영됩니다. 입장할 출입구를 골라 그 앞에 서십시오.
데크 보안 시스템과 자동 접속된 단말기가 그녀의 청각으로 안내 메시지를 직접 전달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한 걸음 더 내딛어 27번이라고 씌인 문 앞에 다가섰다.
- 먼저 개인 소지품을 출입구 하단에 위치시키시기 바랍니다. 개인 소지품은 데크 출입 보안 절차를 마친 후 탈의실에서 곧장 반환됩니다.
지시에 따라 짐가방을 출입구 앞으로 옮기자 출입구의 아랫부분이 정확하게 짐 크기에 맞추어 열리더니 짐을 문 안으로 빨아들이듯 가져간다. 짐가방이 순식간에 사라진 직후 메시지가 청각으로 전해진다.
- 개인 소지품 스캔이 완료 되었습니다. 금지 반입품 없음 확인되었습니다. 문이 열립니다. 잠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다음 절차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단계다. 할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망설임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데크 보안 시스템이 그녀를 재촉해온다.
- 질서를 위해 빠른 입장 바랍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힘들게 발을 들인 한 평 남짓한 정사각형 공간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문이 닫힌다.
- 우주선 통과 출입 절차가 시작됩니다. 다음 단계로 진행이 준비되면 '완료'라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유나는 본격적으로 몸에 조금씩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로 조용히 속삭였다.
"완료."
- 산소, 기압, 기온 조정 중. 잠시 대기 바랍니다.
방의 모서리에 매달린 공조 시스템을 통해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 보안 절차에 따라 신체 특징을 통해 권한을 부여합니다. 우주복을 벗어 주십시오.
유나는 조심스럽게 헬멧에 양손을 갖다 대었다. 헬멧 유리를 통해 우주복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 밀폐를 해제하시겠습니까?
- 외부 상태 : 기압 0.95 - 산소량 21% - 기온 23도
- 종합 평가 : 안전
그녀는 메시지를 보는둥 마는둥 하고 헬멧을 풀었다. 갑갑한 헬멧 속 공기 대신 신선한 공기가 뺨을 어루만진다. 짧은 단발을 끌어모아 질끈 묶어둔 머리끈을 풀자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주변에 가볍게 떠오른다. 유나는 오른쪽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쓸어 넘긴다음 천천히 우주복을 벗기 시작했다.
헬멧과 우주복의 경계선에 있는 안전 고리를 풀어내자 빠져나올만한 구멍이 생긴다. 그녀는 어깨와 팔을 밖으로 빼낸 다음 천천히 우주복을 아래로 내렸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피만 남겨 놓은채 허물처럼 우주복이 벗겨진다. 마지막으로 신발에서 조심스럽게 양발을 꺼내자 바닥에서 떨어진 몸이 둥실 떠오른다.
- 데크용 우주복 외피를 수거하겠습니다.
우주복이 붙어 있는 바닥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방 모서리로 우주복이 밀려간다. 유나는 공중에 뜬 채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신체 특징 스캔을 완료하기 위해 착용 중인 모든 것들을 탈의 혹은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끔찍해하는 순간이 왔다.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설임의 번뇌 앞에서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멈추어 있길 잠시,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싫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유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우주복 내피를 벗었다. 무중력 상태다보니 꽤 쉽게 벗어진다. 내피를 다 벗고 나니 땀에 절은 속옷만이 남는다. 아까 무리해서 달린 탓에 흐른 땀이 내피 안쪽을 온통 땀범벅으로 만든 탓이다.
방 안 온도는 23도로 결코 낮은 온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타고 오한과 소름이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위축된 마음 탓인지 땀으로 젖은 속옷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망설임을 남겨두고 주저하던 유나는 눈을 딱 감고 몸에 남은 축축한 감각을 한번에 모두 벗어던졌다.
- 신체 특징 스캔을 시작합니다. 팔다리를 편안하게 뻗어주시기 바랍니다.
지시에 따라 몸을 펼치자 그녀의 하얀 나신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진정되지 않은 마음처럼 몸이 부르르 떨 때마다 젖무덤이 덩달아 부드럽게 흔들린다. 유나는 이 감각이 너무 싫었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웠다. 볼을 스치는 머리칼과 한없이 가벼운 관절에 집중하자 바닷속에 잠수할 때 몸을 스치는 물결이 같은 감각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 감각에 몰두하자 그녀는 알몸이라 느끼던 불쾌와 불안이 사그라지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강한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자 번데기를 찢고 나온 나비처럼 생전 처음 날개를 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 그대로 태어나 처음 맛보는 온전한 자유.
- 나린호 기관실 9번 엔진 보조 기관사 장유나. 신체 정보 스캔 완료 되었습니다.
데크 보안 시스템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긴다. 기껏 눌러두었던 자의식이 유나의 몸을 점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벌거벗은 알몸을 통해 자신임을 증명하는 불쾌한 과정 중이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또다시 오한을 느낀 그녀는 몸을 태아처럼 웅크리고 다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차가운 무릎에 젖가슴이 닿자 오한이 다시 한번 그녀를 찾는다. 그녀는 속으로 승선 절차를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을 향한 깊은 저주를 퍼부었다.
- 현시각 이후로 장유나씨는 '다'급 승무원 권한을 배정 받으며 선내 지정된 지역에서 별도의 신분 증명 없이 자동으로 통과가 가능합니다.
스캔된 그녀의 신체 자체가 보안 출입증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녀는 학생 때 들고 다니던 학생증이나 지문인식을 통한 출입이 불편하긴 해도 더 좋았다. 적어도 수치심 가득한 스캔이 필요 없었으니까.
- 마지막 승선 절차입니다. 우주 항해법에 따라 승선자 파악을 위한 나노칩을 삽입합니다. 나노칩이 수집하는 정보는 응급상황을 대비한 신체 활동 정보 및 위치 정보이며 삽입 장소는 관련법에 따라 임의 제거가 불가능하도록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잠시동안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나는 다시 몸을 펼치고 마네킹처럼 몸을 가만히 멈추어 두었다. 대신 부지런히 눈을 꿈뻑이며 공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동안에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삽입되는지 보고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과정을 지켜보지았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 공중에 떠 있었고 겉보기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삽입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반환되는 짐을 통해 다시 의복을 착용하시고 착용이 완료되면 '완료'라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닥 한 구석이 열리더니 유나의 짐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유나는 허공에 떠다니는 자신의 속옷부터 잡아채곤 후다닥 입었다. 아직 축축하기에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신체를 가려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다 됐어. 옷만 입으면 완료야."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유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짐가방을 받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 데크 출입 절차가 완료 되었습니다. 문이 열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녀가 인지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직까지 출입절차 중이냐? 신속하게 안 움직일래!"
정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 사고회로는 고열로 인해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렸다.
'어째서 문이 열린거지? 왜 천선배님이 나보다 먼저 나와 있지?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나...... 나......'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마냥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마냥 화끈거린다.
"아...... 아...... 아......"
벙어리가 된 것 마냥 입은 열려있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욱은 그런 유나를 보고는 표정하나 변화 없이 말을 툭 던졌다.
"멍청이 같이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챙겨입고 튀어나와. 네 속옷 취향에 관심 없으니까."
무심한 억양을 툭 던져 놓은 채, 정욱은 벽에 걸려 있는 이동 손잡이를 잡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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