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불꽃의 추격을 하고 있는 현 선수! 마지막 랩을 앞두고 마침내 오늘 내내 독주를 펼치던 지구 뮌헨팀 프뢰 선수에게 다가섭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의 황금날개를 꺾을 듯한 기세로 다가서는 백색의 날개!”
장내 아나운서의 요란한 멘트가 객석을 휘몰아쳤다. 덕분에 객석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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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제 14 코너에서 한번 더 최대 속도를 낼 거야. 몇 초 동안 가속 가능해?”
현이 오랜만에 전략실에 질문을 던졌다. 항상 독단적으로 레이스를 운영하던 현이다. 그런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모두 잠시동안 귀를 의심했다.
“네……?”
한 엔지니어가 멍한 얼굴로 엉겁결에 되묻자 현이 특유의 귀찮음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꾸한다.
“제 14 코너에서 가속을 얼마동안 할 수 있냐고.”
그제서야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실감이 난 팀 엔지니어들이 손을 바빠진다. 연료량과 부품내구성을 몇번씩 계산하고 검토하더니 곧 치프 엔지니어가 인후에게 다가왔다.
“이미 한계입니다. 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벅차요. 만약 이번에 가속을 한다면 이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는 현에게 직접 알려주기에는 겁이 났는지 계산 결과를 인후에게 말해주었다. 대신 전달해달라는 뜻이다. 무리도 아니다. 불같이 화낼지도 모르는 현에게 엔지니어가 직접 알려줬다간 자질 부족이니 뭐니 해서 욕을 시원하게 얻어먹을 것이다.
인후는 현에게 사실을 전달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바퀴 안에 승부를 걸 수는 있을까? 이대로는 뮌헨과 시차를 줄이는 것도 벅차다.
“이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뮌헨 녀석들하고 경합을 벌일 수 있을만한 거리까지 가까워지는 건 언제쯤이지?”
인후는 현에게 통신을 넣기 전에 먼저 스태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수가 없다면 제 15 코너입니다.”
엔지니어의 대답에 그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금새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갸웃했다.
“시차는 2초잖아. 그런데 한 코너만에 따라잡을 수 있어?”
그의 질문에 엔지니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못 따라잡습니다. 제가 말한 건 다음 랩인 21랩의 제 15 코너입니다.”
인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21랩이면 마지막 바퀴. 제 15 코너면 마지막인 제 16 코너 바로 앞 코너다. 즉, 경기 끝나기 15초 전에야 겨우 뮌헨팀의 엉덩이에 붙을 수 있다는 말이다. 화성 베이징팀을 넘어서는데 꼬박 4랩이 걸렸는데 뮌헨과 경합에서 주어진 시간은 겨우 15초다. 꼬리에 달라 붙어서 뭔가 해보려는 찰나에 경기가 끝나고 말 것이다.
“뭐해? 빨리 알려주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할거야.”
현이 재촉해온다. 인후는 방금 들은 내용을 들으면 실망할까 걱정되어 대답을 망설였다. 그것도 잠시 인후는 고민하지 않고 현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는 현은 실망은 하되 포기는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안돼. 지금 가속하면 녀석의 꼬리 근처에도 못 가보고 진다.”
단호한 인후의 대답에 팀 전략실의 스태프 전부가 일순간 숨을 죽였다. 이제껏 그가 보였던 반응을 되짚어보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제멋대로 가속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군.”
모두의 예상을 깨고 현이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평소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달려들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다. 잠시 현의 반응을 기다리던 인후는 그가 말없이 레이스에 집중하자 정말 걱정되기 시작했다. 몸에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메디컬 체크.”
인후가 잠시 통신을 끊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하자 시스템 담당자가 고개를 들어 외친다.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은 건 여전하지만, 관성 내성은 정상 범위로 돌아왔습니다!”
건강 상태 이상은 확실히 아닌 모양이다. 다시 곰곰히 생각에 잠겨보지만 현의 갑작스럽게 변한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인후는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 드니 자연스럽게 기화 초콜릿 스틱이 떠올랐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포장갑을 꺼내든다. 그 속을 손가락으로 한번 훑었지만 손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려다보니 포장갑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하나 더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인후는 평소 기화 스틱 개수를 헤아려가며 먹던 버릇이 있어 마지막 하나까지 정확하게 세어 놓곤 했다. 인후는 계산대로라면 당연히 하나 남아 있어야 하어야 하는데 비어있는 포장갑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어디서 흘린 것일까. 머릿속으로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
인후의 뇌리로 짧은 기억이 스쳐 지난다. 덕분에 깨달았다. 이 녀석이 평상시와 달리 레이스 종반에 다다르면서 목소리에 점점 힘이 없어지고 평상시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조언까지 구하는 이유를 말이다.
녀석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평소보다 더 간절히 우승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녀석은 불같은 성질을 꾹꾹 눌러 담고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아까 화성 런던팀에게 역전을 허용할 뻔 했을 때도 얼마나 참았던가. 평상시였으면 상대팀 기체를 들이받고도 남았을 터다. 그런 봄날 망아지 같던 현이, 인후가 그토록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절대 고치지 못하던 성질을 죽여가며, 이기려 하고 있었다.
‘사자도 지 새끼는 귀엽다더니.’
인후는 잠기 가슴이 찡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인후가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동안 말이 없던 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달리면 황금빛 생쥐 꼬리 근처까지는 갈 수 있나?”
인후가 스태프들에게 물어본 바로 그 질문이다.
“그래 갈 수 있어. 마지막 랩 제 15 코너에서 만날 거다.”
인후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현재로선 그것만이 그를 위해 인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었다.
“제 15 코너…… 알았어.”
현이 계속해서 차분하게 대답하자,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라던지, 오늘 지구의 자전 방향이 바뀌지 않았냐느니하는 실없는 소리가 스태프 사이에서 오간다.
“모두 닥쳐.”
인후의 나지막한 호통에 전략실 내부가 순식간에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우리 선수가 집중하고 있잖아. 함께 달리는 마음으로 승리 기원은 못할 망정 어디서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들이나 찍찍 내뱉고 있는 거냐!”
인후의 관자놀이에 솟아 오른 실핏줄이 분노로 파르르 떨린다. 네 놈들은 현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지 알긴하는 거냐. 인후는 한번 더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고마워 형. 모두들 추진기 꺼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백업 해줘. 오늘은 꼭 우승하자. 부탁할께.”
통신이 켜져 있었던 것인지 현의 당부가 대답처럼 전략실로 흘러 들어왔다. 평상시의 현에게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 진솔하고 간절한 부탁이 모두에게 전해진다. 인후가 입을 열 필요조차 없었다. 전략실의 모든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
스태프들이 감동과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손을 바삐 움직이려던 찰나, 현으로부터 추가 통신이 들어왔다.
“아 그런데 다 들었어. 동훈이, 시현이, 동희. 셋이는 끝나고 나 좀 보자.”
지목당한 세 사람과 인후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어느 새 경기는 21번째 랩! 바로 마지막 랩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1위와 2위, 그리고 3, 4위 간의 간격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경기는 이대로 종료될 것 같습니다. 지구 뮌헨팀 프뢰 선수의 황금빛 기체는 경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선두에서 안정적으로 날고 있습니다.”
“화성 태백팀의 현 선수가 베이징팀을 제칠 때만 해도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기대를 했거든요. 물론 2바퀴 만으로는 1위를 노리기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네 해설위원님 말씀대로 화성 태백팀은 2위 굳히기에 만족할 것 같습니다. 의외의 결과이긴 한데 해설 위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훌륭한 판단입니다. 화성 태백팀으로서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 동안 현 선수가 무리한 플레이로 실격된 게임을 떠올려 보세요. 얼마나 어이없는 사고가 많았습니까? 지금과 같은 차분한 대응이 적응은 안될지 몰라도 실리적 측면에서 바른 판단입니다. 물론 현 선수가 맞긴 한지 의문이네요. 오토 파일럿으로 대체 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차분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거든요.”
“해설 위원님 말씀대로 팀 전략실에서 제재에 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팬으로서 아쉽긴 합니다. 현 선수의 플레이가 포뮬러 R-5614 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였으니까 말입니다.”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중계를 정리하려는 것 마냥 차분한 목소리로 현의 변화를 언급할 뿐이다. 객석의 관람객 중 몇몇이 미리 경기장을 나서려고 짐 챙기고 자리 정리를 하는 통에 객석 전체가 부산스러워진다.
모두가 경기를 마무리 짓는 와중에도 오직 소년만이 꼼짝도 하지 않고 경기 중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은 선두 그룹이 코너를 지날 때마다 순위별 시차를 알려주는 홀로그램에 꽂혀 있었다. 시차를 바라보는 소년의 심박이 조금씩 빨라져간다. 소년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삼촌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총 세 개의 코너, 체커는 이미 깃발을 흔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지구 뮌헨팀은 15 라운드에서 한번만 더 순위권 안에 들면 14회 대회 종합우승이 확정됩니다. 말씀 드리는 동안 아… 화성 태백팀 현 선수 어느새 지구 뮌헨팀 뒤에 바짝 붙었군요. 하지만 유감입니다. 코너는 이제 겨우……”
소년의 귀로 들려오던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서서히 옅어져 간다. 전광판 위로 나란히 날아가는 금빛, 햐얀빛의 날개만이 그를 사로잡는다.
“가요, 삼촌!”
제 15 코너는 완만한 왼쪽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코너가 끝나면 곧장 오른쪽으로 꺾인 제 16 코너가 이어지는 짧디 짧은 코스로 선행 기체가 오른쪽만 사수하면 후행 기체는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코너였다. 그런 제 15 코너를 눈 앞에 두고서야 현은 가까스로 황금날개에 바짝 붙을 수 있었다. 레이스 종료까지 약 15초, 현은 지체 없이 뮌헨팀의 오른쪽 날개 끝으로 바짝 붙어섰다.
뮌헨팀의 프뢰는 그가 오늘 레이스 전반에서 보여준 좌우 평면 공략의 재현에 혀를 찼다. 물론 상하 콤비네이션은 고속을 유지하는 상황에서는 감속량이 너무 많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꼬리만 쫓는 무기력한 공략으로는 어림도 없다. 프뢰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현과의 승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현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고들 듯 속임수를 걸며 이번 코너를 넘긴다. 그리고 곧장 다음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파고들며 승부를 걸어 온다. 왼쪽에서는 그를 이길 방법이 없으니 그것 말곤 현이 던질 수 있는 승부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뢰가 오른쪽을 막아선 상태에서 현이 부딪혀 오지만 않는다면 체커는 무조건 그의 것이다. 프뢰로서는 현의 역전을 조심하기보다는 현이 충돌해오지 않도록 걱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정도로 역전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미리 오른쪽 코너를 차지해 현의 충돌을 사전 차단해 버리기만 하면 레이스는 종료야.’
프뢰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체를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현의 시도를 원천 봉쇄했다.
현은 황금 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등뒤로 꼿꼿히 세운 다음 오른쪽 다리를 할 수 있는 한계까지 꺾었다. 기체가 고속에서 급격한 기동에 덜컹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망가질듯이 덜덜거린다.
현이 허리를 펴자 황금빛 기체 아래로 그의 하얀 기체가 화살이 쏘아지듯 날았다. 현은 뮌헨팀의 아랫공간으로 날아 들어가며 왼팔을 오른발의 반대 방향으로 뻗었다. 기체가 한번 덜컹이더니 현의 오른쪽 어깨로 엄청난 충격이 날아든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
전략실의 스태프들 모두가 짧은 감탄사만 겨우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 현의 하얀 기체가 프뢰의 황금빛 기체의 아랫배를 뱀처럼 비선형 나선으로 감싸고 돌며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간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을 거짓말처럼 매끄럽게 탈출한다.
“아! 지금 우리가 무얼 본 건가요!”
장내 아나운서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객석으로 울려 퍼진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객석은 현의 기체가 체커를 받으며 골인지점을 통과한 후 미친듯한 환호성에 휩쓸렸다.
“이건 역대급입니다! 화성 태백팀! 선현 선수! 우승!!”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미친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로비를 향해 달린다.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기술을 선보입니다! 백색의 나선! 똥멍청이가 해냅니다!”
“정말 엄청나네요! 지구 뮌헨팀의 프뢰 선수가 오른쪽만 신경쓰는 사이에 생전 처음보는 콤비네이션으로 그를 뚫어냈어요! 그것도 경기 종료 15초를 남겨두고 처음 벌이는 경합에서요!”
“이거 멀리서 잡은 화면에서는 프뢰선수가 그냥 옆으로 비켜준 것 같아 보였겠습니다!!”
“말도 안되는 기동이었습니다. 어떻게 기체가 저런식으로 편심된 나선형으로 회전할 수 있죠? 일대 혁명입니다!”
객석은 환호성과 중계석 소리가 뒤섞여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년은 벅찬 가슴을 안고 화성 태백팀 전략실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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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설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전개다 보니 많이 미흡하다는게 함정이죠 ㅠㅠ | 15.01.22 23:1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