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억을 소중히, 내일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며.
우리는 하루 밖에 살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정신은하루가 지나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하루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무의식의 습관만 남아 하루하루를 반복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우리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톱니바퀴같은 존재들이다. 나 역시 매일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톱니바퀴 중 하나이다.
나 그리고 우리의 계급은 노동자이다.
노동자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침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때 거주지로 돌아간다. 감정이라 불리는 최소한의 인간미는 남아 있어 우리는 서로 인사도 하고 일을 하면서 가끔 대화도 나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는 하루라는 시간에 편중되어 있지만 대화를 하며 웃고 울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명백히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노동자의 계급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다. 시험관에서 일괄적으로 재배되는우리는 바로 사회 시스템에 적응되기 위해 그들로부터 설계된다. 사회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그들은 이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관리자라고 하는 자들이다. 관리자와 노동자 이것이 인간이 설계한 유토피아라는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HJK1001, A-1 구역으로 재배치됩니다.--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공장 안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드론의 기계음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A-1 구역으로 이동했다. 나는 공장 소음을 뒤로하며 천천히도 빠르게도 아닌 적당한 걸음걸이로 긴 통로를 지나 A-1 구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다른 노동자들이 드론이나 휴머노이드를조립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HJK1001 신원을 확인합니다.--
A-1 구역의 드론이 나를 맞이했다.공중에 떠 있는 드론은 광학 센서로 나를 스캔하고는 문제가 발생한 지역으로 앞장섰다. 나는드론을 따라 해당 지점으로 향해갔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도착했고 어떤 예쁜 여자 노동자가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마 휴머노이드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기계적 오류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나는늘 하던 대로 문제점을 찾기 위해 바로 기계의 패널을 조작했다. 노즐이 하나 느슨해져서 경고가 생긴듯 한데 그냥 작업하기에는 조금 위험한 부분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손가락이 날라갈 수도 있지만 무슨 자신감인지그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기계 안쪽에 손을 넣어서 노즐의 조임 쇠 부분을 다시 풀었다가 잠갔다. 그러자패널에서 경고 등이 그린으로 틱- 바뀌면서 곧바로 기계의 모터가 움직였고 아슬아슬한 찰나 나는 손을빼내었다.
뭐가 자랑스러운지 나는 잠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질근묶은 짙은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 그리고 나는 그녀의 진한 검은색 눈동자에서 나를 조금 걱정하는 듯해 보이는 살짝 놀란 표정과 입가의 살짝 띤 미소를 잊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와 드론에게 자신있게 말했다.
“모두 끝났습니다. 작업을재개해도 좋아요.”
--LSJ1004 작업을 재개하라—
--HJK1001은 바로 복귀하라—
망할 드론, 그녀가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적어도 ‘고마워요’라는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짜증나는 기계 소리를 들으면서 발길을 돌려야했다. 다시 그녀를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차피나도 그녀도 내일이 되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테니 참 쓸데없는 고민인 것 같았다. 우리는 오늘의인연이 내일의 인연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래도 무언가 아쉬웠다. 내가 그녀를 하루 더 기억할 수 만 있다면오늘 하루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복귀해서 현재 돌아가는 조립 기계들의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패널을 보면서 검수를 진행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여느 때처럼 흘러갔다. 마치 전자 시계의 숫자가 8자에서 멤도는 것 것처럼 누구나 다 똑같이 흘러갔다.
--복귀 시간입니다. 노동자들은귀가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세요—
공장에 설치된 입체 서라운드 스피커에서 익숙한 AI의 음성이 들려왔고잔잔한 음악이 공장을 가득 울렸다. 공장의 기계는 멈추었고 나와 노동자들은 옆 사람과 짤막한 인사를하고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락커룸에서 가방을 찾은 나는 군중 사이를 가로지르며 밖으로 빠져 나갔다. 저만치 공장 주변의 펜스가 보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길을 따라 거주지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사로웠던 아침 햇살은 어느새 노을에 가려졌고바람 때문에 조금 쌀쌀했다. 주어진 임무가 끝난 노동자들은 적당히 오늘 처음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도나누면서 저마다의 거주지로 돌아간다. 또는 그들 중 오늘 첫 약속이나 첫 만남을 위해 산책을 하거나차를 마시거나 저녁을 함께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특별한 약속이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과 인사만나누었을 뿐, 저녁 초대를 받은 적도 한 일도 없었다. 터벅터벅길을 따라 걸었다. 길가에는 식당과 카페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한꺼번에빠져 나온 사람들을 피해 거리에서 작은 샛길로 빠져 모퉁이를 돌아 지름길로 향했다. 이쪽으로 가면 내가사는 거주지까지 금방이었다.
“에이츠, 에이츠”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식별코드와 이름의 대한기억은 남아있으며 아침에 새로 인사할 때 항상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관례가 있다. 나는 뒤를 돌아굵은 남성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짙은 청바지에 기름 때가 묻은 후드티를 푹 뒤집어쓴 그는 오늘 아침에내 옆에서 일했던 노동자 제이미였다.
“여~ 제이미, 오늘 하루의 기억을 잘 만들고 있나? 그런데 이런 골목에서 뭐하고있는거야? 벌써 거주지로 돌아가는 건 아닐테고 말이야.”
“쉿, 조용히하고 이쪽으로와봐.”
제이미는 내 팔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더 좁은 골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두어번 살피더니 후드티의 호주머니에서 작은 비닐 팩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안에는푸른색의 거친 알갱이들이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감출 수 없는 호기심에 제이미에게 물었다.
“이.. 이게 뭐야?”
“E※M. 엑셈이라고 하지.”
“엑셈? 엑셈이 뭔데? 뭐하는 것이길래…”
“잠깐!”
제이미는 내 말을 황급히 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의 시선을따라 위로 올려다보니 건물 위로 드론이 순찰 중인 것이 보였다. 아직 무언가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만괜한 불안한 심리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치 드론은 내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춘 듯 웅웅웅 거리는엔진음을 내며 천천히 건물 위에서 멀어져갔다.
제이미는 다시 조용하게 말을 이어갔다.
“E-X-M, Extention eXtra Memories 라고 하는특수한 약이지. 최근에 입수하게 되었어.”
“이거 무슨 마약 같은 거 아니야?”
“흐흐, 정말 신기해. 어제도 똑 같은 소리를 했어. 효능은 확실하구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제도 똑 같은 소리를 했다고? 내가 어제 했던 말을 제이미는 기억하고 있는 건가. 나는 더 강한호기심에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내가 어제도 똑 같은 소리를 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헛소리는 아니겠지?”
제이미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약간의우월감도 더해서.
“맞어. 어제 일을 기억하고있어. 뭐 약 기운이 떨어질 때 즘 되어서 완전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그런 궁금해 죽겠다는멍청한 표정과 말은 기억이 나는 군. 흐흐흐.”
“장난치면서 주고 받을 기분은 아니니까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게 진짜 마약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원히 정지라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좀 놓고 말해. 어제보다 조금 더 격한 것 같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아.. 미안. 그러니 어서 말해봐.”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그 파란 결정체들이 왠지 나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이미는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다시 한번 두어번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익스텐션 엑스트라 메모리즈. 말그대로 기억을 연장시키는 약이지. 지금 고위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엄청 유행하고 있는 약이라고. 지금 이렇게 작은 한 알이 무려 하루나 기억을 지속시켜주는 것이지. 즉이걸 먹으면 어제의 일이 똑똑히 기억이 난다는 거야.”
엄청나다. 기억을 연장시킨다니. 듣도보도 못한 물건이다. 대체 이런걸 이 녀석은 어디서 구한 걸까. 그것보다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도 들었다.
“정말 이게 가능한 거야?”
제이미는 여전히 불안한 듯 자꾸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시간을 오래끌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면 모르겠어. 내가아까 말했잖아. 네 어제 말과 모습이 기억난다고. 아무튼일단 받아. 한번 즐겨보라고.”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느닷없이 내 손에 약이 든 비닐팩을 쥐어주고는 하늘을 두어번 살피더니 곧장 골목을 뛰쳐나갔다.
“자..잠깐 제이미! 제이미!”
나는 제이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얼떨결에 내 손에 쥐어진 EXM으로시선을 옮겼다. 기억을 연장시켜주는 약이라.. 진짜일까하는의문과 호기심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이미의 불안한 모습을 상기한 나는 빨리 이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골목 밖으로나갔다.
곧 거주지가 보였다. 회색의 높은 빌딩이 바로 나와 다른 노동자들이살고 있는 서플라이라고 불리우는 건물이었다. 나는 서플라이 B섹터입구에 들어서서 목에 걸고 있는 ID 카드를 인식시킨 후 엘레베이터를 타고 바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긴 복도를 따라 B-8108이 쓰여진 문앞에 섰다. 거주지까지 돌아오는 내내 긴장을 했는지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 있는 EXM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 문 안으로들어섰다.
--HJK1001 오늘도 인류를 위해 봉사한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의 기억을 소중히 하셨나요.이제 내일을 위한 새로운 기억을 준비하세요.—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인류를 위해 함께하고 있습니다.—
AI의 음성이 들려왔다. AI의음성을 들으니 나는 문득 어디서든지 감시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욕실로 들어가 다짜고짜 샤워기에 물부터 틀었다.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면 AI가 내가 씻고 있다고 믿을 것 같아서였다. 그냥 느낌에 행동한 것이지 확신은 없었다.
--물 온도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AI의 음성이 욕실 문 너머에서 울렸다. 살짝 안도감을 느낀 나는 세면대의 거울 앞에 서서 주머니 속에서 비닐 지퍼팩을 꺼내었다. 파란색의 울퉁불퉁한 결정체들이 이삼십 알 정도 들어있었다. 정말로이것이 기억을 연장시켜준다면 진짜 엄청난 약임에는 틀림없었다. 고위 관리자들에서 돌고 있다고 한다면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뜻 용기가 나지않아서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들켜서 영원히 기억이 정지당해 수용소에서 평생을 사물처럼 살다가 죽음을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왜 일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보았던 그녀의미소를 내일 기억하고 그녀를 내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녀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 이름도 말해주고 함께 기억을 나누자고 말을 건네고 싶다.용기가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한번시험해보는거야.
나는 조심스레 지퍼팩을 열어서 파란 결정체 한 알을 살짝 집어 들었다. 혹시나떨어뜨릴까 지퍼팩도 다시 꼼꼼히 잠갔다. 거울의 내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깊게 심호흡을 하고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설마 부작용 같은 것은없겠지. 라고 생각하자 마자 바로 눈이 감기며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아주 잠깐 느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 소리가 귀에 들리자마자 눈이 바로 번쩍 떠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