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요이 사쿠야의 간섭받지 않는 세계
그 날은 조금 어두운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약간 춥기도 했고, 하여간 일을 하는 날으로선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덕이었을까, 지금 굉장히 난처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뭐어… 정확힌 난처롭달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느낌도 아니고. 응.
"그러니까, 듣고 있습니까아! 이자요이 씨!"
그렇게 시끄럽게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 이 바보같은 처자야. 하여간, 술만 마시면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으니라고… 같은 생각을 했다. 한 두번 그런 거라면 모를까, 매번 이런 상황이다. 이 곳에 있는 사람은 사용인들끼리라고 해도 나와 정원사, 단 둘 뿐이지만 여간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아무렴 어떠한가. 나, 이자요이 사쿠야는 이 시간이라면 이미 홍마관의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날씨가 영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사용인은 그 어떤 일이라 하여도 정숙을 유지하고, 가내의 청결과 동시에 주인의 안녕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 맞다지만… 오늘따라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덕에 나는 지금, 백옥루의 사용인과 함께 한 잔 걸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완벽하고 소쇄한 사용인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했을 것이지만, 예상 외로 이렇게 된 일에는 복잡한 일이 있다.
"아아, 물론 듣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콘파쿠 씨는 확실히… 편할 지도 모르겠네요."
"편할 리가 없잖아요오?!"
분명 나이는 충분히 먹을 만큼 먹은 환상향의 사람인데도, 행동만 보면 그렇지 않았다. 헤롱거리는 모습이 충분히 귀여운데도 딱히 그녀를 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 그런 것 보다도. 사실은. 나는 그녀가.
부러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질투심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은 오산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있잖아요, 이자요이 씨이. 이자요이 씨는 홍마관에서의 일이 힘들지 않으신 거에요오?"
반 쯤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내게 묻는 정원사 소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마저 나왔고 일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태연스럽게 꺼내도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어리숙한 아이같은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그만 두었다.
이런 일을 심도 깊게 생각해봐야 좋을 일도 없었고, 만약 그녀가 나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면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으니까. 같은 게 이유였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났다.
"…체."
"무슨 일인가요오."
"…대체, 왜 그렇게 까지 괜찮은 척을."
무의식 중에 입을 열어 버렸다. 하면 안 될 말이었지만, 나한테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가요. 대체 뭘 원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정원사는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이런 추태같은 모습마저 내게 쉬이 드러내는 걸까, 하고.
…무언갈 원한다면 말하면 된다. 필요한 게 있다 하면 적당히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내가 도와주는 것으로 일은 해결이 될 테니까. 그 정도는 도와줄 자신이 있었기에.
단지, 모르겠는 건 정원사의 마음이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 행동. 옷매무시. 마음가짐. 전부, 헤이해져 있었다. 평소에 보아왔던 정원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에 화가 나서, 나는.
"나는 이런 모습이니까 당신도 적당히 해두라는 겁니까?"
"…에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녀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늑대가 토끼를 향해 엄니를 보이듯 마음에도 없었던 화살을 취한 정원사에게 쏘아냈다. 확실히 정원사도 많이 놀란 모습이었다.
막상 내뱉고 나니 후회가 막심했던 터라,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후, 일단 오늘 주연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콘파쿠 씨의 상태를 누군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도 그렇고. 이런 저런 사유를 더 붙이자면 사용인으로서 몸가짐이 이상해 보일 테니까요."
하반신의 스커트에 붙은 먼지를 가벼이 툭툭, 하고 털어내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원사는 좀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뭐하자는 걸까.
"…지 말아요오."
"네?"
"가지 말라구요."
취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 였기에 무시하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목을 붙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뭐하자는 건가요."
"조금 정도는, 쉬었으면 해서."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나는 그 쪽처럼 여유가 많지 않아. 그런 말을 입에 내뱉으려다가도 이내 그만 두었다.
더 이상 심한 말을 해봐야, 좋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사용인의 기본적인 의무는 일이다.
고용받아 행복한 존재. 일을 해야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사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아?"
정원사의 실음과 동시에, 차가운 게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 투둑, 투두둑. 예사롭지 않게 소리가 울렸다. 한바탕 눈물을 쥐어짤 생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잖아요. 가요. 돌아 가야죠. 서로의 주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정원사는 그러기 싫다며 어리광을 부렸다. 이게 정원사라고 하는 이름의 사용인이 할 만한 태도인가 싶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은 하기 싫었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옷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져서, 혼자서라도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나 참."
그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원사가 영 신경이 쓰여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여간,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여자라니까. 그리 생각하며 품 안의 스톱 워치를 꺼내 한 번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나의 주변 반경에서 움직이는 모든「시간」은 멈췄다. 정원사의 눈은, 사뭇 슬퍼 보였다. 왜 그런 눈매를 하는 거야.
다시 두통이 몰려왔다. 시간은 오래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야 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정원사를 적당히 어깨에 걸쳐 들쳐매고 걸었다.
멈춰버린 비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이젠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당연하다, 라고. 그렇게 느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돌아가서 조금 쉬고 싶었지만, 이대로여선 딱히 돌아가서 쉴 여력도 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마을의 여관에서 묵는 수 밖에 없겠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적당히 그쳤으면, 같은 생각을 하며 빗 속을 걸었다. 마을에 들어설 즈음에 시간 정지를 해제했다. 어깨에 들쳐 매어진 정원사는 자신의 몸이 붕 떠있다는 것을 알고 흠칫거리는 모습은 나름 귀여워 보였다.
"조금 정신이 드나요."
"…어어."
아무래도 정원사는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에 나는 적당히 말을 걸었다.
"너무 취한 것 같아요. 좀 쉬는 게 좋겠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안 된다고, 자신은 백옥루의 정리를 하러 가야 한다며 거절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게 왠 게, 의외로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의 의사는 없는 것이 그래도 좋네요. 저기면 되겠죠?"
손가락으로 적당히 마을 부지의 여관을 가리키자, 정원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착각인가. 얼굴이 살짝 벌거진 것 같았는데. 조금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비에 맞아서 그런가. 어서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적당히 여관에서 전을 꺼내 값을 지불하고 방을 잡았다. 썩 비싼 돈은 아니었지만, 돈까지 내면서 쉴 정도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내버린 거 어쩌겠어.
아깝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정원사를 침대에 뉘였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런 비를, 장대비라고 하던가요."
창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정원사는 여전히 반 쯤 넋이 나간 채로 누워 있었다. 번거롭게 하기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는 편이 훨신 현명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곤히 쉬는 사람을 억지로 일으켜서 옷을 벗기는 작업은 굉장히 고되고 힘든 작업이다. 들쳐매는 것과 옷을 벗기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상대방이 깨지 않게, 조용하고 확실히 옷을 벗겨내는 법이란 건 몹시 어려운 일이기에 조심히 접근해야만 했다.
그냥 품에 있는 나이프로 옷을 찢어버렸다면, 정말로 간단했을 텐데. 그런 난폭하고 교양없는 방법으로 곤히 자고 있는 대상의 옷을 찢어 발기는 일은 도저히 프라이드 상 맞지가 않는다. 애초부터 할 생각도 없었지만.
고결하고 소쇄하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용인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게 정신적 피로가 되었건, 육체적 피로가 되었건. 결국 어느 쪽이던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라는 이야기였다.
"잠꼬대는 없어서 좋네요."
적당히 시간이 지나고서 옷을 다 벗긴 후에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었다. 이걸 어떻게 데려간담. 일단 간단하게 옷이라도 입히는 게 좋겠지. 들어오기 전에 받았던 옷을 적당히 걸쳐주는 것으로, 마무리.
"저도 슬슬 벗어야 겠네요."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와 버렸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버릇. 이거 정말 안 좋은 건데. 고치려고 하면 할 수록 되려 고쳐지지 않는 행동에 이젠 반 쯤 포기해버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외로운 감정을 달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허공에 대어, 아무 것도 없는 바람에 마음을 실었다. 그 것으로도 붕 뜨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나쁜 생각이 들었다. 배덕감 마저 들었다. 하면 안 되는 행동일 터였는데. 어째서도 이렇게 순진하고, 곤히 자는 소녀를 보면.
"나쁜 짓을 하고 싶어지는 걸까? 후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사였다. 물론 이게 썩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그런 게 확실히 이야기할 만한 수준의 '말' 이었다면 입에서 쉬이 내었겠지만 그러지 않으니 쉬이 낼 리는 만무했다.
그런 건 불가능해. 해서는 안 될 행동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짓을 반복했다. 손이 움직였다. 몸도 움직였다. 팔을 뻗었다. 들숨을 몇 번 정도 내쉬다가 그만 두었다.
모르겠다, 이젠.
이런 짓도 이젠 흥에 겹지가 않았다. 가만히 있던 백옥루의 사용인을 보다가도 침대에 걸터 앉아 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술을 못 마시더니, 내 앞에서 만큼은 강한 척을 하던 그녀가 왜 이렇게도 곱게 보이는 걸까.
"…나 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도 푹 숙였다. 품 안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뒤틀려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동안 보좌해온 이 내가, 설마 스트레스같은 걸 받았다는 반증이려나.
"이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이네요. 진짜 웃겨서."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중얼거리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져서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며 일어나던 차에 숙취로 인해서 정신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소녀 정원사가 갑작스레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뭐지, 이거. 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단순히 잠꼬대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잡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뿌리치기 조금 곤란한 걸.
평소였더라면 그냥 매몰차게 떼어 냈겠지. 그렇지만 오늘 따라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누군가 부리는 응석 정도는 받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는데.
"정마알, 너무… 하다고요."
뭐가 너무한 겁니까. 같은 말을 내뱉으려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그래. 잠꼬대야. 그냥 넘기면 돼. 모르는 척 하라고.
…아. 나도 모르게 실소를 내곤 작게 말했다.
"진짜, 술도 못 마시면서 매번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니 이젠 진절머리가 다 난다니까."
팔을 잡은 손을 뿌리쳤다. 억지로라도 떼어내지 않으면 여전히 어리광만 부릴 터였다.
평상 시에도 이렇게나 곤란한 아이는 아니었는데.
귀찮다 귀찮다 말로만 해선 전해지지 않는 걸까. 어중간하게 태도를 보인다면 상대방에 대해 우롱을 한다는 것. 조롱을 한다는 것. 가벼이 여긴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말을 가능한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계속해서 들어나가니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그 마음… 뭔지 안답니다. 알고 있어요. 말하고 싶은 데도, 말하지 못 하는 것 조차."
받아줄 수 없다. 분명, 나는 이런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다. 이미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기에.
더욱 더 애절한 마음을, 이 이상으로 망가뜨리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해. 그게 현재, 나의 마음이었다.
나도, 그녀도.
분명, 이 이상의 친밀하고 위험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생각을 하지 못해서, 벌어질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사단이 일어날 지를 알고 있으니까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그 어떤 감정도 용납되지 않는 시간대여서 그랬을 터다. 분명 그게 옳은 일이었다.
사랑해서는 안되고, 좋아해서도 안 될 사이.
우리는 어차피 다른 이들에게 보일 때에, 그저 친한. 아니. 정확히는 사용인으로서 서로의 고충을 나누는 정도의 사이가 좋다.
이상의 관계가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견디지 못 할 사이가 되리라.
그런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끝을 내야만 한다. 그럼 무시하고 가야 한다. 그게 맞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가히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무덤덤해져만 갔다.
이 사람을 정말로 좋아해도 되는 걸까?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분명… 아닌데."
그녀를 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이자요이 사쿠야라는 사람은 겁쟁이였다. 자신이 그 동안 만들었고 쌓아왔으며 지내왔던 평범한 '일상' 이 대번에 무너져 내리진 않을까, 하고.
"우음, 이자요이… 씨…."
백발의 가녀린 소녀는 얼굴이 벌개진 채로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래, 그냥 우리 사이는 이 정도가 좋아. 그러니 그만 두자.
난장판이 된 방을 적당히 청소했다. 정원사가 계속 이불을 발로 걷어차다가 그만 두었기에,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준 후 여관을 나섰다.
"비가 그쳤네."
맑은 하늘이 보였다. 햇빛이 찬란하게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다. 뭐, 이건 이대로 좋은 거겠지. 입으로 살짝 좋다는 듯 소리내어 웃고 돌아가기로 했다.
잠깐, 숨을 쉬면서. 현기증이 잠깐 일었다가도 금새 상태가 좋아졌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걸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깐만요."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정확히는 갑작스럽게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도 무방할 일이었다.
왠 일인지, 하얀색 머리를 한 정원사한테 뒷치기를 당했거든. 무척이나 어이가 없어질 법한 이유였다.
"잠깐만요. 이자요이 씨!"
취한 게 아니었나? 머리를 잠깐 긁적거리다가도 잠깐 한숨을 푹 쉬었다. 조용히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답했다.
"…뭔가요."
"어째서… 그냥 가시는 건가요!"
"헤…?"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려 버리고 말았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내가 여관 방에 그녀를 놔두고 간 것 때문에? 아니면 대체 무슨 연유로?
물론 짐작가는 부분이 있긴 했다. 아니, 짐작이 아니다. 이건 빼도 박도 못 할 이유였다. 그렇지만 자알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였다.
웃기지 마라. 웃긴 소리 좀 하지 말란 말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냥 단순히 변덕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야? 단순간의 욕망? 쾌락? 뭐지? 내게 바라는 게 그런 부분이 아니라면, 자기과시?
…이 쯤 되니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만두세요, 제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말란 말이에요.
"좀, 가요. 가란 말이에요. 내 마음 속에서 나가. 더 이상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입을 열다가도 멈췄다. 순간, 뒤늦게나마 말 한 내용을 파악했다. 분명 생각으로 했어야 할 말을 그대로 읊조리고 말았다.
…해선 안 될 말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긴 싫었지만, 그게 현재 보이는 명쾌한 답이었다.
"…이자요이 씨는, 제가 싫은 건가요?"
"……그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넓은 바다에, 깊은 심연 속으로 찬찬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우수어린 눈에서 한 방울. 무색, 불투명한 감정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을 정도로.
하늘은 맑았다. 하지만, 비가 내렸다. 그녀의 마음에도, 나의 마음에도.
멈추고 싶었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다. 한사코 그녀의 결심에 제지를 두고 싶었다. 이미 한 번 쯤은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시금 말하는 것으로, 그녀와 멀어질 수 있었을 터다. 그렇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참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말할 수 없었다.
전부― 부질없는 행위였으니까. 나는 등을 돌렸다.
"다시는, 보지 말아요."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별통보같은 느낌의 이야기였다.
"어째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왜, 어째서."
그녀가 몇 번이고 연신 같은 말을 되뇌이며 물었다. 백옥루의 정원사가 홍마관의 사용인에게 물었다. 작은 아기새처럼 날갯질을 하지 못하듯, 자신을 지켜봐달라는 의미에서 한 말 처럼 들렸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안 돼. 내게 속삭였다. 돌아 본 그녀를 본다면, 나는 결코 참을 수 없어. 넘어선 안 될 다리를 넘게 될 지도 몰라.
달콤한 유혹이었다. 마치, 입 안을 향긋하게 채우는 홍차와 행복한 기분이 가득한 케이크처럼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다.
떼어내고 싶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일 정도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지만.
"왜 피하는 거에요? 이자요이 씨, 저는―"
그 입을 막아야만 했다. 틀어 막아야만 해. 그녀의 말을 들어 버렸다간, 더 이상은―
"―좋아해요, 이자요이 사쿠야라는 사람을."
결국, 들어버리고 말았다. 들어선 안되는 말을. 가슴이 조금 뛰기 시작했다. 착각하지 마.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정원사라는 소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언제나 미숙하고, 우직하게 노력만 할 줄 알던 바보같은 소녀였다. 나와는 달리 잘 하는 것이 비교적 적었지만, 노력이라는 걸 하던 작은 아이였다. 언제나 내가 앞서가고 있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말―."
답을 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분명히 그녀는 나보다 모든 것이 뒤쳐져 있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완벽하고 소쇄한 사용인. 붉은 악마를 모시는 하녀. 영원히 죽지 않는, 시간의 섭리를 거스른 존재.
그런 나이기에. 그런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 곁에서 떠나갈 까봐. 사실은 지금까지의 일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랬기에, 그 마음이 커지기 전에 쳐내려고 했는데. 가지치기를 하듯, 쳐냈어야만 했는데―
"그래도, 전. 이자요이 사쿠야 씨가 좋아요."
맹한 눈빛이었지만, 자신이 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득한 눈동자였다. 분명 흐릿해보이지만, 그 눈에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뭔가 잃어버릴 각오 하나 쯤은 했다는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나보다 뒤쳐져 있었지만, 뒤쳐지지도 않았었다. 착각이었다. 그녀의 주인, 백옥루의 망령 아가씨는 분명 내게 있어 기품이 느껴지는 존재이겠지만 백옥루의 정원사, 눈 앞에 있는 당사자는 그러지 못했다.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든 걸까.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데. 분명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유령이 아니다. 절반은 인간의 피를, 절반은 유령의 피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인간다운 걸까. 그리하야 사랑스러운 걸까.
"저는, 이자요이 씨를 걱정하지 않아요. 완벽하잖아요. 그래서 더욱 동경심이 들었어요. 저는, 이자요이 씨를―"
다시 한 번, 내게 침투하려고 들었다. 들어오지 마. 나가. 내 안에서 나가란 말이야.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닿지 않는 목소리는 메아리 쳐, 어지러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나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도 없는 당신을 싫어합니다. 성실한 점을 빼면 뭐든 미숙하고, 애매한 점이 싫습니다.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더 이상은 같은 사용인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인간이었기 때문에.
같은 사용인이지만,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점이 그렇게도 정이 오는 그런 느낌이.
흡사 열어버리면 안 될,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매력을 가진 그녀였기에―
그리고 그녀는 이미 소유물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이 손을 댈, 그런 영역의 존재가 아니었다. 본디 내 것이 아닐 때에는,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과도 같은.
그래서 더욱 더 그녀를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어봐야 내게는 상처만 남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이런 말에 뭔가 이유라도 있어야 한다는 게 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데요."
그녀의 말에 무덤덤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가 듣기 싫어 할 말이었지만, 상관 없다. 내가 꼭 알아야만 했나 싶을 정도로 무정해졌다.
여전히 소나기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다면, 신경 조차 쓰지 않으리라. 그녀에 대한 관심 또한 결단코 내어주지 않으리라.
그게 나의 심정이었다.
"저는… 이자요이 사쿠야 씨를 동경해요. 단순히, 일선의 감정이 아니에요. 이 순간이 아니라, 제가 죽는 그 날까지 줄곧 당신만을…"
정원사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 내가 존재하는 걸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무시하고 갈 수 있었잖아 나는. 어째서 그러지 않는 건데?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자요이 사쿠야, 라고 하는 '나' 자신이 내게 말했다.
「너 또한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너는 부정할 수 없어. 그저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을 뿐이니까. 단순히 아집이지.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나' 야. 어리석은 '나' 야. 너는 말 할 수 있지만, 말 하지 않고 있어. 무시할 수도 있지만, 무시하지 않아. 대번에 손으로 멋대로 나불대는 소녀의 입을 막아버릴 수도 있겠지. 시간을 멈춰 네게 고백하는 정원사의 시간 마저도 빼앗아 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전부 그러지 않았어.
어째서일까? 당연한 이유지.
너는. 나는. '이자요이 사쿠야' 는.
성실하지만, 매번 실수 투성이에 바보같은 귀여움을 가진 '콘파쿠 요우무' 라는 소녀를 동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알겠니, 이자요이 사쿠야?」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숨이 막혔다.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 소리를 내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괴로웠다. 머리가 아팠다. 두통이 가볍게 일었다. 혼란스러웠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눈 앞의 정원사는 나를 향해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지만, 아니었다.
"아, 아아. 아아아…."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한 채로 나는 땅바닥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이 바보같은 아가씨를? 사랑스럽지도 않은 아가씨를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다고?
수치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나보다 완벽하지 않는 자를 동경하고, 내 것으로 만들길 원한다고?
"…야 씨!"
안 돼. 오지 마. 난 널 알아. 너 자신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서, 결국엔 그 이야기는 행복해질 수 없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그런 상황 만큼은 막아야만 해.
알고 있었다. 진즉부터, 정원사와 어울리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용케도 버텨온 게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그게 바로 나였다.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홍마관의 사용인. 붉은 흡혈귀의 시녀.
이자요이 사쿠야(十六夜咲夜). 열 여섯번 째의 밤.
나를 만난 주인, 레밀리아 스칼렛 아가씨께서 지어준 이름. 내게 내린, 하사한 '나' 의 이름.
"사쿠야 씨! 정신 차려주세요, 제발…!"
백옥루의 정원사가 '나' 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의외로 알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저… 뜨거운 거에 약해요. 완벽하지 않아요. 저는 완벽하지 못 한 사람이에요. 그런 저를 어째서 사랑하는 건가요. 그러지 말아요. 저는,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 해요. 고로 당신에게 있어 존경의 대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내 마음에서 나가.
더 이상은 나를 괴롭히지 마.
―말해버렸다.
그녀를 향해, 악의에 차도록.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더 이상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어… 째서… 그렇게 까지 저를…."
내 어깨를 잡던 소녀는 울었다. 슬퍼서 우는 게 확실했다. 더 이상, 말 할 가치가 없었다. 너무나도 완곡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습니다. 분명 원하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정원사. 나의 시간은, 오로지 나의 것입니다. 타인은 나, 이자요이 사쿠야의 세계에 간섭할 수 없어요. 당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정리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백옥루의 정원사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며.
스톱워치를 두 번 정도 똑, 딱. 하고 눌렀다.
그리고― 세계는 일 순간, 회색의 세계가 되었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세계가.
"미안…해요."
멈춘 세계 속에서, 빗방울 조차 멈춰버린 이 불투명한 세계에서.
나는 내 앞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백옥루의 하얀 정원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렇다면 차라리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아."
쓸쓸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당연하다. 그녀와 나의 시간은 다르다. 사는 세계부터가. 그렇기에 나는 결심했다.
나의 세계에, 그 누구도 간섭하게 두지 않겠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길을 재촉했다. 그녀의 마음 만큼은 기억해주겠노라고.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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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분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에 써놨던 작품을 올려봅니다.
주제는 사쿠야와 요우무의 연정이며, 뒤틀리고 왜곡된 사쿠야의 감정을 서술한 작품입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요 시점은 '사쿠야' 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스타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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