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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이후로, 이부키는 매일 밤하늘의 달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아직 술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밝게 차오르는 달을 보며 마시는 술은 어쩐지 각별하게 느껴졌다. 이는 달의 마력에 의해서일지도 모르고, 기분 상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부키는 아무래도 좋았다. 켄 처럼 술을 좋아할 이유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술을 마신다는 행위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 없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 쓰고 저릿한 물을 가지고, 인생을 논하는 건 정말이지 바보 같아 보이니 말이다. 이부키는 이제 술을 한 모금 마시는 것만으로 인상을 쓸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싫어하면서도 자주 마셔대다 보니 그 특유의 맛에 적응이 된 것이었다. 한 잔, 두 잔. 술을 들이킬 때 마다 조금씩 취기는 올랐으나, 아직 제대로 취해 본 적은 없었다. 이부키의 주량이 그만큼 커서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취해버릴 만치 마시지 않은 탓이 더 컸다. 그 이유는 취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싫었던 것이다. 주정뱅이의 지랄은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만큼 꼴 사나웠으니까. 이부키가 술을 들이킬 때 마다 옆에 있던 켄이 취할 만큼 마셔보라고 매번 권해 왔지만, 주정뱅이가 되기 싫은 그녀는 당연하게도 그의 권유를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달빛을 바라다보며 술을 마시는 밤이 계속 이어졌다. 밤하늘의 달은 점점 갈수록 크고 밝아져 갔고, 약속처럼 가장 밝게 차오르는 날이 찾아왔다. 『만월』 요괴들의 요력이 가장 강해져 그 본능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 달빛에 취한 인외들이 활발히 인간들을 해치는 밤이 온 것이었다. * 만월의 밤은 대규모의 요괴 무리들이 인간 마을을 습격하기로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부키와 켄 역시 요괴였기에 만월 아래에서는 끓어오르는 호승심으로 몸이 근질거려왔다. 그 둘은 주점을 나서며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밝은 만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 없이 몸을 놀려 치고 박고 싶어지는 시간. 요괴들도 곧 마을을 노리고 들이 닥칠 것이기에 들끓는 피를 해소시키기에 나쁘지 않았다. 강한 오니가 둘씩이나 머물고 있는 마을이라 만월의 밤에도 쳐들어 올 요괴는 많지 않을 것 같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자신감 넘치는 요괴들이 작정하고 떼를 지어 몰려들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특히, 유독 달이 크고 밝은 이날의 만월은 이 작은 촌락에 흉포하고 강한 요괴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마을에서 오리(五里)정도 떨어진 곳에서 수백의 요괴들이 군집한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만월의 빛에 취해 인간을 습격하는 잡요괴들이 아니었다. 며칠 전 부터 이 일대의 요괴들 사이에 돌던 소문에 의해 만월의 때를 노려 모여든 자들이었다. 미치광이 오니가 지키고 있는 작은 마을에 또 한명의 오니가 머물고 있으며, 그 오니의 강함이 미치광이를 훨씬 상회한다는 소문. 평소에 미치광이 오니에게 원한이 있는 요괴들도 많았지만, 대다수가 그 강하다는 오니와 붙어보고 싶다는 요괴들이었다. 아마, 이 일대 가장 강하다고 큰소리치던 요괴들이 다 모였을 것이다. 그 만큼, 마을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요괴의 무리는 심상치가 않았다. 육중한 거구를 뽐내는 요괴, 날카로운 손톱과 날렵한 몸을 지닌 요수, 거대한 얼굴의 뉴도, 사이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땅거미 요괴 등등. 그들은 만월의 빛에 강해진 자신의 요력을 유감없이 발산시켰고, 행동을 같이하는 다른 요괴들과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면서 마을로 향했다. * 「술, 마시는 쪽이 낫지 않겠어?」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는 거야?」 주점 바로 앞에서 만월을 바라보던 둘 중에 먼저 운을 뗀 것은 이부키였다. 켄은 이제 곧 닥쳐올 요괴들과의 싸움에 격양 되 가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차에 뜬금없이 물어오는 이부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에 보란 듯이 손에 든 술병을 내보이며 살짝 흔드는 이부키. 언제 주점에서 들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한잔 마셔보라는 듯 씨익-, 웃어 보이며 눈짓했다. 「그 좋아하는 술을 왜 여태껏 참는 거야?」 「그야, 널 이기기 전 까지는 안 마시겠다고 정했으니까.」 「그건, 내가 정한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허락한 이상 마셔도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자, 이부키가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켄은 저도 모르게 삼킨 침이 생각보다 크게 울린 것 같아 머쓱한 표정으로 킁. 하고 콧방귀를 크게 뀌었다.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 않아!」 「그래?」 이부키는 즐거운 얼굴로 손에든 술을 병 채로 입에 대고 마셨다. 「크아─. 역시 쓰다. 난 너랑 달라서 쓴 건 딱 질색인데.」 「누가 뭐랬냐?」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가 생각해도 좀 엉뚱한 말을 내뱉은 것 같은 이부키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웃음기 지운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느껴지지? 꽤나 요란한 놈들이 잔뜩 온 거 같아.」 「어. 이거 전력으로 날뛰어도 되겠는데?」 「허세는.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 너만큼 강한 놈도 있어.」 몇 주 동안 마을을 노리던 몇몇의 요괴들을 상대하긴 했지만, 그 모두가 자신을 비롯해 켄에게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잡요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만월의 영향 탓인지 찾아온 요괴들은 격을 달리했다. 멀리서 풍겨오는 요력은 꽤나 강한 요괴의 것이고, 켄에 필적할 정도의 요괴의 것도 섞여 있었다. 이 요괴들과의 싸움을 앞두고, 켄에게 일부로 술을 권한 것은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셔두라고.」 「왜?」 켄은 아까부터 술을 권해오는 이부키가 귀찮았다. 안 마신다고 못 박았는데도 자꾸 권유를 해온다. 주점에서 들고 나온 술은 자신에게 마시게 하기 위해서였나? 만약, 이부키가 힘을 써서 마시게 만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마시고 싶지 않았다. 짜증이 드려난 얼굴로 완강히 거부를 해오는 켄과는 달리 이부키는 될 수 있으면 그가 자의로 술을 마셨으면 했다. 한 모금이라도 좋았다. 처음 그와 술을 했을 때의 기억대로라면 켄은 단 한잔만으로도 취할 만큼 주량이 형편없었으니까. 이부키가 켄에게 연신 술을 권해온 이유는 이랬다. 「넌 술에 취해 있을 때가 훨씬 더 세니까.」 켄과는 오늘날 까지 십여 번 넘게도 싸워 봤으나 역시,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리던 때에 비해 약했었다. 그도 그럴게 주점에서 보였던 귀화와 비교해 맨 정신일 때의 귀화는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도 되었다. 어쩌면 취기로 인해 이성이 날아가 있는 쪽이 오니로서의 순수한 폭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랑하던 검술은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이성이 없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그날 이부키에게 입혔던 상처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한 번 더, 주정부리는 너와 싸워보고 싶었는데.」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저 잡놈들에게 양보할 거니까. 마셔 둬.」 어차피 취한 상태의 그와 싸울 기회란 앞으로도 많으니, 만전의 상태로 만들어 놓는 편이 현명했다. 행여나 그가 오늘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기회란 영영 없어지고 마니까. 하지만, 그런 이부키의 심정을 모르는 켄은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거부했다. 「주정부리는 내가 더 세다니. 언어도단.」 검집에서 스르릉 하고 검을 뽑아낸 그가 서슬 퍼런 칼날을 찬찬히 훑어보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 검 한 자루가 나의 전부야.」 자신 있게 이를 드려내 보이는 그를 보며, 이부키는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똘추인 건 변함이 없구나.」 「똘추 보다는 미치광이라고 불러줬으면 하는데.」 「어느 쪽이건 욕이잖아? 그래, 소원대로 불러주지.」 하아. 숨을 크게 내뱉은 이부키는 고개를 들고, 밝고 거대한 만월을 바라다보며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자신 있게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죽지나 마, 미치광이 켄.」 서로 눈빛을 교환한 두 오니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였고, 어느새 마을 안 까지 침입한 무수한 요괴들이 달을 등진 채, 이부키와 켄 앞에 그 모습을 드려내고 있었다. * 수백에 달하는 요괴와 두 명의 오니. 천하의 오니라 할지라도 주변 일대를 장악하던 강한 요괴들이 전부 모여 있는 무리를 상대한다는 건 너무나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싸움의 양상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단신으로 수많은 요괴들을 압도하고 있는 오니의 선전으로 흘려갔다.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요괴의 군세에 맞서는 두 오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용감함 보다 투쟁심을, 이야기 속의 영웅이 아닌 영웅이 쓰러뜨려야 할 사악한 악귀가 되어 날뛰었다. 이부키와 켄은 피가 튀는 이 처절한 살육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만월의 밤 아래에 벌어지는 두 오니와 수백의 오니간의 싸움은 그 행방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런, 켄 녀석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어.」 너무 신나게 날뛰었던 탓일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부키의 근처엔 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는데. 그래야 진짜 위험한 녀석을 자기 선에서 처리 할 수가 있다. 켄이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나,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으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부키는 다시 켄이 보이는 지점 까지 몸을 옮기려 했지만, 당장 눈앞에 자신을 노려오는 요괴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거, 이놈들 다 없애기 전 까지는 꿈쩍도 못하겠군.'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던 요수의 목을 맨손으로 틀어서 찢은 이부키는 잠시 갈등을 하고는 이내 정했다는 듯이 눈에 불을 키고, 요력을 끌어 올렸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기운에 이부키 주변의 요괴들이 주춤 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밑에도 못 미치는 요괴들을 상대로 여태 본 실력을 숨기고 적당히 상대했던 그녀가 이제야 그 귀신의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주변의 공기가 이부키의 요력에 반응해 요동치기 시작했고, 무거운 사기에 요괴들의 몸이 점점 짓눌려 갔다. 요괴들은 이 강대한 대요괴의 힘에 전의를 상실 할 만 했으나, 만월에 취한 탓인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이를 들어 내고 있었다. 그 중 사이한 기운을 내뿜던 땅거미 요괴가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을 동원해 요력을 끌어 모으는 이부키에게 습격을 가해왔다. 분신들은 환술로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었기에 모두 본체와 같았다. 그 분신 하나하나가 아무리 작은 생채기라도 일격사 시킬 독을 지녔으며, 손톱을 통해 이부키를 중독 시킬 요량이었다. 본체 까지 합해 총 네 체의 땅거미 요괴의 분신들이 서로 협공을 펼치며 이부키를 덮쳤다. 무방비해 보이는 등을 향해 분신체 하나가 입으로 부터 거미줄을 토해냈다. 한번 걸려 들면 절대로 벗어 날 수 없다는 땅거미 요괴의 주박. 그걸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은 이부키는 끈적거리는 하얀 실타래를 뒤집어 쓴 채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어 양 옆으로 부터 다른 분신체 둘, 정면에서 본체가 치명적인 독을 머금은 손톱을 이부키에게 휘둘려왔다. 움직임도 봉쇄했고, 앞과 좌우 피할 수 없는 공격. 독이 몸속에 침입할 정도의 상처만 내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땅거미 요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허나. 툭. 날카로운 자신의 손톱이 이부키의 몸에 닿자마자 연약한 볏짚처럼 부러진 것이었다. 양 옆에서 공격해왔던 나머지 분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부키의 몸에 닿는 것과 동시에 투두둑하고 손쉽게 부러져 나갔다. 땅거미 요괴는 경악한 얼굴로 부러져버린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 봤다. 단단한 철과도 같은 거목도 넘어뜨리는 자신의 손톱이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이리도 간단히 부셔질 줄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땅거미 요괴는 간과했던 것이다. 진짜 오니의 힘을. 본심을 드려낸 이부키의 몸은 그 어떤 거목보다도 단단한 철광석과도 같은 금강불괴였고, 그녀를 묶어 둘 것이라 여겼던 거미줄도 그녀에게 있어 찐득하기만 한 불쾌한 실에 불과했다. 이부키는 자신의 몸을 감고 있던 거미줄을 기합을 넣는 것만으로 흔적도 없이 태워 없앴다. 그리고 이어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서는 자신을 공격해온 땅거미 요괴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꽤 재밌는 술법을 구사하는구나.」 「난 힘만 앞세운 머저리들과는 달라.」 비록, 자신의 습격이 실패로 돌아갔고 믿겨지지 않는 힘의 차를 느꼈지만, 땅거미 요괴는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수를 생각하며 부러진 손톱을 재생 시켰다. 하나의 분신은 분신 전 본체가 가진 힘의 절반 정도를 가진다. 그것이 본체를 포함해 4체. 전부 합치면 총 4배의 힘이 분산되어 있었다. 다만, 분신술 중엔 막대한 요력이 소모하지만 절만의 힘만 감소한 채 4명으로 분열된다는 점에서 분신술의 이점은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그 절반의 힘이 담겨진 거미줄로도 힘이 쌘 요괴를 포박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으나 상대는 진짜배기 오니. 그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서는 4체 모두의 힘이 필요했다. 땅거미 요괴는 재빨리 몸을 놀려 이부키의 주위를 맴돌며 주의를 분산 시켜갔다. 그러다 어느 시점을 기해 동시에 거미줄을 쏘아 쉽사리 벗어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땅거미의 작전은 펼쳐져 있던 이부키의 손바닥이 주먹으로 쥐어지는 것으로 시도도 못해보고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부키 주위를 맴돌던 본체와 분신들이 갑자기 한데 뭉쳐서 거대한 덩어리가 된 것이었다. 「으어억.. 이게 어찌된 거야?」 분신들과 뒤엉켜 덩어리가 되어 버린 땅거미 요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부키를 쏘아봤다. 「성가시니까 한데 모아놓은 것뿐이야.」 이부키가 대답을 들려주었고, 그것을 끝으로 말아 쥐고 있던 그녀의 주먹이 땅거미 요괴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질려졌다. 퍼엉 ─ ! 주먹을 내지름과 동시에 땅거미 요괴와 분신들은 거대한 폭탄이 되어 뼈와 살을 남기지 않고 사방으로 터져버렸다. 괴물 같은 패력. 그 어떤 요괴들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힘이 땅거미의 모습을 일순간에 지워버렸고, 주변의 요괴들은 그 광경을 자신의 두 동공에 똑똑히 새기고 있었다. 저것은 어느 요괴도 범접하기 힘든 절대적 위용을 자랑하는 신화적 괴물. 과거 스사노오의 손에 죽은 대재앙 야마타노오로치의 재래임이 분명했다. 압도적인 강함은 곧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공포가 되어 요괴들의 마음을 어둡게 잠식해 갔다. 대치중인 오니는 왜소한 체구의 소녀이지만, 누구보다도 거대했고,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가진 힘에 이끌리고 있었다. 요괴들은 눈앞의 오니를 경외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만월의 달빛에 취해 분수에 맞지 않게 굴던 건방진 요괴들이 눈앞의 오니에게 선 듯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행색이 되어버렸다. 요괴들은 더는 이부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꼬리를 말아버린 개처럼 긴장한 상태로 설설 길 뿐이었다. 허나, 이러한 태도 변화는 목숨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일격에 땅거미 요괴를 지워버렸던 그 패력이 이번엔 자신들에게 향해졌기 때문이었다. 쿠아앙 ─ ! 천지를 갈라놓을 듯한 파공음이 이부키의 주먹으로 부터 터져 나왔다. 그 앞을 막고 있던 수많은 요괴들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몸에 커다란 구멍을 남긴 채 죽어버렸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권압에 가까이 있던 요괴들마저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져 간다. 그 이부키의 패력이 담긴 소리는 멀리 떨어져 있던 켄의 귀에도 생생하게 전해져갔다. 전신이 빨갛고, 흉악한 모습으로 귀화해 있던 켄은 멀리서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음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저것은 틀림없이 이부키가 낸 소리다. 그 의심 없는 믿음이 그의 심장을 쿵쾅하고 세게 달음 박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한 격이 다른 존재. 켄은 이부키야 말로 최강의 호적수이며 언젠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라 생각했다. 그런 감상에 젖어있는 그에게 대적 중이던 요괴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내 앞에서 한 눈 팔지 마라!」 켄과 대적하던 요괴는 강한 불만을 내비치며 큰소리로 켄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요괴는 자신과의 진검승부 도중에 한 눈을 판 켄이 용서되지 않았고, 당장에라도 사지를 찢어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고 싶어 했다. 요괴는 육중한 몸을 가진 거대한 뉴도(入道)로 양손엔 둥근 철 바퀴를 들고 있었다. 뉴도는 이 요괴무리 중에서도 특출 나게 강한 존재였다. 그 뉴도가 육중한 몸을 놀려 켄을 향해 철 바퀴를 휘둘려 왔다. 후우웅! 100근은 너끈히 나갈 철 바퀴가 공기를 갈라놓았다. 그 둔탁한 일격은 켄의 머리를 노려왔으나 카아앙! 얄팍한 검 한 자루에 막히고 말았다. 켄의 검은 무거운 철 바퀴에 닿자마자 부러질 만도 한데, 그의 요력을 휘감고 있어서인지 조금의 균혈도 없이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타앙! 완력으로 철 바퀴를 쳐낸 켄은 바로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대각선을 내리 그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게 들어간 쳐올려 베기. 뉴도의 몸이 목 언저리부터 허리까지 점점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피를 뿜으며 양단 되 버렸다.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절단 되고 나서야 이해한 뉴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했고, 켄은 그런 뉴도를 차갑게 내려다 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역시, 네놈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만월의 영향 아래에서 달아오른 호승심은 이걸로는 만족되지 않는다. 켄은 이부키라는 괴물을 알아버린 이상 방금 베어버린 뉴도 정도의 요괴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좀 더 강한 상대와 싸워보고 싶다. 그런 욕망을 채워줄 요괴들은 흔하지 않았고, 적어도 그가 베어 넘긴 요괴들 중엔 존재하지 않았다. 강인한 오니의 육체와 극한까지 단련된 검술은 이 장소에서 이부키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적수라 할 만한 상대가 있다면, 주점 앞에서 이부키가 켄에게 일러두었던 켄 만큼이나 강하다는 요괴. 아직 두 오니 앞에 모습을 드려내지 않고 있는 녀석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요괴들이 두 오니에 의해 그 수가 급격히 줄어, 이제 수십 명만 남기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마을에 침범해 두 오니를 습격한 요괴 무리들 중에서 가장 강한 요력을 지닌 요괴가 때가 되었음을 알고, 켄 앞에 그 광포한 모습을 여실 없이 드려내 보였다. 흔히 낫족제비(카마이타치)라 불리는 날카롭고 거대한 낫을 지닌 요수. 전신이 하얗고, 머리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백발에 양손의 낫만큼이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요괴였다. 모습을 드려내자 마자, 행동을 개시한 낫족제비는 눈이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순식간에 켄의 뒤를 잡아버렸고, 켄이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등에는 대각선으로 두개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이어서 그는 켄의 허리 부근과 가슴 쪽에도 두 차례 새빨간 선을 새겨 넣었다. 켄은 너무도 날렵한 낫족제비의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자세를 다잡았다. 낫족제비의 요력은 켄을 상회했고, 그 움직임 또한 켄 보다 날렵했다. 그러나 켄에게는 그 불리함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는 검술이 있다. 순수 강함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켄에게는 그 정도 강함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켄의 진정한 강함은 오니로서의 패력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검술. 나약한 인간들이 무기에 의존하여 단련했던 요괴답지 않은 무예(武藝)였다. 낫족제비가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엄청난 속도로 연달아 얕은 상처를 새기고 있을 때, 켄은 정신을 집중했다. 놈은 자신이 흐트러진 그 순간만을 노리고 숨통을 끊어 올 것이다. 낫에서 부터 발생되 나오는 칼바람이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생채기를 만들어 넣고 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틈을 노리고 가해오는 직접적인 낫 공격이 단단한 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단단한 오니의 몸도 갈라버리는 낫족제비의 낫은 켄의 자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관절만을 노렸으나 그럴 때 마다 켄의 검에 의해 막히기 일쑤였다. 칼바람은 무방비하게 허용하고 있으나, 큰 피해를 입힐 공격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지친건지, 아니면 다른 수를 떠올린 것인지 모르나 낫족제비의 움직임이 돌연 멈추었다. 이대로면 켄의 자세가 무너지기 이전에 자신의 움직임이 간파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낫족제비는 자신의 전 요력을 끌어올리며 켄의 모습을 살의의 눈으로 훑었다. 「소문대로 강하군.」 「음.. 그래? 칭찬 고맙다.」 상대의 말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켄은 검은 허리에 붙이고는 발도의 자세를 취했다. 저쪽은 전 힘을 개방하고 있고, 자신도 이 일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틀림없이 이번 합에 결판이 난다. 아까까지만 해도 간에 기별도 안가는 송사리 요괴들만 베어 넘겼던 켄은 낫족제비의 강함에 만족스러워 하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제대로 된 상대여서 고마워!」 「미치광이인 것도 소문대로군. 널 죽일 상대에게 고맙단 말 마라!」 낫족제비의 모습이 켄의 눈앞으로 부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대신 주변을 쓸어버리는 강한 칼바람이 일어 관계없던 요괴들마저 말려들게 만들었고, 몸을 양단하는 낫족제비의 낫이 켄의 코앞에서 돌연 휘둘려져 왔다. 절대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낫족제비의 베기. 아직 검을 휘두르지 않은 켄은 막을 수조차 없는 공격이었다. 이대로 켄의 몸이 양단되는 건 시간문제. 낫족제비의 전력이 담긴 낫이 켄의 어깨와 가슴을 양단해 버리기 직전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앞으로 몸을 뺀 켄의 발도가 일섬(一閃)으로 행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낫족제비의 낫과 켄의 발도. 그들의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 졌다. 그 혼신의 일격을 끝마친 켄과 낫족제비가 상체를 교차시켜 서로 등을 진 자세를 취했고,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흘렸다. 어느 쪽이 이긴 것인지는 그 결착은 바로 지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등을 진 상태로 쭈욱 멈춰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 되어서야 승패가 드려났다. 먼저 쓰러진 것은 가로로 몸이 양단된 낫족제비였다. 낫족제비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그와의 전심전력의 승부에게 이긴 켄은 상체를 일으키려다 돌연 비틀거리다 땅에 무릎을 찧었고, 양 어깨로 부터 붉은 피의 분수를 치솟아 올랐다. 낫족제비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깊게 파여진 상처로 부터 피가 쉴 새 없이 흘려 나왔다. 재생은 쉬이 되지 않았고, 이때다 싶어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요괴들이 있었다. 켄은 자신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오는 요괴들을 젖 먹던 힘을 써서 단칼에 베어내었다. 켄의 상태는 그대로 혼수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심각했으나, 그는 계속 싸워나갔다.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밝게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최후의 최후까지 한 명의 요괴라도 더 베어나갔다. 낫족제비에게 입은 상처로 인해 자신의 생명은 곧 끝이 난다. 그럼에도 켄은 결코, 두렵다 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부키와 겨뤄보지 못한다는 분함조차도 가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요괴와 죽기 직전까지 싸워볼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뿐이었다. 다 죽어가는 행색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엔 비장함이 넘쳐 흘렸다. 그 몸짓 하나하나가 처절했으며, 발악이었다. 건들면 바스러져 버릴 만큼 위태로웠으나 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요괴들을 베어 넘길 뿐인 검귀. 켄은 죽어가면서도 강한 요괴였다. * 만월 아래 벌어졌던 장대한 싸움이 오니의 승리로 그 끝을 고했다. 죽은 요괴들은 수백에 달했고, 그나마 살아서 도망친 요괴들은 불과 십여 명에 불과했다. 마을은 죽은 요괴들의 시체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땅을 뒤덮은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 껴 있는 켄의 몸뚱어리. 시체에 기대어 누워있는 그의 몸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이 남아있었다. 켄은 자신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감겨져오는 눈을 간신히 위로 쳐 올렸다. 「꼴사납게 너와는 더 이상 승부를 볼 수 없게 되었어.」 「그런 말 말고, 한잔 받아.」 허탈하게 웃음 짓는 켄에게 이부키는 잔에다 술을 따라 건넸다. 그러나 켄은 고개를 저으며 이부키의 잔을 거부했다. 「너 이런 때에도 고집을!」 「고집 부려 미안하군. 하지만, 남자가.. 쿨럭!」 켄의 입으로 부터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켄은 동요 없이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말은.. 죽어서라도 지켜.」 「그건 어리석은 아집이야.」 질렸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 이부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으로 한잔 하는 건 별개인 거잖아.」 「... 마지막이니까. 안 마실 거라고.」 「왜?」 「벌써 잊은 거야? 나 한잔만 마셔도 제정신이 아니거든... 그냥 눈감기 직전까지 제정신이고 싶어.」 「.. 그래? 그거 참 아쉽네. 넌 술을 좋아하는 거 치곤 너무 약하니 말이야.」 「듣고 보니. 속상하군.」 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지만, 아쉬워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이부키는 쓰게 웃으며 술이 따라진 잔을 자신의 입으로 옮겼다. 꿀꺽하고 이부키의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지만, 요구하지 않았다. 이부키가 맛있게 마셔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술을 마신 이부키와 임종이 다가오는 켄의 모습은 즐거워 보이면서도 애잔했다. 이제 떠나보내야 할 친구를 바라보는 이부키의 눈엔 슬픔이 가득했다. 한 때는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흥미를 가진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바뀌면 죽일 생각 만만이었다. 매일 같이 자신에게 승산도 없는 싸움을 걸어오는 그가 귀찮기만 했고, 그러면서도 거부 없이 상대를 해줬다. 그가 더 이상 주정을 부리던 때의 전력이 아니었기에 흥미를 잃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상대를 해줬다. 그가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술도 여전히 썼고, 그 쓴 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왜 쓴 맛이 좋다는 건지. 이부키는 술을 또 한잔 들이키는 것으로 깨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헛소리나 내뱉던 켄이. 이 미치광이 녀석이 자신에겐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는 사실을. 술을 마시고 나서 쳐다본 켄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더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이부키는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너와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술이란 게 좋아졌어.」 이미 죽어있는 그가 그 말을 들었을 리 없겠지만,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이부키에게 화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쪼로로. 이부키가 잔에 술을 따랐다. 이 첫잔은 자신에게 술 맛을 알게 해준 친구의 넋을 기리는 잔. 꿀꺽 단숨에 삼키고는 또 한잔 따른다. 이 두잔 째는 술을 좋아하게 된 자신을 위해. 그 잔도 바로 비워버리고서 세잔 째를 채웠다. 이 세잔 째는─ ------------------------------------------------ 잔속에서 넘실거리는 달을 내려다보던 스이카가 쾌활하게 웃으며 잔을 쳐들었다. 「맛 좋은 술을 위해!」 그날 밤도 오늘처럼 유난히 달이 밝고 컸었다. 그런 만큼 잔에 담겨진 달도 그 영롱함을 잃지 않고 밝은 빛을 냈다. 그것을 삼키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 나간다. 이부키 스이카는 술과 함께 달을 삼켰다. <달을 삼키다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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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이 에피소드도 끝입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대략 유우기와 서로 투닥거리는 덤 앤 더머와 같은 전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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