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풍기는 PvPvE와 섹슈얼리티, ‘뱀피르’의 첫인상
뱀파이어. 어둠 속에서 남의 피를 빨고 감염시키는 위협성과 창백한 미모로 귀족적인 삶과 영생을 누리는 고고한 일면이 공존하는 존재. 때문에 인기 소설 ‘트와일라잇’처럼 뱀파이어를 퇴치해야 할 괴물이 아닌 인류의 비밀스러운 이웃 정도로 묘사하는 작품도 적잖다. 다만 정석적인 하이 판타지 RPG가 먼저 자리잡은 국내서 뱀파이어의 취급은 늘 중, 상급 몬스터에 머물렀다. 간혹 뱀파이어를 플레이어블로 제공하더라도 대척점인 헌터와 함께 주어지기 마련. 그런데 여기 뱀파이어가 단독 주연을 맡은 독특한 게임이 나왔다.
오는 26일부터 정식 서비스될 ‘뱀피르(Vampir)’는 국내 모바일 MMORPG 유행을 선도한 ‘리니지 2 레볼루션’ 제작진의 야심 찬 신작이다. 특히 ‘리니지 2 레볼루션’ 개발 및 운영을 총괄했던 넷마블네오 한기현 PD가 재차 지휘봉을 잡아 이 장르의 이정표를 제시한다는 의미가 크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휴먼, 엘프 등 선한 종족들 중심의 하이 판타지 ‘리니지’와 정반대로 오직 뱀파이어가 플레이어블인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택했다는 것. 과연 MMORPG 문법 안에서 어떻게 뱀파이어를 표현했을지, 직접 ‘뱀피르’를 즐기며 살펴봤다.
29일 진행된 '뱀피르' 쇼케이스. 미디어 시연도 같은 날이었다
뱀파이어의, 뱀파이어에 의한, 뱀파이어를 위한
‘뱀피르’의 캐릭터 클래스는 그림리퍼, 블러드스테인, 카니지, 바이퍼까지 4종. 거칠게 소개하면 차례대로 근접 딜러, 검방 탱커, 원거리 딜러, 법사인데 실은 그리 단순치 않다. 한기현 PD에 따르면 뱀파이어 컨셉을 헤치지 않도록 모든 클래스를 딜러로 설계했다고. 즉 대규모 PvP처럼 여럿이 모였을 때 각자 더 적합한 역할은 있을지 몰라도 일단 전부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지녔다. 외형 커스터마이징은 체형, 피부, 눈동자, 문신, 음성 등 꽤 많은 옵션이 제공되나 정체가 뱀파이어인지라 얄쌍하고 파리한 틀 자체를 깰 순 없더라.
좀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가장 먼저 그림리퍼는 큼직한 낫을 휘두르는 암살자다. 은신, 순간이동 스킬을 모두 보유해 치명적인 기습에 능하다. 블러드스테인은 우수한 방어력과 더불어 광전사란 설정이라 스스로 살갗을 찢고 피의 검을 벼려낸다. 쌍권총, 저격총 등 여러 화기를 활용하는 카니지는 일정 거리 밖이라면 전천후로 활약한다. 바이퍼는 독과 저주는 물론 소환수 스킬을 지였으며 공역 피해를 누적, 대군 통제 역시 그의 특기다. 공통 사항으로 뱀파이어답게 피를 흩뿌리든 피로 뭘 만들든 붉은 선혈 이펙트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모든 클래스가 딜러, 라는 경파한 기조로 설계됐다
성인향 게임답게, 뭐라 적기 힘든 부위까지 커스터마이징 가능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 선지자 라즈비라는 NPC가 주인공을 맞이한다. 정황상 한때 인간이었던 주인공이 죽거나 크게 다친 후 라즈비에 의해 뱀파이어로 부활한 모양.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로 당황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던 주인공은 우연히 도적들로부터 한 소녀를 구해준다. 이러한 전개서 작중 세계의 질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공개된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논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고관대작이나 종교계 같은 권력층이 제 역할을 못하니 뱀파이어들이 영웅-최소한 자유인-에 가깝다는 식.
널리 퍼진 통념처럼 ‘뱀피르’의 뱀파이어도 햇볕을 견디지 못한다. 다만 피의 관문이 활성화된 지역은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피의 관문을 둘러싼 싸움에 휘말려 크르브나, 포에나리, 키셀 같은 영지를 오가는 게 성장 단계서의 메인 스토리인 듯하다. 살짝 개발자 편의적인 설정이긴 해도 덕분에 모든 배경이 어두컴컴한, 상상만으로 눈이 쑤시는 상황은 면했으니. 실제 게임 속 풍광은 언리얼 5 엔진에 힘입어 대작이란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그저 현장 시연이 PC 빌드로 진행됐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겠다.
보통 황금 갑옷인 쪽이 플레이어블인데, 여기서는 반대가 됐다
UE5에 힘입어 고딕 호러풍으로 구현된 뱀파이어의 영지, 네스트
딱 봐도 하드코어 게임? 의외로 유저 친화적이다
원활한 시연을 위해 마련된 고레벨 캐릭터로 전환 후 메인 UI를 띄웠을 때 감상은 여러 의미로 굉장히 낯익다는 거다. ‘뱀피르’는 어느덧 장르 문법처럼 굳어진 국산 모바일 MMORPG 특유의 UI/UX, 시스템 및 콘텐츠 구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물론 세피라, 피의 계율 등 세계관과 관련된 명칭으로 대체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독창적일 정도는 아니다. 넷마블부터 ‘리니지 2 레볼루션’ 제작진의 신작임을 내세우는 중이니 타겟 유저층은 명확할 터.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단순 열거식 콘텐츠 소개에 너무 지면을 할애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뱀피르’가 눈길을 끄는 첫번째 차별점은 물론 상술한 뱀파이어라는 소재,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다. 마냥 마르고 예쁜데 혈마법을 다룬다고 뱀파이어라 와닿는 게 아니니까. 이에 본작은 적 체력이 일정 비율 이하로 떨어졌을 때 단숨에 물어뜯는 일종의 처형 시스템, 흡혈을 도입했다. PvE, PvP 양쪽 모두에서 발동 가능한 흡혈 스킬은 그 자체로 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할 뿐 아니라 얼마간 강력한 아드레날린 버프를 활성화시킨다. 이 버프가 끊기지 않도록 캐릭터 세팅을 조정하는 게 ‘뱀피르’ 고수가 되는 요령이라고.
기존 MMORPG의 문법을 부정하기보다 계승, 발전시키려는 시도
흡혈 스킬을 통한 아드레날린 버프 획득, 유지가 사냥의 핵심이다
PvPvE 전장인 게헨나 역시 뱀파이어하면 떠오르는 위협성과 MMORPG 특유의 경쟁 콘텐츠가 적절히 융합된 사례다. 거대한 사냥터 곳곳에 필드 보스가 도사린 게헨나는 효율적인 파밍을 위한 장소일 뿐 아니라 유저간 공격이 허용되는 PK존이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야 필드 보스에 홀로 맞설 수 없으니 파티나 길드 단위로 도전할 텐데, 이때 곧잘 다른 그룹과 마찰이 발생할 터다. 금번 시연의 경우 그만한 머릿수가 되지 않았음에도 보스를 잡다 말고 PK가 벌어졌다. 추후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면 훨씬 열띤 쟁탈전이 기대된다.
이렇듯 캐릭터와 콘텐츠 모두 소위 ‘쎈’ 이미지를 내세우니 본작이 무슨 하드코어 게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실 ‘뱀피르’는 한기현 PD가 여지껏 MMORPG를 개발 및 운영하며 느낀 뭇 유저의 부담을 덜어주려 고민한 결과다. 캐릭터가 일정 수준 이상 크려면 PvP가 반강제되는 여느 MMORPG와 달리 ‘뱀피르’는 경쟁 선호/비선호 유저의 동선을 아예 나눴다. 거기다 무과금 유저는 거래소를 통해서나 좀 만져볼 유료 재화, 다이아가 필드 플레이만으로 수급된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밝히지 않았으나 섭섭지 않을 양이라는 모양.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열띤 쟁탈전의 무대, PvPvE 콘텐츠 게헨나
살짝 위험하지 싶은 쌀… 광고, 실제로 다이아 파밍이 가능하다고
보기 드문 성인향, 포화 장르에도 새 바람 불까
솔직히 필자가 ‘뱀피르’에 대해 가장 인상 깊은 바는 데모 시연보다 회장 내 대형 화면으로 감상한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웹에도 올려놔 기사로 소개할 수 있는데, 머잖아 영상이 잘린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듯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게임이 못났다는 게 아니다. 되려 넷마블 같은 대기업이 무언의 금기를 깨고 이처럼 강렬한 성인향 콘텐츠를 뽑아낸 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세계적으로 보면 선혈이 낭자하는 다크 판타지쯤 차고 넘치지만-되려 하이 판타지가 귀할 정도- 국산 모바일 MMORPG에 새 바람인 것도 사실이니까.
다만 이미 국내 시장에 MMORPG가 포화 지경이고 넷마블 스스로도 작년부터 ‘아스달 연대기’, ‘레이븐 2’, ‘RF 온라인 넥스트’를 연달아 낸 바 있다. ‘뱀피르’가 구태여 도발적인 소재를 택한 게 자기잠식을 피하려는 무리수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장르 향유층이 한정된 가운데 신작이 계속 투입되면 사측도 힘들겠지만 무엇보다 유저들이 느끼는 부담이 막심하다. 따라서 필드 플레이를 통한 다이아 파밍이란 용단을 내렸듯, 단기적 수익보다 장기적 경험과 가치 보존이 우선되는 유저 친화성 높은 운영 기조를 보여주길 바라 마지않는다.
시청 연령 제한이 걸려있다. '뱀피르' 유튜브 채널서 감상하시라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