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 S. 존슨
아동 납치 미수라는 터무니없는 중범죄로도 놀랄 일인데, 그 마수의 대상이 다름아닌 루시라는 것을 알게 된 알베르는 문제의 범인이 긴급 체포된 이후에도 한참을 고심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분명 다음에도 일어날 것이고, 그 다음에도 일어날 것이었다. 그렇다면 암흑 날개의 핵심 간부진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상대는 자신도 그 꿍꿍잇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리스'. 설령 암흑 날개를 완전히 박살낸다고해도 그녀가 잡히지 않고 활개치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성공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그런 상황에서 알베르는 암흑 날개 사냥에 앞서 암흑 날개의 새로운 중핵이 되어가고 있는 리스를 속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냈다. 성공의 확률은 장담할 수 없지만, 교활한 여우를 꾀어내어 사냥하기 위해서는 때론 극단적인 수를 동원할 필요도 있었고, 그렇기에 알베르는 루샬카가 머물고 있는 어느 건물을 찾아간 상황이었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신분을 얻기 전에는 가택 연금된 상황이나 다름없어 답답해하던 루샬카 입장에선 유일한 손님이나 다름없는 알베르가 꺼낸 말에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더러 그 여자애를 대신해서 죽어달라? 언제는 삶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더니."
"원래대로라면 그러고 싶었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한 약속을 지키려면 시간이 예상 외로 많이 걸릴 것 같게 되어서 말이야."
그 말을 듣는 루샬카는 알베르가 자신을 배신한 것 같아 영 껄끄러웠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구석도 있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몸담았던 암흑 날개가 이제는 여자 아이를 납치하는 인신매매단 같은 것으로 전락한 것 같아 약간의 불쾌함마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이는 중요한 아이야. 만약 그 애가 암흑 날개의 손에 떨어진다면, 진짜로 그 먹을 수 있는 신이 너를 산채로 잡아먹을거야. 그런 건 원치 않겠지?"
"아아... 이제와서 나더러 죽어달라니. 살고 싶은 마음이 막 들던 차에 너무한 거 아니야?"
여러모로 다소 불쾌했지만, 알베르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둠의 신이 다시 한 번 돌아와 자신을 벌레처럼 짓밟아버릴 것이 뻔하다는 의미였으니 그 어둠의 신에게 엿을 날릴 수만 있다면 그녀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는 수 없네. 그 애 신상 정보를 좀 가르쳐줘봐."
코스프레라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미 정해진 캐릭터의 틀에 끼워넣으며 그 틀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루샬카는 알베르가 말한 소녀, 루시에 관한 간단한 신상 정보를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
"루샬카 쨩이 최대한 루시에 가깝게 위장하면, 내가 나머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알베르는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언어로 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며 루샬카의 몸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 당사자인 루샬카는 무언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무형의 무언가가 자신의 몸으로 스며들어오기 시작하는 기묘한 느낌에 왠지 모를 이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거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루샬카 쨩의 고생에 대한 보상은 꼭 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야할텐데 말이야..."
어둠의 신의 침략으로 갈 곳을 잃은 성녀들의 영혼 중 루시의 몸에 깃든 '이브'의 영혼과 가장 유사한 에너지와 기운을 지닌 성녀의 영혼을 루샬카의 몸에 주입한 알베르는 이걸로라도 그 교활한 여우를 자신이 죽을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죽음을 피하기보다 죄를 삼가는 것이 더 낫다. - 토마스 아 켐피스
비슷한 시각, 카게야마는 코가라스마루에게 의문스러운 정보를 건내받고 있었다. 일전의 가짜 정보에 속아 닌자로서 큰 수치를 느꼈던 코가라스마루는 표정만 봐도 전에 비해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선명히 보였지만, 그런 만큼 그가 건내준 정보는 카게야마 입장에선 정말로 생각치도 못 했던 소득이었다.
"암흑 날개의 진정한 대장로에 관한 정보..."
"그렇다네... 저번 일로 동지들에게 적잖게 실례가 되었던 것 같아 큰 위험을 무릅쓰고서 건져온 자료들이네. 자네가 이 정보들을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니야. 그 얼굴만 봐도 굉장히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이 눈에 보인다네. 자네는 우선 좀 쉬고 있게."
"으음... 그럼 나는 조금... 일찍 실례하지."
'인법 그림자 흐트리기'로 모습을 감춘 코가라스마루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카게야마는 그가 건내준 기밀 자료들을 하나하나 꺼내 확인해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 내용이 심상찮았다.
"샤키르... 나셸... SEM 사의 현 회장과 친척 관계였다고...?"
많은 부분이 기밀 처리된 인적 사항이었음에도 그 SEM 사의 회장과 친척 관계라는 정보에 카게야마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2년 전의 영웅들을 뒤에서 서포트해주던 그의 친척이 암흑 날개의 수장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을 어디까지 신용해야할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표면 상으로는 SEM 사의 계열사인 '레나투스, 크로노스 & 엔텔레케이아', 약칭 RChE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는 정보도 같이 포함되어있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대담할 정도로 자기 친척을 기만해가며 암흑 날개를 이끌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 다음으로 코가라스마루가 건낸 자료는 바로 사진 자료. 명문가의 자제 오벨과 그 친척인 샤키르가 함께 찍힌 사진으로, 명문 사립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지 며칠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사진 자료였다. 코가라스마루가 첨부한 추신에는 '샤키르 나셸은 자신의 사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이 어렵게 구한 유일한 사진 자료'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철저할 정도로 자신에 관한 정보를 숨기고 다닌다는 말이군..."
그리고 다음으로 카게야마가 살핀 자료는 바로 RChE 사의 회계 내역이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아무런 이상도 없어보이는 자료였지만, 코가라스마루가 함께 첨부한 자료를 살펴보며 다시 확인해보니 페이퍼 컴퍼니인 "슐라그베르크 컴퍼니"로 RChE 사의 자금이 암암리에 흘러들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암흑 날개와 애프터라이프의 활동 자금을 조달했단 말인가... 그것도 오벨 회장의 눈을 속여가며..."
이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카게야마로선 암흑 날개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셈이었다. 그러나 일전의 사례도 있어 이전에 비하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카게야마는 이번에는 함께 첨부된 장로들의 인적 자료도 같이 확인하고 있었다. 은퇴 군인이며 현재는 여러 군사 업체 인사들과 연줄이 있는 자바트 장로, 대형 은행의 지점장을 맡고 있으며 대장로와 함께 암흑 날개의 자금원을 맡고 있는 르보리스 장로, 고급 의류 브랜드의 고위직 인사이며 암흑 날개에서도 가장 많은 연줄을 지녔지만 글레이브 하우스 테러를 기점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아즈라 여장로, 표면상으로는 고급 패션 모델을 맡고 있지만 여러 정재계 인사들과 여러 이익 단체의 대표들을 자기 치맛자락 아래에 두고 있는 바르타 여장로, 그리고 RChE 사와 거래 중이며 암흑 날개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의 돈세탁을 맡고 있는 페이퍼 컴퍼니인 "슐라그베르크 컴퍼니"의 공동 창업자이며 동시에 뒤에서는 '흥신소' 사업을 벌여 여러 스캔들과 비밀들을 쥐고 있는 펠라니스 형제 등 암흑 날개의 마수가 생각 이상으로 크게 뻗쳐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미끼였던 루샬카조차 유명 코스튬 플레이어이면서, 여러 공직자들을 연줄 겸 빽으로 삼고 있었단 말인가... 무서운 녀석들이었군."
비교적 최근에 합류했던 리스에 대한 자료는 없었으나, 리스는 애초에 이 쪽 사람이 맞는지도 의문인 수상한 인물이었기에 그 부분은 알베르 등의 인물들에게 맡긴 카게야마는 코가라스마루가 어렵게 수집한 자료들을 하샤신 등의 눈을 피해 시큐리티 포스에게 전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확고한 의지로써 스스로를 율하고 인류를 지도하는 왕인 만큼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운명의 신비를 깨치고 있는 것으로 해서 만인의 숭앙을 받는다.
"일은 잘 풀리십니까, 리스 여장로."
"이런 일은 길게 봐야하는 거 아닐까요, 샤키르 대장로?"
루나 시티의 비밀 거처. 리스와 샤키르의 단 둘만이 남은 비밀 거처는 두 사람이 내는 목소리 이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비록 제 생각대로 잘 풀리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별 일이 없는 한 우리... 정확히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풀리겠죠."
그렇게 말하는 리스 여장로는 상급자마냥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건방지게 앉아있었고, 오히려 샤키르 대장로가 자신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리스, 당신의 그 끈기와 집념에는 언제나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암흑 날개조차, 당신에게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테지요. 그것도 좋습니다. 저조차 당신의 눈에는 그저 고기방패에 지나지 않을테지요. 그것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당신에게 깊이 반했습니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그거 참 기묘한 소리네요. 절 사랑한다라..."
사랑이라는 개념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리스였지만 샤키르 대장로의 눈에 서린 광신과 맹목은 그런 리스조차도 나름의 흥미를 안겨줄 만한 요소였다.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발에 키스라도 해주시겠어요?"
"기꺼이."
그리고 샤키르 대장로가 진짜로 자신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것을 본 리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하하하...! 진짜로 해버렸네요? 정말 괜찮은 거에요?"
"새로운 어둠의 신을 위해 이미 모든 걸 내던진 몸이니, 이젠 뭐가 되어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 말에 리스는 왠지 모를 황홀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다 알텐데도 그런 자신을 말리기는 커녕, 도리어 그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겠다는 샤키르 대장로의 광신에 지난 시간 동안 한 번도 못 느꼈던 황홀감을 처음으로 느낀 리스는 샤키르 대장로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를 가증스럽고도 포근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대장로의 목숨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때도 제 말대로 해주실건가요?"
"목숨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드리지요. 그게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그거 정말 멋지네요. 그럼 샤키르 대장로, 아까 한 말이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오늘부터 저를 사랑해주시겠어요?"
"저는 리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죽으라면 죽어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말에 리스는 어둠의 신의 침략 이전에 그 누구도 사랑한 적없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기애로 가득한 리스의 마음에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록 그도 곧 리스의 자기애에 먹혀 사라지겠지만, 그것도 좋다는 광기마저 내비치는 샤키르의 모습에 리스는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죽진 마요, 샤키르 대장로. 나중에 당신에게 나를 위해 죽어달라고 말할 때가 올테니, 그 때 죽어주면 되거든요."
"그 때까진 대장로로서, 혹은 당신의 연인으로서, 혹은 당신의 산제물로서 당신과 함께해드리지요."
"그거 참 멋진 말이네요."
진심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목숨도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취하겠지만, 그것도 좋다며 자신과 함께 하려는, 보통 사람의 감성을 이미 한 참은 벗어난 샤키르의 광적인 모습에 다소 터무니없을지언정 리스는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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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슬쩍 써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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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폭탄을 선물했으니(??) 그걸 터트리든 해체하든 그건 자유입니다(?????) | 23.04.22 11: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