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원한 냉기가 피부를 감싸온다.
병실에 에어컨을 틀어놓은지 꽤 된 모양이었다.
적당한 쾌적함에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한 침대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아린이 다소곳이 앉아 독서를 즐기던 참이었다. 고개를 희미하게 젖히고 다시 내리는 것으로 보아 한 번 읽어내린 문장을 또다시 곱씹어보는 듯 하다.
그냥 책을 읽을 뿐인 그 모습에 유진의 기분은 어쩐지 복잡해져온다.
대뜸 놀아달라고 부탁하던 첫 병문안 당시를 떠올렸다.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그녀가, 어느 샌가 알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마음을 놓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더이상 와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쓸쓸함을 느껴야 할까.
그런 고민을 그녀는 알아줄리는 없으리라.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조차 못 알아본 모양이었지만.
순간 장난기가 도진 유진은 살금살금 다가가 짧게 한 마디 건넨다.
"왁!"
"어!? …어, 왔어?"
정말로 이제 막 눈치를 챘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인사하는 아린.
표지를 보아하니, 이번에 읽던 것은 학교 도서관에서 얼핏 본 적이 있는 듯 없는 듯 한 어린이용 소설이었다.
"못보던 책이네."
"읽고 싶다고 하니까 사주셨어."
"퇴원하고 도서실에서 보면 되잖아. 어차피 얼마 안 남았는데."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이 애는 이렇게나 책을 좋아하는구나. 그것이 병문안을 해오면서 깨달은 아린에 대한 사실이었다.
가끔씩 저 아이를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유진에게는 있었다. 글을 잘 읽는다면 적어도 국어 점수 만큼은 높을 테니까.
평소부터 학교 성적이 높던 비결도 저 취미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재미있어?"
"응. 내용은 들어보긴 했는데, 역시 직접 보는 것만 못하네."
"그래?"
유진의 반응은 시큰둥.
문제집이나 교과서처럼 의무적으로 봐야하는 것도, 만화책처럼 눈요기라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책이란, 유진에게 흰 종이와 검은 글자의 행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성스럽게 그려진 삽화가 실려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진이 독서에 몰입하게 만들기는 역부족이리라.
"얼마나 재미있길래?"
"현실에 살던 주인공이 어쩌다 다른 세계로 간다고 생각해봐. 거기서 말하는 동물 친구들이랑 동료를 맺어서 마법사를 무찌르고 왕까지 되는 거야.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거지."
말을 하던 도중에 뜸을 들이던 그녀는, '현실'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려는 듯 잠시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크림색에 가까운 하얀 천장과 벽. 그리고 창문과 커튼, 서랍과 텔레비전 등등.
그녀가 며칠째 누워있는 병실의 풍경은 크게 바뀐 것이 없어보였다. 환자 몇 명이 오고갔을 테지만 적어도 병실 자체만큼은 아직 바뀔 이유가 없다.
여전히 유리창을 통해 여름 햇살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너도 재미있게 볼 것 같은데."
"글쎄다."
"아쉽네."
그런 내용의 판타지 장르 만화를 이미 적지 않게 접해온 그였지만, 적어도 그녀가 보고 있는 책은 그런것들과는 분위기가 다소 달라보였다.
지금 막 들은 내용대로라면 만화 내용과도 별 차이가 없을 텐데, 어째서 자신은 흥미가 동하지 않는 것일까.
적어도 텔레비전도 켜놓지 않은 채 열중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게 재미있는 걸 한창 읽고 있는데 내가 끼어들어버린 거네?"
"그렇지?"
"그래그래.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고 있다. 괜히 자신이 와서 방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시 지금의 자신은 그녀에게 필요없어진 것은 아닐까. 시덥잖은 고민이라 생각하면서도 유진은 묘하게 찝찝해진다.
이왕 문안 선물로 책을 줘볼까 하는 생각도 따랐지만, 뭘 줘야 좋아할지 고민하며 미루다 보니 결국 고사하고 말았다. 어차피 본인에게 좋은 책을 가려낼 만한 눈은 없으니까.
대신에 유진은, 이번에도 평소처럼 하던 일과를 제안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번엔 듀얼 못하겠다는 거지?"
"글쎄, 음……. 그렇게 되려나…."
듀얼을 망설일 정도로 이번 독서가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럼 여기서 자극을 한 번 더.
"그럼 이번엔 내 부전승이겠네."
"뭐야!? 왜 그렇게 되는데?"
유진이 덱을 꺼내들더니 다시 집어넣으려는 시늉을 보이자, 아린 역시 금세 태도를 바꾸고 황급히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운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플레이 매트와 카드를 꺼내들었다.
"책만이 아냐. 새 카드도 생겼거든."
"잘 됐네. 나도 새 카드 챙겨왔는데."
듀얼이라는 게임에 여전히 흥미를 가져준 것에 내심 마음을 놓으며 플레이 매트를 침대 시트 위에 깔아놓는다. 이로서 오늘도 유진과 아린의 (나름대로) 치열한 듀얼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참고로 결과는, 이번에도 유진의 연패였다.
◇
"………!"
벌써 몇 번째의 혼절인가.
몸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에 유진의 두 눈이 번뜩 뜨인다.
그 두 눈이 본 것은, 감기기 직전까지도 익히 보고 있던 것.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실실거리고 있는 청년, 위저드였다.
"깨셨네요."
독기라고는 없어보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유진은 눈에 띌 정도로 기겁한다.
그리고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환경임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쓰러진 직후의 자신을 아지트 내부에 눕혀놓았던 모양이다.
다름아닌 이 남자가.
"뭐야, 왜 네가…."
"듀얼이 끝나면 휴식해도 된다고 제 입으로 말했으니까요. 그럼 지켜야죠."
위저드는 이윽고 책상으로 돌아가 앉는다. 그리고는 본인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을 책갈피를 끼워놓은 부분부터 펼쳐들었다.
제 집처럼 편하게 있는 모습을 보건대 그 역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방금 전 기억의 아린처럼, 그 역시 독서를 즐기면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래?"
"으음, 정신을 잃느라고 기억이 없으시나? 함께 할 생각이 없는지 권유드렸을 텐데."
"내가 왜 너같은 놈하고?"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료라는 말이 있잖아요."
"누가 동료야?"
"마음 편히 놓으세요. 기껏 컨디션 찾을 기회를 드렸는데. 생사까지 걸고 싸운 상대에게 이런 혜택을 받을 일이 또 얼마나 있겠어요."
두 눈을 책에서 떼지 않은 채 목소리만 던져주듯 하는 위저드의 대답이 돌아온다.
또 싸우기 싫다면 처신 잘 하라는 뜻이 아닐까.
이 상황에서 불리한 것은 어느 쪽일까. 그 의문에 유진은 그저 상대를 노려보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저드는 다시 독서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기에, 유진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시선을 피하듯 슬며시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나갈 때와 딱히 달라진 것은 없음을 깨닫는다.
깔끔하면서도 어딘가 너저분한 풍경이 그대로 비춰진다. 트릭스 건으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대로 놓고 나왔던 식량이 든 비닐 봉투 역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구성원이 바뀐 것만으로 분위기는 어딘지 달라 보인다.
피난처 이상의 감상을 가지지 못했던 이 공간이, 저렇게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만으로 번듯한 휴식처처럼 보이려 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졸음에 몸을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저 독서가와 아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지금의 유진에게는 그저 가시방석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던 공간에 의자끄는 소리가 뒤따라온다.
기지개를 키듯 목을 쭉 뻗고난 뒤, 힘이 빠진 위저드는 훈훈한 표정으로 창밖을 슥 둘러다본다.
"아늑하네요, 여긴. 글 읽기에 제격입니다.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
"식량까지 챙겨놓은 걸 보니 여기서 어느 정도 체류하는 걸 택하신 모양이던데. 당신 일행 분들은 꽤 현명한 분들이셨나 봐요."
위저드는 독서 중이던 탁상 위에 올려진 비닐 봉투에서 과자 봉지 하나를 꺼낸다.
"드시겠어요?"
"됐어."
"그래요."
본인도 먹을 생각은 없는지 과자 봉지는 도로 비닐 봉투 안에 들어간다.
"이걸 얻으러 떠나는 여정 끝에 당신과 제가 만나는 결과가 이뤄진 셈인데. 기이한 인연 아닌가요?"
"인연은 무슨. 나같은 놈이나 노리고 다녔으면서."
"또, 또, 가시 돋힌 태도 하고는. 결과적으로 저는 트릭스 씨라는 징검다리가 있었기에 당신께 다다를 수 있었거든요."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건 듀얼을 하고 난 위저드의 말투는 이전보다도 다소 경쾌해져 있었다.
위저드는 다시금 들여다보던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밖은 변함없이 비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을 다한 자가 이곳에 묻혔다는 표식. 거기에 유진의 일행이었던 사람이 하나, 그를 묻어버린 자가 또 하나씩 묻혀버렸다.
"그 과정에서 서로 동료를 하나씩 잃었습니다. 원수라고 봐도 좋겠죠."
가식이다. 동료의 원수를 갚을 생각 따위 없다는 것 정도야 유진도 어렴풋이 꿰고 있는 바였다.
정말로 증오스러운 원수라면 그 사실을 저렇게 가볍게 전할리가 없다. 자신을 가만히 쉬게 두고 있을리도 없다.
듀얼 말고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끝장낼 수는 없다지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유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무력해진 자신을 괴롭힐 방법 정도야 저쪽도 얼마든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약속이랍시고 정말로 자신에게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고 있다. 방금 전까지 태연하게 독서를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원수를 갚는 싸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게 만든 게 당신입니다."
"어째서?"
"그럴 만한 인물이니까요."
"어딜 봐서? 이상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
"그런 거라면 훔치고 떠나면 그만이죠. 그럴 기회도 충분히 있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뭐냐고?"
"당신 본인도 잘 모르는데 남이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그걸 알고 싶은 겁니다."
이딴 식의 대답을 늘어놓는 것도 상대방의 화를 자극한다는 것을 이 자는 알기나 할까.
짜증이 가득한 유진의 얼굴을 앞두고, 위저드는 여전히 친근한 척하는 태도를 보낸다.
"참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동료로 제안하고 싶을 만큼."
"누구 맘대로."
"그러시겠죠."
일단 이 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엿보인다. 그것이 호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료의 원수니 뭐니 하는 주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까지 드니 기분은 더욱 찜찜해진다.
설마 그가 말하는 '동료'라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엮인 인연은 아니었을까. 맞다면 그것을 정녕 '동료'라고 불러도 될 것인가.
"이런 식이면서 용케 동료를 모으셨네. 아까 그 트릭스라는 애, 진짜로 동료 사이 맞는 거야?"
"네. 당연하죠."
"처음 봤을 때부터 동료였고?"
위저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살짝 들고 나서 대답에 들어갔다.
"처음 뵈었을 땐 가엾은 분이셨어요. 나약한 몸으로 죽지 못해 떠돌고 계셨죠. 의지할 데도 없으니, 삶의 목적도, 꿈을 가질 여유조차 갖지 못한, 그야말로 버림받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죠."
본인의 이야기에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위저드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분은 그 때, 저희를 만난 걸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여기셨을 겁니다. 놀이라는 것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고, 그걸로 삶의 의미를 되찾으셨을 테니까. 저희도 얼마나 보람찼는지 몰라요."
분명 트릭스 본인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꺼내기는 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다.
그 말대로라면 어둠의 게임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은 것의 원흉은 이들에게 있을 확률이 높다. 역시 이들은 경계해야 마땅한 위험 인물들이다.
다만 유진에게 더 미심쩍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정말로 동료가 맞다면 지금 이런 식의 반응은 말도 안 된다.
하다못해 방금 전의 듀얼만 해도 동료의 원수를 갚겠다고 덤벼오는 것이 차라리 말이 된다. 장본인도 그런 명분을 꺼내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진심 같지는 않다.
진심이라면 그런 카드 따위를 넣어서 무승부로 퉁치지 말고, 필사적으로 덤벼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동료의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함께 하려는 속셈인가.
더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같이 답을 찾아내기 위해 의기투합하자고도 했지만, 과연 어디로 끌고 갈 셈일까.
그렇기에 유진은 오히려 불안할 따름이다.
"아까 트릭스한테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뭐죠?"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행동하게 만드는 것일까.
설령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어둠의 듀얼이라는 걸 하는 거야?"
"말씀 안 드렸던가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죠."
"그렇게 해서까지 원하는 게 뭐가 있는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일단, 재버워키라는 분께 도달하기 위해섭니다."
"도달해서 뭘 어쩌려고?"
"알고 싶은 답을 찾아내는 거죠."
대답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렇게 긴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번 대답들은 이렇게 짧고 간단할까.
"…정말 그것 뿐이야?"
"네. 알고 싶은 걸 알고, 찾고 싶은 걸 찾는다. 제 인생의 좌우명입니다. 답을 찾기 위해서라면 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죠. 그러니 그 분의 방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요."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그러게요. 목숨이 여러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 분의 뜻이 그렇다는데."
듣고 있는 유진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속편하게 대답한단 말인가.
"진짜, 진짜로 그 짓거리를 해왔는데 아무 생각 안 들어?"
"생각이라. 어떤 생각 말이죠?"
"그게, 후회라던가."
"후회라. 고민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해버린 거에 대해서라면."
역시, 대답을 듣는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질문한 것 자체로 후회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적어도 행동한 것 자체를 후회할 일은 없죠."
"어째서?"
"그게 제 선택이니까요. 누구도 시키지 않은, 나 자신만의 선택."
대답하고 있는 본인에게는 정말로 한 점 후회라곤 없어 보인다.
오히려 무슨 헛소리가 뒤따라나올지가 궁금해질 정도라 유진은 일단 귀담아들어보기로 했다.
"당신이 여기 이끌린 것도, 결론적으로는 본인의 선택이겠죠?"
"난 오라고 해서 억지로 온 거야."
"글쎄요. 혹시 그 분께서 '와줬으면 좋겠다'거나 '와도 된다'고 하시지는 않았나요?"
"그랬… 을지도."
"그럼 명목상으로나마 거부권은 드린 거네요."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이다. 그것도 유진의 미간이 찡그려질 정도로 불쾌한 것이었다.
"사람을 인질로 잡았는데, 안 가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걸 거부해?"
"그 사람을 포기하고 일상을 누린다는 선택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런…"
반박하려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 선택지는 분명, 머릿속에 악마의 속삭임마냥 어렴풋이 떠오른 길 중 하나였으니까.
재버워키의 목소리에 일방적으로 이끌려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식으로나마 분명 선택의 갈림길은 있었다.
성아린의 구출을 포기하고 모른 척하며 일상을 받아들인다.
"그걸 뿌리친 건 당신 선택이었죠. 소중한 걸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은 당신은, 두 선택 중에 하나를 했을 뿐입니다."
틀렸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분할 따름이었다.
이런 사실을 듣고도 그런 일상을 맞이한다는 선택은 여전히 내릴 생각이 없다.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뭐, 말하는 제가 봐도 억지이긴 하네요. 사람은 보통 소중한 걸 포기하길 싫어한다,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으면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하실 줄이야. 그렇게 해서까지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런 물건까지 쥐어줘놓고."
"……"
"정말로 그냥 미끼로 적당한 훈제청어가 필요했던 걸지. 그렇다기엔 당신이 가진 또다른 힘이 변수가 되는데.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셈이 되잖아요. 정말로 그 분께서 모르셨을까?"
그가 말하는 '또다른 힘'은, 듀얼이 끝난 지금 유진의 엑스트라 덱 슬롯에서 기척을 지우고 잠들어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그 카드들의 정체는 어둠의 에너지로 이뤄지는 듀얼을 방해하는 일종의 버그.
다만 듀얼 자체를 막지 못한다면 의미없는 저항일 뿐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렇겠죠."
자신이 왜 이래야 되는지에 대한 답은, 이쪽에 관해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사람조차 알아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답답한 마음에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도 대화는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잠시간 둘 모두 목소리를 꺼내지 않고 침묵에 들어갔다.
"사실, 당신 말고도 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으로 이런 데에 오신 분은 계십니다. 그런 사례를 본 적이야 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왜 오게 하는데?"
"글쎄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그냥 걸려든 김에. 짐작할 만한 건 그 정도인데. 당신이라고 다를 건 없으려나요."
그런 사람들을 분명 아까까지 동료로서 두고 있었다.
눈앞의 위저드와는 다르게 이 게임이 끝나는 순간까지라도 믿고 함께 할 마음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너 같은 인간이 사냥하고 다닌다는 거지?"
"그렇게 되겠네요. 뭐, 수집하기 수월한 타깃인 건 사실이니까."
대답을 들은 유진은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위저드가 듀얼을 걸기 직전에 보인 것을 떠올린다.
사람의 모습이 찍힌 카드 1장. 그런 것을 앨범 속에서 꺼냈다. 즉, 어쩌면 그 카드 1장만 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열된 카드들이 곧 벌칙의 결과물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가 있었다.
트릭스라는 애가 디젠을 한가득 모으던 것과 다를 것 없다. 얼마나 모았건 간에 그 행위 자체는 유진이 두고 보기가 힘든 악취미다.
"그딴 짓을 계속하게 두겠냐?"
"그래서, 저같은 사람들을 벌하겠다는 자의를 품고 계신 거군요?"
"그렇다면?"
"딱히 막지는 않을게요. 이미 그런 분들을 상대하고 있는 처지고. 운이 좋다면 저도 그 카드를 얻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나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봤자 장본인은 덤빌 테면 덤비라는 태도만 보일 뿐.
"어쨌든 지금은 진정하시죠. 진실을 알고 싶지 않으셨나요? 기껏 같은 뜻을 품고 휴전 상태에 들어갔는데."
"………."
정말로 이 휴전을 깨고 다시 재도전한다면, 그를 이겨보일 수 있을까.
그런 불안에, 조금 있으면 나을지 모르는 심신의 피로를 핑계삼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분하다.
"저도 피곤합니다. 뜻이 안 맞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야 한다는 게. 아무리 제가 선택한 일이라지만 이런 나약한 몸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에요."
위저드가 어깨에 힘을 주면서 느긋하게 머리 뒤로 깍지를 낀다.
"그래서, 가끔은 결투 이외의 수단도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이렇게 쉬면서 의견을 나눠본다던가.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평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그나마 평화롭다고 할 수 있던 일상이, 이런 작자들 때문에 어지럽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유진은 치가 떨려왔다.
더구나 아까만 해도 자신을 죽일 기세로 몰아넣던 인간이 태연히 이런 소리나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 더더욱 치가 떨린다.
하지만 휴식이 필요한 유진에게 당장 일어날 의지는 없다. 오히려 다시 눕고 싶어진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벌떡 일어나 도망이라도 친다면 쫓아갈 수 있을까. 목을 조르러 손을 뻗어온다면 그걸 뿌리치고 제압할 수는 있을까.
그런 불안한 가능성을 곱씹으며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는 정도였다.
"역시,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니 저희 몸은 나약하기 짝이 없단 말이죠."
피곤하다. 하지만 복잡하게 요동치는 머리가 잠기운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혹시, 자기가 무력하다고 느껴지나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처지가 원망스럽지 않아요?"
이 자는 아까부터 자신을 내다 보고 있는 듯 말을 꺼내오고 있다.
아니면 그 정도로 읽히기 쉬운 타입이 아닐까.
이런 상대를 지금의 자신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당장 미룬다고 승산은 있을까? 오히려 저쪽에서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덜 갖고 있을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여전히 다시 싸울 기회를 잡으라고 부추겨오는 속내도 있었다.
그런 의견들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충돌한다.
갈등한다.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질문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
유진은 그런 머리를 깨버리는 한이 있어서라도 갈등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런 유진을 향해 위저드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마세요. 자기가 고른 선택의 결과가 좋은 것만 있을리는 없죠. 거기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도록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고도 후회되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잖아요. 그 때의 선택권 역시 당신 자신에게 있습니다. 대신에 후회를 갖지 않을 책임이 따를 뿐."
"그게 말처럼 쉬울리가."
"쉽진 않겠죠.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인 겁니다. 그걸 풀어내는 역할은 결국 자기 자신. 힌트라면 몰라도 답은 남이 알려주면 안 되죠."
이 말 자체를 틀리다고 부정할 자신은 유진에게도 없다.
"당신이 충분히 강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에요. 선택을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
그렇다고 인생의 교훈이 될 충고를 이런 사람한테서 듣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이 틀린 것이라는 관념이 박혀버릴 것 같으니까.
"그러니 부디, 자신에게 와닿는 선택을 하시길. 눈앞에 펼쳐지는 게 어떤 것이든, 자신의 느낌을 믿고 따르세요. 틀린 답이더라도 다음에는 정답으로 바꿔나갈 용기를 가지세요."
"그럼…"
그렇다면 이들을 막기로 스스로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도 옳다는 뜻이렷다.
그걸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막지는 않겠다고 한다.
그러니 그렇게 대답하려던 찰나 방금 전에 닫은 입을 위저드는 또 열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독서 시간도 끝났고 하니 제 휴식도 슬슬 끝낼 때가 된 것 같네요."
만만찮은 두께의 페이지를 그새 넘긴 위저드는, 질기고 튼튼해보이는 커버를 살포시 닫는다.
그리고는 고문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옛스러운 조형의 그 서적을 그는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저렇게 두꺼운 책을 완독한 모양이다. 유진은 황당하기까지 했기에 질문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걸 다읽었어? 페이지가 반 정도 남지 않았나?"
"한 두 번 읽은 게 아니라서요. 그 정도로 훌륭하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책이거든요. 읽어보시겠어요?"
"아니."
만화책이나 교과서, 더 양보해도 아린의 연습작 정도 읽는 것이 고작이던 그는, 하물며 삽화라고는 없어보이던 낡은 하드커버에 눈을 집중할 만한 여유 따위 없었다.
얼핏 보아 하니 외국어로 쓰인 그 책 내용을 본다고 읽어낼 수 있을리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 다 읽어낸 것인지는 사뭇 의심이 들었기에, 유진은 가볍게 물어보기로 한다.
"근데 그거 내용이 뭐야?"
"위대한 말씀이라는 걸 기록해놓은 겁니다. 신비의 발견과 예언이라는 것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려고는 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납득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내용이죠. 대부분은 망상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런 걸 뭐하러 읽는데?"
"재미있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설명으로 듣느니 직접 접해야 가치가 있는 글인데, 안 보시겠다니 안타깝군요."
역시 이해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유진은 이를 다시금 깨닫는다.
"휴식은 충분히 취하셨나요?"
"그렇겠지."
"그럼 슬슬 일어납시다."
"…이제 뭘 할 건데?"
"탐색 겸 구경이요."
정말로 같이 재버워키를 찾으러 다닌 작정인가.
과연 자신을 미끼로 던져서 버릴 속셈인 것일까.
이번에도 그의 머릿 속 의문에 대답하듯, 위저드는 굳이 첨언하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자기만의 선택을 따르는 사례를 보러가자는 겁니다."
◇
잠시 고민에 빠지며 뜸을 들인 끝에, 유진은 순순히 위저드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떠나기 앞서 위저드는 들고 나올 만한 짐을 다 챙기고 나올 것을 권유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듯이.
그렇기에 자신이 가지고 나오던 소지품 외에는 남아있는 카드들과 식량 일부 정도를 챙기고 채비를 마쳤다.
전부 들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빠뜨리고 나오자니 괜히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역시 포기한다는 선택에 서투르시네요. 그렇게 다 챙기면 만에 하나 도망치기도 버거울 텐데."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걸 질리도록 깨달았으니까. 거기다 듀얼리스트의 무기를 함부로 놓고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바로 그겁니다."
위저드가 자신의 짐을 들어보이며 흡족한 듯 미소를 보낸다.
"그래도 힘이 꽤 들 것 같은데. 정말로 더 쉬었다 갈 생각 없으신가요?"
"더 쉬어봤자 시간만 흘러갈 텐데."
"네, 사실 제 생각도 그렇거든요."
방금 전까지 태평하게 독서하고 있던 인간이 그런 소릴 해도 되는가. 하며 유진은 속으로 따져보았다.
그리고는 방금 문을 닫고 나온 건물을 뒤돌아본다.
"………."
관리자가 찾아올 일은 없을 쓸쓸한 관리사무소. 아무리 여건이 따르더라도 24시간을 여기서 생활하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니 아지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런 아주 잠깐동안 있었을 공간이었을 뿐인데 오랜 추억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대회가 계속된다면 다시 돌아갈 일이 있을까. 어쩌면 그 때쯤에 누군가가 벌써 몰래 기어들어온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 때 자신은 그 자를 쓰러뜨려서 이 보금자리를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도망쳐서 영영 떠나보낼 것인가.
하지만 유진은 일단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를 품기로 한다.
이 발걸음이 여기서의 마지막 여정이 되기를 바라니까.
비석과 잔디를 제치고 언덕길을 내려가니 방금 전에도 보았던 항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을 드리우는 바다가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ABC'라는 대회장 아래에 펼쳐진, 끝이 존재하는 바다.
그곳에서 유진은 사람 하나를 담궈버렸음을 떠올린다.
저 혼자 빠져나가겠다고 자신에게 덤빈 그 남자는, 결국 패배 끝에 방금 낚아올린 생선마냥 가쁘게 숨을 헐떡거리며 제발로 물에 뛰어들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잠수 실력을 발휘해서 어디로든 도착했을지, 아니면 영영 물 위로 떠오를 일은 없는 것일지 괜히 궁금해진다.
그 순간의 의문에 대답하듯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 유진의 시야에 밟혔다.
가져갈 만한 것을 죄다 빼앗긴 채 그대로 방치된 검은 가방 하나. 다시는 주인을 맞이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잠수 실력을 발휘해서 어디로든 도착했을지, 아니면 영영 물 위로 떠오를 일은 없는 것일지 괜히 궁금해진다.
그 순간의 의문에 대답하듯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 유진의 시야에 밟혔다.
가져갈 만한 것을 죄다 빼앗긴 채 그대로 방치된 검은 가방 하나. 다시는 주인을 맞이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곳도 다시는 올 일 없기를 빌며 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웬만한 경사를 다 내려왔으니 이제는 평지 위의 도시를 맞이할 차례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미 그곳은 이전보다도 더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커다란 스케일의 몬스터들이 날뛰고, 자연재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상현상이 다발한다. 멀리서 보일만큼 커다란 몬스터가 저 정도이니, 아마도 더 자잘한 몬스터들이 도시를 누비고 있을 것이다.
그런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재난 상황임에도, 몬스터의 몸뚱아리가 빌딩에 부딪혀도 무너지는 일은 없고, 마른 하늘에 폭풍이 몰아쳐도 간판이나 가로수 따위가 휩쓸리는 일은 없다.
그것들이 어디까지나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는 듯 도시의 형상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전부 현실로 구현해내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듀얼에 집중해야 할 듀얼리스트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저런 것을 자신 또한 몇 번이고 체험해왔음을 깨닫는다. 또한 앞으로 몇 번이고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했다.
유진은 마른 침을 삼킨다. 마치 맹수가 가득한 수풀로 발을 옮기는 것만 같다.
휴식을 취한 덕분에 유진의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일은 없었지만, 슬슬 가방끈이 유진의 어깨와 손가락을 짓눌러오고 있었다.
이 도시라는 전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적을 마주할지 모르기에 토우키라는 남자와 긴장 바짝든 상태로 진입했던 것을 떠오른다.
유진은 이번에 동행 중인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짐이 무겁지도 않은지, 본인도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는 것인지 그 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
새로운 만남에 들뜬 것처럼도 보인다. 어찌됐든 긴장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위저드에게 유진은 질문을 꺼내본다. 어쩌면, 나오기 전에 진작에 물어봤어야 할 의문.
"그래서, 누굴 찾으러 가는데?"
앞으로 마주할 상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가는 이 남자는 그 상대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어필해왔다.
물어봐둬서야 나쁠 것은 없으리라.
"저요? 앞으로 이곳 개최자 분을 찾아뵐 예정인데."
역시나, 하고 유진은 마른침을 삼킨다.
정말로 이것이 마지막 발걸음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유진은 더 긴장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아뇨."
"그럼 무슨 수로?"
"말씀 드렸잖아요. 지금 저는 후각에 의존하는 사냥개나 다름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 분의 기척이 잡힐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이죠."
"단서가 진짜로 그것 밖에 없어? 사진 같은 건? 전에 직접 봤다고 했었잖아."
"글쎄요. 그 분께 눈에 보이는 형태라는 건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서."
"의미가 없다니?"
"생각해보세요. 이만한 가짜 풍경을 진짜에 가깝게 만들어내시는 분이, 과연 자기 모습도 어떻게 못할지."
수긍할 만한 짐작이다. 더 나아가 여기서마저 모습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역시 '자신을 찾아내라'는 간단하면서도 대책없어보이는 조건이야말로 터무니없는 난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흔적만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던 겁니다. 그러다 당신 같은 사례를 마주했지만.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훈제청어가 한 두 개 준비돼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뭐, 그것도 그것대로 기대되는 바입니다만."
이 경쾌한 분위기는 기대감에서 오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역시 기분 나쁘다.
"그 냄새라는 것도 바꼈을지 모르잖아?"
"냄새는 어디까지나 비유라구요. 아무리 모습을 바꿔도 숨기지 못할 뚜렷한 에고. 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야말로 제 이정표인 셈이죠."
"그 냄새라는 건 어떻게 계속 기억할 수는 있는 건데?"
"아, 실은, 당시에 그분이 들고 다니던 물건을 확보했었거든요."
그는 뒤를 돌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는 가져가라는 듯 집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구멍 뚫린 토큰 한 닢. 광택이 남지 않을 정도로 때가 잔뜩 타서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길 망설이게 될 법했다.
"이것도 디젠이야?"
"디젠'이었던' 물건이겠죠."
주인이랄 게 없다고 하니 빈 껍데기, 즉 단순한 골동품이겠지만, 무언가 어렴풋한 기척이 없지만도 않은 것은 같다.
그 기척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 묘하게 불쾌하다. 오해할 만도 하다고 유진도 생각해버릴 정도였다.
여기에 새로운 소유자였던 이 남자의 기척까지 희미하게 서려있다는 것은 더욱 불쾌할 따름이었다.
"원하시면 가지세요."
"너한테 중요한 물건 아냐?"
"저야 없어도 질릴 만큼 기억이 되니까. 그리고 어쩌면 새 물건을 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걸 얻었다는 것은, 분명 재버워키에 해당하는 인물을 이겨봤다는 뜻일 터.
그럼에도 또 나타나 게임을 개최한 재버워키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닌다. 한번의 패배가 끝일지도 모르는 전장에서.
그것도, '알고 싶은 것을 알겠다'는 단순한 목적으로.
"만약에, 이 게임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계속해서 수집과 탐구에 열중해야겠죠."
"그럼 그 재버워키라는 애가 완전히 끝장나버린다면 어쩔 건데?"
"대답은 같습니다. 새로운 화제가 찾아오는건 저도 환영이고요."
물어본 자신이 바보였다고 느낀다. 역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집착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면서도 언젠가 자신도 그것을 깨달아버리는 것일까 하는 불안마저 엄습해왔다.
"그런 의미해서, 우리가 고대하던 그 순간이 머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 말은?"
"슬슬 느껴지거든요. 만남의 순간이."
저 말이 사실이라면 끝나는 순간이 머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게임, 혹은 이 사람과 유진 자신의 운명 중 하나가.
과연 직접 맞이하는 순간 이 자는 자신을 어떻게 할까.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불안 섞인 의문을 품는 찰나 위저드가 몸을 휙 틀었다.
마치 기척을 느낀 방향을 향하듯이.
"그 만남은, 의외로 익숙한 상대일 수도 있죠."
위저드의 시선을 따라 유진도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그 너머는 여전히 텅 빈 거리 뿐.
"뭐야, 없잖……, 어라?
되묻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대답을 들어야 할 위저드의 모습이 몇 초만에 갑자기 사라져 있었다.
마치 허깨비에 홀려있었던 것 같다.
분명 방금 전까지 그 모습을 똑똑히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목소리, 발소리 모두 방금 전까지 귀에 똑똑히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그러나 허깨비일리 없다는 것을 유진도 알고 있다. 선물이랍시고 받은 물건이 확실히 손바닥에 있으니까.
분명 어떻게든 재주를 부려서 내뺐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야, 어디 갔어? 어디 숨었어? 야!"
"왜!"
어안이 벙벙하여 꺼낸 닿지 않을 물음에 대답이 들어오자 흠칫.
그러나, 그것은 어딘지 다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은 앞이나 뒤도 아닌 옆 골목.
그 너머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댁들은?"
"드디어 찾았네. 얘하고 같이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사람 고생하게 만들고 있어."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인가 했더니, 익숙한 얼굴이 유진을 맞이한다.
비니를 쓰고 있는 비교적 캐주얼하고도 반항적인 이미지의 청년은, 척 봐도 시비를 잘 걸 법한 인상이다 보니 말을 걸기가 꺼려지는 인상의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디젠을 노리고 목숨을 거는 어둠의 듀얼리스트라니, 더더욱 가까이 할 이유는 없다.
같이 찾아오는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유노는 왜 이 사람하고 같이 있어?"
뜻밖의 일행 구성에 유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이 둘이 함꼐인가. 어떻게 아무 일도 없이 여기까지 왔는가.
"아, 오해하진 마. 의외로 별일 없었다고."
그 '의외'라는 기준이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유노는 잠시 제쳐두기로 한다.
그러나 점차 혼자 있는 유노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이미 퉁명스런 도펠코프의 얼굴이 더 찡그려진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반응에 유진은 또다시 당황.
"근데 왜 혼자 있냐? 리퍼는?"
"네?"
사정을 알리 없는 유진은 어리둥절.
도펠코프는 이번에 유노를 향해 따지기 시작한다.
"야, 없잖아. 리퍼가 데리고 있으니까 얘만 찾으면 될 거라 그러지 않았냐? 어떻게 된 거야? 도중에 내뺐다고 하시게?"
"……."
"에휴."
대답이 돌아오질 않으니, 벌써 텄다고 생각한 도펠코프가 한탄의 한숨을 내쉰다.
상황을 보건대 지금은 입을 꾹 다문 유노가 뭔 얘기를 했었구나, 하고 유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이 있던 사람이 바로 방금 전에 내뺀 것은 사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리퍼가 아니다. 그런 해골 가면 괴인은 도시로 들어선 후 코빼기조차 본 적이 없다.
유진을 찾기 위해서라도 억측이나 거짓을 내뱉은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 그런 건지 유진과 도펠코프가 추측하려는 가운데,
그 장본인인 유노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아니, 리퍼는 이미 있어."
"뭐? 어디?"
그녀는 갑자기 가방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든다.
다소 심플한 외형의 팔찌였다.
디젠을 꺼내드는 것이라 생각하자니 도펠코프로서는 어딘지 이상하게 다가왔다.
분명 디젠으로 삼기에 적합한 외양이기는 하겠지만, 저 물건 자체에는 에너지랄 것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빈 액세서리가 아닌가.
"있었어. 처음부터."
하지만 유노가 그것을 팔에 차는 순간, 도펠코프의 의문은 서서히 해소되어간다.
그것은 기존의 모조 디젠과는 냄새 자체가 달랐다.
촉매의 화학 반응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변화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유노가 답답한 듯 앞머리를 쓸어넘기니 새하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그 눈빛이, 태도가, 전과는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 같다.
아니, 주장이 아니다.
그 몸뚱아리를 움직이는 것이 어느 샌가 바뀌어있다고, 도펠코프는 감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하──"
헛웃음.
"그렇게 된 거였냐? 이거 한 방 제대로 먹였네. 내 감도 다 죽었나 봐."
본인을 제대로 광대로 부려먹은 그 배짱에, 또 거기 넘어가있던 자신에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친히 용서해주기로 한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어찌 됐든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오는 셈이니까.
그런 도펠코프를 앞두고서 아이바 유노, 그 육체를 매개로 현현한 리퍼가 담담히 고한다.
"──네가 그렇게나 원하던, 게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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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가 대충 끝나는 대로 다음화를 또 올려봅니다
솔직히 계속 볼만한 재미가 있는 글인지는 본인도 잘 몰루겠습니다만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모쪼록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용
그리고 다음 듀얼로그가 완성되는 대로 다음 화를 올릴 수 있을 듯 한데... 또 오리카 등장에 어떻게 전개할지도 감을 못 잡은 상태인지라 기약을 잡기가 어렵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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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게임의 모 캐릭터가 말한 모 대사가 생각났읍니다 "가설이지만, 만약 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잘못된 것 뿐이라면, 그건 사실 잘못된 것이 아니란거지. 운명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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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마음에 들었다 짤(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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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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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게임의 모 캐릭터가 말한 모 대사가 생각났읍니다 "가설이지만, 만약 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잘못된 것 뿐이라면, 그건 사실 잘못된 것이 아니란거지. 운명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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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4.10 21:23 | |
(IP보기클릭)211.198.***.***
Lahmu
대충 마음에 들었다 짤(아닙니다) | 23.04.10 2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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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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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쟈쟈아안☆ | 23.04.10 21: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