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여보, 오늘은 출근하는데 눈물이 샘솟았어
굵고 높은 기둥이라서 올라갔지
떨어지고 싶어서
올라갔어 보이더라 검푸른 바다가
반짝이더라 단번에 빠져죽을 순 없더라 앉았지
기둥 끝에 땅끝에 시간이 무진장 잘 가더라
먹고 살 때는 길다 싶더니 가고 보자 하니까 짧아
여보, 짧은 거더라 내가
당신이 긴 쪽
누가 더 길고 짧은지는 대봐야 안다고 해서
내가 당신 몰래 짧을 걸 내보였던 거 모르지 모르면서 뭐
가 그렇게 다행이라고 한 걸까
팔다리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정신을 두껍게 하며 살았다 헛것에 홀려서 여보
몸에 충실했어야 했어
웃음이 나올 때 웃고 기도하고 먹고 싸고 감싸고 휘몰아
치는 가운데 가화만사성을 가훈으로 정하는 데는 다 이유
가 있는 거더라
우리는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때때로 가능한 때가 오면 아이를 몇이나 길러 키울까 상
상해보곤 했잖아
나는 딸이 좋겠어
요즘 아들 새끼들은 죄다 입에 달고 살더라고 부끄러움을
나나 당신만 해도 그렇잖아 발가벗고 싸돌아다니는 건 집
에서만 하잖아 여보
어제 영업3팀 워크숍에서는 다들 차례를 기다리더라고
누가 먼저 바지를 내리고 알을 깔 것인가
땅콩에도 위아래가 있어서
반과장이 까더라고 잘 까 과연 아직 앞날이 창창한 녀석
이더라고
그럼 또 두고 볼 수가 있나 내가 한 번에 두 갤 깠지 훅
깠어
내가 그런 등급이잖아 승진을 앞두고 있잖아
부장이 손뼉을 치더라고 비전이라고 하더라 비전
자기 인생의 비전이 집에서 새지 말고 밖에서도 새지 않
는 거라고 하더니
기어이 가더라고 비전 룸으로 우리를 다 끌고
실행하더라고 흔들더라고 쥐어짜더라고 비전을
시커멓게 쪼그라들더니 울더라고 여보
그런 미래를 당신에겐 보여줄 수 없고 죽겠더라고
빤쓰를 배꼽까지 끌어올려 입어도 되질 않더라고
갈아탈 곳을 놓치더라고
한번은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계속 가게 되더라고
뻘을 보면서 대낮부터 조개구이에 소맥을 마는데 여보 항
복은 거기 있더라
행복하더라
당신이 맞았어 당신은 참 일찍 항복했잖아
항복의 맛을 보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잖아 당신이 밤마
다 떠도는 걸 내가 이해 못했잖아
거기가 어디라고 가느냐고 내가 자꾸 그랬잖아
두 다리가 성해서는 그게 뭐냐고 했잖아
무섭다
당신이 스키야키 주점에서 얇게 썬 쇠고기를 달걀에 적셔
먹으면서 말했어
너무 쉽게 말했어
다 어렵게 말하는 걸 여보 그래서 내가 파를 그렇게 먹
었어
대파를 먹고 또 먹었지 대단했어 당신이랑 나랑
젊은 날 만나서 산 넘고 바다 건너 평야에 씨를 뿌리며 살
았다
쌀농사는 짓지 말자고 늙어 허리 굽어 고생한다고
당신 어머니는 환갑에 이미 망했다고 했지
그래도 우리 벼를 심었잖아
논에 물을 대고 모판을 떼다가 심었지 그걸 손으로 다 했어
기계가 못 들어가는 논이라고 작은 논이라고
그 작은 논으로 먹고살려고 했다 우리가 어렸다 우리가
진즉 망해서 평야를 버리고 산업 역군이 되었다 우리가 이
런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빨리 쇠고기 맛을 알고 고기를 끊었을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여보 이런 말 하는 사람
을 내가 안다
원이사가 그런다 자기는 원없이 고기를 먹는 게 소원이
었다고 하면서
갬성이 아주 옛날 갬성이야 가족 같은 회사라잖아 자꾸
여사원 블라우스를
쓰다듬잖아 만지잖아 부어주고 마시라고 하잖아 비비잖
아 그래서
원이사 결국엔 빤쓰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쇼를 했잖아 합의했잖아 지 혼자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원이사가 조부장 똥꼬에
얼굴을 박고
그윽하게 말했잖아 자기 인생의 비전을
조부장이 구운 파를 꼬치에서 빼서 원이사 입에 넣어주면
서 방귀를 얼마나 잘 뀌는지
둘이 생소를 하더라고 인생의 맛이라잖아
나도 개다리춤을 췄잖아 인생 뭐 있나
여보, 미안해
나는 인생을 글로 배워서
잠을 자다가 말고 눈물이 샘솟아서 당신이 자꾸 오라고
손짓을 했는데
가긴 어딜 가느냐고 거기가 어디라고 가느냐고 내가 손
짓을 했잖아
내려오라고
꿈은 현실이랑 반대라고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고 했
잖아
여보 당신이 꿈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물어보지 못
했더라
무섭다
저 끝에 뭐가 있을까 여보
오늘도 무사히
눈물 기둥을 고이 접어넣었다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김현, 문학동네시인선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