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인의 등에서 반짝인다
파울 첼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자의 등에서 반짝인다고(1)
(1)우대식의「정선을 떠나며」를 읽는 저녁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던 벤야민과
눈 내리는 함흥의 밤을 걷던 한설야는
이 밤 어디까지 갔을까
아무리 추운 계절이 와도
그대의 욕망은 선하고 아름답다
삶의 불안과 적막이 파도처럼 요동칠 때
난바다의 파도로부터 내륙의 고요한 심장부까지
편편의 눈은 한 장의 평화처럼 내린다
눈의 고요 눈의 쓸쓸함 눈의 지고지순
눈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자는
늘 어디론가 떠나려는 자
늘 어디에선가 돌아오려는 자
사랑이 톱밥 난로처럼 타오르는 곳에
제재소는 숙명처럼 남아
아직 오지 않은 추억을 대패질한다
문풍지 한 자이 가려주던 겨울의 따스함을
여인네의 등에 남아 반짝이던 시절을
누군가는 기억한다
기억이 만들어 나가는 미래
아니 미래는 만들어 나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이 이미 피워 놓은 불씨
불씨를 물고 대륙풍에 몸을 맡긴 채
새 한 마리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이제 사북에서 갈아타야 하는 정선선 열차는 없다
다만 별빛을 따라 그 오랜 옛길을 가다 보면
그곳엔 기적처럼, 열차의 기적소리처럼
누군가 당도해 있을 게다
두 장의 별빛을 넘기고
두 개의 펄럭이는 언덕을 넘어가면
두 겹의 삶이 하나로 맞닿아 총총 별빛으로 이어지는 곳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오, 오랑캐의 계절이
감정의 무한처럼 펼쳐져 있는 곳
이절이라는 곳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 모여들어 산등성이에서 반짝이
리니
여인네의 등처럼 아름다운 산 아래로 등불같은 눈이 내
리면
누군가는 걸어서 깊은 밤을 산책하고
누군가는 돌아와 불꽃의 자서전을 읽고
누군가는 젖은 외투를 말리며 고요히 생각에 잠기리니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인의 등에서 반짝인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