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융마
관산융마(關山戎馬)라 했지 쓸쓸한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서도의 노래라 했다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
데 창밖에는 허공 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마, 눈 위를 달리는 말이라!
썰매의 어원이라 했다 누구의 말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시의 제목을 뭐라 할까 생각하다 그냥 관산융마라 했지
누가 뭐래도 관산융마라는 말이 좋아졌는데 왜 갑자기
그 말이 좋아졌는지는 나도 몰라
무엇이 왜 좋은지를 알고 싶은데 나는 잘 모른다
그래도 그게 좋고 그게 사랑스럽다
가령 곤쟁이젓, 꼴뚜기젓!
찻잔에서 무엇을 읽어 드릴까요?
어두워지는 창가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누군가
저 자신에게 고즈넉이 속삭인 말이다
오늘밤에는 눈이 내릴 것 같고 쌀쌀한 어둠 속에서는 바
람이 분다
담배를 피워야겠으니 창문을 열어야겠다
창문을 열면 와락 별빛들 쏟아질 텐데
방 안 가득 별빛이 쌓이더라도 담배를 피워야겠다
*
달 보러 가자
이천십팔 년 일월 삼십일 일 아들에게 두툼한 외투를 입
으라고 한 뒤 아비가 아들에게 한 말이다
아비는 이번 생애에는 이것이 마지막 인 것 같구나
춥고 쓸쓸한 일월의 마지막 밤 삼십오 년 만에 우주적
볼거리가 펼쳐진다는 밤
연중 가장 큰 달이 뜬다는 슈퍼문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뜬다는 블루문 개기월식 현상으로 달이 붉게 보인다는
블러드문
이 모든 현상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우주의
풍경이 삼십오 년 만에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앞으로 십구 년 후에나 볼 수 있다는데
십구 년 후면 이 지상에 없을지도 모를 아비는 옥상으
로 올라가 담배를 피워 물고 한참이나 달을 보고 있다
아들은 밤하늘을 향해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아비
는 그런 아들을 향해 눈동자의 셔터를 누른다
그러니까 십구 년 동안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이 행성을
견딜 수 있으려나
개기월식의 어둡고 추운 밤 누군가는 또 여전히 쓸쓸하
고 출출한가 보다
슈퍼 문을 열고 나오는 누군가의 비닐봉지에는 달보다
환한 지상의 양식이 담겨 있다
아비는 이 모든 광경을 향해 실체도 없는, 심장의 셔터
를 누른다
*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천지사방 눈발이 날리고 있다
눈 위를 달리는 말이라 설마
누구의 말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겨울 깊은 속으로 파묻혀 가는 희디흰 고독의 말
관산융마라 했다
쓸쓸한 오랑캐의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