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쉽게 쓰여진 시는 없다
아우슈비츠가 사라졌어도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모두 다 제 속에 거대한 감옥을 세우고 사느니
서정이 사라진 시대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어
렵다
지성이 감성을 데불고 어디로 가느냐
묻지 마라, 지성도 감성도 명왕성도 사라진 시대에
또 다른 행성에서는 샘물 같은 지성이 솟고
불꽃같은 감성이 피어나느니
그대 눈에는 그대 가슴팍에는
그저 쉽게 쓰여진 시만 펄럭이며 나부끼고 있구나
인류여, 나의 이름을 묻지 마라
나는 그대에게 다가간 적 없고
그대 입술에 사랑을 고백한 적 없나니
적이 없어서 사랑을 사랑할 수 없는 나에게
사랑이라 불리는 그대여
더 이상 인간의 사랑을 발설하지 말아다오
고독이 메마른 나무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오후의 거리
에서
나는 나의 고독과도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나니
그대의 사랑이 끝이 없어서 나는 하냥 외로웠을 뿐
하냥내 외로워 나는 그대 사랑을 모독했을 뿐
인간의 말이여, 인간의 말로 뒤덮인 한 장의 벌판이여
세계여
나는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어서
인간 이전의 시간이어서
나는 여전히 시 밖의 아쿠스메트르(1)
그대가 나를 모르듯 나는 여전히 그대를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고 그칠 때마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 봐도
시여, 그대는 언제 나에게로 오는가
나에겐 아직 단 한 편의 시도 없는데
*
(1)미셸 시옹에 의하면, ‘아쿠스메트르acousmetre’는 영화
의 화면 밖에 음향적으로만 존재하면서 전지적 힘을 발휘
하는 존재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
겠다고 말한다
그 구절을 제목 삼아 두루 두루, 두루마리처럼 풀어서
다시 변주해 봤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