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는 대관령 밤의 음악제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오장환,「The Lat Train」에서
자정이다. 바스티유에서 마들렌으로 가는 합승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로 트레아몽 백작,「말도로르의 노래」에서
모든 것은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었다
―박정대,「퓌르스탕베르광장의 겨울 시」에서
모든 것은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었다
늦가을이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급류에 휩쓸려 나는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강 저편에는 갈대밭이 무성하고 처음 보는 아름다운 숲
이 펼쳐져 있었는데 갈대밭 언저리에서 숲 쪽으로 뛰어가
며 한 여인이 나를 손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빨리 강을 건너 그곳으로 가고 싶었으나 범피중류
처럼 자꾸만 떠내려가며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깨어나니 꿈이었다
낭만적이오 오 낭만적 낭만은 적이오
자정이다. 바스티유에서 마들렌으로 가는 합승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불러 마지막 별빛마저 완전히 꺼
진 칠흑의 밤
역병이 창궐한 시대 어둠의 거리를 걸어가며 백작은 마
스크를 쓴 채 말도로르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나의 적멸이 완벽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바야흐로 원소들이 도처에서 충돓하고
있는 겨울밤이 아닌가
아니다 지금은 세상의 나쁜 습기들이 폭풍우에 몰려가
는 여름밤이다
누군가 불굴의 선의로 폭풍우 치는 밤을 뚫고 이 적막
한 거리에 겨우 당도했을 뿐이다
자정이다 거리엔 정선으로 불어 가는 바람도 알타이로
떠나는 마지막 열차도 보이지 않는다
한 마리 아름다운 욕망만이 쏟아지는 빗속에 갇혀 무구
한 짐승처럼 울고 있을 뿐이다
극야의 밤 꿈도 없는 날들이 수개월째 계속되고 그대는
외출을 한 지도 오래되었다
슬픈 고양이의 눈동자를 지닌 그대는 방드르디 지역의
올빼미 당원 태양을 버리고 오롯이 밤과 밤을 이어 가는
그대를 위해 나는 한 편의 시를 들려주려 한다
알타이 계곡 깊숙이 숨겨 두었던 시
너무 아름다워 자신만 알고 싶어 먼 옛날 세상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보석처럼 몰래 숨겨 두었던 마을 정선 같은 시
그곳엔 아직도 시가 많으니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궁극적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무엇인가
끝없는 어둠을 타개하기 위한 한 점의 불씨, 불씨를 물
고 가는 한 마리의 새일지도 그럴지도
어느 날은 새들이 물고 날아오르는 시가 밤하늘 가득
별이 되리니 또 어느 날은 세상의 고아들이 별빛 아래서
길을 찾을지도 그럴지도
폐에 결절이 생겼다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소견
을 듣고 큰 병원에 입원도 하고 병원에 다닌 지 한 달 반
결절도 거의 사라질 무렵 의사는 면역력 약화에 따른 급성
폐렴이라는 최종 진단을 내렸다
한 동안 피우던 담배도 줄이고 술도 끊다시피 했는데 좋
아하는 것들을 멀리 하니 삶은 급속도로 적막해졌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화원에서 여러 나무들을 구경하
다가 올리브나무를 만났다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 같은 올리브나무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올리브나무에 레아 세이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올리브나무의 수피는 밝은 회색빛인데 가지는 가느다랗
고 단단하며 잎도 역시 작고 단단하다
분갈이 한 올리브나무의 위치를 몇 번 옮긴 후에 마침
내 햇빛이 잘 들고 내 시선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올리브나
무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올리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나는 그리스
의 언덕이나 남부 스페인의 구릉지를 떠올린다
이제는 없어진 결절에 와 닿는 바람 결절이란 무엇이 끊
어진 것일 수도 무엇이 맺힌 것일 수도 있어 바람이 불 때
마다 나의 결절을 생각하는 것이다
폐에 결절이 생겼다 사라졌다 폐가에 생긴 거미줄처럼
내 몸에 생겼다 사라진 결절을 떠올리며 나는 생의 결핍이
며 올리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도 함께 생각
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비는 내리는데 이건 예술적 사대주의도 망각
의 제국주의도 아니다
레아 세이두일 뿐이다 내가 기르는 비애의 이름일 뿐
이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뜨거운 햇빛을 끌어와야 한
다 적절한 물과 바람과 나의 시선 속에 올리브나무는 있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나는 날마다 그리스의 낮은
언덕을 끌어오고 지중해의 미풍과 적절한 언어를 올리브나
무에게 들려준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매일 착한 생각을 하고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데려와 쓴 시를 올리브나무에
게 읽어 준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세상의 근심 걱정은 나 홀로
하고 올리브나무에게는 좋은 풍광만을 보여 준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별빛 아래에서도 그 희미한
빛의 온기마저 간절한 기도처럼 올리브나무의 이파리로 향
하게 한다
올리브나무를 살리기 위해 수염을 기른 천사가 올리브
나무 곁에서 꼬박 밤을 샌다 한 계절을 보낸다
그럴 때마다 바람이 불고 태풍은 지나가는 것이다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노란 살구 몇 알을 떨구며 태풍은
지나가는 것이다
대지의 뿌리를 붙들고 살아남은 나무들은 부러진 제 몸
의 일부를 태풍에게 다시 내어 주고 있다
누군가는 길가의 테이블에 앉아 살구 몇 알을 안주 삼
아 술을 마시다 태풍에게 자신의 전생을 내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테이블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시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밤새도록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들이 있다
멀리 있는 빛을 듣는 밤이다
초개(草芥)와 수영(洙暎)이 호출되고 우리는 그리 멀지 않
은 지나간 날들을 이야기한다
지나간 날들은 이곳을 지나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디론가 간 시간들은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킬킬대
며 이곳을 바라보기도 하는 것인가
먼 길을 가며 어설픈 사랑을 하기도 하고 물미역 같은
퍼어런 그리움으로 그대를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탁자 위에 쏟아진 술은 또 흩어지고 스며들어 흔적을 남
긴다
흔적을 지나 사라진 것들은 또다시 어디로 모이는 것
인가
통영이나 해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빛나는 별
빛이여
우리는 무엇을 잊으며 잃어버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것
일까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을 소리 내어 읽고 싶은 밤이다
초개가 표지화를 그리고 수영이 발문을 쓴 밤하늘이라
면 좋겠다
밤하늘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김영동의 음악이 흘러나
오고
밤하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국적 없는 고아의 시시껄렁한 넋두리만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위 위 불란서 여인은 그런 소리를 내
며 흔들린다
지금은 개기월식의 밤
바람이 불 때마다 위 위 그런 소리를 내며
갈대들이 또 다른 갈대 쪽으로 이동하는 시간
긍정적 침공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오롯이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다락방이 좁다고 기르던 나무들을 함부로 버린
다면
생은 아름다운 행성 몇 개를 포기하는 것이다
불란서 여인은 침략당하고 역습하며
드디어 자신의 음악에 상륙한다
위 위 위구르를 상상하지 마라
말은 언제나 아름다운 침략처럼 달려가고
달은 지상의 등대처럼 밝다
뒤라스의 말처럼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테라스에 앉아서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여인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위 위 이런 걸 불란서 여인과 아름다운 침략이라고 하자
고독이 완성되는 밤의 한가운데서
하나의 눈은 밝아지고 또 다른 눈은 어두워져 가나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 위 위구르를 지나
아무도 모르는 밤의 끝으로
가야 한다면 위 위 우리는 가야 하는 것이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새드앙역 저무는 역두에서 나도 너를 보내고 싶었다 비
애여
아그네스는 이미 발차하고
밀바가 부르는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듣는 밤이다
누군가는 하루하루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관공서에서 인간의 헛된 욕망을 설계하며 평
생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밤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심야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연기하며 삶을
지속한다
누군가는 곧 부서질 건축물을 설계하고
누군가는 잘 지어진 은행 건물 속에서 평생 자신이 가
질 수 없는 돈을 세며 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어 있다
나는 오직 글을 쓰면서 이번 생을 살고 싶었다
내가 산책하고 싶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이번 생을
횡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 하나 뉠 지상의 방 한 칸 없는 비애여
세상 같은 건 다 버리고 산골로 가고 싶어도 막상 갈 수
있는 산골이 없다
끝내 산골에 당도한다 해도 오두막을 지을 한 평의 땅조
차 없으니
나는 이제 화전민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이 행성의 땅들을 분할했나
언제부터 그 땅의 주인이 당신들이었나
태초에 지구라는 행성이 생겨날 때 이 행성의 그 어디에
도 주인은 없었나니
미리견도 영길리도 불란서도 애초에 없었나니
집도 절도 땅도 없어서 슬픈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분노는 정당하고 그대들이 점거하는 거점은
아름답다
새드앙에서 이 시대 혁명 예술가 동지들에게 알린다
이제는 더 이상 뻔뻔한 자본주의에 예속되지 말자
굴복하지도 말자
우리들 싱싱한 중지로 세상을 향해 퍽큐를 날리며
눈 쌓인 자작나무 공화국을 세우자
가을이 오기 전 우리가 꿈꾸는 겨울을 완성하자
늦가을이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급류에 휩쓸려 그녀는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강가에는 갈대밭이 무성하고 처음 보는 아름다운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갈대밭 언저리에서 숲 쪽으로 뛰어가며
나는 그녀를 손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그녀에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강을 건너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으나 범피
중류처럼 자꾸만 떠내려가며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잊을 수 없는 눈동자였다
깨어나니 꿈이었다
낭만적이오 오 낭만적 낭만은 적이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는 것이오 폭풍우 치는 대관령 밤
의 음악제였소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