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구락부 8진
사당역 언덕 벤치 모임에서 출발했지요
석양이 질 무렵이면 밥벌이를 끝낸 이들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번개를 쳤는데
주로 번개에 맞아 사당역 언덕 벤치로 호출된 사람은
익산 출신 ‘에세이소설’ 작가 청야(淸夜)
장수 출신 술꾼 석운(石雲)
김제 출신 술꾼 사노(思老)였지요
정선 출신 시인 생강은 술꾼에 담배꾼이었는데
몸이 몹시 상했었지요
그럭저럭 몇 잔의 술으르 기울이다 석운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것을 제안했고
곧바로 구락부의 이름이 정해지고
삼나무 구락부는 태동되었지요
삼나무는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만나자 하여
구락부는 세상 시름 내려놓고 함께 즐기자 하여
그렇게 되었지요
이상, 이태준, 박태원 등이 활동했던 구인회(1)처럼
아홉 명이 즐기면 더 좋을 텐데 아직은 칠인회죠
정식 출범을 하면서 1회 정기 모임엔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닌 7인의 술꾼들이 모였지요
앞의 네 명에 더하여
서울 출신 술꾼 췌세(贅世)
대구 출신 화가 항사(恒沙)
서울 출신 시인 사하(寺下)였지요
삼나무 구락부는 이미 4차 전인대까지 가졌는데
1년에 두 번 횡성 청일면 사노형의 농막에서 술을 마시
고 엎어지고
매달 한 번 사당역과 이수역 사이에 있는 순댓국집에서
엎어지자고
취중 결의를 했지요
그러나 엎어지고 싶은 일이 생기면 수시로 번개를 날린
다오
구락부니까 두 명이 더 들아와 아홉 명이 즐길 수 있으면
삼나무 구락부 완전체(2)가 되겠지요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주소
7인의 만장일치로 추천은 완료될 게요
돌아갈 조국을 잃어버린 50년대 북한의 청년 예술가들은
모스크바 근교의 숲에 모여 모스크바 8진(3)을 결성했
지요
진실되게 살자고 이름도 모두 진으로 바꿨지요
그들을 따라 이름을 이진, 소진, 박진, 정진으로 바꿀 필
요는 없겠지만
술을 마실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출몰하는 정선된 7인의 술꾼
우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 날아가
‘영월하라’를 ‘영원하라’로 바꾸는 기적을 보기도 하겠
지;만
7인이든 9인이든 정선에서 영월까지 그녀에서 영원까지
아름답게 술잔을 기울이는 우리는
성하의 이팝나무를 지나온 삼나무 구락부 8진
우리의 언어는 언제나 첫눈처럼 쏟아질 게요
*
모스크바 근교의 모니노 숲은 아니지만
새드앙 근처 삼나무 숲에서 우리 이렇게 만나
시니피앙 시니피앙 술잔을 부딪치며
굳은 시니피에로 맹세하나니
조진 선생, 드디어 삼나무 구락부 8진이 격렬하게 완성
되었구랴
조직우너 제1강령
―나의 음주를 적에게 알리지 마시오
*
(1)구인회― 1933년 8월 이종명(李鍾鳴), 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효석(李孝石), 이무영(李無影), 유치진(柳致眞), 이태
준(李泰俊), 조용만(趙容萬),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9인이 결성하였다
그러나 발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인 이종명과 김유
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태웢(朴泰遠), 이상(李箱),
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그 뒤 유치진, 조용만 대신
에 김유정(金裕貞), 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언제나 인원
수는 9명이었다
(2)삼나무 구락부 완전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
의 희망이 무엇이냐
괴산 소수면 출신 비래형은 임꺽정을 닮아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서림이처럼 머리도 비상하고 글재주가 출중하지
소수면의 고추를 닮아서 그런가 푸근하게 웃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바뀔 때면 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
홍진비래라 놀리면 흥흥 콧방귀를 뀌는 품새가 동무들
의 마음을 푼푼하게 하지
괴산 장날 종이 상자에 든 어린 강아지처럼 눈동자가
참 아련하고도 깊구나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사람은 더더욱 좋아하는데 삼나
무 구락부 8진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것은 형 자체가 하나
의 구락부이고 8진이기 때문이라
괴산 차부 옆에 있는 식당에서 올갱이 해장국에 소주
한잔 마시면 괴강의 물들이 전부 비래형 만세를 외치지
괴강의 물들이 괴물인 탓
감상적이고 우아하며 주체적이고 격렬한 비래형은 평생
함께 술을 마시자고 약속했지
형이 보고 싶다
형의 너털웃음이 그립다, 흥흥
(3)모스크바 8진― 정린구, 허웅배, 한 대용, 리경진, 김종
훈, 리진황, 최국인, 양원식 8인을 말한다
김소영 감독의 다큐멘터리「굿바이 마이러브 NK: 붉은
청춘」은 한국 전쟁 때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
났다 현지에서 망명한 여덟 청년을 담았다
새롭게 발전하는 조국을 위해 똘똘 뭉쳤던 이들은 1956년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초를 다진 종파사건을 1인 독재로 비
판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1958년, 소련 망명이 하락되자 이들은 모스크바 근교 모
니노 숲에서 ‘8진’이라 불리는 결사체를 맺는다
작가, 배우, 감독, 촬영기사가 된 8진은 시베리아와 우크
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곳곳으로 흩어졌다가 카자
흐스탄으로 하나 둘 모여 서로를 지지하고 붙들어 주며 영
화를 만들었다
이들 중 생존해 있던 최국인 감독과 김종훈 촬영감독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망명 북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룬다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에서 공부하던 이들은 1956년 북
한에서 종파사건이 일어난 후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한다
돌아갈 곳을 잃은 이들은 스스로를 모스크바 8진이라고
칭하고 유라시아 대륙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를 숙청하
고 자신의 체제를 강화한 정치적 사건이다
모스크바 영화대학 재학생 중 허웅배, 최국인 등이 종파
사건을 비판하며 망명을 주도한다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더는 장학금을 주지도 말고 학교
에서 퇴학시킬 것을 소련 정부에 요구한다
모포 하나만 가지고 기숙사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집
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 이들은 모스크바 교외의 숲속에
거적을 깔고 한 달을 버티며 진로를 모색한다
마침 스탈린(1878~1953)을 이어 집권한 흐루쇼프
(1894~1971)는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정책을 비판하고 있
었다
8인은 김일성 개인숭배정책 비판으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한 편지를 소련 당국에 보내 망명을
요구하고 정부의 명령으로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에 속하는
오지로 발령을 받는다
이들은 헤어지기 전날 밤샘 토론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자신들의 이름에 ‘참 진(眞)’을 넣어
개명할 것과 다음 사항을 결의한다
―하나, 자기 직장에서 겸손하고 성실하며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모범적인 일꾼이 될 것
―둘, 언제나 자체 교양에 노력할 것
―셋, 항상 동무들의 사업과 생활, 의식 수준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며 일체 어느 정도라도 중요한 문제
는 전원이 알게 하며 필요하면 토의에 부칠 것
―넷, 도덕적으로도 공산주의자답게 손색없는 인간이
될 것
―다섯, 조국 정세에 대한 자기 의견을 일체 외국인들
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을 것
―여섯, 투쟁과 관련되는 일체의 의견을 제때 토의에
부쳐 동무들이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도록 노력할 것
―일곱, 동무들이 서로 한 달에 한 번 이상 편지로 자
기 생활에 대한 총화를 지어 다른 동묻즐에게 알릴 것
리경진은 모스트바 인근으로, 정린구는 중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한 대용은 시베리아 바르나울로, 김종훈은
북극해 근처의 무르만스크로, 리진황은 우크라이나 근교
도네츠크로, 양원식은 러시아 스탈린그라드로, 최국인은
카자흐스탄 남부 알마아타로 배치되어 지방정부의 영화종
사자로 일한다
이들은 수재이자 북한의 귀족들이었다
리경진(리진)은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기억했고, 허웅배
(허진)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장군의 손자이며,
문학에 재능이 있는 한 대용(한진)의, 아버지 한태천은 김일
성을 만나는 사이였고, 독립군 출신의 최국인은 카자흐스
탄 정부로부터 공훈감독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한 대용은 러시아 여성 ‘지나이다 이바노브나’와 결혼한
다(한진이라는 인물은 매력적이다, 연애지상주의자 같기도, 예술
인 삶을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건너간다, 그에게서 고독한 예
술가의 초상을 본다, 그는 이미 한 편의 시다, 그러나 그 시를지
은 것은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다)
소련이 해체된 뒤 김종훈과 양원식, 한 대용은 최국인이
거주하는 따뜻한 지방 알마아타로 이주한다
영화 사운드 트랙으로 흐르는 빅토르 최의 노래는 참으
로 많은 걸 이야기해 준다
―헤이, 모두가 잠든다면 누가 노래를 부를까?
죽음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사랑에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지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