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데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에게 철
학을 강의하던 데카르트는 결국 심한 감기에 걸렸고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폐렴이 악화되어 죽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머리를 빡빡 깎곤 했던 마야콥스키는
1912년 12월「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유서 세 번째 줄에 “릴리,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쓴 그는
1930년 4월에 권총 자살했다
1966년「관객모독」을 발표하며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페터 한트케는 2019년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문학상
을 받았다
「관객모독」으로 시작된 ‘낯설게 하기’가 53년 만에 ‘작가
모독’으로 돌아온 셈이다
담배를 피워 문 혁명이 나를 쳐다보지만 창문을 열고 나
도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겨울의 빛이 어느새 곁에 당도해 있다
건조한 듯 물기를 머금은 겨울의 빛은 유리창을 지나 스
웨터에 닿는다
무심한 듯 따스한 빛, 누군가는 그걸 빛의 호위라 부르
고 또 누군가는 빛의 과거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냥 겨울의
빛이라 부른다
항온동물에게 겨울의 빛은 늘 체온처럼 그리운 것일 테
고 그것은 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스웨터를 통과한 뒤 심
장의 내면에 닿는다
창밖을 보니 은행나무는 무수히 많은 비밀들을 달고 마
치 아무 비밀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화안하게 서 있다
바람이 불더니 여기저기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나뒹
군다
행인들의 발길에 부딪히는 세상의 비밀들, 어느 날 은행
나무는 자신의 이파리들을 모두 지상으로 떨군 뒤 앙상한
진실로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끝끝내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채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
온몸으로 비밀을 말하지만 결국은 드러낼 수 없는 뿌리
의 비밀만이 지구의 내면으르 향해 통곡하고 있는 시간
누군가의 통곡 소리를 듣는 달팽이관이거나 세반고리관
이거나 유스타키오관 속에 신은 있을 것이다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를 지나 달팽이관을 맴돌던 소리
의 입자들은 겨울의 빛 속에서 마치 철학자의 방처럼 빛날
것이다
산책길 위로도 겨울은 왔다
겨울의 빛을 머금고 있는 낙엽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비밀
문서보다 더 낡아 손으로 만지면 바스러질 듯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낙엽들은 어디론
가 쫓기는 여진족 같고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에서 이동하
는 구름들은 마치 유목민의 천막 같다
인류는 먼 옛날에는 사냥과 수렵과 유목을 위해 떠도는
떠돌이였을 텐데 언제부터 콘크리트로 된 단단한 집들을
짓고 이토록 삭막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 것일까
편리한 삶이 미적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닌 이유는 뭘까
자본주의적 삶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나의 핏속에는 아직도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어 도시
에 살면서도 여전히 방랑하는 꿈을 꾸곤 한다
어두워지면 다락방으로도 눈발이 칠 것이다
밤이 오면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이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이 탄생하고 있는 밤은 모두 성탄
제의 밤이다
언제부터인가 종류별로 조금씩 소금을 수집했다
소금에 대한 전문적이니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소금 생산
지의 지명에 이끌려 소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세상의 잡다한 맛에 식상해 소금 커피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소금과 커피 만으로 이루어진 소금 커피를 마시는 날은
이상하게도 마음은 아득하게 슬퍼지고 멀리 있는 사람들
에게까지 마음이 가닿곤 했다
인간에 대한 혐오와 애증이 마음속에서 싹트던 무렵이
었을 것이다
구입했던 소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카마르그와 게랑
드 소금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신안 염전 같은 불란서의 카마르
그 습지와 게랑드 지방에서 난 소금이었을 것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카마르그 소금은 입자가 가늘고 곱게
빻여 있어 섬세한 짠맛을 가지고 있었고 게랑드 소금은 카
마르그보다 입자가 굵어 일반적인 음식에 짠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을 찍어 먹기에 좋았다
10여년 전에 산 두 통의 소금은 아직도 여전히 사용 중
인데 게랑드 소금은 조금 남아 있고 카마르그 소금은 아직
절반 이상이 남아 있다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소금 고유의 맛을 유지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소금의 맛을 먼저 보고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아마도 소금을 구입할 때의 기준은 소금의 이름이었을 것
이다
나는 이 두 통의 소금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음식을 해 먹
고 얼마나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가끔 소금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나 시각적 느낌이 마치 저 먼 허
공에서 누군가 인류를 위해 소금을 뿌려 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창문을 여니 소금 같은 눈발이 세상의 어둠 속으로 떨
어지고 있다
소금이 귀했던 시절 소금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적 정책
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당시 소금은 小金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소금이 귀한 음식 재료가 아닌 시대에 사는 인
류는 과연 행복할까
모든 것이 풍족해, 역설적으로 사물에 대한 소중함을 망
각한 시대에 나는 나에게 당도한 두 통의 소금을 보며 카마
르그 습지와 게랑드 지방 염부의 거친 손마디를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곳에 인류는 당도해야
한다
인류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것들에 댛란 소중한 의미를
망각할 때 인류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런 최악의 지점까지 인류가 당도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지금 한 명의 시인으로 소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든 시인의 의무며 사명일 것이다
스탕달의 연애론에 나오는 잘츠부르크 소금 광산의 예
를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소나무 가지에 엉킨 소금 결정
을 다이아몬드로 인식하고 누군가는 그냥 소금 결정체로
본다
사물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인식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잘츠부르크 소금광산의 소금 결정체
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그는 소금을 그냥
소금으로 바라본다
리얼리즘의 다이아몬드다
소금 같은 눈발이 치는 오늘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일
지도 모른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한다
한 예술가에 대한 최대의 찬사다
나도 그런 찬사를 받은 적이 있던가
하지만 그러한 객기조차 그리워지는 밤이 있다
바로 오늘처럼 어둠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소금 같은
눈발을 보며 겸손해지는 밤이다
이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데카르트나 페터 한트
케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었다
또 이 세계의 내면을 구름처럼 떠도는 쓸쓸한 불란서 고
아들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글은 아무래도 소금에 관한, 아니 어쩌면 소
금을 제외한 그 모든 것에 대한 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 지포라이터와 담배 케이스를 가지고 다닌다
가끔 심심할 때면 담배 케이스의 그림을 바꿔 붙인다
최근에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린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V의 모습이 좋아
그것을 오려 담배 케이스에 붙였다
어떤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며 의도적으로 그림을 붙인
건 아니지만 그림이 붙여진 담배 케이스를 볼 때마다 나는
V를 보게 되고 V의 미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콧수염을 달고 웃는 V의 미소는 아름답다
V의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
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빗방울 속에 신이 있다”라는 말을 어느 시에 쓴 적이
있다
그 말이 정확히 어디서 온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나
는『브이 포 벤데타』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최근
에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을 뒤져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
이드 원작의 그래픽노블을 구입해 읽으며 샅샅이 뒤져 보
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말이 끝내「브이 포 벤데타」에서 온 것이라면
아마 워쇼스키 형제가 쓴 영화 각본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의 말 속에 신이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책꽂이 맨 위 칸에 꽂혀 있던 데카
르트의『방법서설』을 꺼냈다
그동안 쌓인 먼지를 좀 털어 내고 비닐에 감싸인 책표지
를 보고 있노라니 밤안개처럼 감회가 밀려온다
책을 구입할 때는 분명 노란색이었는데 표지는 어느새
감잎 빛깔로 변해 있다
책 구입 연도는 1989년, 비닐을 드나든 공기들의 흔적,
30년 산화작용의 결과이다
감잎 빛깔로 변한 표지 자체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
같아 표지에 그려진 데카르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다
방의 한쪽 구석엔 수염을 기른 몰리에르가 눈앞엔 수염
을 기른 데카르트가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 역시 수염을 길렀다
조금씩 자라나는 수염 속에 인류를 위한 시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프로필을 볼 때 수염을 기른 얼
굴에 마음이 간다
원래 수염이 나지 않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도 나는 간혹
내면의 수염을 본다
수염이 형성하는 얼굴의 지도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만
큼의 구불구불한 길들과 섬세한 감정의 지점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다락방의 문을 열면 어느새 세상의 저녁은 누군가의 수
염처럼 길게 어둠을 드리운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간혹 흰 수염처럼 휙휙 눈
발이 친다
눈발이 치는 오늘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일지도 모른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떨어지던 눈은 함박눈으로 바뀔
태세다
빗방울 속에 신이 있다면 눈발 속에도 또 다른 형태의
신이 있을 것이다
눈의 형상을 한 신, 눈은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을 떠돌
다 지상에 떨어져 쌓인다
눈의 소리를 듣는다
눈의 이름을 묻는다
허공에서 조금씩 돋아나는 눈발 속에 또 다른 형태의
신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수많은 입자들의 결정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입자들의 결정체일 것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수많은 입자들의 결정체가 사물을
이룬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엔 결정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물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이며 변하고 있기 때문
이다
칼 세이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변용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지구라는 행성을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말한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라는 행성조차 창백한 푸
른 점, 하나의 입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입자 속의 입자 속의 입자 속에 어쩌면 전 우주를 껴안
을 위대한 생각이 있다
생각 속에, 누군가의 코기토 속에 가장 확실한 신이 있
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저녁이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위대한 예술가는, 철학자는 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오늘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일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밤이다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위대하고 성스러운 밤이다
밤새 함박눈이 펑펑 내려 아침을 다 뒤덮어 버릴 것이다
오늘 새벽 강의는 없을 것이다
아침이 오기 전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