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아날로그가 됩니다
영규 휴가 나옴
백두에서 한라까지 오후 다섯 시
눈으로만 볼 것
보았니
보았지
가니
갈 거니
갈까
가야지
다 잊었니
우린 젊잖니
영회는
풀무질 게시판에 꽂힌 종이를 떼어
자신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오지 말길
영규 형과 둘뿐이길
초여름 교정의 먼 길을 돌아 가까운 곳으로 갔다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소리내어보고
한터소리에서
청계천 8가를 불러주던
영규 형을 좋아했다
노동해방은 쥐뿔도 모르면서
좋아해 형이 부르기도 전에
그런 입으로 동지라고 말했는데
영규 형
그러나 지금은 우리 둘이 땅끝에 갔던 걸 생각해요
땅의 끝으로 걸어가서
여기가 땅끝
끝이야
우리도 끝이라고요
의문을 가지고 인생을 새롭게 살자 다짐하면 될 걸
못하고
흑염소탕을 먹고 열불이 나서
서로 등에 찬물을 부어줬지요
형의 등은 휘어질 대로 휘어져서
보리도 키울 수 없고
호랑이도 뛰놀 수 없고
기껏해야 돌을 세워 돌을 올려놓고 무덤속에서
메―에 하고 염소가 풍겨나왔습니다
등이 이렇게 무너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래
형이 제 등을 공연히 두드려서
제가 토하고 말았죠
역사의 굴레를 시원하게
그때 이후로 저와 형은 검은 털이 숭숭 돋은 후일담이 되
고자 하였습니다
젊어서 백 년 다르고 늙어서 백 년 다르다지만
영규 형 우리가 그때 그 바위 위에
검은 똥을 누었던가요 힘을 줬던가요
사뿐사뿐 이승을 거닐었죠
영회는 로터리에서 들려오는 최신가요를 듣다가
그만 종이를 씹어먹었습니다
뱃속에서
영회는 영규 형을 보고
인사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괜스레 허파꽈리를 톡톡 터뜨렸습니다
웃다가 실실 웃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짐승으로 볼 것인가
오장육붕서 갈등 한 판이 벌어졌습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회는 창자 언저리에 우두커니 앉아서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형이랑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습니다
영규 형이 달려왔습니다
언제 사람이 될래
메에
울었습니다
다섯시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영규는 영회와 마주앉았습니다
둘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졌고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강독하다가
이 모든 게 꿈인 줄 알게 되고
잠에서 깨어
등에 묻은 흙을 서로 털어주고
무덤을 나오며 속닥거렸습니다
여기가 끝인가
여기가 끝인 거 같아요
영회는 애상에 젖은 채로 간신히
똥꼬를 빠져나왔습니다
구깃구깃한 것을 잘 펴고
실존을 강타할 노래가 속수무책으로 튀어나오는 리어카
를 지나
풀무질로 들어가 영회는 다시
영규 휴가 나옴
백두에서 한라까지 오후 다섯 시
눈으로만 볼 것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시계를 보았습니다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김현, 문학동네시인선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