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메카가 지축을 흔드는 진동소리를 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방송에서 트레이드마크를 담당하는 분홍색 메카는, 이번에는 디지털 패턴의 위장색을 입은 체 조종사가 탑승하는 부분은 바깥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위장색 코팅지를 짙게 바른 체 정말 군용기처럼 보였다. 토끼를 연상시키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영화 속에서 나오던 철혈의 로봇처럼 자신이 사냥할 먹잇감을 찾는 메카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공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살려줘, 제발!"
메카에 탑재된 생체인식시스템이 작동했다. 자동화 시스템이 짤막한 경고 문구를 던지자 어두운 메카 안에서 엎드려있던 그녀는 메카의 샷건을 때어내고 부착한 군용 중기관총을 적이 엄폐하고 있던 자리로 발포했다. 대구경의 탄환이 무자비하게 콘크리트 벽에 처박히며 엄폐물과 함께 적을 갈아버릴 작정인 것 처럼 보였다. 그녀의 메카가 쏟아붓는 사격에 버티지 못한 병사 한명이 튀어나와 자비를 구걸했다.
[UN 협정에 따라, 항복한 적에 대한 포로 대우를 준수해야 합니다.]
"알게뭐야, 쏴."
메카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보내는 경고문을 무시한 체,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이 걸려있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몇발의 총탄이 무자비하게 적 보병을 찢어버렸다. 오른쪽 어깨가 찢겨져나간 적의 시체를 그녀는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적은 살아있었다. 그녀는 메카를 움직였다. 족히 톤 단위로 나갈 메카의 다리가 적의 아직 남아있는 몸뚱이를 짖밣았다. 마치 달팽이를 짖밣는 것처럼 뭔가가 퍽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메카가 사람을 짖밣은 것을 생생이 느낄 수 있었지만, 그저 드는 생각은 청소하기 귀찮다는 짜증뿐이였다.
그날의 작전이 끝나고, 그녀는 기지로 귀환했다. 그녀와 비슷한 기체에 탑승한 조종사들이 이끄는 메카 수십기가 이미 격납고에 대기상태로 서 있었다. 그 중 빈자리로 들어간 그녀는 메카의 조종 시스템을 종료하며 메카 뒤쪽으로 자신의 몸을 뺐다. 기름과 화약 냄새, 그녀가 나오자마자 맡은 냄새였다. 머리에 끼고있던 인터페이스 연결 장치를 빼내며 그녀의 얼굴이 밝은 격납고의 빛에 일그러졌다. 땅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메카에 묻은 피와, 살조각들이였다.
이제는 익숙한, 그런 것들을 그녀는 무감각하게 바라볼 뿐이였다. 그녀의 몸은 발랄한 슈트대신에 방탄 성질의 탄소섬유로 제작한 군용 슈트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허리춤에는 권총집과 탄약집이 걸려있는 홀스터가 채워져 있었다. 지난 3년간, 그녀가 겪은 변화는 이런 것들이였다. 처음으로 불타죽는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때가 생각났다. 그녀는 옴닉과 싸워왔다. 그것들은 강철과, 기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그녀의 적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옴닉보다 훨씬 나약한 인간들이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런 것들에도 익숙하다. 망설임없이 적을 죽이고, 신경질적으로 항복한 포로들을 학살한다. 그녀는 이제 이런 것들이 일상적이다. 군 정비사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메카의 상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건성건성 대답하며 그녀는 메카의 다리에 묻은 살조각들을 가리켰다. 정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메카로 사람을 짖밣았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것을 청소해야한다는 혐오감이 뒤섞인 얼굴이였다. 그녀가 수고하라며 정비사를 지나치자, 정비사는 그녀에게 경례를 올렸다.
그녀가 자신과 세명의 하급자들과 지내는 열악한 취침실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금발머리,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흑색 슈트, 무엇보다 어느곳에서도 번쩍번쩍 빛난 눈빛까지. 메르시였다. 그녀는 메르시를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메르시는 사무적인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언니? 언니가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관물대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메카는 좁아서 보관하기 어려웠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임무를 마치고 나서야 한 개비 피울 수 있는 처지였다.
"원래라면 지금쯤 북아프리카에서 난민 봉사를 하고 있어야 겠지만, 국제연합에서 특별 임무가 떨어졌단다."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은 놀랍다는 듯 메르시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분명 전쟁 때문이리라. 메르시는 씁쓸한 심정으로 이해했다.
"특별 임무라, 저번에 한번 명령이 떨어지긴 했었죠. 포로 학살때문인가요?"
"바로 그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민감한 안건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이곳에서는 흔한 일이죠, 전쟁이니까. 그녀의 말에 메르시는 얼굴을 구겼다. 흔한 일이라고? 이건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정도로 중대한 일이야. 메르시가 말을 끝마치자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죠. 미안해요 언니.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메르시를 조롱하는 듯 했다. 국제사법재판소, 어쩌잖건지. 그녀는 관물대 상자 하나를 꺼내 거기서 철제 수통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뚜껑을 따자 독한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겼다. 그녀가 숨겨둔 밀주였다.
"아, 뭐,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요. 이정돈 괜찮겠죠?"
기름때 묻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녀는 철제 수통 안의 술을 한모금 삼켰다. 책상 위에 있던 스탠드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서야, 메르시는 좀 더 그녀의 얼구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짙은 다크서클과 생기를 잃은 눈빛은 그녀가 지금 얼마나 피폐한 상태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은 3년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3년동안 그녀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송하나의 왼쪽 뺨 아래로 화상으로 인한 흉터가 살짝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메카가 피격되어 폭발하기 직전 긴급탈출했을 때 생긴 흉터였다.
"그래서, 국제연합에서 포로학살에 대해서 조사한다구요? 뭘 하실 생각이세요?"
그녀의 피곤한 눈빛이 메르시를 올려보았다.
"메카들에 기록된 전투기록영상을 사찰할 생각이야. 그리고 나서 전투 보고서나, 상대국 병사들의 증언, 그리고 현장 조사, 그런 것들이지."
메르시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보았다. 처참하게 변해버렸구나. 전쟁은 언제나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는 했지만, 어린 그녀가 이토록 변해버린 것을 메르시는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그녀는 수많은 죽음을 봐왔고 언제나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조각나 버린 인간의 내면이였다. 그것은 나노머신도, 현대 의학도 치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서 그녀는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이 아이도 결국은 고통받고,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라고 메르시는 자신의 탓인듯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 안정되어보였다. 줄담배를 피우고, 숨겨둔 술을 마시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들였다. 그녀는 불안한 듯 보였다. 메르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떨림을 멈추고 메르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메르시의 손 위에 얹어졌다.
"...근데, 이상하네요."
"뭐가?"
메르시는 가슴 한켠에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때문에 조사하는 거라면, 이미 다 끝났을 텐데. 모를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공허한 눈빛이 메르시와 마주쳤다. 그녀의 손이 권총집에 닿았다. 그것이 반사적인 행동인지, 배신감에 따른 분노인지, 그것도 아님 자포자기의 심정이였는지 메르시는 알 수 없었다. 두사람만이 있던 방의 문이 덜컥 열렸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권총을 뽑았지만 들이닥친 병사의 사격이 더 빨랐다. 그녀의 가슴에 꽂힌 전류탄이 그녀의 온몸을 마비시켰다.
"송하나 대위, 당신을 전쟁 범죄자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 시간 이후로의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립니다."
무력하게 늘어진 그녀의 두 손을 구속하며 푸른 헬멧에 큼지막하게 MP라고 쓴 완장을 찬 병사들은 그녀를 연행했다. 메르시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녀를 설득해서 순순히 연행을 할 계획이였다. 그러나 그녀가 총을 뽑은 것은, 그건 돌발적인 상황이였다. 지금도 메르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총을 뽑은 이유를,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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