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퍼즐을 풀고 있는 도중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현관 비밀 번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이다.
녀석과 같이 왔을 친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깜짝 놀란다.
당연히 남자를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타난 것은 젊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문가를 데려온다더니 여자 친구 자랑하러 온 건가?' 싶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청바지에 수수한 반팔 티셔츠라는 캐주얼한 차림에 머리도 적당히 묶어 내렸을 뿐 제대로 빗질조차 하지 않은 듯
꾸미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미모를 감추는 건 역부족한 듯 했다.
내 복잡한 심정과는 다르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소개한다.
"이 녀석이 내가 말했던 그 녀석이야. 아마추어지만 전파에 관해서는 거의 프로급이라고 할 수 있지."
녀석이라고? 아니, 대체 어떤 사이길레 저런 미인을 그런 식으로 막 부르는 거지?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자세히 보니 그 여성은 커다란 검정색 백팩을 등에 메고 있었는데,
제법 두툼하게 보이는 게 왠지 전문가 같은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가방을 내려놓는다.
"웃차."
메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내려놓는 것을 보니 제법 무게가 있어 보인다.
그 안에서 그녀는 큼지막한 직육면체 박스를 꺼낸다.
처음 보는 도구였지만 한 눈에 봐도 가전제품같이 생겼다.
약간 오래된 듯 한 그 기계에는 5인치 쯤 되어 보이는 액정 화면과 몇 개의 다이얼이 붙어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증폭기라는 거지?"
그녀는 내가 찾아놓은 철조가리들을 들어올린다.
한참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내려놓고,
박스에 연결되어 있는 플러그를 벽 콘센트에 꽂는다.
"어떻게 하는 건데?"
기혁이는 흥미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옆에서 관찰한다.
뭐든지 아는 것 같은 저 녀석도 모르는 건 있는 것이다.
"간단해. 이 철조각이 네가 말한 대로 증폭 역할을 한다면 이 철조각에 전자파가 수신되겠지?
이 기계로 그 전파를 감지하고 나서, 해당 주파수의 발신 방향을 추적해가는 거야."
"흠. 생각보단 훨씬 간단하네?"
"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로, 전자파가 흐르는 방향은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라서….
솔직히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나침반과 지도만 들고서 길을 찾아 간다는 건 쉽지 않겠지?
한국에 날아다니는 전자파가 한두 개도 아닌데, 그 미세한 신호를 추적해 가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지나 모르겠어."
"두 번째는?"
"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 인간들은 전파를 보내 사람의 머리를 조종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 조종하는 시간동안만 전파를 송신하겠지?
따라서 취침 시간 안에 그 전파를 찾아내야 한다는 건데.
그 짧은 시간만으로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거지.
아마 굉장한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걸?"
그럼 오늘 하루는 물론이고, 무기한으로 그 놈이 시키는 대로 따라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대단한 실망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정도라도 어디냐.
반대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아무 대가도 없이 며칠이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어, 잠깐. 그럼 오늘은 밤새도록 돌아다녀야 한단 말이야?"
그제야 중요한 생각을 떠올린 내가 깜짝 놀라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그래서 아까 자뒀던 거야."
"너도 그렇지만…이 아가씨는? 내일 출근 안 해요?"
아무리 기혁이 녀석이 부탁을 했다지만 생판 모르는 날 위해 이렇게까지…세상이란 아직 살 만하구나.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녀석이 대신 대답한다.
"아. 걱정 마. 이 녀석 백수거든. 낮에 실컷 자면 돼."
"백수가 아니라 프리랜서거든?!"
그녀는 발끈하며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서는.
"내가 이 일 때문에 100만원짜리 일 하나 버리고 온 건데. 다시 돌아가 버릴까 보다."
"이런 몰인정한 여자 같으니라고. 사람 생명이 달린 일이잖아?"
"그러니까 말조심하란 말이야."
"저기…."
나는 험악해져 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나중에 보상은 할게요. 그러니까…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사실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돈 가지고 생색내는 것 같아서 약간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자 그 여성은 갑자기 얼굴을 활짝 피고선
"아하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 원래 우리는 만날때마다 이러니까요."
"그, 그래도…."
그녀는 표정을 180도로 바꾸고 싱글싱글 웃는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스러웠다.
"그것보다, 당신도 이 녀석이랑 나이 같은 거 맞죠?"
그녀는 기혁이를 곁눈질하며 말한다.
"그런데요…."
"그럼 그냥 말 놓자. 존댓말 쓰려면 서로 불편하잖아."
그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바로 반말을 한다.
나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금방 금방 친한 척 하는 녀석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말 놓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그러던가."
"그러니까 네가 빨리 잠들어야 내가 할 일이 생긴다고. 보상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얼른 눕기나 해."
…나는 이런 성격 싫지 않지만, 아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엄청나게 나뉘겠지.
"무슨 소리야? 어차피 때가 되면 끌려 들어갈 테니, 깨어있을때 최대한 준비를 해 둬야지."
"아하하. 그래. 그래. 열심히 공부해. 이게 그 연습 문제야?"
그녀는 모니터상의 화면과 내가 끼적이고 있던 연습장을 번갈아 들여다보더니 금방 고개를 돌린다.
"우와. 수학이야? 난 숫자는 하나도 모르니까 도움이 안 되겠네."
"숫자가 있긴 하지만, 결국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는 퍼즐이야. 네가 좋아하는 미스터리와도 닮았지."
기혁이가 그렇게 설명하긴 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숫자와 수식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타입인가 보다.
전파도 결국 물리 분야니 수학과 관련 있는 것 아닌가?
"아. 몰라. 몰라. 난 핸드폰이나 하고 있을게."
"할 것 없으면 잠이나 자지 그래? 아무래도 밤새도록 돌아다닐 게 될 것 같은데."
"아. 그렇잖아도 낮부터 하도 잤더니 잠도 안 온다."
그리고 그녀는 대체 무엇을 하는지 바닥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고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본다.
나는 다시 문제 풀이에 들어갔고, 기혁이는 내 옆에 선 채로 내가 풀고 있는 퀴즈가 막히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