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눈을 떠 보니, 완전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단순한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상황.
아까까지의 긴장과 압박감은 전혀 느낄 수 없는 평온한 세상.
돌아왔다. 드디어 이 현실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밤이 되면 다시 그 악몽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젠장.
생각 같아선 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마음껏 이 평온함을 즐기고 싶지만,
그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현실 도피를 하는 건 엄청난 바보짓이다.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이불에서 뒤치닥거릴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제 갑자기 잠들어 버린 것은 이상했다.
한 번 잠이 왔었다가 완전히 물러간 상태이기도 했고, 동영상을 보는 내내 졸리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갑자기 꿈속에 들어와 있었고, 깨어나 보니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컴퓨터를 하던 도중 무의식중에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운 모양이다.
이불이야 24시간 개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깔아둔 건 아니다.
컴퓨터와 모니터는 켜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나는 밤 늦게까지 컴퓨터를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눈을 떠 보면 벌써 아침이 되어 있고 이불 위에 누워 있을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피곤을 못 이기고 쓰러진 상황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오늘 밤에만 정신 차리면 괜찮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한 것 같지가 않다.
역시 그 놈들이 무언가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원격으로 나를 잠들어 버리도록 만들 수 있는 어떤 수단이 있다면…나는 꼼짝없이 매일 밤 그 악몽을 꾸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평생을 그 놈들 뜻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깨어있는 동안 그 탈을 쓴 남자든 소장이든 둘 중 한 명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이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어떻게?
나는 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어디에 사는지도, 어디에 주로 출몰하는지도 전혀 모른다.
탈을 쓴 남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소장은 두 번 만나긴 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잠깐 이야기만 나눈 것뿐이라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한 상황이다.
아니, 잠깐만.
명함이 있잖아!
소장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건넸던 명함.
나는 부랴부랴 지갑을 뒤져본다.
좋았어. 아직 남아있다.
명함 속에는 그의 핸드폰 번호와 연구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제 끝났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
…그런데 말이지. 과연 이 전화번호가 진짜일까?
처음부터 나를 속일 작정이었다면 나중에 신분과 사생활이 탄로 날 위험이 있는 전화번호나
연구소 이름 같은 것을 떳떳하게 밝힐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쭉 빠진다.
그래도 전화를 안 해보는 것 보단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생각대로였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해지를 했는지 없는 번호라 나오고,
연구소라고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걸어보니 가정집에서 받았다.
이쯤 되니 더 이상 기대할 필요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함에 적혀 있는 대학 연구소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당 대학 홈페이지에 가서 학교 소개 페이지 등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연구소가 있다는 안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즉, 이 명함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정보가 거짓이었던 것이다.
젠장. 너무 허술했다.
만약 실험을 하던 도중에 연구소로 전화를 걸어봤거나 하다못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기라도 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텐데….
그렇지만, 실험이 워낙 단순하여 전화를 걸 만한 일도 없었고,
만약 전화를 걸어야 할 만한 상황이 있었더라도 연구소로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고 나서 연결이 안 되면 그때 연구소로 걸어보는 사람은 있어도…보통 핸드폰이 있는데도
연구소로 먼저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아마 실험 도중에는 핸드폰이 살아 있었겠지.
실제로 실험 중간에 그의 핸드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 상황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해봤자 물품 사기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보통 사기를 친다면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상대 쪽에서 돈을 주면서 요구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선불로 확실하게 받았으니까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꿈을 빼앗기고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인데….
….
역시 뻥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죽는 상황이 생기면 실제로도 죽는다는 것은 모두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고, 꿈은 꿈일 뿐이다.
즉, 우리를 조종하기 위한 놈의 공갈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는 건 불가능하다.
누군가 간 큰 놈 한 명이 목숨을 걸고 놈에게 반항을 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아니면, 다 포기하고 공부나 할까…. 결국 놈이 출제하는 문제만 다 맞춰버리면 살 수 있는 거잖아.
아니야!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어떤 문제를 낼지 예상할 수가 없잖아.
처음에는 숫자 퀴즈 쪽으로 가나 싶더니, 갑자기 주기율표가 나왔다.
다음에는 어떤 문제가 나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설령 하루 종일 책만 붙잡고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범위가 무한이라면 모든 문제를 맞히는 건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정답을 맞힐 확률이 1% 정도 늘어날 뿐이다.
게다가 문제를 내는 것 자체가 그 놈 마음에 달린 일이다.
쉽게 말해, 문제를 출제하기 지겨워지면 그 길로 우리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
놈은 비정상이다. 놈에게 있어서 우리는 게임 속 등장 인물에 불과할 뿐이다.
게임 계정을 삭제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은 없다.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야.
역시 나 혼자서 해결하는 건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인터넷 지식 검색 사이트에 어떻게 해야 좋은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
"그 녀석한테 상담을 해 보자."
물론 그 녀석이라고 해도 모든 것에 대해 아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 혼자 끙끙대는 것 보단 둘이 고민 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놈은 내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 제일 의지가 될 만한 녀석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녀석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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