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 후 우리는 침묵하고,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파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나는 수학 공부에 열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1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젠장. 또 그 악몽이 시작되는 건가."
어제도 이 시간쯤에 꿈이 시작되었지.
나는 책을 덮고 나서 절망이라는 기분이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둡고 암담한 기분이었다.
입대 전날 밤 느꼈던 그 참담한 기분과 흡사했다.
알고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
내 표정을 지켜보던 기혁이 녀석은 위로하듯 말을 꺼낸다.
"야. 너무 포기하진 마. 어쩌면 오늘은 잠들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
잠을 자게 만든다는 것은 가설일 뿐이잖냐."
하지만, 그 위로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젯밤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다 잠들었어. 그렇다는 것은 잠을 피할 수 없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말이지."
나 역시 오늘 하루 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봤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실은 어제 그 자리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예정이었으나, 잠들지 않고 버틴 사람은 빠졌던 것이지.
그러니까 실제 정원은 네가 말한 20명이 아니라 한 3~40명이었는데, 어제 잠들었던 게 그중 20명이었던 것일 수도 있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럴듯한 추측이었지만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어제 상황으로 보면 그 남자는 미리 팀을 다 짜둔 것 같았어.
만약 정원이 예정보다 줄었더라면 팀을 다시 편성해야 했을 거야. 하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어.
또, 4명씩 다섯 팀으로 떨어지는 20명이라는 절묘한 숫자도 그래.
만약 네 말대로 우연으로 정해진 인원이었다면 19명이었거나 21명일 가능성도 있었겠지. 아니, 그 가능성이 더 높지.
그랬더라면 팀을 나누기가 굉장히 애매했을 거야. 상당히 고민을 해야 할 문제지.
마침 딱 20명이라서 팀을 나누기가 수월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즉, 처음부터 2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
"흠. 과연."
녀석도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내심 내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해주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일단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 만약 잠들게 된다면 내가 깨워줄 테니까."
하긴,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이 녀석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깨워줄 수도 있겠다. 이론적으론 그렇긴 하지만….
"만약 놈이 내 두뇌를 원격 조종해서 잠들게 되는 거라면, 아무리 깨워봤자 일어날 수 없지 않을까?"
"아니. 나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 잠깐만."
그는 잠시 인터넷 웹 브라우저를 이용해 무언가를 검색한다.
몇 번인가 웹 페이지가 바뀐 후 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설명한다.
"잠. 즉, 수면이란 건 렘수면과 논렘수면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를 주기로 번갈아가며 반복되지.
일반적으로 꿈은 렘수면 때 꾼다고 하더군.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렘수면이란 뇌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취침을 말하는 거니까.
뇌가 잠들어 있는 논렘수면에서는 꿈이라는 사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네 꿈도 이때만 꾸는 걸지도 몰라.
네 생체 시간으로 추정했을 때 그 꿈은 3~4시간 정도 지속되는 것 같다고 했었지?
취침 시간 중 렘수면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 꿈은 연속해서 계속 꾸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고 사실은 연속이 아니었다는 말이군?"
"그렇지. 연속이 아니니 미분을 할 수 없지."
"…."
지금, 미분이면 연속이다. …에 관련해서 농담을 한 건가?
이 녀석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나름대로 시도하는 개그마다 전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머 센스가 없다고 해야 할까? 이럴 바엔 차라리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말이다.
아니, 그것보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괘씸하네!
녀석은 내가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머쓱한 듯 설명을 덧붙인다.
"아니, 그러니까 미분 가능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건데…."
"나도 이해했어. 이해를 했지만 놀랄 만큼 재미없어서 반응을 안 한 것뿐이지."
"음. 어쨌든 간에 논렘수면 때는 꿈을 꾸지 않고, 뇌가 비활성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라면 조종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따라서 그때 깨운다면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녀석은 극히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어쨌든 나는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잘 될 것 같지 않은데…."
"나는 가능성이 크다고 봐.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는데…."
"뭔데?"
녀석은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말을 포기한다.
"아니. 쓸데없이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내일 이야기 하자구."
"내일 무사히 눈을 뜰 수 있다면 말이지…."
말을 내뱉고 나니 암담한 기분이 꾸물꾸물 솟구쳐올랐다.
"나는 그 남자의 목적이, 너희를 모두 죽이려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위로하려는 듯, 녀석이 입을 연다.
"만약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분명히 어제 한, 두 명 정도는 본보기로 죽였을 거야.
게다가 이런 번거로운 장치를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건 그렇다. 솔직히 나도 목적을 모르겠다.
단순히 퀴즈 쇼를 진행하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살해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번거로운 선택이다.
문제를 일일이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라는 말은 아니야. 내가 얘기를 들어보니…뭐랄까. 솔직히 긴장감이 좀 떨어져 보였어.
실패하면 죽는 퀴즈라고 하기엔 너희가 조금 여유 있어 보인다는 느낌까지 받았거든."
"…그럴지도 몰라. 솔직히 마지막 문제가 나올 때쯤에는 다들 표정에 여유가 있었거든.
처음에 긴장했을 때 와는 전혀 달랐어."
"아마 너희 조만 그렇진 않았을 거다. 다른 조들도 결국 비슷비슷한 상황이었을 텐데….
인간이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극한 상황에서도 상황이 조금 호전되면 쉽게 긴장을 풀어버리기 마련이지.
조만간 '어차피 안 죽을 거다.'라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구는 녀석이 나올지도 몰라.
그런 녀석이 한두 명만 나타나도 통제 불가의 분위기가 되어버릴 수 있거든.
그렇게 되면…본보기로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사람은 많으니까 말이야."
그때 내가 바로 잠들었는지, 아니면 조금 더 깨어 있었지만, 기억을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더 이상의 기억은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악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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