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휴우. 굉장히 잘났다는 듯이 떠들어대기에 얼마나 잘났나 싶었는데, 내가 보기엔 별로 대단할 것도 없군그래?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서울 안에만 해도 적지 않은 숫자의 대학이 있지.
서울 내의 대학에서 1년에 탄생하는 졸업생의 숫자가 대기업 1년 공채 인원보다 훨씬 많으니 말이야.
게다가 학점은 간신히 3.0을 넘기는 수준이군. 그것도 4.5 만점의.
자격증도 없고, 어학연수도, 봉사활동도, 공모전 경험도 없으니 스펙이라고 해봤자 내세울 건 토익뿐이잖아?
토익 800점이라면 분명 낮은 점수는 아니지만 특출나게 높은 점수도 아니지.
이것 하나만 가지고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기업은 없을걸?
그런데도 여자라서 안 된다는 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해.
사실 전화 상담직이나 사무보조, 경리나 비서는 여성을 더 우대하거든.
물론 편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메신저로 잡담이나 하면서도 돈은 많이 버는 일만 원하는 너로서는 그런 직종은 생각도 안 해봤겠지만 말이야.
전공과 관련없는 직종에만 이력서를 넣으면서도 전공을 탓하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
애초에 제일 만만해 보이고, 경쟁률이 낮아 커트라인이 낮다는 이유로 어문 계열에 지원해 놓고
대학 다니는 동안 실컷 놀았으면서 이제 와 전공 핑계를 대는 것도 곤란하단 말이지. 아주 골치 아픈 일이야."
여자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어갔고, 나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제일 쉬울 것 같다는 이유로 수학과를 선택했으니까.
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잘하긴 했었지만,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수학과를 졸업해 무얼 하겠다는 비전 같은 것도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대기업밖에 안 본다는 거지. 사실, 이 정도 스펙이라도 어느 정도 눈을 낮췄으면 벌써 취업을 하고도 남았을 거야.
하지만, 끝까지 눈을 낮추긴 싫은지 대기업 공채에만 도전하고 있군.
거기다가 기껏 서류를 통과해도 인적성 검사에서 번번이 낙방.
인적성 검사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토익에만 의지하니 떨어질 수밖에.
그 토익이란 게 800이 넘긴 해도 졸업한 지 2년 가까이 되어서야 얻은 성적.
졸업 후 이렇다 할 이력이 없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마이너스지.
정말 취업할 생각이 있긴 한 건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집에 신세를 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자는 입을 일자로 다문 채 고개를 숙인다.
왠지…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것저것 변명만 하며 취업이 늦어지고, 집에 의지만 하게 되는 생활.
그나마 나는 지금 영어 공부도 하지 않고 있으니…. 더 심각한 상황이다.
아무튼, 두 명의 남녀가 반발을 시도했으나 모두 호되게 질책당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 정보만 잔뜩 알려지게 되자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어설프게 말을 꺼냈다가 아픈 곳만 잔뜩 찔리고 봉변당하기 십상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 나서는 사람이 없자 그는 우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녀석들 모두 마찬가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핑계 대며 돈과 시간만 축내고 있는 녀석,
토익을 준비한답시고 학원만 전전하는 녀석, 집에 빈대 붙는 생활이 너무 편하게 느껴지는지 떨어질 게 분명한 기업에만 이력서를 넣고
서류에서 탈락하고 나서, 취업난이라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하는 녀석.
그 밖의 모두들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모두 쓰레기다! 사회의 적! 한국의 수치! 가정의 기생충! 그게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다!"
"너희들은 단 한 번이라도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라도 자식이라는 이유로 귀하게 기르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학비와 자취 비용을 마련해 주시고,
이제는 결혼 자금을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하며 저축하고 계실 너희들의 부모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냔 말이다!
그런 부모님께 지금껏 효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느냐?
기껏해야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사오는 것이 전부겠지.
물론 그 카네이션도 부모가 준 용돈으로 산 것일 테고 말이다."
"가축보다 못하다! 가축은 쏟는 애정만큼의 애정을 돌려준다!
아무리 애정을 쏟아도 부모를 부양할 생각은커녕 자기 자신의 앞가림마저 할 생각이 없는 너희는 가축 이하의 존재다!
미물! 축생! 바퀴벌레 같은 수준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 같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냐?
너희는 인간이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행동하라!
여기서 나가고 싶나? 나가라! 싸워 이겨서 제 발로 걸어 나가라!
여긴 말하자면 취업 전선에서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놀고만 있는 제군들을 위한 임시 전쟁터다!
제군들의 비뚤어진 근성을 뜯어 고쳐줄 삼청교육대다!
여기서 살아남아 취업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거다!
그리고 쓰레기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 되어서 부모님께 효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떠들 필요 없어! 쓸데없는 잡념으로 갈팡질팡할 필요도 없다!
이겨라! 너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너희들의 부모를 위해서 말이다!"
놈의 말은 지나치게 혹독하게 느껴졌고,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젠장. 웃기고 있어. 일단 여기에서 놔줘야 취업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그때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주변에 있던 몇 명의 남녀가 언제부터인지 훌쩍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비슷한 상황을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처음 수련회에 갔을 때였다.
생전 처음으로 기압 비슷한 훈련을 열심히 받고 나서, 둘째 날 밤 캠프파이어 시간에 신나게 놀고 난 후,
갑자기 불을 모두 끄고 교관들이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지금까지 철없게 굴었던 자신에 대해
이 시간만큼은 반성하라는 식의 웅변을 조용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몇몇 애들이 무언가 감동했는지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늘 까불기만 하던 아이와 덩치 크고 성격도 거친 애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었지.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평소에 부모님 속 썩일 일을 별로 안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을 보니 딱 그 상황이 떠올랐다.
이 자식들. 대체 왜 우는 거지?
그때는 그 특유의 분위기라던가…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보면서
반성의 마음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있었지.
나 자신은 울지 않았지만, 이해를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지만, 전혀 다르잖아?
이런 정체불명의 수상한 남자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제멋대로 지껄이는 헛소리를 듣고 왜 질질 짜는 거야?
지금은 감동을 할만한, 그런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너네들, 정말 너네가 쓰레기라는 말에 동의하는 거냐?
멍청한 놈들! 완전히 저 남자에게 말려드는 거나 다름없어.
다른 놈들도 다 이 모양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남자에 대항해 싸우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략 1/4 정도는 울고 있었고.
약 절반 정도는 억울한 듯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머지 1/4은 나 같은 반응. 즉, '이 놈들 바보 아닌가?'하는 표정으로 주변의 인물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군. 저 녀석들이라면 그나마 믿어볼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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