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젠장.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기분이 나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가 주입했다던 그 여자의 집 근처 지형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개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던 터라, 나는 몸을 일으키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자식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접근했었던 건가?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루시드 드림에 대한 실험이니 뭐니 했던 것은 모두 내게 접근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었고,
진짜 목적은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에 내게 줬던 750만 원은 결국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고작 사람을 조종하는 쾌감을 맛보기 위해 750만원이라는 거금을 사용한 건가?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부자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아주 질 낮고 더러운 인간.
갑자기 갈증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놈들이 한 말이 사실일까?
정말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사실일까?
나를 위협하기 위해 잘 만들어낸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확인해보자.
그놈들이 말한 그 집에 가 보면 진실을 알게 되겠지.
서두를 것 없다. 이제 아침이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우선 밥부터 먹고, 천천히 씻은 후 러시아워가 끝나고 난 다음에 천천히 그 여자의 집으로 가 보자.
그리고 두 눈으로 확인해보자. 진실인가, 거짓인가 여부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내렸던 적이 없었던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거리를 걷고 있음에도 굉장히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작 꿈속에서 봤을 뿐인데…. 어떤 식으로 내 머릿속에 이 풍경을 '주입'했는지는 몰라도
'어느 역에서 내려서 어디 골목으로 들어가고….' 같은 단순한 2차원적 데이터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친구를 따라 한 번 와본 것만 같은 그런 생생한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다.'
그곳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예전에 지어졌는지, 요즘 건물에는 다 설치되어 있는 중앙 현관 도어록이 없었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별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분명히 그 사람의 집은 503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려 3번째 집 앞에 선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벨 소리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 한 번 더 눌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역시…그놈들 말대로 '집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것인가?
그놈들의 살인 행각이 사실이라는 말인가?
날씨는 춥지 않았지만,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아니야. 잠깐만.
지금은 10시다. 즉, 일반적인 사회인이라면 모두 학교에 갔거나 직장에 있을 시간이다.
백수로 있다 보니 시간관념이 완전히 사라졌군그래.
그러니 지금 응답을 하지 않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하지?
퇴근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고.
만약 늦게까지 기다렸음에도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근을 하거나 숙직을 할 수도 있으니까…아니. 여자니까 숙직 같은 건 안 시키나?
어쨌든 다른 사람 집에서 자고, 다음날 바로 직장으로 출근해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것 참. 그렇다고 문을 따고 들어가서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옆집에서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 한 분이 밖으로 나오신다.
이거 여기에 계속 서 있으면 괜히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받는 거 아니야?
아니다. 오히려 잘 됐다. 저 아주머니께 물어보면 되잖아.
"저. 말씀 좀 묻겠는데요."
"네?"
그 아주머니는 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깜짝 놀란 듯 움찔한다. 그리고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내게 보낸다.
쳇. 멀쩡한 사람을 거수자 취급하고 있어.
하긴, 내가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외출 빈도도 줄어들고 돈도 줄어들게 되면서
미용실에 마지막으로 간 지도 거의 반년은 되었기 때문에 머리가 상당히 덥수룩 하다.
귀찮아서 면도도 1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하고 있고.
확실히 내가 봐도 수상하게 보일 만하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어쩌면, 지금 집 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수상한 남자라고 생각해서 응답을 안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별수 없지. 지금 당장 단정하게 될 수는 없잖아.
"혹시 여기에 사는 노선희라는 여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에서 물어본 말이었으나, 뜻밖에도 그 아주머니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머. 학생, 혹시 그 아가씨랑 아는 사이에요?"
"네? 아, 네. 조금…."
직접적으로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아직 몰랐나 보구나. 여기 살던 아가씨 있잖아.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네? 병원에요? 왜요?"
아주머니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그 짧은 찰나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게, 갑자기 쓰러졌다나 봐. 어느 날 갑자기 기절해서는 아직까지 눈을 못 뜨고 있지 뭐야?"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혹시 누군가한테 머리를 심하게 맞았다거나…."
차라리 단순 강도의 소행이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분명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의사도 원인을 모른다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데."
젠장….
그놈들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여자는 그날 이후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잠들어 있는 상태라는 거다.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왜, 그 아가씨 혼자 살고 있잖아.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더라면 쓰러진 채로 아무것도 못 먹고 굶어 죽었을 거 아니야?"
그래. 맞다. 잠이 든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구조를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혼자 살고 있으며 당분간 찾아올 사람도 없는 내가 그 상황에 놓였더라면,
지금쯤 이미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세요?"
"아가씨가 쓰러졌을 때? 아마 두 달 정도 전이었을 거야.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 안 나는데…아무튼 그때 이 아파트 전체가 난리였었다니까?
처음에는 살인 사건인 줄 알았잖아. 만약 병이나 사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무서운 일인 건 마찬가지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정신을 못 차린다니,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지…."
두 달 전이라…. 시기도 비슷하다.
내가 실험에 참여하게 된 지 약 한 달 정도 되었으니까…그 여자가 쓰러지고 나서 다음 타겟으로 내가 선택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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