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활동하는 A국의 스파이들이 한국의 첨단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커닝’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 이 장치는 컴퓨터 본체 크기의 네모난 상자에 카메라 렌즈와 30cm정도 길이의 로봇팔이 달려 있었다. 카메라 렌즈 앞에 문서를 놓으면 카메라가 문서를 읽은 뒤 로봇팔이 연필이나 볼펜 등을 이용해 마치 문서를 복사하듯 원본 문서의 필체 그대로 글씨를 베꼈다.
사람처럼 글씨를 쓰는 ‘커닝’은 아이들의 숙제를 베끼는 일에서부터 각종 언어로 된 외교문서까지, 어떤 문서라도 그대로 척척 베끼고 위조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글씨를 보고 필체를 인식하면 다른 내용의 문서도 같은 필체로 작성할 수 있었다.
책을 만들 때 쓰는 인쇄기나 컴퓨터 프린터로 글씨를 출력하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이 인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 기계를 이용하면 누가 봐도 사람이 손으로 직접 쓴 글씨로 보였다. 심지어 사람들 각자의 고유의 표시인 사인까지도 원본과 똑같이 복제할 수 있었다. ‘커닝’을 이용해 글씨나 사인을 위조하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감정실에서조차도 원본과 사본의 구별이 불가능했다.
어느 날, A국 대사관이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할 곳의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었다. 이미지가 좋지 않은 A국의 대사관이 들어오면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땅값과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A국은 한국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이면서도 이권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을 했다. 때문에 A국 대사관 앞에서는 한국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현재의 대사관도 시위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소음피해와 교통체증을 오래도록 겪어왔다.
A국 대사관이 이전할 예정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A국 대사관 건물 공사가 시작되자 각종 시위를 벌이며 법원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겉으로 트집을 잡은 것은 공사 때문에 소음이 심하다며 소음방지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법원은 주민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공사를 다시 재개하려면 대다수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A국의 대사관에서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약간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하며 합의에 나섰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합의서에 서명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명한 합의서가 법원에 제출되었다.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면 진위를 가려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법원은 어떤 방법으로도 진위를 가릴 수 없었다. 주민들 각자가 보기에도 합의서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 서명을 한 필체가 그들 각자의 것과 일치했다. 한두 사람의 필체라면 누군가 연습을 해서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도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필체를 똑같이 흉내 낼 수는 없었다.
A국 대사관의 주장은 인근 주민들이 합의금을 받아 챙긴 뒤 뒤돌아서서 딴 소리를 한다는 거였다. A국 대사관의 주장처럼 주민들의 통장에는 A국 대사관에서 입금한 약간씩의 돈이 들어 있었다.
법원은 많은 사람들이 항의를 하니 A국 대사관에서 제출한 문서들이 위조된 것 같다는 심증은 가지고는 있었지만 눈앞에 제출된 증거가 확실하니 인근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 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납득할만한 확실한 증거도 없이 자국 국민들의 손을 들어주면 A국이 강하게 반발할 테고 다른 나라 국민들도 한국을 공정하지 않은 나라로 느낄 수 있었다. 또 매우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정말 주민들이 합의를 한 뒤 마음이 변해 문서가 위조되었다느니 어쩌니 딴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A국의 외교관들과 스파이들이 해당 구청과 동사무소에 훔쳐난 각종 문서를 이용해 필체 복사기계인 ‘커닝’으로 주민들의 필체와 사인을 똑같이 위조한 것이었다.
이 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정원에서 은요일 요원이 파견되었다. 은요일 요원은 주민들이 친필로 주소와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한 문서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은요일 요원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문서에 서명한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집 근처에 A국 대사관 건물이 들어와도 좋다는 동의서, A국 대사관을 상대로 한 공사중지 가처분신청과 피해배상소송을 취하한다는 고소취하 문서. 대사관 건물이 들어오는 것을 희망하니 공사를 계속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탄원서 등등.
은요일 요원은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문서를 놓고 꼼꼼히 비교해 보았다. 위조된 흔적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볼펜으로 빠르게 흘려 쓴 글씨의 특징은 부분 부분 모두 일치했고 사인도 모두 똑같았다. 살펴보면 볼수록 누가 비슷하게 흉내를 냈다고 보기 어려웠다.
문서를 살피던 은요일 요원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렇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거야! 이 문서들의 서명은 사람이 아니라 분명 기계가 한 거야!”
[문제] 은요일 요원은 무엇을 보고 사인이 위조되었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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