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내린, 10센티 정도 쌓인 눈 때문에 길이 꽤 막혔다. 꽤 지루할 만큼 관광버스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대만관광객들은 매우 들뜬 분위기였다.
대만에서 볼 수 없는 은빛 풍경이 사람들을 상상의 나라로 이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관광버스 가운데쯤에 자리를 독차지 하고 혼자 앉아있는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뿔테안경의 남자만은 차가 밀리는 것이 꽤 짜증난다는 표정이었다.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관광버스는 평소 서울에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스키장을 3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스키장에 도착한 대만관광객들은 콘도에 짐을 풀고 나서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 이후로는 자유시간이었다. 별도로 요금을 지불하고 스키를 타도되었고 그냥 콘도에서 쉬어도 되었다.
다른 대만인들이 스키장비를 빌리기 위해 스키샵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이 뿔테안경의 남자는 새로 지어진 옆 건물로 향했다.
뿔테안경의 남자가 905호의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안에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체육복을 입은 오십대 초반의 김성종이었다. 막 샤워를 하다 뿔테안경을 맞은 듯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가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꽤 늦었군요.”
김성종이 뿔테안경의 사내를 따라온 사람이 없는지 밖을 살피며 말했다.
“눈 때문에 차가 밀려서…”
한국말로 대답한 뿔테안경은 외국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발음이 정확했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뿔테안경이 소파에 앉기도 전에 김성종이 인덕션레인지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니,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저 콜라나 한잔 주십시오.”
뿔테안경이 식탁 위에 놓여있던 콜라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성종이 콜라병을 테이블로 가져와 잔에 콜라를 따라서 뿔테안경 앞에 내밀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건 준비해 놓으셨겠죠?”
“그렇습니다만…”
김성종이 텔레비전 옆에 놓여 있는 007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입니다… 가격을 좀 조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가격은 이미 두 장으로 합의를 보지 않았습니까?”
“저번 거래 때문에 이미 내사를 받고 있어 이번 신기술 유출 건이 터지기 전에 외국으로 나갈 생각인데, 액수가 너무 작습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입니다! 한 장이면 10억인데, 10억이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뒤늦게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시면…”
“부담이 되시면 이번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시죠. 마지막 거래라서 저도 양보를 해드릴 수가 없군요.”
“정말 아쉽군요. 끝까지 좋은 거래를 하고 싶었는데…”
뿔테안경이 김성종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재빨리 테이블 위에 있던 콜라병을 집어 김성종의 머리를 내려쳤다. 김성종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으나 콜라병이 가격한 위치가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바뀐 것뿐이었다. 콜라병에 머리를 강타당한 김성종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움직이지 않았다.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뿔테안경은 코트 호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끼고 재빠르게 엎질러진 콜라를 휴지로 닦고 자신이 만졌을 만한 곳의 지문을 지웠다.
자신이 방문했었다는 흔적들이 사라지자 뿔테안경은 가슴 높이에 위치해 있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은 화단이었다.
“제길, 창문을 왜 이렇게 높게 만들어 놓은 거야?”
뿔테안경은 혼자 중얼거리며 김성종의 몸을 들어 올려 창밖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곧바로 식탁의자 하나를 가져다 창문 밑에 놓았다. 김성종이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김성종이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이 밝혀지면 뿔테안경이 한국을 빠져나가기 전에 추적을 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김성종이 자살한 것처럼 보이면 수사가 늦어질 테고 그 사이 2박 3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대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 만큼 곧장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지만 불행이도 설 연휴여서 비행기표를 구하기가 불가능했다. 그게 관광일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곧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시체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뿔테안경은 텔레비전 옆에 있던 007가방을 서둘러 집었다. 하지만 뿔테안경은 출입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실내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열려있는 창문 밑에 놓아둔 식탁의자의 커버가 비닐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지.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사관들이 내 실수를 그렇게 금방 눈치 채지는 못할 거야.”
뿔테안경은 007가방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유유히 출입문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뿔테안경이 숙소로 돌아와 창문 밖을 내다보자 그때서야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뿔테안경이 막 빠져나온 옆 동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산업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던 김성종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은요일 요원이 스키장 콘도로 출동했다.
“자살 같습니다.”
현장에 먼저 도착해 조사를 하던 경찰관이 말했다.
“김성종은 최근 회사에서 산업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심적으로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어제 회사에서 머리가 아프다며 좀 쉬어야겠다고 며칠 휴가를 냈답니다. 이 콘도에 투숙한 것은 어제 저녁입니다.”
“김성종이 죽기 직전 다른 사람과 같이 있었다는 물증은 없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은요일 요원은 열려있는 창문 밑에 놓여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와 창틀에 연필가루 같은 검은 가루들이 마치 불에 그슬린 것처럼 시커멓게 묻어 있었다. 경찰 과학수사반원들이 지문을 채취한 흔적이었다. 검은 가루 속에는 아직도 지문의 흔적들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몇 개의 지문이 찍혀 있었고 다른 곳은 모두 깨끗했다.
“다른 사람의 지문은요?”
은요일 요원이 다시 경찰관에게 물었다.
“지문도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너무나 많은 지문이 남아있어서 골치 아픕니다. 모두 분석을 하려면 꽤 시간이… 하여튼 자살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닙니다! 김성종은 분명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지문 중에 꼭 있어야할, 자살이라면 반드시 남아 있어야할 지문과 흔적이 없군요.”
[문제] 은요일 요원은 사건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김성종이 살해된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