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전쟁박물관에서 관람을 모두 마치고 나오니 오후 2시, 어딘가 한군데 더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어딜 갈까 생각하다 그냥 여왕님 집이나 구경하러 가자 (사실 궁전은 관심 없지만 근위대에는 관심이 많으니까!)
해서 발길을 버킹엄 궁전으로 돌렸습니다. 초행이다보니 구글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헤맸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리고 왕립전쟁박물관 글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 (광고질)
어쨌든 구글신과 친절한 런던 시가 제공하는 공공 지도와 표지판의 도움을 빌어 버킹엄의 관문인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건너 버드 케이지 워크를 밟았건만, 옆에 호스 가드 로드라는 길 이름과
기마 행진 시에는 길에서 비켜달라는 표지를 보고는 여기가 기마 근위병들의 나와바리구나!
곰가죽 모자 쓴 척탄 근위대는 어짜피 옆동네 오타와 놀러가도 볼 수 있어! 삐까뻔쩍한 흉갑을 두른
기병을 내놔라! 해서 옆길로 새게 됐습니다. 마침 옆에 세인트 제임스 공원도 있어서 경치도
꽤 좋았거든요. 하지만 흉갑기병들이 자리를 지키는 호스 가드 퍼레이드 건물에 도달하기도 전,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나 저거 알아! 왕립전쟁박물관 사이트에서 봤어!
너도 HMS 벨파스트처럼 왕립전쟁박물관 소속 박물관이지?!
입구가 구석에 정말 작게 나있었는데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모처럼 런던에 왔으면서
처칠 영감 지하벙커도 안 가볼 수 없잖아! 해서 이미 한번 길을 샛으면서도 또 한번 더 새서
던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너는 참 길을 잘 새는 프렌즈구나!
입구에 있던 처칠 영감의 흉상. 트레이드마크인 퉁명스럽게 똥씹은 표정입니다.
여기서 짐 검사를 한 뒤 한층 밑으로 내려가 표를 삽니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살짝 보이는 매표소.
입장료는 학생할인을 받아 £13.80로, 지난번 HMS 벨파스트 때와는 달리 기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니들 비싸! 본관은 무료입장인데 왜 벨파스트랑 너는 입장료를 받는거야! 뭐 그래도 돈 내고 볼만한
가치는 있는 장소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저게 캐달러였다면 납득이 가는 가격이지만 파운드라서 ㄷㄷ
프랑스에서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와서 많이 북적였습니다. 지하벙커라 복도가 엄청 좁거든요.
그래서 사진을 급하게 찍고 길을 비켜준다고 흔들린 것도 이제와서 알았습니다 ㅂㄷㅂㄷ
서있는 밀랍인형은 제복을 보니 영국 해병대 소속의 장교네요. 계급은 사진이 흔들려서 전혀
모르겠습니다;;; 영국 해병대는 대통령의 직속 경호부대 성격을 띄는 미국 해병대처럼
수상의 신변을 책임지는 부대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왕실은 8개의 근위 연대가 책임지고
수상은 해병대가 책임지는 모양세였다네요. 이 공간은 전시 내각의 멤버들이 상시 회의를
가지던 곳으로, 저기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자가 처칠의 자리였다고 합니다. 저 안에
수상과 장관들, 장군들, 해병대원들, 속기사가 출입했다고 하네요.
이 지하벙커는 처음부터 벙커로 지어졌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지하창고였던 것을 국회의사당과 가장
가까운 지하시설이라는 이유로 보강해서 벙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칠은 지하벙커가 갑갑하다고
즐겨 사용하진 않았다고 합니다만 1940년에서 1941년까지의 독일 공군의 런던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고 하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독소전이 발발해 가용 항공전력을
소련으로 몰빵한 독일 덕분에 몇년간 거의 쓸 일이 없었다가 1944년부터 V 시리즈 로켓들이 기승을 부리자
또 다시 강제로 종전까지 전시 내각이 저 갑갑한 곳에 쳐박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은 "더 독"으로 불리던 지하 2층으로 통하던 입구로, 지하 1층에 특별히
방을 배정받은 소수의 인원들 외에 나머지 인원들이 생활하며 잠을 청하던 공간으로, 밑에는
내려갈 수 없어 볼 수는 없었지만 설명상 상당히 좁고 붐비는 공간으로, 대략 싸구려 호스텔처럼
생긴 공간이였다고 하네요. 환풍이 거의 안 되고 산소공급 기계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
푸세식 화장실, 어두운 조명, 벌레와 쥐가 들끓는 환경 덕에 저기서 지내던 모두가 혐오했다고 합니다.
벙커에서 지내던 멤버들의 단체사진.
생각보다 여성의 비율이 상당히 높네요. 주로 속기사나 통신 쪽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수상의 경호를 담당하던 해병대가 입었던 복장입니다. 육군 제복과도 비슷하지만 색이 푸른색이라
흡사 경찰복과도 비슷하네요. 거기다 미해병이랑도 살짝 비슷한 느낌인 것 같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은
항공전과 해전이였기에 대규모 육상부대와의 전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지만,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팔쉬름예거로, 세계 전사상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전쟁 초기 덴마크 침공, 노르웨이 침공, 벨기에 침공,
프랑스 침공 등에 모두 투입되어 미친 전과를 올리던 공수부대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침공을 성공하기 위해선
꼭 벨기에로 우회해 프랑스의 후방을 때려야 했는데, 당시 벨기에에는 작은 마지노 선이라 불리우던
에방 에말 요새가 있었습니다. 1200명의 벨기에군이 주둔하던 이 커다란 요새를 팔쉬름예거 대원 85명만으로
30시간만에 무력화 시켜버렸고 결국 독일군 후속부대가 아무런 저항에 부딛히지 않고 벨기에로 들어와
나라 전체를 점령해버리게 됩니다. 독일의 이러한 공수작전 성과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팔쉬름예거가 영국 본토에 강하해 처칠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을 암살할 것에 대비해
처칠이 가는 곳 어디에나 해병대가 따라붙었다고 합니다.
누구든 처칠을 만나기 전에 꼭 들어가 기다려야 했다는 대기실.
전쟁중인데다가 독일이 보낸 스파이나 암살에 노이로제 반응을 보이던 당시 영국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국방 위원회 - 1941년 10월
바깥 날씨를 표시해 놓는 판입니다.
지속되는 폭격에 나가기도 힘들고 중요한 회의를 며칠이고 이어서 하기도 하니 필요했다고 하네요.
다만 늘 정확한 일기를 표시한 것은 아니고 불타는 런던 거리에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 따위를 보고는
위의 사진처럼 저렇게 "쾌적하고 따듯함"이라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네요. 영국인들의 유머는
상당히 심오합니다. 심오해요.
문 위에 수상이라고 써있지만 처칠이 사용한 방은 아니고 그의 수석 개인 비서실입니다.
다만 처칠의 비서가 사용하던 방이니만큼 처칠도 자주 들렀는데, 처칠이 소음에 상당히
노이로제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 처칠이 말을 걸지 않는 한 닥치고 제 일만 해야했다네요.
이미 아시는 분도 많이 계시겠지만 당시 타자기는 탁탁탁 팅 찌익 등 상당히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이 기계가 원래 그런 것을 처칠이 하도 짜증을 내서 처칠 비서 전용 무음 타자기가 따로 있었다네요.
검기병인 훗사르의 제복을 입은 조지 6세의 초상화.
형이였던 에드워드 8세와는 달리 정치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폭격의 위험 속에 있던 런던을 떠나지 않고 궁을 지키며 국민들과
군부대를 직접 찾아가 위로와 사기진작에 늘 열심이였던 왕이죠. 남들 앞에서
말을 심하게 더듬는 버릇이 있어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였지만, 왕이 된 이후
국민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발음교정을 받아가며 국민들 앞에 서는 등의
모습으로 국가 원수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영화로
"킹스 스피치"가 있으니 혹시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세계지도를 벽에 걸어두고 큰 그림을 그리던 장소입니다.
오직 소수의 선택받은 인원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며,
그 인원들 조차도 이 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철저한 검사를
받은 후에야 입장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내부 사진은 좀 더
밑으로 내리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처칠 전용의 전화실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통화하기 위한 핫라인이 깔려있어
도청의 위험은 없었지만 이 사실 자체가 너무 극비라 담당 엔지니어 같은 극소수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언제나 벙커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저 전화실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합니다.
처칠은 자신의 뭐같은 성격을 이용해 저 방이 자신의 전용 화장실이니 아무도 사용하지말라고
엄포를 놓았고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피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성격이 지랄맞고 더럽기로 유명한 게 처칠과 몽고메리 원수였거든요.
덕분에 루즈벨트와 오간 통화내용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네요.
처칠과 육해공 지휘관들
전쟁 내내 이 지하벙커에 직격탄을 맞은 적은 없지만 주위의 건물들이 상당히 많이 파괴되었고,
벙커 입구 옆에 있는 계단이 폭탄에 맞아 날아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지하벙커는 엄청나게 두꺼운 콘크리트가 위에 발라져 있는데, 그 콘크리트 벽 위에는
평균 200mm 두께의 강철판이 씌워져 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에는 이런 것을 만들
기술력도 자원도 없어 미국에서 인력을 파견해 만들어준 것이라고 하는데, 이 건물
태생이 벙커가 아니였던 만큼, 이렇게 두꺼운 콘크리트와 강철판을 두르고도 완벽한
방호력은 없었다고 합니다. 직격탄에 맞았다면 벙커가 날아갔을 거라고 하는데,
한번도 직격탄이 꼽힌 적이 없으니 천운이라고 할까요.
히틀러 후드려 패러 가는 영국 수뇌부
처칠의 막내딸 메리와 차녀 세라.
장녀인 다이에나 처칠의 경우 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차녀인 세라 처칠은 여성 공군 예비군(Women's Auxiliary Air Force)에
소속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항공정찰을 나가 적진 사진을 찍는 임무를 맡아 전쟁을 치뤘습니다. 메리 처칠은 향토 예비군에
소속되어 런던에서 복무, 종전까지 대위로 진급했으며 4남매 중 둘째인 장남 랜돌프 처칠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복무했던
제 4 검기병 연대에 소속되어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싸웠는데,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파견되어 1944년 당시 파르티잔
지휘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티토를 직접 만나 면담을 가진 뒤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성사시킵니다. 어린 나이 병으로 요절한
삼녀 메리골드 처칠을 제외한 윈스턴 처칠 슬하의 4남매 모두 군에서 복무했는데,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영국의 전통상 왕과 왕세자, 왕세손을 제외한 모든 왕실 인사들이 죄다 실전에 투입되니 귀족과
정치인들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뒤로 뺄 수는 없겠지만 처칠 가문을 이을 최소 한명이라도 안전한 지방으로 빼돌리지 않고
모두 군복무를 한 것을 보면 꽤나 존경스럽습니다.
처칠이 즐겨입던 스타일의 옷을 입어볼 수 있었던 코너.
저는 부끄부끄해서 저기 계신 여자직원분이 한번 권했지만 안 입어봤습니다 //ㅅ//
처칠이 양복을 입을 때 즐겨 쓰던 모자와 즐겨 마시던 술들.
저 모자는 이런 사진도 있는데,
심히 마피아 보스 같은 아우라를 내뿜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선전부 장관이였던 요제프 괴벨스가
폭격기를 통해 저 사진이 들어간 삐라를 영국에 뿌리며 "니들 수상 완전 깡패새끼임 ㅋㅋ"라며 영국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시도했는데, 저걸 본 영국인들은 오히려 "우리 수상님 완전 멋져!"라는 반응이 쏟아져 나와
실패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처칠 본인은 "뭐 이딴 거지같은 사진을 찍어서 쪽팔리게 해!"하며 화냈다고;;;
처칠이 양복을 착용할 때 입은 셔츠와 나비 넥타이. 원래는 자신의 아버지였던 랜돌프 처칠 경의
패션 스타일이였다고 합니다.
소리에 과민반응을 하며 비서들을 마구 갈구던 처칠에 의해 탄생한 발명품.
위에서 전술한 무음 타자기입니다. 총기 회사로 유명한 레밍턴 사에서 생산한
제품이며, 당시 영국에는 이러한 물건이 없어 미국에 특별 주문을 넣어
공수해왔다고 합니다. 처칠의 모든 비서들에게 지급되었다고 하네요.
처칠이 사랑한 하바나 시가. 위의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사진에도 물고 있는 그 시가입니다.
상당한 골초라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찾는게 시가였다고 하며, 하루에 대략 8번 정도 피웠다고 합니다.
처칠 스스로 말하길 평생 30만개 이상의 시가를 태웠다고 하네요. 다만 연기 흡입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칠이 즐겨 입었던 육군 제복. 정모에는 제 4 검기병 연대의 문양이 달려있습니다.
한때 그가 복무했고 2차대전 당시 자신의 아들이 소속되었던 부대였기에 1942년
방문해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데 힘썼다고 하네요.
정모는 제 4 검기병 연대의 것이지만 상의는 왕립 포병대 소속인 제 63 대전차 연대의 물건입니다.
이 연대에서도 처칠을 명예대령으로 임명했다고 하네요. 제복을 이것 저것 섞어 입다니 역시 계급이 깡패...
함 무바라! 스까 묵으면 억수로 맛있다!
하긴 몽고메리 원수도 공수부대와는 인연도 없는 양반이 공수자켓을 입고 다니기도 했죠 ㅎㅎ
처칠이 착용했던 브로디 헬멧.
가운데에 수상의 약자인 PM이 써있습니다. 원래는 이걸 쓰고 D-Day 때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관전하려고 했는데, 조지 6세가 거의 간청하다시피 말리는 통에 왕의 부탁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합니다.
처칠이 입었던 사이렌 수트.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였을 당시 집에서 자다 말고 뛰쳐나와
방공호로 뛰어들어야 했던 게 일상이였던 영국인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입고 잤다는 옷입니다.
지하는 춥고 습한데 밤새 밖으로 나올 수 없으니 부드럽고 두꺼운 옷감으로 원피스 옷을 만들어
보온성과 포근함을 높혔다네요.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입었는데, 처칠은 형형색색의
사이렌 수트를 만들어 저 새깔 외에도 컬렉션이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처칠의 초상화. 처칠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 초상화라고 합니다.
처칠이 입었던 공군 코트. 계급은 대령으로, 이것 역시 1939년 공군에서 그를
제 615 비행중대 명예대령으로 임명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계급이 영어로
Air Commodore인데, 요즘은 영관급이 아니라 장관급이라네요.
불명예스러운 악평과 온갖 루머가 나돌았던 스텐 기관단총.
원래는 장난감 회사였던 라인즈 형제 사가 전시 체제로 돌아가면서
무기를 납품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찍어낸 스텐을 처칠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마피아 보스 ver. 2
뒤에 있는 육군 코트는 위에 이미 설명한 제 63 대전차 연대 명예대령으로서의 것입니다.
처칠이 루즈벨트 대통령과 첫 만남을 가졌던 때 입었다는 해군 정복.
처칠이 가장 좋아하는 군복이였다고 하네요. 참고로 군인출신 수상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수상직에 있으면서 군복을 입은 사람은 처칠밖에 없다고 합니다.
재밌는 것은 처칠과 루즈벨트가 처음 만난 장소는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로,
위험한 대서양까지 건너 직접 미국으로 가지 않은 것은
"한 나라의 수상이 남의 나라까지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모양세가 빠지지.
그러니 중간지점인 캐나다에서 만나자!" 이런게 아니였을까 상상해 봅니다.
처칠은 훈장에 환장을 하는 성격이였는데, 아마 군인 출신이라 더욱 그랬던게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훈장에 눈 돌아갔던 양반이지만 정작 군인 신분 때 받은 것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받은 게 훨씬 많다고 하네요. 거기다 훈장은 그렇게나 욕심을 부리면서 작위 욕심은 없었던지
전후 엘리자베스 2세가 처칠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려고 했으나 뒷방 늙은이 취급 받기는 싫다며
쿨하게 거부합니다. 제가 처칠이였다면 훈장보다 공작이 되는 것을 더 반겼을 것 같은데 헤헿
공작은 영국 귀족 중 급이 가장 높은 작위로 자기 영지도 있고 성도 있고 빵빵하니까요.
하지만 뼛속까지 정치인이였던 처칠로서는 아마 마지막 자존심이였을 겁니다. 영국에서의
공작은 상원의원으로 밀려나 정치 실권을 쥘 수 없거든요. 제 2의 전성기를 원했던 처칠에게
가장 필요없던 것이 작위였던거죠. 그리고 실제로 1951년 재기에 성공하여 두번째로
수상직을 맡아 또 다시 내각을 이끌게 됩니다. 불굴의 투지맨 ㄷㄷ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급의 훈장들을 쓸어담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처칠이 없었다면 지금의 영국도 없었을 테니 당연하지만요. 하지만 처칠도 한낱 인간이니
완벽할 수는 없었습니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답게 꽤나 지독한 골수 인종주의자였으며,
1920년대에 이라크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모습도 가진 인간이였죠. 그렇기에 저 화려한 훈장 중 지금 21세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못 할 훈장들도 다수 섞여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인이라고
모든 개개인이 제국주의자인 것도 인종주의자인 것도 아니였으니 처칠의 큰 오점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칠이 수여받았던 훈장 중 3개는 저 자리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의 사후 영국 왕실에 반환되어서라고
하네요. 아마 생전에만 소유가 허락되는 특별한 종류의 훈장인 것 같습니다.
처칠의 취미 중 하나인 풍경화 그리기. 인물화는 절대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나무나 돌은 내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며 딴지를 걸지 않는게 좋았다나요. 히틀러도
풍경화만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력은 처칠이 월등히 좋아서 피카소에게 그림만으로
먹고 살아도 되겠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히틀러의 작품들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고 하네요. 사실 히틀러의 그림은 단지 히틀러의 이름빨로
비싼 것일 뿐이고 예술성은 그닥이라고들 하지만요.
처칠이 사는 동안 늘 그림을 그린 이유가 꽤나 슬픈데, 유전적인 이유로 그는 평생
중증 우울증을 안고 살았으며 그의 자식들도 같은 증상으로 장녀 다이에나는 ■■,
차녀 세라와 장남 랜돌프는 알코올 중독(세라는 67세에 사망, 랜돌프는 57세에
술에 찌들어 살다 심장마비로 사망)으로 고생하는 등 처칠 가문에서 건강문제 없이
천수를 누리다 죽은 사람은 91세 일기로 2014년에 눈을 감은 막내딸
메리 솜스 남작부인 밖에 없습니다.
귀여워서 찍어봤습니다. 고정되어있지는 않지만 도난 방지를 위해 보안 태그를 붙여넣었다고 하네요.
처칠의 4살 때 모습이 담긴 유화. 그를 그린 초상화로서는 처음 그려진게 아닐까 추측되는 작품이라네요.
1878년에 그려진 것인데 확실히 19세기 사람이라 그런지 머리 스타일이 ㅎㅎ 그래도 애기애기해서 꽤
귀엽게 생겼습니다. 처칠 일가는 아일랜드에서도 3년 정도 살았는데,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였던
랜돌프 처칠 경이 당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7세(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부)와 크게 싸워 사이가 벌어졌고,
그로인해 정계와 사교계에서 왕따를 당해 고생했다네요.
이건 처칠의 사진과 머리카락입니다. 한살이나 되었으려나요.
처칠이 어렸을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커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 웨블리 윌킨슨 리볼버 권총으로, 1893년 자비로 구매해
초급 장교 시절 종군한 마흐디 운동 진압과 2차 보어 전쟁 등에서 차고 다녔습니다.
처칠은 취향이 확고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만 잘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과 군사학에는 뛰어났지만 그 외의 공부는 죄다 낙제해버리는 기염을 토한 결과
교수들에게 돌대가리라는 조롱을 들었다고 하네요. 위의 글은 처칠이 1890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재학 시절 제출해 수상한 "더 인플루엔자 (The Influenza)"라는
시로, 상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합니다.
처칠의 또 다른 권총과 회중시계.
이것은 처칠이 제 4 검기병 연대에서 복무할 때 입었던 제복으로, 전투복은 아니고 예복입니다.
계급은 대위이고 당시에는 예비 연대였기 때문에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1차대전부터는
실전에 꾸준히 투입되는 부대가 됩니다. 처칠이 이 군복을 입을 시절만 해도 머리가 상당히 풍성한
훈남으로,
167cm의 그리 크지 않은 키로도 제복빨을 잘 소화하는 청년이였으나 이 사진들이 찍힌 시간으로부터 겨우
몇년 뒤 탈모빔을 맞더니 살도 불어 퉁퉁해져서 우리가 아는 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눙물)
처칠의 군시절 착용한 또 다른 군복과 예복, 서류가방, 그리고 왜 저기에 있는지 설명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는 은쟁반.
처칠 집에서 문짝을 떼어다 놨습니다;;;
처칠이 평생 몸에 지니고 다닌 금 회중시계. 지금도 명품인 브레게 사의 no. 765 제품입니다.
처칠의 초상화나 사진등에 늘 보이는 시계가 바로 이거죠. 이 시계에는 미닛 리피터 기능과
플라이백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브레게 사의 창업자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처칠의 조상이였던 제 4대 말보로 공작에게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처칠은 일평생
브레게 사의 후원자로 남았다고 하는데, 이 회사의 고객들과 후원자들이 장난이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고객/후원자들로는 처칠을 제외하고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나폴레옹 1세,
빅토리아 여왕 등이 있습니다 ㅎㄷㄷ
처칠의 전시실을 나와 복도로 나오면 전시 지하 1층에서 지내도록 허락받은 운 좋은
사람들의 방이 나옵니다. 이 방은 처칠 직속 경호원 두명이 사용했던 방이라고 하네요.
고위 간부는 아니라 그런지 유일하게 2층 침대가 놓여있습니다.
이건 한번의 웨이브가 지나간 뒤로, 사람이 몰릴 때는 사진은 커녕 앞으로 지나가지도 못 합니다 ㅠ
제가 찍은 사진들도 웨이브가 지나갈 때만 노려서 찍은거라 시간이 엄청 걸렸어요.
정보부 장관이였던 브렌든 브레이큰의 방. 사실 이때부터 음성 해설을 거의 못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미친듯이 몰려서 이렇게 여유롭게 해설이나 듣고 있다 사진도 못 건지겠다 싶어
사진만 열심히 찍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쓸 수 있는 글도 엄청 간략해집니다 ㅠ
데스몬드 모튼 소령의 방. 처칠의 군사고문이였다고 합니다.
찰스 랄프 톰슨 해군 중령의 방. 처칠의 부관(Aide-de-Camp)이였다고 합니다.
근데 군사고문이랑 부관이 따로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궁금하네요 ㅎㅎ
처칠이 식사를 하던 방입니다. 저기서는 부인 외의 다른 인사들과는 함께 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처칠의 부인인 클레먼틴 처칠의 방입니다. 전쟁 중이라 남편과 각방을 ㅠ
물론 꼭 전쟁 때문만이라기보다 귀족들의 경우 부부라도 각방을 쓰는 게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였으니 처칠 부부는 어땠으려나 모르겠네요.
전시 내각 차관이였던 노먼 브룩의 방. 침대 밑에 있는 건 요강으로, 모든 방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위에서 언급한 극소수의 선택받은 인원들만 출입이 허락된 맵룸입니다.
주로 앨런 브룩 원수가 브리핑을 하며 작전을 설명하고 기획했다는 듯 하며, 처칠의
지랄맞은 성격과 성급함에 치를 떨며 이런 노인네를 보좌하면서 전쟁을 잘 끝낸 것에
하늘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방을 관람하던 중 저에게도 시련이 오게 되는데,
카메라 배터리가 5% 밖에 안 남은 것이였죠. 거기다 배터리만이라면 몰라도
이날 왕립전쟁박물관에 먼저 들렀다가 온 거라서 16기가 짜리 메모리 카드가
꽉 차버렸습니다. 여왕님 집 보러 안 가고 즉흥적으로 처칠 안방 보러 온 프렌즈의 비애 ㅠㅠ
결국 뒤에 있던 관람객용 소파에 앉아 일단 노트북에 사진 파일을 모두 옮기는 작전을 실행,
작전 자체는 성공했지만 배터리가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카메라를 충전하기 위해 박물관 내부에
있던 카페에 들어가서
영국에만 있다는 이 레몬맛 판타를 구입, 홀짝거리며 충전을 조금이나마 해보려 했는데,
한 10분 앉아있으니 이제 문 닫을 시간이랍니다. 이제 겨우 5% 충전 됐는데! 거기다
미친듯이 비싼 (메뉴에선 제일 싸지만) 음료수도 마셨는데! 환타 가격이 돈에 엄청
환장한 듯한 가격이였습니다. £1.8 였나, 하여튼 전쟁 중인 것도 아니면서 엄청 비쌌습니다.
그래서 전쟁 중의 지하벙커에서의 생활 느낌도 확 피부로 느꼈습니다 (쑻)
처칠이 먹을 음식을 만들던 주방입니다. 좁아도 있을 건 다 있네요.
지하벙커의 전력 공급실입니다. 그런데 방 한가운데에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는 이유는
요즘은 이 방을 빌려 쓸 수 있어서라고 합니다. 파티 같은 행사에 돈 받고 빌려준다네요.
라디오실입니다. 여기도 사람들이 엄청 밀려서 해설을 못 듣고 그냥 패스.
헤이스팅스 이즈메이 장군의 방과
에드워드 브릿지스 남작의 방
본토 방위군 총사령부의 모습입니다. 벽걸이 시계가 5시로 맞춰져 있네요.
박물관 직원들의 칼퇴근에 대한 소망을 반영한 것인가 ㅎㅎ
우왕 별이다 ㅋ 무려 육군 대장이네요 ㅎㅎ
여긴 그나마 왕립전쟁박물관 소속 답지 않게 밀랍인형들의 생김새가 모두 다릅니다.
근데 이 방의 명칭이 매우 요상한데, 무려 Advanced Headquarters of the GHQ Home Forces입니다.
GHQ Home Forces 자체가 본토 방위군 총사령부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거기서 또 어드밴스드 헤드쿼터면
도대체 뭐라고 번역을 해야하나요 ㄷㄷ
엄청나게 많은 열쇠들과
열심히 일 하는 중인 해군 중령.
그리고 앉아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육군 중령과
열심히 전화 받는 공군 중령. 어째 죄다 중령들이네요.
육해공 중령들의 방... 은 아니고 대서양 호송선단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던 장소라고 합니다.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 독소전이 발발하기 이전, 유럽에서 홀로 남겨져 독일과 싸우던 영국에게 있어
호송선단은 영국의 국운을 결정짓는 가느다란 생명줄과도 같았습니다.
처칠의 침실입니다. 부인인 클레먼틴 처칠의 방과도 엄청 멀고(...) 훨씬 넓습니다.
그런데 정작 처칠은 전쟁 내내 여기서 한 두번 밖에 안 잤다고 하네요. 부인에게는
여기서 잔다고 뻥을 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잤다고 합니다. 성격이 이렇게나 지랄맞고
괴팍한 영감이였지만 동물한테만은 녹아버려서 측근이 데려온 고양이에 껌뻑 죽어
그 떼껄룩이 기밀분서를 즈려밟든 베개에 똥오줌을 갈기든 허허 웃고 넘어갔다고 하네요.
처칠의 방을 마지막으로 음성 해설기를 반납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기념품점도 있었지만
왕립전쟁박물관처럼 어이없는 가격과 살짝 허접한 퀄러티의 물건들로 구매욕이
죽어버렸어요.
내가 널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근위병들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며 하악대고 있었겠지!
박물관에서 나와 시간을 보니 이미 5시. 지금 어딜 가나 닫았겠다 싶기도 하고
카메라 배터리도 간당간당해서 그냥 옆에 있던 세인트 제임스 공원이나 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형적으로 작은 집이 보였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이 집은 1841년에 지어진
집으로, 왕실 소유인 이 공원의 새들을 관리하기 위한 새지기(Bird Keeper) 관리가
살며 새들을 돌보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더이상 새지기가 살지도 않고
그냥 일반 사무실로 쓰인다고 하네요.
캐나다기러기와 이름 모를 작은 새들. 캐나다기러기는 바다 넘어 유럽대륙에서 만나니 되게 반갑더군요.
캐나다에서는 그냥 공원이고 학교 운동장이고 쳐들어와 초록색 고체 똥을 싸는 새일 뿐이지만 ㅎㅎ
그런데 이 새가 영국의 토종 조류가 아니다보니 여기선 해조라서 자주 사냥된다고 합니다. 불쌍 ㅠ
엄청나게 전투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돌진해오던 거위.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 써있는데
얘들 행동을 보면 그닥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사진만 찍는 것 뿐인데 먹을 것을 바라고
엄청 빠르게 달려와요.
그리고 주인이 없는 야생 백조라면 모두 왕실의 소유라는 백조.
옛날에는 대형 가금류가 흔하지 않았고 사육도 힘들어서 백조가
고급 요리재료였는데, 이 때문에 왕실에서 치사하게 "백조는 우리가 침 발라놓음"
이라고 선포를 해서 오늘날까지 왕실 소유라고 합니다. 다만 요즘은 먹을게 하도
많아서 굳이 잡아먹지는 않고, 예쁘니까 그냥 관상용으로 놔두는 듯 싶습니다.
거기다 백조에 대한 왕실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겨우 런던 정도로, 옛날엔
지방 영주들도 야생 백조들을 몰래몰래 잡아먹었다는 듯 합니다.
전술했듯 왕실 소유의 백조는 야생 백조만 해당되는 것이였지만, 백조가
워낙 고급 가축이였던 관계로 위의 그림처럼 사육주 가문의 문양을 문신해 넣어
도난을 방지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왕실에서는 매년 런던의 백조들을 생포해
건강을 체크하는 등 관리를 꾸준히 한다고 하네요.
저기가 원래 이날 가보려고 했던 기마 근위병들이 말 타고 다니며 관광객들에게 셔터를 누를 기회를 주는 곳입니다.
기마 근위병 박물관도 있는데, 겨울에는 5시에 닫고 4월부터 6시까지 영업한다고 하네요. 일해라 영국놈들!
1차대전에 참전해 전사한 근위사단 병사들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저 앞에서 상당히 재미난 것을 봤는데, 제가 이 사진을 찍기 전에 한
프랑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남자아이가 계속 저기 왼쪽에
있는 화환에서 꽃을 떼오려고 하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렸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엉덩이를 손으로 엄청 후드려 팻습니다.
그래도 그 애는 울지도 않고 계속 개기며 발광했지만 결국 저의
존재를 인식한 부모가 쪽팔렸는지 번쩍 들어서 멀리 떠나갔습니다.
이게 뭐가 그리 재미나냐 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사는 곳이
캐나다라 애한테 이렇게 밖에서 대놓고 체벌을 가하면 경찰이 곧바로
오는 나라인지라 꽤 신선했어요 ㅋㅋ 물론 저도 애새끼가 좋은 말로
해도 안 들으면 엉덩이 정도는 때려도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박물관은 닫았지만 혹시 아직도 열심히 일하는 말이 있지 않을까 해서 급히 가봤습니다만
말은 이미 퇴근하고 그 자리엔 말똥만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제 1 용기병대 블루스 앤 로열스 소속의
병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춥지는 않아도 아직 겨울이라 겉에
코트를 입어 속이 보이지 않는데, 속에는
이런 흉갑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착용하는 것은 아니고 저걸 안 입고
근무를 서기도 하는데, 저 병사도 드러난 윤곽을 보니 아마 흉갑은 입지 않은 것
같아 보이네요. 재밌는 것은 이 부대의 기원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창설한 용기병 연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왕이였던 찰스 1세의 목을 자른 사람이
만든 부대의 후신이 지금 왕실의 근위대 중 하나인게 참 아이러니하죠.
또 하나 웃긴 게 얘네는 이름대로 용기병 부대로, 흉갑을 두를 일이 없는 병과 중
하나였습니다. 용기병이라는게 말이 기병이지 사실 말의 기동력을 이용해 적의 후방을
침투하거나 전술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선점, 하마해 보병전술을 구사해 전투를 벌이던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기계화 보병입니다. 속도가 생명이였기에 무게가 가벼운 종의 군마를
사용해 전통적으로 경기병들이 타는 말을 탔죠. 그런데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 프랑스 흉갑기병과
전투를 치뤄본 영국이 그 파괴력과 간지에 깜짝 놀라고 깊게 심취해서 얘네를 이름만 용기병으로 남기고
흉갑기병화 시켜버립니다. 다만 이렇게 중기병처럼 변신한 뒤에는 실전에서 기병전을
치뤄보진 못 했다고 하네요. 이제는 기병전이 세상에 없으니 영영 데뷔전은 못 치룰 것 같습니다.
8개의 근위대 중 유일하게 남색 군복을 입은 블루스 앤 로열스 밖에 못 보고 왔기에
다른 근위병들은 여름이나 되서 또 보러 와야할 것 같습니다. 박물관도 꼭 가보고 싶고요.
어쨌든 카페의 도움을 받아 처칠 워 룸즈에서 사진도 거의 빠트리지 않고 많이 건졌기에
꽤나 만족합니다. 다음은 런던 탑 방문기를 올려볼까 해요.
영국 여행 글 5개 모두 오른쪽에 왔네요 :D
감사합니다!
(IP보기클릭)65.93.***.***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그리고 처칠 외에 다른 승전국 지도자들에게도 해당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2차대전은 자신들에게 있어 큰 치욕이자 아픔이였다고 기억하며 나치를 욕했지만 전후 자신들의 해외 식민지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무력까지 동원해 발악했던 것도 그들이니까요.
(IP보기클릭)183.100.***.***
처칠 사실 개객기 중에 최상위 였음.. 히틀러랑 동급..;;
(IP보기클릭)121.171.***.***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유대인 몇백만명을 죽였다 하는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영국의 수탈로 죽은 사람들만 백만 단위죠. 이건 사실 약과고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영국이 식민지를 수탈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역시 수백만 식민지인들이 희생 당했죠. 심지어 윗분 말대로 2차대전 끝나고 전세계가 나치의 만행에 경학하는 와중에도 아프리카에서 끝까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던게 영국놈들입니다. 처칠도 그런 나라의 우두머리 답게 이라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가스로 현지인들을 죽이라고 명령내린 놈이었다죠.뭐 영국이랑 처칠은 승리한 개,쌍,놈이었기에 오늘날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지만요.
(IP보기클릭)219.254.***.***
1차 대전만해도 이 인간의 삽질로 오스만제국까지.....
(IP보기클릭)119.206.***.***
(IP보기클릭)65.93.***.***
감사합니다 ^^ | 17.03.11 00:55 | |
(IP보기클릭)121.164.***.***
(IP보기클릭)65.93.***.***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7.03.12 15:27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65.93.***.***
초코파이바나나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추천도 감사해요 :D | 17.03.12 15:27 | |
(IP보기클릭)121.131.***.***
(IP보기클릭)65.93.***.***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이야기나 글로만 통해서 접하던 전쟁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지 않았나 싶습니다. | 17.03.12 15:29 | |
(IP보기클릭)61.83.***.***
(IP보기클릭)65.93.***.***
읽으시는 동안 지루하지 않으셨다면 다행이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 | 17.03.12 15:30 | |
(IP보기클릭)183.100.***.***
처칠 사실 개객기 중에 최상위 였음.. 히틀러랑 동급..;;
(IP보기클릭)65.93.***.***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그리고 처칠 외에 다른 승전국 지도자들에게도 해당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2차대전은 자신들에게 있어 큰 치욕이자 아픔이였다고 기억하며 나치를 욕했지만 전후 자신들의 해외 식민지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무력까지 동원해 발악했던 것도 그들이니까요. | 17.03.12 15:33 | |
(IP보기클릭)219.254.***.***
그란도시즌2
1차 대전만해도 이 인간의 삽질로 오스만제국까지..... | 17.03.12 17:30 | |
(IP보기클릭)222.107.***.***
fdr을 처칠, 스탈린이랑 동급으로 놓는것은 좀.. | 17.03.12 21:29 | |
(IP보기클릭)65.93.***.***
루즈벨트를 처칠이나 스탈린과 동급으로 놓기는 좀 그럴지 모르나 당시 미국이란 나라도 엄연히 필리핀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였고 루즈벨트가 벌인 짓은 아니지만 윌리엄 매킨리 정부와 맥아더 원수의 아버지였던 아서 맥아더 필리핀 총독이 벌인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민간인까지 모두 합쳐 20만명이 학살됐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 승전국에는 오로지 미국만 있는 것도 아니죠. 프랑스는 전후 베트남과 알제리를 포기하기 싫어서 전쟁을 벌이고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까지 발악했고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전후 곧바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두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벌여가면서까지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하죠. 게다가 현재까지도 네덜란드는 이 두 침공을 침공으로 부르지 않고 경찰행동이라 우깁니다. 벨기에 또한 콩고와 브룬디를 60년대나 되야 독립을 인정해줬고 쿠웨이트 또한 60년대나 되서야 영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당시 서방 국가들 중 식민지나 전범행위로부터 자유로운 나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고생을 한 유럽인들이 나치를 욕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총부리를 그들 기준에서 저열한 유색인종에게 돌리지 않고 백인인 자신들을 노예로 삼은 것에 대한 치욕과 분개도 한몫 합니다. | 17.03.13 01:31 | |
(IP보기클릭)65.93.***.***
가만히 있던 오스만 제국한테서 전함 두척을 불법적으로 빼앗은 처칠 때문에 빡친 오스만 제국이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에 붙었죠. | 17.03.13 01:33 | |
(IP보기클릭)1.234.***.***
프랑스와 중국....네덜란드..터키..벨기에 뭐 이런 소국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해서리.. 보통 연합국 지도자하면 처칠 스탈린 루즈벨트니까요.. 뭐 말씀하신 대로 전 루즈벨트는 처칠, 스탈린처럼 개인적 과오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식민지 시대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 17.03.13 10:21 | |
(IP보기클릭)65.93.***.***
프랑스와 중국이 소국이라고 하기엔 승리에 기여한 바가 상당히 크죠. 사실 프랑스보다 중국의 노력이 더 컸는데 아시아라 서방에서 관심이 없어 뭍혀진 감도 없잖아 있고 전후 곧바로 내전으로 국민당이 망해버려서 ㄷㄷ 그리고 중국은 공산화가 된 이후로도 현재까지 식민지를 놓아주지 않고 있네요. 상당히 악질적입니다. | 17.03.13 10:33 | |
(IP보기클릭)180.189.***.***
(IP보기클릭)65.93.***.***
감사합니다 ^^ 칭찬도 감사해요! //ㅅ// | 17.03.13 01:34 | |
(IP보기클릭)49.1.***.***
(IP보기클릭)65.93.***.***
전혀 모르겠습니다 ㅎㅎ 헤드쿼터 안의 헤드쿼터니 힘 센 짱짱맨 헤드쿼터일까요 ㅋ | 17.03.13 01:34 | |
(IP보기클릭)1.225.***.***
(IP보기클릭)65.93.***.***
그래서 하루엔 최대 두곳 밖에 못 들르겠더군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 17.03.13 01:35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65.93.***.***
사실 처칠에게 있어 히틀러는 구세주였을 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학살자로 이름을 남길 사람이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으니까요. | 17.03.13 01:36 | |
(IP보기클릭)121.171.***.***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유대인 몇백만명을 죽였다 하는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영국의 수탈로 죽은 사람들만 백만 단위죠. 이건 사실 약과고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영국이 식민지를 수탈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역시 수백만 식민지인들이 희생 당했죠. 심지어 윗분 말대로 2차대전 끝나고 전세계가 나치의 만행에 경학하는 와중에도 아프리카에서 끝까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던게 영국놈들입니다. 처칠도 그런 나라의 우두머리 답게 이라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가스로 현지인들을 죽이라고 명령내린 놈이었다죠.뭐 영국이랑 처칠은 승리한 개,쌍,놈이었기에 오늘날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지만요.
(IP보기클릭)211.46.***.***
파시즘은 섬나라들의 숙명인가?동북아시아의 어느 열도도 영국 못지않으니..... | 17.03.12 23:36 | |
(IP보기클릭)65.93.***.***
인도도 추가하셔야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인도인들을 엄청 죽여댔어요 ㅠ | 17.03.13 01:37 | |
(IP보기클릭)65.93.***.***
섬나라들이라기보단 당시 힘이 좀 있다 싶으면 너도 나도 제국주의! 하면서 놀던 시절이긴 하죠.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고 잔혹했지만요. | 17.03.13 01:38 | |
(IP보기클릭)125.184.***.***
(IP보기클릭)65.93.***.***
물닭 귀여워요 ㅎㅎ | 17.03.13 01:38 | |
(IP보기클릭)119.202.***.***
(IP보기클릭)65.93.***.***
영국내 장애인들을 격리조치 시키자는 정책안을 국회에 제안하기도 했죠. 기각되어 묻혔지만 나치가 하던 짓이랑 똑같은 짓을 하려던 사람이라는 것은 기억해야합니다. | 17.03.13 01:42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65.93.***.***
원래는 게임 정보 찾아보려고 기웃거리다 가입을 한 이후 죽돌이가 되서.... 영국은 전쟁내내 공습에 시달리긴 했어도 거의 런던만 그랬고 육상전투는 치룬 적이 없어서 유적들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는 편이라 볼게 많아요 ㅎㅎ | 17.03.13 01:44 | |
(IP보기클릭)147.46.***.***
(IP보기클릭)65.93.***.***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 17.03.13 10:58 | |
(IP보기클릭)175.117.***.***
(IP보기클릭)65.93.***.***
드레스덴 폭격이야 독일이 뿌린대로 거둔 것이니 뭐라 할 순 없긴 한데 일단 식민지에서 보여준 처칠의 행동과 모습은 사실 나치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죠. 그리고 사실 입국심사는 어느 국적이냐에 따라 좀 차이가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한국 시민권자일 때는 외국 나갈 때마다 oldes님과 비슷한 그런 경험을 종종 했지만 캐나다 시민권을 딴 이후부터는 세계 어디를 가던 그냥 프리패스인 마냥 몇초만에 도장 찍어주고 끝납니다. 제 주위에도 불법체류자들이 미친듯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다른 나라 입국심사국의 반응도 나름 이해는 가요. 한국에서 온 불법체류자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평범하게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는 거죠. 그리고 긴 스압 글인데도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17.03.14 01:21 | |
(IP보기클릭)125.190.***.***
(IP보기클릭)65.93.***.***
오 새로운 사실 알고 갑니다. 군용어는 사전에도 잘 안 나오고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참 추측하기 힘들어요 ㅠ | 17.03.14 01:23 | |
(IP보기클릭)210.111.***.***
(IP보기클릭)65.93.***.***
재밌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감사합니다 :) | 17.03.14 01: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