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몰리나 밀가루에 달걀 두 개 까넣고 즐거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요리는 특히나 숙련도가 쌓일수록 난이도가 쉬워지는게 느껴집니다.
몇 번 만들다 보면 굳이 계량 안 하고 시계 안 봐도 대충 감이 잡히면서 들이는 노력과 시간이 대폭 줄어들거든요.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차라리 사 먹는게 더 효율적이더라도 익숙해지는 단계에 오면 만들어 먹는 게 더 경제적일 때도 많습니다.
파스타도 처음 면 뽑을 때는 '에휴, 이거 마트 가면 얼마 비싸지도 않은데 이 고생을 해야하나'싶다가도
익숙해지면서 '운전해서 마트 다녀 올 시간이면 그냥 집에서 면 뽑겠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반죽을 뭉쳐서 숙성시키는 동안 파스타 기계의 디스크를 바꿔 끼워줍니다.
오늘의 메뉴는 부카티니 알 아마트리치아나 (Bucatini all'Amatriciana).
카치오 에 페페, 파스타 알라 그리치아와 함께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파스타입니다.
앞부분의 부카티니는 파스타 면의 종류를, 뒤쪽의 아마트리치아나는 이 파스타가 유래된 아마트리체 지역을 의미합니다.
부카티니는 얼핏 보기에는 좀 굵은 스파게티 면과 큰 차이가 없는데, 안쪽으로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이름부터가 이탈리아어로 buco(구멍)에서 왔다고 하니까요.
건조대에 널어놓고 말렸다가 끓는 물에 넣고 삶아줍니다. 안에 구멍이 뚫려있어서 그렇게 오래 삶지 않아도 됩니다.
면을 삶는 동안 부카티니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아마트리치아나 소스를 준비합니다.
토마토, 페코리노 치즈, 이탈리아식 베이컨인 판체타, 페퍼론치노 고추가 기본 준비물입니다.
여기에 양파와 마늘, 바질을 추가했습니다.
아마트리체 사람들이 봤으면 기겁할만한 추가 구성품일지도 모르겠네요.
예전에 까르보나라(http://blog.naver.com/40075km/220914215936)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의 파스타 순혈주의에는 뭔가 유별난 구석이 있거든요.
오리지널 아마트리치아나 소스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나마 제대로 된 재료는 페코리노 치즈와 페퍼론치노 고추 정도밖에 없을 듯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토마토는 산 마르자노 토마토를 사용해야 하고, 고기는 판체타가 아니라 돼지 볼살을 사용해서 만든 관찰레를 써야 하니까요.
뭐, 어쩌면 판체타 정도는 봐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탈리아 배우인 알도 파브리치(Aldo Fabrizi)는 이 파스타를 찬양하면서
"이 요리에는 다섯 개의 P가 있다. Pasta(파스타), Pancetta(판체타), Pomodoro(토마토), Pecorino(페코리노), Peperoncino(페퍼론치노).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여기에 P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듯 하다. Panza(올챙이배, 혹은 배불뚝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마늘과 양파에 바질은... 아무래도 정통 레시피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밖에 없겠네요.
유명한 이탈리안 셰프가 아마트리치아나 소스에 마늘 넣은 걸로 아마트리체 시장이 발끈하고 나서서 "저건 오리지널 레시피가 아니다!"라고 반박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른 파스타들이 다 그렇듯이 레시피에는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탈리아 산골짜기의 양치기 소년들이 양젖 치즈 갈아넣고 만들어 먹던 아마트리치아나 소스 역시 좀 더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변하게 됩니다.
요즘 찾아보면 나오는 어지간한 레시피는 다들 마늘과 양파를 넣더군요.
판체타를 볶다가 기름이 충분히 나오면 그 기름에 잘게 썬 페퍼론치노, 양파, 다진 마늘을 넣고 볶아줍니다.
페퍼론치노는 2인분 기준으로 한 개만 넣어도 충분히 맵네요.
껍질과 씨를 뺀 토마토를 넣어서 으깨줍니다.
토마토 소스엔 바질이 들어가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 비슷한 게 있는지라 바질도 팍팍 뿌려줍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님이 좋아하실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진짜 이탈리아의 맛을 내려면 산 마르자노 토마토가 필요한데,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이 아닌지라 통조림으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점들은 주변 시장에 아무리 신선한 토마토가 들어와도 통조림만 고집해서 쓰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격 때문이 아니라 정통 이탈리아의 맛을 내기 위해서 말이죠.
저같은 아마추어는 그저 냉장고 사정과 통조림 재고에 맞춰서 만듭니다만.
소스를 끓여서 졸이다가 어느 정도 걸쭉해지면 삶은 면을 넣고 저어줍니다.
너무 뻑뻑해지는 것을 막고 면과 소스가 잘 어우러지도록 면 삶은 물 한 두 스푼 정도를 넣어주기도 합니다.
붉게 물들어가는 부카티니를 보면서 파스타 레시피의 정통성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토마토도 사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갖고 들어온 후에야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엔 아예 일종의 과일 취급을 했을 정도니까요.
우리가 토마토 소스 뿌려서 만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피자와 파스타 메뉴들 중 대다수는 19세기 후반에나 등장했습니다.
그 전에는 그냥 올리브유나 치즈 뿌려 먹던 게 일반적이었지요.
심지어는 가장 간단한 카치오 에 페페 (파스타+후추+치즈) 조차도 "옛날에는 후추가 비쌌기 때문에 이렇게 후추를 듬뿍 뿌린 메뉴들은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개발된 레시피들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입니다.
접시에 담아서 페코리노 치즈를 넉넉하게 갈아서 뿌려주면 부카티니 알 아마트리치아나 완성입니다.
양치기 목동들이 체력을 보충하고 추운 날씨에 대항해서 열을 내기 위해 돼지고기와 페퍼론치노를 넣은 파스타입니다.
이 레시피가 아마트리체에서 로마로 전파된 경위는 불분명합니다.
같은 라치오 주에 속해있으니 레시피를 공유하는 것을 다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일까요.
공식적으로 확인 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트리체에서 살던 용감한 여인 한 명이 괴나리 봇짐에 재료 싸들고 로마로 와서
기차역 주변에서 행상인들 대상으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출처가 "La matriciana"라는 식당인지라 가게 홍보차원에서 지어낸 말인지 의심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안 믿자니 1800년대 후반부터 장사하던 유서깊은 식당이라 무시하기도 애매한, 그야말로 카더라 통신이지요.
면이 두툼해서 꼭 우동 면발 빨아들이는 것 같다가도 막상 씹으면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마카로니 씹는 느낌도 납니다.
실제로도 면 뽑는 다이스 모양을 보면 부카티니와 마카로니가 큰 차이가 없더군요.
소스에 페퍼론치노의 매운 맛이 더해지면서 고추장 삼겹살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도 제법 잘 맞을법한 맛을 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두 나라의 음식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통성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까르보나라에 생크림 넣고, 아마트리치아나 소스에 마늘 넣는 걸로 시끌벅적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먼저 감자탕을 만들어 팔았는지, 장충동 최초의 족발집은 어디인지 원조를 가리기 위해 법정 분쟁도 마다하지 않는 걸 보면 원조 레시피에는 마치 연금술사들이 찾아다니던 현자의 돌 마냥 엄청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듯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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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작은 면을 뽑고 시작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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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하면 그냥 보면서 오... 하고 넘어가는데 이분 글은 볼 때마다 추천을 안 누르고 갈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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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다음은 40번째네요. 매번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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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M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R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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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밑에서 요리수업 배우고 싶다... 이분은 누구한테 안 배우고 독학으로 요리사 자격증 따셨을것 같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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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조리사자격증에서 취급하는 음식따윈 비교하기도 미안할정도입니다 ㅋㅋ | 17.03.06 00: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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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en! | 17.03.06 18: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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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번 가슴을 울리는 멘트를.. 원조 레시피에는 현자의 돌 마냥 비밀이 있다니 ㅎㅎ | 17.03.07 03: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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