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하빈저
“기자들이 평의회에서 소버린은 게스의 함선이라고 공표하지 않았나라고 물었을 때 재판장 표정 봤어요? 아침 토스트를 굽다가 태웠을 때 게러스가 짓던 그 표정이던데요.”
뒷문을 통해 로비로 나온 셰퍼드는 벽면에 걸련 TV에서 방금 전 재판의 모습이 중계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셰퍼드는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이 조금 전 법정에서 꺼냈던 말들을 귀에 담았다.
“저는 이미 2년 전 리퍼들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에 대비해 왔습니다. 하지만 평의회는 소버린이 리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게스가 펄시우스 베일을 넘어온 것도 설명하지 못하면서 제 경고를 믿지 못해 시타델, 나아가 전 은하계를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이후 저는 콜렉터에게 공격받아 죽었고, 세버러스의 도움으로 살아났지요. 콜렉터들이 갑자기 수 백만에 달하는 인간들을 납치하고, 저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항성계 연합은 진상 조사랍시고 소수의 조사단을 파견하는데 그쳤으며 평의회는 저를 배신자로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평의회와 항성계 연합에 대한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메가톤급 비난이었다. 카메라 봇들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플레시를 터트리는 가운데 셰퍼드는 확고한 손동작과 함께 말을 이었다.
“방금 전 제시한 증거로 인해 과거 제 언행이 설명되리라 믿습니다. 그때 제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미치광이의 헛소리라고 치부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들을 포함한 은하계를 리퍼의 침공에서 구하기 위해서 분투했던 단 한 명의 발악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어두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극에 생명체의 명맥을 위협할 존재의 모든 정황증거를 무시하고 은폐하려고 한 평의회의 리더쉽을 믿을 수 있습니까? 자국인 수백만이 사라지는 가운데에도 시타델의 방어라는 책임에 정신이 팔려 직접적인 위협을 놓쳐버린 항성계 연합이 위기때 능동적으로 움직일까요? 하물며 그 시타델조차 리퍼의 작품입니다. 나는 이 재판을 보고 있는 모든 종족의 시청자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셰퍼드는 화면의 자신이 절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을 할 때 최대한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화면 밖에서 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셰퍼드는 다음 번에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말을 이어서 들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평의회를 비난하는 것은 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도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리퍼의 침공은 정말로 임박했고 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한 채 승진에만 목을 매는 태도를 견지할 수 없습니다. 30만 5천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셰퍼드는 개인의 야망과 욕심을 가진 인간이기 이전 적이 있으면 맞서고 약한 자가 있으면 보호하는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리퍼를 상대로 하는 운명적 결전에 지휘권을 가지길 희망합니다. 지난 수 백만년 동안, 그리고 5만년 전 그토록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프로시안 조차도 리퍼의 공격에 멸종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종족의 역량을 모아 하나로 쏟아 붓을 수 있는 때만이 우리에게 생존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정치적 다툼도, 이해관계를 둘러싼 술수도 없이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모든 노를 하나로 모아 저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화면이 정지되고 아나운서가 나와 셰퍼드를 비난하는 논조를 떠벌렸다. 셰퍼드는 TV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생존을 위해.”
조커는 모자에서 껌을 떼어 벽에 튕기며 물었다.
“소령님이 왕이 되고 싶은 줄은 몰랐군요. 원래 그랬어요?”
“왕?”
“전 종족을 총괄할 지휘권을 달라고 공개적으로 평의회에 요구한 거잖아요. 승진에 목을 메는 타입은 에쉴리가 있으니 둘이 헷갈리잖습니까.”
“조커, 난 개인적 야망으로 이 일을 꾸민 게 아니야. 리퍼는 생명체들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고, 지휘부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면 전쟁은 이길 수 없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리퍼의 조작에서 스스로를 지키면서 확고한 지시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생존의?”
“그래. 생존의 방법.”
“그렇게 하면 소령님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 승률이라면 현실적으로 한 1% 정도 되지 않을까.”
조커는 놀리는 어조로 대답했다.
“자부심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제가 배당률 100배로 리퍼 승리에 건다면 내기 하실 건가요?”
셰퍼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내 재산의 100배나 되는 돈이 있냐?”
“이디를 걸겠습니다.”
“……. 이디가 널 걸지 않으면 다행이지.”
셰퍼드는 복도 끝의 문 앞에 섰다. 기자들이 잔뜩 모인 앞쪽 로비로 갔으면 아마 취재진들에 막혀 하루 종일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셰퍼드가 멈춰서자 영문을 모르는 조커가 문을 열려고 했다. 셰퍼드가 조커를 제지했다.
“소령님?”
“문 뒤에 누가 있다…… 비켜!”
셰퍼드는 조커를 밀치면서 반대 반향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폭음과 함께 문짝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셰퍼드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잭!”
잭이 셰퍼드를 돌아본 순간 셰퍼드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잭의 눈동자가 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허스크의 눈동자처럼. 잭이 입을 열었다.
“셰퍼드. 네 방해는 여기서 끝이다.”
목소리는 잭의 것이었지만 말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셰퍼드에게 익숙한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셰퍼드의 목숨이 말 그대로 경각에 달렸다는 점이었다. 조커도, 셰퍼드도 아무런 무장과 무기가 없었지만 잭은 달랐다. 인간 중 최강의 바이오틱 능력자인 그녀는 손을 까딱하는 것 만으로 셰퍼드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잭의 바로 뒤에 조커가 무방비로 나뒹굴고 있었다. 셰퍼드는 망설임 없이 잭에게 달려들었다.
잭이 손을 뻗자 주변 중력이 휘어버릴 듯한 힘이 허공에 운집했고, 셰퍼드를 향해 비산했다. 셰퍼드는 상체를 젖혀 목뼈가 부러지는 것은 막았지만 바이오틱 푸쉬의 반경 범위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셰퍼드의 옆구리 옷이 찢어지면서 그녀는 5m를 넘게 뒤로 날아갔다. 잭은 조커를 놔두고 쓰러진 셰퍼드를 향해 돌진했다.
“소령님!”
잭이 셰퍼드의 목을 노리고 팔을 뻗은 순간, 셰퍼드는 뒤로 몸을 젖히며 벽에 걸려있던 소화기를 잡아 휘둘렀다. 잭이 소화기에 옆구리를 맞아 벽에 박히자 셰퍼드는 벌떡 일어나 잭의 복부에 연속으로 무릎킥을 먹였다. 조커는 그 날렵한 동작을 보고 처음에 셰퍼드가 날아간 것은 조커에게서 잭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와 소화기 쪽으로 위치를 잡을 수 있도록 노린 것임을 깨달았다.
셰퍼드는 이어서 잭의 머리를 옆 발차기로 가격했다. 잭은 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았지만 몸이 허공에 떴다. 잭은 뒤로 날아가며 재빨리 전방으로 쇼크웨이브를 난사했다. 조커는 셰퍼드가 당했다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잭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조커의 앞에는 쇼크 웨이브를 몸으로 버텨내고 전신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셰퍼드가 아직도 서 있었다.
아마 잭과 조커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셰퍼드가 인간인지에 대한 의문. 잭은 셰퍼드가 숨을 고를 시간도 주지 않고 바이오틱 에너지의 덩어리를 날리며 돌진했다. 맨손인 셰퍼드에 비해 바이오틱인 잭이 원거리에서는 유리하지만 셰퍼드 정도의 민첩성이라면 웬만한 거리에서의 공격은 다 피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셰퍼드는 떨어진 소화기를 주워 비상밸을 끝으로 찍었다. 경고음이 울리며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잭은 달려오는 속도를 줄였고, 그 틈에 셰퍼드는 날아오는 에너지의 덩어리들을 계속 피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복도의 끝까지 밀린 순간, 셰퍼드는 날아오는 에너지 덩어리 하나를 피하지 않고 가드를 올린 두 팔 위로 맞았다. 셰퍼드는 뒤로 튕겨져 나가, 벽을 발로 짚고 그대로 잭 위로 한바퀴 덤블링을 하듯 몸을 회전하며 뛰었다.
순식간에 등 뒤를 잡힌 잭이 돌아서기도 전에 셰퍼드의 수도가 잭의 목덜미를 찍었고, 잭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소령님! 괜찮아요?”
조커가 절뚝거리며 셰퍼드를 향해 걸어왔다. 그때 경보음에 놀란 경비병들이 잭이 돌입해온 문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와 조커를 지나쳐 셰퍼드에게 달려갔다.
“무슨 짓을 한 거요!”
대장인 튜리안이 따지자 씩씩거리던 셰퍼드가 고함을 질렀다.
“닥쳐, 이 얼간이들! 꺼져!”
“뭐라고! 조사를 위해서 동행해 줘야겠소, 지금 당장!”
셰퍼드는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소령님! 안돼요!”
조커의 목소리에 셰퍼드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을 했는지도 깨달았다.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동료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다. 자살 미션을 함께 수행했던 잭이 방금 전 아무 망설임도 없이 셰퍼드를 죽이려고 했다. 셰퍼드는 2년 반 전 아일로스에서 들었던 비질VI의 이야기를 상기해 냈다. 어제까지의 동료였던 자들이 적으로 돌변하게 만든 리퍼의 세뇌기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셰퍼드는 튜리안 경비대장을 외면하고 쓰러진 잭에게 다가갔다. 경비 대장이 소리쳤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잭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뭐 하는 거요! 멈추시오!”
잭의 숨은 붙어있었다. 하지만 셰퍼드의 손이 접촉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감정이 셰퍼드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셰퍼드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잭을 만진 순간 한 목소리가 셰퍼드의 머릿속에서 공명했다.
“이 개체의 통제 해제.” (Releasing control of this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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