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6개월 전
베타 릴레이의 전투로부터 6개월 전.
“셰퍼드 소령님! 싸인 좀 해주세요!”
셰퍼드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인 다음 유유히 카페를 빠져 나왔다. 물론 그 자신의 팬에게 향하는 제스쳐로서는 도의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을 법한 손 모양에 그녀를 따라다니는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전 은하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 인간 종족의 여성은 뚜껑이 열릴 경우 기자를 폭행하는 걸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가로막지 못했고, 그녀는 바타리안의 알파 릴레이를 폭파시켜 30만여명의 생명이 희생된 일에 우울하던 도중 그런 소소한 사실들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서 정거장 앞에 다다른 셰퍼드를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 넷이 막아 섰을 때, 그녀는 기막힘을 넘어 황당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가로막은 무리들에게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오호호, 이게 누구야. 유명하신 셰퍼드 소령님 아니세요? 바타리안들이 300만의 민간인을 죽였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여기서 휴가 중이셨군요?”
셰퍼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남자가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고민하는 대신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근육질의 남자 넷은 우락부락한 체형을 자랑하듯이 팔에 힘을 주며 셰퍼드를 둘러쌓았고, 뒤에 서있던 늘씬한 여성 기자가 모습을 들어냈다. 화장을 짙게 한 전형적인 벽안금발의 미인인 여성은 과장된 어조로 꺄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유명한 영웅이자 인류의 구세주인 셰퍼드가 한 일이니 이유가 있겠지요. 당신을 찾으려고 몇 일을 헤맸는데, 그 이야기를 조금 해도 될까요? 아, 저는 쿠스풉 방송의 앨리스 수석기자에요.”
“내 이름은 알겠지? 이제 꺼져. 얌전히 가도 좋고, 저 옆에 길가의 쓰레기통에 꺼꾸로 박혀도 좋아. 어느 쪽을 택할래?”
앨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셰퍼드를 위아래로 쭉 흩어본 다음, 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꼈는지 정확히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당신, 착각하고 있나 본데. 쿠스풉 방송은 한번도 인터뷰 제의를 거절당한 적이 없어. 우리는 다른 방송사의 방해를 막고 인터뷰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서 바디가드들을 대리고 다니거든. 순순히 인터뷰에 응해 주면 우리도 평화롭게 떠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뒤의 많은 기자들이 셰퍼드의 굴욕을 찍게 될 걸.”
셰퍼드는 두통이 나는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얼음같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 정거장에서 와플 파이가 유명하던데,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게 되면 맛 좀 봐. 비싼 거거든?”
앨리스가 콧방귀를 끼자 그것을 신호로 네 명의 바디가드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순간 셰퍼드의 손이 허리춤으로 섬광같이 날았다. 투박한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고, 미처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네 바디가드들은 각각의 이유로 멈춰 섰다. 예를 들면, 한 명의 바디가드는 자신의 입에 꽂힌 수류탄을 보고 이게 어디서 날아온 건지 이해하기 위한 참선에 들어갔고, 다른 두 명은 자신을 겨누는 M-96 매톡과 M-6 캐니팩스를 보며 그 자리에 동상처럼 굳어 인생의 깊은 의미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것이 앨리스의 명령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 한명은 목덜미가 옆으로 휙 꺾이면서 기절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셰퍼드의 동작조차 보지 못했다.
“너희 둘, 저기 쓰레기통 보이지? 여기 쓰러진 놈과 함께 머리부터 입수. 삼 초 내에 엉덩이 높게 올리고 쓰레기통과 결합하지 않으면 쏜다?”
남자들은 재빨리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 거의 다이빙을 할 것처럼 쓰러진 동료를 안고 쓰레기통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모습은 필사적이었다. 이윽고 셰퍼드는 남은 남자의 입에서 슈류탄을 빼고 그를 쓰레기통에 우겨 넣은 다음, 오금이 저려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앨리스를 향해 돌아섰다. 셰퍼드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앨리스는 이빨까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고, 셰퍼드의 뒤를 따라오던 기자들은 숨죽인 채 카메라봇들을 좋은 각도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와플이 먹고 싶었나 봐요, 기.자.님. 하지만 아무리 돈이 궁해도 쓰레기통 와플을 먹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이거라도 쓰세요.”
셰퍼드는 앨리스를 지나치며 그녀의 손 위에 10 크레딧짜리 세일 카드를 올려줬다. 아까 카페에서 커피를 샀을 때 받은 것이다. 뒤로 앨리스의 굴욕감에 젖은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셰퍼드는 유유히 노르망디로 향했다. 미란다가 앞에 기다리다가 말했다.
“심했네요.”
“이렇게 해야 귀찮은 파리가 안 달라 붙어. 인기도 중요하지만 방해 받으면 아무 임무도 못 하니까. 게다가 인간 바디가드 네 명이라니, 이든 프라임에서 게스 백 마리를 쏘아 죽인 사람에게 뭐 하자는 짓거리야?”
미란다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미란다는 노르망디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거보다 중요한 문제가 생겼어요.”
셰퍼드는 대꾸 없이 미란다를 따라갔다.
“잭이 사라진 것 같아요.”
“잭이라면 원래 입항할 때마다 잘 싸돌아 다니니까.”
“세버러스에 대한 파일들을 전부 가지고요?”
셰퍼드는 미란다를 휙 돌아보았다. 미란다의 푸른 눈이 이미 그녀를 뚫어질라 응시하고 있었다. 셰퍼드는 몇 초 동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생각했다. 출입구에서 소독을 위한 분무가 얼굴을 스치자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미란다, 넌 이디를 의심하고 있지?”
“네, 셰퍼드.”
“왜지?”
“이디는 세버러스에 의해 창조된 AI에요. 일루시브 맨의 컨트롤에 집착하는 성격을 볼 때 비상시 강제로 컨트롤 하는 장치가 없으리라고 볼 수는 없어요. 물론 그 시도는 우리가 알듯이 실패했지요. 하지만 이디가 그에 대한 반감으로 세버러스를 공격하기 위해 잭을 풀어주었을 수는 있죠.”
실제로 잭이 이디의 도움 없이 해킹 기술로 세버러스에 대한 정보를 빼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셰퍼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디가 복수심을 갖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녀는 AI야.”
미란다가 침묵하자 셰퍼드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소버린과 하빈저, 두 리퍼 역시 AI일 터였다. 특히 하빈저의 경우는 전장터에서 개입을 할 때마다 그 오만함과 잔혹함이 여과 없이 들어나지 않았던가. 리젼도 성격이 없다고 불 수는 없었다. 둘은 소독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디의 청각 범위 안에 있는 장소에서 셰퍼드는 이야기를 노출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을 꺼냈다.
“머리 아프군.”
“시타델에 도착하면 고민거리가 많아질 거에요.”
미란다의 말은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하지만 셰퍼드는 그 뜻을 알아챘다.
“난 언제나 혼자였어. 자살임무가 끝난 이상 너희들의 길을 가로막을 생각도, 그럴 수도 없고. 신경 쓰지 마.”
술이 한 바퀴 돌자 게러스가 쓰러졌다. 하지만 술에 강한 튜리안이 술에 취해 쓰러졌다는 놀라운 사실에 감명받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술과 음식이 가득한 사각형의 테이블 여러 개는 세버러스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지난 몇 개월간 셰퍼드 함장의 지휘 아래 벌어졌던 숱한 모험담들을 떠벌리고 있었다. 방의 중앙에 셰퍼드와 동료들이 자리한 테이블만 분위기가 달랐다.
무대 쪽 짧은 면의 중앙에 앉은 셰퍼드가 별 말이 없이 자신의 위 크기를 실험하는 듯이 술독을 퍼붓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따라 하더니 결국 술 많이 마시기 대회로 변질된 것이다. 신체 구조가 다른 튜리안인 게러스 역시 다른 종류의 술을 시켜 말없이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하나 둘 차례대로 인사불수의 상태가 되고, 게러스마저 탁자 위에 얼굴을 박았을 때 셰퍼드는 빨갛게 달아오른 코 끝을 누르며 고개를 들어 한 잔도 마시지 않은 그런트와 눈이 마주쳤다.
“셰퍼드.”
“그런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좋을 대로. 따라와.”
셰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버러스에서 활동자금으로 줬던 돈을 써서 전체로 임대한 클럽을 나섰다. 그런트가 예의 아니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라와 이목을 끌자 몇몇 선원들이 돌아봤다. 셰퍼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머리 위로 저었다.
“화장실.”
선원들이 크로간과 인간이 몰래 거사를 치러 성공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저질스런 농담과 함께 수군거렸지만 셰퍼드도, 그런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복도에서 셰퍼드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미란다는 동생을 찾으러, 제이콥은 브린 콜 박사를 도와주기 위해, 자히드는 용병 일을 하기 위해. 쎄인은 병원에, 탈리와 몰딘은 고향으로, 카수미는 도둑 생활로, 게러스는 군대로 돌아가는군. 모린스는 그냥 가버렸고.”
그런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마라가 아니었나?”
“아아. 속였지. 넌 신경도 안 썼겠지만. 난 원래 그런 인간이야. 필요하다면 선과 악의 기준같은 건...... 까먹어.”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누가 강한 지만 중요하다. 네가 약했으면 나는 탱크에서 나왔을 때 널 죽였을 거다.”
셰퍼드는 심술궂게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흉내 내서 그런트의 옆구리에 쿡 찔렀다.
“피차일반일걸?”
그런트는 걸음을 멈췄다. 셰퍼드는 그런트를 지나 열 걸음 정도 더 걸어간 다음,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휙 돌아섰다.
“그래서, 이별의 포옹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완벽한 크로건 전사.”
“네게 말했었다. 콜렉터가 현재 은하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으면 우리 둘이 남는다…… 배틀 마스터. 넌 내가 본 최강의 전사야. 어떻게 여자가 그런 힘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셰퍼드는 투창카에서 그런트의 성인식을 떠올렸다. 땡볕 아래에서 쓰레셔 모우를 잡던 그날의 환희가 몸 구석구석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런트의 배틀 마스터로 지목되었을 때의 기뻤던 감정도. 셰퍼드는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끌어내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면 물어보지 않겠어?”
“싸움으로 물어보도록 하지.”
그런트의 표정에 적을 상대할 때 예의 그 미소가 번졌다. 셰퍼드는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뽑아들었다.
“알았어, 덩치 큰 도마뱀. 덤벼 봐.”
다음 순간 그런트가 앞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일 이 초 뒤 클럽의 노르망디 승무원들은 지진이 난 것 같은 진동에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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