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혹은 우주선)을 탄 함장의 일생
이렇게 계속 내려가다 보면
바다 밑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어느 순간에
별이 보일까 봐 무서웠다)
해초
심해어
산
계곡
분화구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
모월 모일의 항해일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들 말
한다. 뻔히 보이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 낫은 기역 자다. 마당에 놓인 낫. 나는 마당에 놓인 낫
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
겠다. 낫이 낫인지도 모르겠고 기역 자가 기역 자인지도 모
르겠다. 누가 말해 줬으면 좋겠다. 이건 낫이고 이건 기역이
라고. 이건 마당이고 이건 나무라고. 이건 하늘이고 이건
구름이고 이건 낡은 기와집이고 이건 백열등이고 이건 누
렁이고 이건 개 밥그릇이라고. 이건 돌멩이고 이건 마루고
이건 부엌이고 이건 아궁이고 이건 언덕이고 이건 풀이고
이건 나무고 이건 책이고 이건 불이고 이건 낮이고 이건
기억이라고. 불 보듯 훤하다는 말도 있다. 아궁이에 올려진
가마솥에서는 몇 시간째 죽이 끓고 있다. 나는 환해진 부
엌을 본다. 누가 나에게 말해 주면 좋겠다. 이건 아궁이고
이건 나무고 이건 낫이고 이건 기역이고 이것들이 모두 불
타고 있다고. 그러면 나는 나무가 있는 마당에서 낫과 기역
자를 보며 서 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고
나는 형광등 아래 바나나가 놓인 탁자 앞에 서 있다.
*
―우리 잠수함이 빨갛고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거 맞나?
―……
―빨갛고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거 맞지 않나?
―……
―우리 잠수함 빨갛고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거 아닌가?
―……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배가 고프다……’
나는 또 한 장의 접시가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잠수함은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벽한 개업 축하 시
강보원, 민음의 시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