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대중 매체들을 통해 세상엔 나와 같은 '도플갱어'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정도의 정보력을 과시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진짜니 가짜니 하는 분간은 타인들에겐 별 의미 없는 일이다.
판박이 외모의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아무리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둘을 쌍둥이 정도로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진짜와 가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지 않는 한, 가짜가 저지른 대부분의 사건은 진짜가 한 일로 취급되는 것이 세상살이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할 관례이며, 그들의 뇌가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것이 한국 특유의 이기주의나 군중심리일지 몰라도 도플갱어들은 알려진 것보단 자유롭다. 즉, 가짜였던 내가 무슨 짓을 벌이던 타인의 입장에선 '민정현' 혼자서 하는 자학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고마운 홈 어드밴티지 속에서 나 민정현은 진짜와 '바꿔치기'를 성공했다.
소심하고 찌질하고 한심했던 남학생, 민정현은 재치만점 활발한 존재감 뚜렷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나는 '진짜'로서 살아있다는 실감에 ‘예전의 진짜 나’를 없앤 죄책감 따위는 생각할 가치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의 진짜, ‘이젠 가짜가 되어버린 민정현’이 앞서 말했던 한심한 인간이 된 경로를 내가 우연찮게 알아버린 이후 뚜렷한 존재를 형성한 것을 후회했다.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살기 위해 ‘예전의 진짜 나’를 없앤 나는, 정작 진짜가 되고나서 ‘예전의 진짜 내가’ 버텨온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한 거다.
그렇게,
‘예전의 진짜’에 대한 죄책감인지, 한낱 위선인지 모를 동기로 세상으로부터 나의 존재감을 지워가는 중이다. 어떻게든 단 하나인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고 싶어 하는 도플갱어의 본성을 잃었다. 담임선생님이나 친구로부터 학교 유인물을 건네받지 못하는 일상이 흔하게 일어날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담임선생님이 학교 프린트 주는 것을 깜빡 했다며, 유인물 담당인 학생이 아직 교실에 있을 테니 받아가라는 주문은 내 존재감이 얼마나 흐릿해졌는지 담백하게 설명해준다.
“교무실에서 복사해주는 게 종이 낭비의 근원이라 이건가.”
같은 반 친구에게 프린트 나눠주는 일로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을 생각하면 나중에 먹을 거라도 사줘야 하는 것 아닌지 생각했다. 아무리 존재감을 지운다 하더라도 인과관계일 뿐, 기본적인 소양은 유지된 삶이다.
나는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교실 문 앞에 도착했다.
교실 안에는 같은 반 여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학교 일정이 담긴 종이를 건네기 위해 여태 기다린 그녀의 책임감은 가상하지만 받는 입장에선 오히려 곤란하다. 그녀는 '반장' 도, '부반장'도 아닌 그냥 일반 여학생일 뿐이다. 아마 프린트를 나눠주는 일은 우연찮게 담임선생님의 눈에 띄어 처음 해 보는 일임에 틀림없다.
동급생인 한가인은 2학년 새 학기가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가 교내에서 말을 터놓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말인 즉, 의도하지 않아도 나보다 존재감이 흐릿한 여자애란 뜻이다.
다른 점?
나는 어디까지나 ‘예전의 진짜’ 녀석에 대한 예우로 내 존재감을 고의로 희석중인 도플갱어다. 한가인의 경우에는 본인 존재 자체가 희미한 느낌이다.
교실 뒤편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녀석을 잠깐 바라보다, 한적한 교실 안에서 보니 한가인이 꽤나 미인이란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한가인은 매우 눈에 띄지 않는 여학생이다. 수업 중 창문 밖을 멍하니 보거나, 낮잠을 자는 그녀는 선행학습 폐허의 대표적인 예시인지 성적만은 훌륭. 예체능 쪽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만능 엘리트라고 표현할 수 있으나, 누구와도 섞이지 않을 강한 경계심의 소유자였다. 교내에선 최 상위권에 속하는 몸매에 미소녀로서 손색없을 외모를 가진 잘남 덩어리지만, 정반대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그래서 더더욱, 여태껏 서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그녀에게 좋지 않은 평판들이 즐비한다.. 돈을 위해 이상한 알바를 하고 있다, 밤마다 길거리를 활보~ 등의 근거 없는 얘기들. 어차피 한가인의 미모에서 비롯된 질투들이다.
“으음.”
뒤태를 몰래 감상하는 변태라는 이미지는 존재감을 희석시키기엔 너무 불순물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래 기다렸어? 미안, 받으러 왔어.“
사실 이렇게 말 거는 것도 처음인 느낌이다.
"왔구나."
뭔가 체념한 듯 멍한 표정에 눈 주위가 짓물러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교실에서 몰래 훌쩍인 게 아닐까. 설마 유인물을 건네주려 기다린 것 때문인 아니겠지. 나는 학교를 쓸쓸한 건물로 느끼기에 충분한 그녀의 입장을 이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
"여태까지 혼자 있었던 거야? 정말 고마워."
"...응."
"사실 친하진 않지만...책임감이 정말 강하네. 오늘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졌어."
내가 의식할 정도의 경계심을 품은 한가인은간신히 얇은 입술을 떼었다.
“너, 이름은?”
“같은 반인 민정현이잖아...”
“미안. 난 한가인이야.”
한달동안 같은 반으로 지낸 동급생과 통성명을 하는 나는 슬프지 않아.
...오히려 기쁘다고 해야겠지.
"그럼 일단 받아갈 으아아에아악!?!?!"
나는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괴이 그 자체, 도플갱어인 나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킬 '생각치도 못 한' 일이 상영되었다.
녀석은, 소매에 숨기고 있던 커터 칼을 꺼내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갑작스런 자해극을 펼친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을 꺼내며,
"이이, 이러면 되까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아니,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미안. 무조건 사과할게. 어떻게 할까? 얼굴에 십자 상처라도 낼 테니까 용서해 줄래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그럴 마음이 없었어요."
"자자,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당황함의 늪에 제대로 빠진 나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발을 앞으로 옮긴다. 나 때문에 낭비한 시간이 아까워 자살을 하려는 경우는 아닐 테고, 평소 심리적으로 불안한 그녀가 ‘우연적’으로 나를 끌어당긴 것 뿐. 일단 나는 한가인의 손을 막기 위해 괜한 말을 띄웠다.
"나 때문에 중요한 약속을 못 지켰다면 사죄할게. 뭐든지 들어줄테니 일단 진정해."
"나는 네가 만족할 만한 사과를 해야만 해. 여기? 여기에 그을까?"
"아니 위험하니까 얼굴에 칼날 대지 마! 그그, 그렇지. 그 칼부터 내려놔. 몇 년이 지난 미래의 네가 지금 너의 어리석은 행동을 본다면 얼마나 후회스럽겠어?"
"여자 얼굴에 상처 내는 정도로는 용서해 주지 않을 건가보네. 알았어."
칼끝이 한가인의 목 젓 주변으로 내려가다- 아담하게 솟아있는 가슴 언저리에서 멈췄다. 가슴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 심장이 있는 곳이다. 죽을지라도 찌르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결심이 커터 칼을 잡은 양손에서 요동친다.
"찌를게. 아무리 날 싫어해도 구급차 정도는 불러줘."
"무슨 짓이야! 거긴 찌르면 바로 즉사야, 바보야!"
내 안색이 하얗게 번졌다는 것 정도는 안 봐도 비디오다.
"괜찮아. 칼 손잡이엔 내 지문뿐이니까. 첫 목격자인 네가 범인으로 몰릴 일은 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너 죽는다고?!"
자살 기도, 요구 없는 협박을 동시에 진행하며 얼굴을 붉히는 한가인.
"설마...남자들은 역시 이런 것 보다 성적인 행위를 요구 하는 거야? 으으...그거라면 미안. 할 수 없을지도..."
잠시나마 유지 됬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나는 한가인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본질적인 행위란 게 몰라도 지금 자해하려는 것만은 그만 둬.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
"그러니까..."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영화에서 나오는 협상가들은 이렇게 생명을 지킴으로서 뿌듯한 느낌을 받는 거였구나, 청춘의 방황을 무사히 지켜냈다 생각한 도플갱어, 본인.
"...미안해. 이 정도로는 맘에 안 차는 게 당연하지."
한가인은 내 앞으로 상큼한 여학생의 향기가 가득한 자켓을 벗어 던진다. 이어서 교복의 넥타이, 배지, 하얗게 잘 세탁된 셔츠마저 나풀거리며 내 얼굴로 날아든다.
"결심했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셔츠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지만, 적어도 저 자해소녀가 속옷 차림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바람직하게 성장한 신체가 보이는 것을 잔뜩 움츠린 몸으로 막으려는 한가인의 얼굴은 치욕과 부끄러움으로 새빨갛다.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상이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더욱 부각시킨다. 시선을 둘 데가 없다.
"이러면...될까?"
"지금 뭘 하려는 건지 목적을 말해주겠어? 나,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 되질 않아.“
도플갱어라는 기의한 현상 그 자체인 내가 한가인의 행동을 쫒아가지 못 하고 있다. 아니, 시선만은 정확히 한가인의 몸을 쫒아가고 있지만 억지로 고개를 돌려내는데 성공.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너, 나한테 원수진 일을 풀려고 왔잖아. 나보고 더 이상 어떤 죗값 치르라는 거야. 이렇게 남한테 사과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제발 용서해줘.”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너에게 유인물을 받으러 왔어. 부탁이니까 옷부터 좀 입어줄래?”
“하, 하지만 혼자 있어서 고맙다며? 모든 죄를 받으려는 책임감을 이용하여 더러운 일들을 신세 져가며 하겠다며?”
“사람의 말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 마.”
어느새 한가인은 내 앞에 있던 옷들을 발끝으로 끌어당겨 책상 뒤에서 주섬주섬 입고 있다.
“여기 셔츠.”
“고, 고마워.”
책상 뒤에서 숨는다 해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한가인이 뭐라 하지 않아도 이미 눈을 감고 뒤로 돌았지만, 속옷 위로 여학생이 교복을 입는 경로를 탐색, 내 머릿속 네비게이션에 저장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는 한가인. 다리가 풀렸는지 책상에 털썩 엎드린다.
“날 협박하려고 왔던 게 아니야? 다, 다행이다. 내가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줄 알았...네.”
“대체 뭐야, 너.”
“아...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프린트라면 기다려봐. 선생이 말했으니까.”
“내가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줄 알았다니? 몽유병을 앓고 있는 거냐?”
“아냐!”
“그럼 쌍둥이 여동생이 몹쓸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 말을 부정하려던 녀석은 금세 순응하고,
“그그, 그렇네. 응, 그래.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저저, 정말로 피곤하다니까.”
내가 알기로 한가인은 형제 없는 외동딸이다. 만약 쌍둥이 자매라면 그 여동생의 미모가 내 귀까지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설마.
이녀석...
“니 도플갱어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걸 다 받아주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
"노, 농담이고. 그건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잖아.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괜찮다면 말해주겠어?"
"......"
계속되는 침묵이 교실을 지배했다. 남녀가 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난처한 상황인데, 이런 식의 반응은 나로서 버티기 힘들다.
제발 부정해 달라고, 나는 간곡히 부탁해보지만.
"맞아.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야. 내 잘못도 아닌 도플갱어의 짓을 사과하는 건."
‘예전의 진짜 나’에게.
이런 거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존재감을 지우고 조용히 살겠다는 내 맘을 무참히 깨버린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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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도플갱어
인간
갱생
이야기.
판박이 외모의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아무리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둘을 쌍둥이 정도로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진짜와 가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지 않는 한, 가짜가 저지른 대부분의 사건은 진짜가 한 일로 취급되는 것이 세상살이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할 관례이며, 그들의 뇌가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것이 한국 특유의 이기주의나 군중심리일지 몰라도 도플갱어들은 알려진 것보단 자유롭다. 즉, 가짜였던 내가 무슨 짓을 벌이던 타인의 입장에선 '민정현' 혼자서 하는 자학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고마운 홈 어드밴티지 속에서 나 민정현은 진짜와 '바꿔치기'를 성공했다.
소심하고 찌질하고 한심했던 남학생, 민정현은 재치만점 활발한 존재감 뚜렷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나는 '진짜'로서 살아있다는 실감에 ‘예전의 진짜 나’를 없앤 죄책감 따위는 생각할 가치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의 진짜, ‘이젠 가짜가 되어버린 민정현’이 앞서 말했던 한심한 인간이 된 경로를 내가 우연찮게 알아버린 이후 뚜렷한 존재를 형성한 것을 후회했다.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살기 위해 ‘예전의 진짜 나’를 없앤 나는, 정작 진짜가 되고나서 ‘예전의 진짜 내가’ 버텨온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한 거다.
그렇게,
‘예전의 진짜’에 대한 죄책감인지, 한낱 위선인지 모를 동기로 세상으로부터 나의 존재감을 지워가는 중이다. 어떻게든 단 하나인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고 싶어 하는 도플갱어의 본성을 잃었다. 담임선생님이나 친구로부터 학교 유인물을 건네받지 못하는 일상이 흔하게 일어날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담임선생님이 학교 프린트 주는 것을 깜빡 했다며, 유인물 담당인 학생이 아직 교실에 있을 테니 받아가라는 주문은 내 존재감이 얼마나 흐릿해졌는지 담백하게 설명해준다.
“교무실에서 복사해주는 게 종이 낭비의 근원이라 이건가.”
같은 반 친구에게 프린트 나눠주는 일로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을 생각하면 나중에 먹을 거라도 사줘야 하는 것 아닌지 생각했다. 아무리 존재감을 지운다 하더라도 인과관계일 뿐, 기본적인 소양은 유지된 삶이다.
나는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교실 문 앞에 도착했다.
교실 안에는 같은 반 여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학교 일정이 담긴 종이를 건네기 위해 여태 기다린 그녀의 책임감은 가상하지만 받는 입장에선 오히려 곤란하다. 그녀는 '반장' 도, '부반장'도 아닌 그냥 일반 여학생일 뿐이다. 아마 프린트를 나눠주는 일은 우연찮게 담임선생님의 눈에 띄어 처음 해 보는 일임에 틀림없다.
동급생인 한가인은 2학년 새 학기가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가 교내에서 말을 터놓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말인 즉, 의도하지 않아도 나보다 존재감이 흐릿한 여자애란 뜻이다.
다른 점?
나는 어디까지나 ‘예전의 진짜’ 녀석에 대한 예우로 내 존재감을 고의로 희석중인 도플갱어다. 한가인의 경우에는 본인 존재 자체가 희미한 느낌이다.
교실 뒤편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녀석을 잠깐 바라보다, 한적한 교실 안에서 보니 한가인이 꽤나 미인이란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한가인은 매우 눈에 띄지 않는 여학생이다. 수업 중 창문 밖을 멍하니 보거나, 낮잠을 자는 그녀는 선행학습 폐허의 대표적인 예시인지 성적만은 훌륭. 예체능 쪽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만능 엘리트라고 표현할 수 있으나, 누구와도 섞이지 않을 강한 경계심의 소유자였다. 교내에선 최 상위권에 속하는 몸매에 미소녀로서 손색없을 외모를 가진 잘남 덩어리지만, 정반대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그래서 더더욱, 여태껏 서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그녀에게 좋지 않은 평판들이 즐비한다.. 돈을 위해 이상한 알바를 하고 있다, 밤마다 길거리를 활보~ 등의 근거 없는 얘기들. 어차피 한가인의 미모에서 비롯된 질투들이다.
“으음.”
뒤태를 몰래 감상하는 변태라는 이미지는 존재감을 희석시키기엔 너무 불순물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래 기다렸어? 미안, 받으러 왔어.“
사실 이렇게 말 거는 것도 처음인 느낌이다.
"왔구나."
뭔가 체념한 듯 멍한 표정에 눈 주위가 짓물러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교실에서 몰래 훌쩍인 게 아닐까. 설마 유인물을 건네주려 기다린 것 때문인 아니겠지. 나는 학교를 쓸쓸한 건물로 느끼기에 충분한 그녀의 입장을 이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
"여태까지 혼자 있었던 거야? 정말 고마워."
"...응."
"사실 친하진 않지만...책임감이 정말 강하네. 오늘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졌어."
내가 의식할 정도의 경계심을 품은 한가인은간신히 얇은 입술을 떼었다.
“너, 이름은?”
“같은 반인 민정현이잖아...”
“미안. 난 한가인이야.”
한달동안 같은 반으로 지낸 동급생과 통성명을 하는 나는 슬프지 않아.
...오히려 기쁘다고 해야겠지.
"그럼 일단 받아갈 으아아에아악!?!?!"
나는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괴이 그 자체, 도플갱어인 나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킬 '생각치도 못 한' 일이 상영되었다.
녀석은, 소매에 숨기고 있던 커터 칼을 꺼내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갑작스런 자해극을 펼친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을 꺼내며,
"이이, 이러면 되까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아니,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미안. 무조건 사과할게. 어떻게 할까? 얼굴에 십자 상처라도 낼 테니까 용서해 줄래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그럴 마음이 없었어요."
"자자,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당황함의 늪에 제대로 빠진 나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발을 앞으로 옮긴다. 나 때문에 낭비한 시간이 아까워 자살을 하려는 경우는 아닐 테고, 평소 심리적으로 불안한 그녀가 ‘우연적’으로 나를 끌어당긴 것 뿐. 일단 나는 한가인의 손을 막기 위해 괜한 말을 띄웠다.
"나 때문에 중요한 약속을 못 지켰다면 사죄할게. 뭐든지 들어줄테니 일단 진정해."
"나는 네가 만족할 만한 사과를 해야만 해. 여기? 여기에 그을까?"
"아니 위험하니까 얼굴에 칼날 대지 마! 그그, 그렇지. 그 칼부터 내려놔. 몇 년이 지난 미래의 네가 지금 너의 어리석은 행동을 본다면 얼마나 후회스럽겠어?"
"여자 얼굴에 상처 내는 정도로는 용서해 주지 않을 건가보네. 알았어."
칼끝이 한가인의 목 젓 주변으로 내려가다- 아담하게 솟아있는 가슴 언저리에서 멈췄다. 가슴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 심장이 있는 곳이다. 죽을지라도 찌르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결심이 커터 칼을 잡은 양손에서 요동친다.
"찌를게. 아무리 날 싫어해도 구급차 정도는 불러줘."
"무슨 짓이야! 거긴 찌르면 바로 즉사야, 바보야!"
내 안색이 하얗게 번졌다는 것 정도는 안 봐도 비디오다.
"괜찮아. 칼 손잡이엔 내 지문뿐이니까. 첫 목격자인 네가 범인으로 몰릴 일은 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너 죽는다고?!"
자살 기도, 요구 없는 협박을 동시에 진행하며 얼굴을 붉히는 한가인.
"설마...남자들은 역시 이런 것 보다 성적인 행위를 요구 하는 거야? 으으...그거라면 미안. 할 수 없을지도..."
잠시나마 유지 됬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나는 한가인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본질적인 행위란 게 몰라도 지금 자해하려는 것만은 그만 둬.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
"그러니까..."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영화에서 나오는 협상가들은 이렇게 생명을 지킴으로서 뿌듯한 느낌을 받는 거였구나, 청춘의 방황을 무사히 지켜냈다 생각한 도플갱어, 본인.
"...미안해. 이 정도로는 맘에 안 차는 게 당연하지."
한가인은 내 앞으로 상큼한 여학생의 향기가 가득한 자켓을 벗어 던진다. 이어서 교복의 넥타이, 배지, 하얗게 잘 세탁된 셔츠마저 나풀거리며 내 얼굴로 날아든다.
"결심했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셔츠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지만, 적어도 저 자해소녀가 속옷 차림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바람직하게 성장한 신체가 보이는 것을 잔뜩 움츠린 몸으로 막으려는 한가인의 얼굴은 치욕과 부끄러움으로 새빨갛다.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상이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더욱 부각시킨다. 시선을 둘 데가 없다.
"이러면...될까?"
"지금 뭘 하려는 건지 목적을 말해주겠어? 나,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 되질 않아.“
도플갱어라는 기의한 현상 그 자체인 내가 한가인의 행동을 쫒아가지 못 하고 있다. 아니, 시선만은 정확히 한가인의 몸을 쫒아가고 있지만 억지로 고개를 돌려내는데 성공.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너, 나한테 원수진 일을 풀려고 왔잖아. 나보고 더 이상 어떤 죗값 치르라는 거야. 이렇게 남한테 사과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제발 용서해줘.”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너에게 유인물을 받으러 왔어. 부탁이니까 옷부터 좀 입어줄래?”
“하, 하지만 혼자 있어서 고맙다며? 모든 죄를 받으려는 책임감을 이용하여 더러운 일들을 신세 져가며 하겠다며?”
“사람의 말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 마.”
어느새 한가인은 내 앞에 있던 옷들을 발끝으로 끌어당겨 책상 뒤에서 주섬주섬 입고 있다.
“여기 셔츠.”
“고, 고마워.”
책상 뒤에서 숨는다 해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한가인이 뭐라 하지 않아도 이미 눈을 감고 뒤로 돌았지만, 속옷 위로 여학생이 교복을 입는 경로를 탐색, 내 머릿속 네비게이션에 저장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는 한가인. 다리가 풀렸는지 책상에 털썩 엎드린다.
“날 협박하려고 왔던 게 아니야? 다, 다행이다. 내가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줄 알았...네.”
“대체 뭐야, 너.”
“아...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프린트라면 기다려봐. 선생이 말했으니까.”
“내가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줄 알았다니? 몽유병을 앓고 있는 거냐?”
“아냐!”
“그럼 쌍둥이 여동생이 몹쓸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 말을 부정하려던 녀석은 금세 순응하고,
“그그, 그렇네. 응, 그래.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저저, 정말로 피곤하다니까.”
내가 알기로 한가인은 형제 없는 외동딸이다. 만약 쌍둥이 자매라면 그 여동생의 미모가 내 귀까지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설마.
이녀석...
“니 도플갱어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걸 다 받아주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
"노, 농담이고. 그건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잖아.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괜찮다면 말해주겠어?"
"......"
계속되는 침묵이 교실을 지배했다. 남녀가 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난처한 상황인데, 이런 식의 반응은 나로서 버티기 힘들다.
제발 부정해 달라고, 나는 간곡히 부탁해보지만.
"맞아.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야. 내 잘못도 아닌 도플갱어의 짓을 사과하는 건."
‘예전의 진짜 나’에게.
이런 거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존재감을 지우고 조용히 살겠다는 내 맘을 무참히 깨버린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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