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레밀리아 스칼렛, 엘도라도에 내려서다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1)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2)
-----------------------------------------------
다리 위에 놓인 서적에서 시선을 올린 파츄리 널릿지는 대도서관의 입구에 있는 그림자를 확인하고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보는 변덕을 부려보기로 했다.
“어서 와. 메이링.”
불려진 홍 메이링은 붉은 머리와 하얀 에이프런을 휘날리면서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파츄리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운 나머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별일이네요. 파츄리 님이 먼저 말을 거시다니.”
“고작 그런 게 별일은 아닌 거 같은데.”
마녀의 시선은 다시 마도서로 향해있었다. 메이링은 그녀의 옆에서 멈춰서서 정중히 양손을 맞대었다.
“평소엔 책에 빠져계셔서 3번을 불러야 겨우 뒤돌아보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지금 넌 홍마관에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잖아.”
파츄리의 눈이 스윽 좁혀지며 곁눈질로 메이링을 살폈다.
“들었어. 메이드장, 그만둔다면서?”
“네.”
──메이링이 너무나도 발랄하게 대답해버리니까 파츄리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책벌레의 거처인 도서관에 있는데도 그 벌레는 기분 나쁘다는 듯 뺨을 긁으며 계속 웃고 있는 메이드장을 째려보면서 물었다.
“……넌 그걸로 괜찮은 거야?”
“네.”
“그래도 넌 1세기 넘게 레밀리아의 시중을 들어서 겨우 하우스 키퍼의 자리까지 올랐잖아. 그걸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돼……?”
“전 아가씨의 사용인이니까요. 아가씨가 그러라고 하셨으면 따를 뿐입니다.”
그 말에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파츄리는 눈이 조금 휘둥그레졌지만, 곧바로 눈을 감았다.
“……정말 난 사용인 같은 건 죽어도 못할 거라고 생각해.”
“저도 주인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열심히는 안 했을걸요.”
“그게 나여도?”
“네.”
“그래. ……레미랑 같이 지낸 건 나보다 네가 더 기니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별말은 안 할게.”
파츄리는 책상으로 손을 뻗어 백자의 찻잔들 집어 들었지만, 찻잔엔 아무것도 안 들어있었다.
“차, 내어드릴까요?”
메이링이 바로 물어보았기에 파츄리는 얌전히 부탁했다.
“네 홍차도 이제 못 마시는 거네.”
얼마 뒤, 메이링은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홍차를 타는 메이링을 보고 파츄리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새로운 하우스 키퍼는 저보다도 훨씬 맛있는 홍차를 탈 거에요. 제가 보증합니다. 제 홍차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실걸요?”
“소악마가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겠네.”
대도서관의 책장에서 꺼내온 홍차의 문헌을 두고 악전고투하고 있는 소악마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지나가서 주인 마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호박색 수면에 입을 갖다댄다. 향기가 콧속으로 퍼져갔다.
“맛있어. 역시 영국 귀족을 1세기나 섬겼던 사용인이네.”
“감사합니다.”
“이거보다 맛있게 할 수 있다니 쉽게 상상이 안 되네. 네 대신에 들어온다는 하우스키퍼는 분명 십 여년밖에 안 살은 인간이잖아. 이름이──”
“──이자요이 사쿠야.”
메이링은 그 이름을 불쑥 말했다.
“안심해주세요. 그 애는── 사쿠야 씨는 아가씨의 홍마관에 어울리는 사용인이 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전했어요. 완전하고 소쇄한 종자에요.”
메이링과 파츄리의 연도 나름대로 길다. 그러나 파츄리는 저런 표정을 짓는 메이링은 처음 봤다고 감개무량하여 숨을 죽였다. 그 모습은 마치 예전에 봤던 성모 마리아상 같은 자애가 넘쳐나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럼 나도 사쿠야의 홍차를 기대하고 있을게.”
파츄리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대로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멀었다.
‘그러고보니 이 대도서관이 이름에 어울리는 환경이 된 것도 이자요이 사쿠야의 능력 덕분이었지. 어쩌면 정말로 메이링의 홍차 맛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네.’
“그건 좀 아쉬운걸.”
뭐가 아쉽냐고 물어본 메이링에게 혼잣말이라며 손으로 막았다.
“그래서 신경 쓰이는게 있는데──”
메이링이 원래 용무였던 소악마에게 용건을 전하고 파츄리가 홍차를 다 마셨을즘, 그녀는 메이링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네가 하우스 키퍼를 그만두는 건 알겠어. 그럼 내일부터 넌 이 홍마관에서 어디에 있겠다는 거야? 설마 맡는 일도 없이 메이드를 계속 할 것도 아닐테고.”
“어라. 그건 못 들으셨나요?”
“아쉽게도 말이지.”
메이링은 크게 웃었다. 그 온화한 표정을 본 파츄리는 중요한 직무를 받았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메이링의 답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지기에요.”
“……문지기라니, 게이트 키퍼를 말하는 거야?”
“네. 그리고 정원사도 같이 할거에요. 정원의 화단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게이트 키퍼와 가드너. 영광스러운 하우스 키퍼의 다음 직무가 좌천이라고 말해도 지장 없는 수준이었다.
“메이링, 레미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럴 리가요.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걸요.”
메이링의 눈은 조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에 뭐가 있을지 추측할 방법은 없지만, 메이링이 바라보고 있는걸 직접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직감하고 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아가씨 나름대로 신경 써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참 사용인 다루는 게 서투른 흡혈귀네.”
“그리고…….”
조금 부끄럽다는 듯 메이링은 쑥스러워했다.
“전 태양을 쬐는 걸 좋아하니까 문지기는 더할 나위 없는 직책이죠.”
허를 찌르는 말 때문에 마녀는 엉겁결에 웃음이 터졌다.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표정으로 태연한 메이링을 바라본다. 그리고 손가락을 연분홍색 입술에 갖다 대 기분 좋은 듯이 웃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 우중충한 흡혈귀 저택에서 그런 걸 말할 수 있는 건 요정 말고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정말 좋아한다니까요. 그건 아가씨도 알고 계세요.”
“의외네. 레미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매도했을 거 같은데.”
“자주 들었었죠.”
메이링은 어깨를 움츠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달도 좋아해요. 태양보다는 못하지만…… 달님도 따뜻하니까.”
“달이 따뜻해?”
신기한 감상이라고 파츄리는 흥미를 보였다. 마녀인 그녀는 속성 마법을 사용할 때 달에 부여되있는 전승을 인용할 때가 많다. 달에는 광기, 혹은 신비. 혹은 끝없는 꿈이 있다. 그렇기에 흡혈귀는 달이 빛나는 밤에 살아가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100년도 넘게 지난 일이에요. 전 어두운 곳에 갇혀있었죠.”
집요하게 물어보니 메이링은 추억을 회상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차갑고 어둡고── 태양이 닿을 리가 없는 그런 장소였어요.”
“감옥이네.”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도 달빛은 조금씩 들어왔어요. 달빛만이 저를 비춰주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달빛에 태양빛과 비슷한 따뜻함을 느끼게 된 거죠.”
그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도시의 어둠이 어느 흡혈귀에 의해 제거되기 직전에 알게 됐었다. 메이링은 태양을 버렸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양 대신에 달을 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인외가 되어도 그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달과 태양의 빛은 완전 다른데──”
파츄리의 시선이 느껴져서 메이링은 말을 도중에 끊었다. 흥미 깊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파츄리가 뭔갈 말하고 싶어서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 그러신가요? 파츄리 님.”
“너…… 정말 사용인의 업무 말고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네. 레미는 대체 어떤 교육을 한 거야?”
“아가씨는 이따금 박물관 같은 곳을 데려가 주셨지만, 역시 매일 지내는 저택과 관련이 없으면.”
“지식은 평생 간직해야 할 보물이라고. 좋아. 내가 네 1세기나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줄게.”
파츄리가 허공을 향해 손짓하니 한 권의 책이 저절로 책장에서 빠져나와 대도서관 안을 부유해갔다. 그리고 그녀의 곁으로 도달해 마녀의 작은 손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제안한 건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 너보다 2300년이나 전을 살아갔던 인물이야. 그러니까 넌 2300년이나 뒤떨어졌다는 거지.”
“네에.”
“얘, 메이링.”
파츄리는 도서관의 천장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건 천장이 아니라 저 멀리에서 불타고 있는 태양과 지구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달이었다. 그런데도 메이링은 침실에서 잠을 자는 레밀리아를 가리킨 건가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달빛이란 건 태양빛을 반사한 거야. 달은 혼자서 빛을 못내. 달빛의 정체는 태양빛이야. 그러니까 네가 달에 태양과 비슷한 따뜻함을 느낀 건 당연한 거라고.”
신기하게도 메이링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파츄리가 말해준 지식은 메이링은 몰랐던 거지만 그것 자체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아침 해가 떠오르는 어둑한 방안에서 메이링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1세기나 에이프런 드레스를 입고 있었더니 이런걸 이제 와서 입어보는 것도 좀 그렇네.”
그녀는 레밀리아가 준비해줬다는 중화풍 의상에 몸을 둘렀다. 하우스 키퍼 시절과 같은 셔츠에 연한 녹색 조끼와 롱스커트. 확실히 홍마관의 문지기에게 어울리는 화려함이다.
──마녀가 건넨 말은 인상 깊게 메이링의 손바닥 안에 남아있었다.
달은 혼자서 빛을 못 낸다.
그렇다면 홍 메이링에게 있어서 흡혈귀 레밀리아 스칼렛은 뭘까.
자문자답한 메이링은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