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 불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 되어 플랑의 머리를 걷어차고, 치르노와 함께 죽일 기세로 불과 서리로 지지고 볶다가 다들 사이좋게 펑 터져버렸다...라는 파츄리의 목격담을 납득하는데 마리사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플랑의 더러운 성격머리를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정황상 플랑이 주범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싸웠던 건데?'
마리사는 파츄리에 비하면 편식쟁이다. 식습관이 아니라 마법 면에서 말이다. 그게 어떤 마법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것도 사람한테 사용하는 건 폭탄을 불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험할 것이다. 다행히도 마리사가 이런 마법에 무지하지 않았기에, 파츄리의 지도와 도움을 받지 않고도 마루의 회복력을 증폭시켰다. 눈 돌리면 온갖 상처가 사라지는 인외들과 달리 잔뜩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건 언제 배워뒀어? 화끈한 거 타령하는 네 성격이랑 안 맞는데."
"다치면 혼자 손볼 줄도 알아야 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상처야?"
치료하는 입장에서 어떤 부상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했지만 여기서 마리사의 의도는 중의적이었다. 마루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이 금이 간 뼈와 이빨이 다시 붙고, 터지고 찢어진 피부도 다시 깔끔해졌다. 마루의 체력 부담 때문에 완벽하게는 아니었지만, 안정만 취하면 완벽하게 나을 것이다.
마루가 아픔 없이 편안히 잠든 상태가 되어서야 마리사는 기절한 이들을 안아들어 간이 침상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의자에 먼지 날리도록 털썩 주저앉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도움 될만한 건 찾았어?"
"의식이 없으니까 마법약은 먹이면 안되고, 이게 괜찮을 거 같다."
"안전한 거 맞지?"
"암요암요. 자는 사이에 뭘 했는지도 모를 만큼 안전하고 순한 마법입니다."
대략적인 추측만으로는 다들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츄리는 심문에 사용할 마법을 찾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는 마법은 안된다는 듯 마리사의 시선이 따가웠다. 자연스럽게 깨어난 다음에 얘기를 듣자니 언제 깨어날지는 알 수 없고, 분명 3명 모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모두 머리와 목만 아플 게 뻔할 것 아닌가. 때문에 파츄리는 '사실을 말하게 하는 최면 마법'에 부작용 일절 없음이라는 조건을 추가하면서 필요 이상의 노력을 투자했다. 마루를 걱정하는 그 지극정성은 잘 알겠으니 그만 노려봐도 된다는 불편한 눈짓이 받고 나서야 마리사는 고개를 돌렸다. 갈 곳 잃은 시선은 다시 3개의 간이 침상으로 향했다.
마루도 치르노도 플랑도 다들 의식불명이지만 잠든 얼굴만은 편안해 보였고, 마법사들은 그 점에 안심했다. 이제 좀 깨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그냥 푹 자게 두고 싶은 마음의 괴리 속에서 마리사가 주목한 곳은 마루의 손이었다.
대체 어떤 주먹을 내질렀던 건지 손바닥은 자신의 손톱에 깊게 찍혀 피가 나고, 손톱들도 깨지거나 들린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마루에겐 자기 손을 아끼지 않는 불주먹질 외에는 이렇다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졌지만 그 손을 매만지던 마리사는 아직도 거친 흉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심란해서였다.
...
자기파멸적인 난투를 벌인 걸 똑똑히 본 증인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자세한 진상을 알고 싶은 이들은 저 주관적인 말이 더 입에 잘 맞는 아이들에게서 객관적인 사실을 듣고 싶었다. 게다가 이들이 눈 뜨자마자 2차전을 벌여도 안된다는 어려운 조건을 만족시키는데 필요한 건 이번에도 마법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걸 할 수 있는 게 마법 아닌가.
레밀리아와 사쿠야가 도착했을 때쯤 준비는 끝나 있었다. 잠든 채로 의자로 옮겨진 이들은 모두 안대가 씌워지고 팔다리가 묶여 있었다. 검은 천 정도로 무슨 포박이 되겠냐 싶지만 이 또한 파츄리의 손을 거쳐간 물건이었다. 어차피 쇠독 오르는 쇠사슬을 써봤자 흡혈귀는 못 묶는다는 것도 있었다. 꽤 오래 주문을 외우던 파츄리는 마침내 모든 이의 기다림을 끝내 주었다. 하지만 양손 가득 들고 있는 마법의 빛무리는 동시에 가벼운 긴장감이었다. 머릿속을 건드리는 마법은 파츄리 자신도 완벽하게 자신하기 어렵다는 사전 경고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화염? 안개? 비눗방울? 무지개처럼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저 애매모호함의 집합체는 담담한 명령과 함께 피심문자들의 머리맡에 떨어졌다.
"다들 일어나."
가슴 높이에서 떨어뜨린 무지개빛은 수면 위의 파문처럼 퍼지며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의 발치를 훑고 지나갔다.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이들에겐 어떤 효과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아 마법의 대상이 된 이들의 의식은 신기한 변화를 겪었다. 각성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튕긴 팔다리가 구속에 걸려 덜컹대고 크흡 하며 불규칙한 숨소리가 한두번 터져나왔지만 예상 내의 반응에 다들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깨어나기 전처럼 얌전해졌다. 한동안 이들의 이마에 손을 얹거나 귓가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등 자극을 줘가며 상태를 살핀 파츄리는 특별한 문제는 없다며 모두에게 손짓했다. 이제 파츄리의 마지막 확인만 남았다.
"다들 내 말 들리지?"
"...들린다."
잔뜩 쉰 치르노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곧이어 마루와 플랑 또한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로 뭐라 웅얼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마법으로 끄집어내고 주무르며 재구성된 의식의 목소리는 꼭 금속 관을 타고 흘러나온 소리 같았다. 이로 인한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말투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깨어난 이들의 의식은 모두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의 기억에만 쏠려 있었다. 한치의 거짓말도 없이, 질문을 들으면 보고 듣고 행동한 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털어놓을 것이다.
마리사가 그 처음을 끊었다.
"너희들 중, 누가 먼저 싸움 시작했어?"
...
다들 이 대단치 않은 이유로 시작된 사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사람 해치는 요괴의 자연스러운 본질과,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충돌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세상 섭리 이야기였다. 열심히 내용을 필사하던 사쿠야나 질문을 던지던 레밀리아와 파츄리는 제대로 얼굴 들기를 난감해했고, 관자놀이가 지끈대는 마리사는 플랑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지금 상황에서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담을 뛰어넘는 납치로 시작해서, 무계획적인 탈출과 도주에 대한 체벌. 치르노 본인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난입이 일어나더니 막판에는 그저 때리고 찌르고 박살내고. 전부 놀잇감을 원했던 자기가 시작한 거라고 플랑이 실토한 순간부터 맨정신인 사람들은 다들 탄식을 참지 않았다. 누가 봐도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잘잘못의 저울은 요괴의 본질 문제나 파츄리가 싸움 중에 가한 크고 작은 비중립적인 지원,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끝맺고 싶은 주변 인물들의 의견 등등에 의해 평행을 이루었다. 사건의 발단인 플랑은 야단치고 벌하는게 결정된 다음, 침입자라는 색안경이 벗겨지자 마루와 치르노를 향한 미안함이 담긴 눈길이 지나갔다. 다들 플랑이 한 짓에 대해 대신 사과하고 싶었다.
최대한 태도와 말을 자제하면서 마리사가 파츄리에게 난감함과 짜증 섞인 말을 던졌다.
"계속 할 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래야겠다. 그 전에, 일단 저 녀석들은 떼어놓고."
"사쿠야, 일단 플랑은 방으로 데려가서 재우자. 에휴, 이거 미안해서 어째."
피심문자들의 정신은 파츄리의 손을 떠나 다시 자유로운 수면에 들어갔고, 비몽사몽하던 플랑은 사쿠야에게 업히자마자 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지금쯤 찢어진 인형 조각들로 너저분해진 자기 방에서 다시 얕은 잠에 들고 있겠지. 마법의 영향 때문인지 마루와 치르노 또한 잠이 얕아진 듯 했다. 구속을 풀어주자 조금씩 팔다리를 뒤척이고 끙 소리를 내고 눈부신 조명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반응이 마리사를 위로해주었다.
여러모로 칙칙해진 분위기를 돌릴 겸 레밀리아가 궁금증을 하나둘 풀어내며 말을 시작했다.
"서로 얼굴 좀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네가 가르쳤어?"
"동생 같은 친구. 그리고 주술은 내가 가르쳤다고 할 만큼 해준 건 없었는데."
얘기가 나온 김에 생각났다는 듯 마리사는 마루의 품을 조심스럽게 뒤적여 부적을 찾았다. 이게 오늘의 난리통 속에서 마루와 치르노를 지켜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적에서 아직도 흘러나오는 시원상쾌한 활기가 손가락을 휘감을 때마다 마리사는 오늘 마루가 얼마나 힘을 터뜨렸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해준 건 이거랑 책 몇 권뿐인데, 그동안 잘 배운 모양이네."
"뭣하러 그런 걸? 벌써부터 요괴 퇴치사가 하고 싶대?"
"그건 아니고, 할 얘기가 좀 많은데..."
마루가 주술을 배우는 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집중하기 좋은 활동이었고 노력하는 즐거움이 있어서 몰두하는 것뿐이었다. 슬픈 일이 생각나지 않게 하는데 말이다.
...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마루가 품고 있는 씁쓸한 사정을 털어놓은 것에 대해 마리사는 말 없는 용서를 구했다. 이런 관계로 엮여 있는 마루와 마리사가 여기서 이렇게 마주친 것에 대해 레밀리아는 이 또한 운명인가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온 이유가..."
"자료가 많이 부족했거든. 그런데 스리슬쩍한 마법으로 도와준다고 얘가 기뻐하지도 않겠지..."
뒤늦은 반성과 함께 마리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파츄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파츄리와 레밀리아는 저 흑백 도둑놈이 고개 숙여 부탁했다는 사실이 꼭 머리에 못이 박힌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난해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한계에 당도한 마리사가 오늘 이곳에 온 건 바로 저 마법책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밤낮의 경계를 허물면서 얻은 것이라곤, 지금 자신이 가진 지식과 힘만으로는 마루를 도울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정신을 건드리는 그런 마법은 대개 위험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마루가 그걸 짊어지지 않으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필요한 대가와 시간은 적지 않겠지만, 마리사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루가 뭘 잊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실감을 떠안고 사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잠시 고민한 끝에 파츄리가 입을 열었다.
"나라면 그렇게 절실하고 돕고 싶은 애한테, 그런 위험한 마법은 안 쓸 거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과 함께 몇 권의 책 더미가 밀려 탁상을 쓸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부탁할 용기가 있으면, 그걸 도둑질에 쓰지도 말고. 내가 무시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파츄리는 마리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참 이상한 거절이었다.
"위험하니까 이 책을 안 빌려줄 거고, 대신 좀 더 안전한 것들로 찾아줄게.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마리사의 저런 모습도 드문 일이지만, 저렇게 말한 것과 달리 파츄리는 그걸 곧이곧대로 들어줄 위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승낙 아닌 승낙은, 마리사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부탁이라서 들어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오늘 혹독한 일을 겪게 한 마루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과와 위로이기도 했다.
"...조만간 가져갔던 책들 돌려줄게."
"그래야지. 그리고 옆에 좀 봐봐."
레밀리아가 옆에서 계속 손짓하며 '여기 이것 좀 보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꽤 반가운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루가 끙 소리를 내며 열심히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마루가 깨어나자마자 남은 힘을 다해 날뛰지 않은 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냥 힘이 없어서였을까. 흐리고 뻑뻑한 눈을 열심히 굴리던 마루는 이제서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입도 뻥끗거리는 게 보였지만 뭐라 들리진 않았고, 마루는 조급해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익숙한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을 파악한 후 마루는 이번엔 힘겹게 머리를 기울였다. 어깨를 살살 찔러가며 옆에 있는 치르노를 조심스럽게 깨워보려는 행위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의문을 불어넣었다. 의문에 빠진 건 마루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그것도 아니면 저세상에서 보고 있는 환상일까. 모르는 얼굴이야 그렇다 쳐도 왜 마리사가 여기에 있는 거지. 온몸이 찌뿌둥하고 살살 아픈 것까지 근거로 고려해가며 마루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열심히 현실을 자각하려 애썼다.
...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꿈나라로 가버린 치르노와 달리 마루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깨어 있었다. 깨어난 직후 붕대와 반창고는 답답했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픈 몸을 추스리고 다시 싸워야 한다거나, 혈액의 대부분이 플랑의 목구멍을 넘어갔다거나 하는 최악의 경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사려 깊은 설명 덕분에 사태 파악은 금방이었다.
그런 다음 마루가 가장 먼저 한 건 인사와 사과였다. 자신이 잡혀왔다는 연유가 어쨌건 플랑과 죽자 살자 싸우고 주변을 박살낸 것에 대한 사과는 저 가족 식구들에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이건 의도치 않게 이들의 죄책감의 무게를 늘리기도 했다.
그 다음엔 여러모로 자신을 도와줬고, 앞으로 도와줄 파츄리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연기와 피냄새 섞인 첫 만남 때와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였다. 화염을 몸 안에 가두는 무모한 짓으로 인한 후유증은 없는지 파츄리는 마저 마루의 상태를 진찰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치르노는 괜찮은 거 맞아요? 아직도 깨어나질 못하는데."
"전에 싸우던 도중에도 그렇고, 너는 너보다도 훨씬 불멸하는 요정을 더 걱정하네?"
"그건... 제가 이상한 건가요?"
"아니. 딱 어린애답고 주술사답네. 저렇게 널 찾아내고 도와주는 친구는 얼마 없다?"
저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며 자신이 배운 것들을 차근차근 짚은 후에야 마루는 파츄리의 충고를 이해했다. 세상과 친근해지는 주술사는 자연히 자연의 분신인 요정과도 유대할 것이다. 물론 이 주술적 관계가 저 친구 사이의 원인이 된 건 아니었다. 이전부터 둘은 친구였고, 주술은 그 관계를 잇는 다리를 하나 더 놓아준 셈이었다.
치르노가 본능적으로 마루를 찾아온 것도, 눈치를 한참 뛰어넘는 호흡을 맞추고 서로의 힘을 빌리며 플랑에게 맞선 것도. 우연이 끼어든 부분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냥 지쳐서 자고 있는 거야. 너도 당분간 푹 쉬기만 하면 되겠지만, 다른 문제는."
"제 문제가 많이 복잡한가 봐요?"
"아직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그래. 하지만 지금 걱정하는 건 나보다는 네 문제야. 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정신도 많이 지쳤을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몸과 마음 모두 잔뜩 지친 지금의 마루는 파츄리가 도와줄 수 없었다. 왜 기억을 잃었는지를 짐작하고 그에 맞는 처방법을 생각하려면 머릿속 문제점을 아주 명확하게 알아내야 한다. 지금 마루의 기억은 어떤 상태일까. 불타 재가 된 책?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사장 위의 글씨? 그것도 아니면 풍화되어 모래가 되어버린 암각문? 복원의 가능성 이전에 그걸 알아내는 게 첫번째였다.
하지만 지금 파츄리가 마법적 방법으로 그의 머리를 열어본다 한들 분간을 방해하는 극심한 피로가 희멀건 안개처럼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맑고 명료한 정신은 이런 걸로도 쉽게 흐트러질 수 있었다.
마루에게 있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오늘 당장은 도와주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럼... 굳이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곧 실망할 모습이 눈에 훤하던 파츄리는 저 낙관적인 태도의 즉답에 조금 놀랐다. 놀라움이 얼굴에 드러나자 마루는 저 표정에 대해 답했다.
"엄청 졸려요. 그냥 쉬고 싶어요."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애시당초 이 도움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좋아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루였다. 동시에 이걸 미룬다면 가장 아쉬워할 사람이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간다고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난항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금 마루가 원하는 건 푹 쉰 다음,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원하는 걸 얻는 것이었다.
덕분에 파츄리는 마루를 실망시킬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
"마루야, 궁금해서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플랑한테는 화 안 났어? 뭐, 내 생각보다는 마루 생각이 더 중요하겠지만 너무 차분해보여서."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저희가 이기기도 했고, 힘들어서 더 싸우기는 싫고. 나중에 생각할래요."
방금 사쿠야가 살펴보고 왔을 때는 삐지기라도 한 건지 자기 방에 얌전히 있다고는 했지만, 꼭 플랑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재대결을 요구하는 것만이 곤혹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당분간 파츄리의 도움을 받으러 이 저택을 왕래할 일도 있을 것이고, 자연히 플랑과 마주칠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참 불편한 재회일 테고. 마루는 피하고 싶지만 그렇게 마음처럼은 안되는 껄끄러움을 지금 당장은 덮어두기로 했다.
지금이야 아프고 지치고 그 녀석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도 않으니, 정말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그때 생각하자. 화해를 권유할지, 또 무작정 싸울지. 물론 여러모로 마루가 원하는 건 전자였다. 서로 머리 식히고 차분해진 다음에 만난다면 또 피 볼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마루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도 맞으면 아프고 화나는 법일 텐데. 마리사는 저 착함을 걱정하기보단 칭찬해주기로 했다.
"역시 마루는 의젓하네. 너희가 이길 만 했어."
"히히."
눈꺼풀과 고개가 무거워진 마루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사과의 선물을 건네받기도 했고, 배웅과 작별의 말이 몇 마디 오가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홍마관 밖으로 나오니, 마루는 차가운 바깥공기를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았다. 추위는 상처를 쑤시게 만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시원했다. 아마 마리사의 등에 업혀 있는 치르노도 같은 기분일 것이라고 마루는 생각했다.
"둘이 같이 싸웠던 거 맞지? 그런데 어쩜 이렇게 다르냐."
"전 저렇게 느긋하게 자고 있는 것도 조금 부러운데요."
"졸리면 가는 길에 잠 자도 괜찮아. 내 실력 알지?"
세 사람씩이나 마리사의 빗자루에 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진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두 사람의 체중이 비교적 가볍기도 하고, 가끔씩 대량의 짐을 매달고 이런 짓을 하기도 했으니까. 선두에 있는 마리사의 뒤에는 치르노가 있고, 맨 뒤에서는 마루가 마리사의 허리춤을 붙잡아 곤히 자는 치르노도 함께 붙잡았다.
노곤노곤하게 늘어진 얼음 날개를 조심히 끌어안은 채 마루는 상승을 느꼈다.
느긋하게 날아오른 빗자루는 갈수록 더 느긋해져, 하쿠레이 신사에 내려올 때쯤엔 그 속도가 걷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그럴 수 밖에. 여전히 자신과 친구를 잘 붙잡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마루까지 잠들어 버렸다.
저녁이 되어 하늘에는 어둑어둑한 주황빛이 끼고 있는데 마루는 조금 늦는 건가 위화감을 느끼던 레이무는 당연히 마리사 일행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온갖 의학 처치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두 아이를 이부자리에 조심히 늬여놓고 나서야 마리사는 이 기담에 준하는, 오늘 마루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말하는 쪽도 마음이 편하진 않은지 마리사도 크고 작은 첨삭을 가하기도 했지만 레이무의 저 표정을 보아 하니 별 소용은 없는 듯했다.
보다 못한 마리사가 애들은 푹 자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위로해주고 나서야 레이무가 조금 안심했다.
------------------------------
다음 날 느지막하게 일어나자마자 마루는 레이무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는 날벼락처럼 쏟아질 잔소리를 걱정했다. 간만에 밖에 나갔다가 이 꼴이 되서 돌아왔으니, 전후사정 이유불문하고 레이무가 그렇게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며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는 말이 그의 입 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레이무라고 위험한 짓을 했다고 꾸짖어가며 마루의 진을 빼놓을 만큼 사려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에 마루와 치르노가 가볍게 끌어안아 주고는 아주 잘하고 왔다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마루는 입 안에 맴돌던 말을 도로 삼키진 않았다.
...
경내에서 치르노가 무례한 짓을 벌이려고 하자 레이무의 떽 소리가 한번 터졌다. 곧이어 그 사이에 있던 마루는 치르노를 타일러 신사 뒷편으로 데려가면서 더 이상 문제는 없었다. 신사 마당과 달리 여기서라면 치르노는 잔소리 듣지 않고 눈밭을 뒹굴고 뛰어다닐 수 있었다. 물 만난 고기보다 더 신나게 날뛰는 것 같다는 게 마루의 생각이었다. 아직 쑤시는 곳이 많아 치르노만큼 화끈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재활 삼아 마루는 열심히 친구의 장난을 받아줬다.
웃음소리와 흥분이 커져갈수록 아픔은 누그러지고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재밌었다. 저 차가운 눈과 얼음에게서 계속 힘을 얻기라도 하는 건지 치르노가 헥헥대며 대자로 뻗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주 상쾌해 보이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루가 질문했다.
"다친 데는 안 아파? 난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쑤시는데."
"흐흥, 벌써 다 나았지."
그걸 자랑하겠다는 듯 치르노는 눈에 젖은 반창고와 붕대를 북북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공기와 맞닿은 살갗의 가려움을 씻어내기 위해 부드러운 가루눈으로 시원하게 문질러댔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팔에 붙은 얼음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저대로 냠냠 눈을 먹지 않는 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면 볼수록 치르노는 세상이 다 자기 꺼인양 행복해 보였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추울수록 강해지는 얼음의 요정에게 있어 겨울은 자기 세상이겠지.
"요정은 상처도 빨리 낫고 부럽네."
"그럼 너도 요정 해볼래?"
"...요정이란 게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거야?"
"안될 게 뭐 있어!"
마루는 피식 비웃는 대신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치르노가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눈이 묻고 축축해진 치르노의 머리카락과 옷을 털어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