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얼마나 뒤척였는지 모른다. 내 바로 옆에 아직 10대인 파릇파릇한 전직 여고생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나의 몹쓸 망상을 부추겼다. 그 결과, 카나코님이 기상을 알릴 때까지 잠든 시간은 고작 3시간. 눈꺼풀이 무거웠다.
반쯤 비몽사몽한 상태로 어질러진 이불을 개고 나서 욕실에서 간단한 세수로 몽롱한 정신을 각성 시켰다. 그러는 동안 먼저 일어나 있던 사나에는 아침식사를 준비중이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주방에서 새어 나왔다.
신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
변한 몸에 맞춰 정신도 수정되어 버린 바람에 기대한 것만큼 두근거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직 여고생과 한 방에서 떠들다가 잠든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오빠, 아침 먹으려 안 오세요?」
그런 감회에 빠져 있는 나를 사나에가 부른다. 나는 「응. 갈게!」하고 기운차게 대답하고는 입안 가득한 군침을 삼키며 안방으로 향했다.
*
아침 식사후, 신님과 함께 오손도손 아침드라마를 시청한 사나에는 익숙한 동작으로 본전 앞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아마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 일과의 시작일 것이다. 부지런한 사나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냥 놀고만 있을 수 없는 나도 밥값을 벌기 위해 카나코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뭐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소우지 씨는 손님이니 편하게 있으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가만히 있기가 뭐해서.」
「음.. 딱히, 거들었으면 하는 일은 없는데...」
카나코님은 확고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들었다. 죽치고 있자니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영 가볍지가 않아서 한 말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괜히 죄송스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골똘해 하던 카나코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저와 스와코를 좀 더 신앙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런걸로..」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압니다. 하지만, 신앙에 굶주려온 저희에겐 그것만큼 도움이 되는 건 없습니다.」
카나코님은 의아해 하며 바라보는 내게 선선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신앙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즉답했다.
「물론입니다. 신앙하고 말고요!」
덕망 높은 신님께서 저렇게 까지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겠어. 만약, 그런 녀석이 있다면 천벌을 받지 않을까? 신님이 벌하지 않겠다면, 내가 대신 벌 해주마!
진심이 담긴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나코님의 눈동자가 기뻐하는 것이 전해질 정도로 이채를 발한다.
내게서 시선을 돌린 카나코님이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우지 씨는 정말로 올곧은 요괴시군요.」
「올곧다니..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고평가에 의아해 하는 나에게 카나코님은 그렇다는 눈빛을 보낸다. 머쓱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과찬이에요..」
카나코님에게 그런 칭찬을 듣다니.
이거 황송해서 어쩌나.
에헤헤, 하고 쑥스러움을 얼버무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내 어디가 올곧은 건지 카나코님에게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이런 사소한 의문조차 신님을 의심하는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계시는 카나코님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마당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나에가 슬며시 입가를 올리며 환한 웃음을 보내온다. 나는 그녀의 눈과 미소가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져 시선을 피해버렸다.
*
손님 취급이라 딱히 할 일도 없던 나는 내 행세를 하고 있던 가짜가 신경쓰여 한 번 집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그 가짜놈이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헛것을 본 것인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상까지 오를 때와 달리 마을까지 내려가는 건 상당히 수월했다. 백년은 훨씬 넘게 오르내리던 산이다. 눈에 익다 못해 세세한 지형까지 외워버린 내겐 너무도 쉬운 산길인 것이다.
올라갈 때의 1/4의 속도로 내려온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곧장 집까지 달렸다. 그리하여 도착한 정문앞. 나는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조금 망설이다가 긴장되는 기분으로 문을 열어 재꼈다.
드르륵, 하고 집 내부가 눈앞에 드려난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났는데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없는 건가?'
그 가짜가 어제만 존재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마루 밑에 놓인 신발 한 켤레가 보였다. 백랑텐구의 게타였다.
「... 있구나.」
없었으면 했는데.
그런 기대를 했었던 나는 다소 실망한 기분으로 집안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안방으로 가서 장지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인 것은 배를 드려내고 잠들어 있는 가짜의 모습이었다. 누가 둔갑한 것인지는 몰라도 뻔뻔하게 제집인양 기분 좋게 자고 있는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니 이마에 핏발이 서는 듯했다.
녀석은 빨간 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근처에 스마트폰까지 있고.
「뭐하는 새끼야?」
영락없는 잉여새끼다. 내 직감이 이 녀석이 답이 없는 잉여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 얼굴이지만, 상대하기 싫을 정도로 한심해 보인다. 이런 놈이 내 행세를 하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림새를 봤을 때, 가짜는 바깥세계에서 왔거나 최소한 관련이 있는 녀석일게 분명했다. 유카리님도 구해와도 하필이면 이런 녀석을..
그래도 유카리님이 준비한 만큼 만만치 않은 놈이겠지만.
나는 욱하고 올라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만 자고 있는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옥!」
효과는 굉장했다. 단숨에 눈을 뜬 녀석은 화들짝 놀라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미간을 좁히며 뚱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그런 녀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뭐하는 놈이야?」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녀석이 한심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카지나 소우지. 산을 수호하는 백랑경비대의 자랑스런 전사올시다!」
「새끼가 장난하냐? 나인 척 하려면 최소한 이름 정도는 틀리지 말라고.」
가짜인 주제에 이름도 틀려먹는 것에 화가 난 나는 녀석의 옆구리를 한번 더 걷어찼다. 꾸엑, 하는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녀석이 옆으로 데굴데굴 뒹굴었다.
「너 그래가지고 내 지인들 속여 먹을 수나 있겠어?」
그렇게 일침을 놓는데, 옆구리를 부여잡고 웅크린 녀석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큭,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썹을 늘어뜨리며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내게 녀석이 히죽대는 얼굴로 말했다.
「이누미미 미소녀의 매도 떴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씨바.. 뭔가 기분이 굉장히 거지 같네.
인중을 늘어뜨린 능글거린 미소가 내 기분을 더 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내 얼굴을 하고 있지만, 혐오감이 느껴지는 녀석을 나는 홧김에 밟아댔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업계포상 개꿀~~~! 감사합니다! 좀 더.. 좀 더 밟아 주세요오오옷!」
이 미친 변태새끼는 밟아댈수록 좋아하는 것이었다. 입으로만 떠드는 패션 변태가 아닌, 진정한 ㅁㅁ 변태인 건가!?
이래서야 발길질을 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여자가 되서 약해져 있다곤 하나 요괴의 발길질인데 끄떡없는 녀석도 보통이 아니다. 아픈데도 참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맷집이 강한 걸까?
발길질을 멈춘 나는 질렸다는 눈으로 녀석을 내려다봤다. 감정이 격해져 있는 탓에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킬 때였다. 녀석이 내 발목을 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뺨에 내 발을 밀착 시키는 게 아닌가!
「호옹이! 이누미미 미소녀의 통통한 버선발의 촉감. 기.. 기분 좋아아아아아!」
흥분으로 달궈진 뜨거운 콧김이 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내 발에 연신 뺨을 비비적거리는 녀석의 표정은 역겨움 그 자체였다. 흥분하면서 내뱉는 기괴한 신음도 구토감을 불러일으킨다.
아 씨바 완전 ㅁㅊㅅㄲ 아냐!?
역겨움이 임계치를 넘는다. 더는 견딜 수 없어진 나는 녀석의 얼굴을 힘차게 걷어차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 집밖으로 나갔다.
세상에 저렇게 소름끼치게 기분 나쁜 자식이 있을 줄이야..
만만해 보여서 쫒아내려 했지만, 되러 당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만한 새끼가 아니다. 저런 변태를 어떻게 참교육 시켜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자.
저 변태새끼를 치운다고 해도 유카리님이라면 또 다른 변태를 준비해 놓을지 모른다. 거기다 지금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텐구도 없으니까.
「완전 성희롱 당한 기분이네. 아니, 성희롱 당한 게 맞나?」
가짜의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떠올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변태새끼가 나로 둔갑하고 있다니. 냉정을 되찾고 나자, 가짜의 변태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변태새끼가 다른 사람에게도 저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거 생각할수록 심각한 문제인거 같은데?
가령 레이무나 모미지 앞에서도 저 지랄을 떤다고 하면...
내 평판은 바로 바닥을 치고 말겠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쫒아내야 했나?
집 근처에 숨어 한참을 고민하던 나의 귀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아 아마도 날 찾아온 손님인 것 같았다.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은 육안으로 확인 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얀 머리에 승복. 좀 더 가까워지자, 얼굴까지 또렷이 보였다. 아직 옛되어 보이는 귀여운 백랑소녀. 이누바시리 모미지였다.
이 시간에 뭐하려 온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니 금방 풀렸다. 가짜놈이 대낮까지 잔다고 아침 집합를 빼먹었겠구나. 성실한 내가 말도 없이 열외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네.
나는 걱정 되서 찾아온 모미지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미지와 가짜가 대면했다.
정문 앞에서 만난 둘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청각을 집중 시켜 둘의 대화를 엿듣는다.
「미안미안. 그만 늦잠을 자버렸지 뭐야~. 에헤헤헤헤..」
「그런 한심한 이유로 땡땡이치지 마세요. 걱정해서 손해 봤잖아요.」
「그래도 내가 걱정 되서 찾아와 주다니. 모미지쨩 진짜로 천사아냐?」
「네? 천사라뇨?! 갑자기 그런 소리를..」
「뭐야? 혹시, 쑥스러운 거야? 수줍은 모미지쨩은 레알로 귀여운데?」
「귀엽다니..」
「모.. 모에에에!!」
저 ㅁㅊㅅㄲ가 무슨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그리고 모미지 너는 또 그런 입바른 소리에 얼굴을 붉히는 건데!?
예상대로 모미지는 가짜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모에~'같은 소릴 하는데도 전혀 눈곱만치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다간 내가 정신 나간 백랑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수상한 요괴라고 의심 받겠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미지의 어깨에 손까지 얹고 징그럽게 실실대는 녀석을 향해 나는 큰소리로 호통쳤다.
「야이─ 강아지야! 그 손 당장 안 치워?」
녀석과 모미지가 동시에 이쪽을 쳐다봤다. 개수작을 부리는 녀석을 죽일 듯 노려보는 내게 모미지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묻는다.
「누구냐?」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살이 에는 듯한 살기에 나는 주춤한 채 식은 땀을 흘렸다. 역시, 모미지다. 수상해 보이는 자에겐 용서가 없구나.
무시무시한 박력과 살기에 한 순간에 기세가 죽어버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베여버릴 지도 모르기에 나는 하는 수없이 모미지가 납득할 만한 말을 지어내야만 했다.
「그.. 그러니까. 저는 경비대에 소속 된지 얼마 안 된 수습인데요... 저기..」
그럴싸한 설정을 짜내느라 머뭇대며 말을 더듬거리는 내게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강해졌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막 떠오른 말을 토해냈다.
「모.. 모미지님을 전부터 사모해 왔어요! 그러니까.. 저 남자가 수작을 부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내가 말해놓고도 바보 같았다. 이런 궁색한 거짓말을 누가 믿는다고.
그런데...
이런 궁색한 거짓말을 믿어 버리는 자가 있었다.
바보 같이 성실한 모미지였다.
「그런가...!?」
모미지는 순수하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심란한 표정으로 난감을 표했다.
「나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니... 고백을 받은 건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생뚱맞은 소리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미지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함부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만약, 거짓말인 게 들통 나게 된다면 저 흉흉한 언월도에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 엉뚱한 연극을 끝까지 유지하는 수밖에.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연모해온 자가 있다.」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는 모미지의 눈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양심이 찔린다는 말이다. 그런 내 심정을 반영하듯 내 시선은 모미지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미지는 가짜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카자네 소우지. 이 자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백랑이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면서
「그러니, 너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걸 이해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한 모미지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