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레밀리아 스칼렛, 엘도라도에 내려서다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1)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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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꿈이 모여드는 도시의 항구는 새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기후 속에서도 신중하게 양산을 펼치는 레밀리아 스칼렛은 지금이라도 당장 침몰할 것 같은 나룻배에서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부두에 도착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배가 접안을 못 한대서 왜 그런가 싶었더니.”
안개가 자욱한 항구 안에서도 그녀는 항구의 이상한 광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온한 수면 위에 떠오르고 있는 건 수백은 족히 넘는 크고 작은 배의 형체와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돛. 수많은 배는 안 그래도 비좁은 항구를 제 것인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사공 씨?”
레밀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나룻배의 노를 젓던 백발이 무성한 노인을 향했다. 박복해 보이는 표정의 그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는 레밀리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기가 꿈의 도시라는 말을 듣고 머나먼 영국에서 찾아왔는데 이래선 그냥 배의 무덤이잖아. 이게 무슨 꿈의 도시야?”
길고 긴 여행길에 지친 레밀리아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부두 위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연분홍색의 치마가 바닷바람에 흩날린다.
그녀의 체격은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나 뱃사공의 노인은 그녀의 신원을 전혀 모르는데도 레밀리아에게 신중하게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그야 여긴 꿈의 도시니까요.”
“요점을 모르겠네. 그게 뭔 소리야.”
“선원들이 꿈을 찾아서 주인들에게 도망쳐오는 도시라는 거죠.”
뜻밖의 명쾌한 대답을 들어서 레밀리아는 감탄했다.
항구에서 몇 번이나 계속 전해져오는 일확천금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익숙해진 배조차도 그들에겐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 정도의 매력이 이 세상의 끝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해를 한 레밀리아는 조금 불안해져서 뒤에 있는 프록코트의 집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리 배는 괜찮겠지?”
“적어도 왕립해군에 속해있는 자들입니다. 규율은 철저히 지킬 겁니다.”
“그래 봤자 똑같은 인간이잖아. 신용이 안 돼.”
항구의 앞바다에 영국 해군기를 건 증기선이 닻을 내리고 소문으로만 듣던 황금향을 바라보기 위해 수병들이 갑판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부심이 강한 넬슨 제독의 후계자, 로얄 네이비다. 레밀리아가 돌아갈 수단이 간단히 없어질 일은 없다.
그리고 배의 정반대 측에는 완만하게 떠오른 반도의 능선이 안개 속에서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안개 도시라는 건 사실인 거 같네.”
여기는 세상의 끝. 그러므로 세상에 알려지는 정보들은 전부 확실하지 않다. 수상쩍은 정보도 많다. 그래도 이 도시가 런던과 비슷한 정도의 안개가 낀다는 건 확실한 정보였었다. 그리고 런던과는 다르게 이곳의 안개는 석탄 매연 같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기분 좋은 안개다.
그리고 반도의 언덕에는── 바다에 삐져나온 항구에 서 있는 레밀리아의 예정지는 이 근방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가 있다. 항구 내에 늘어서 있는 유령선과는 다른 인간들의 활기가 넘치는 도시가 있다.
구름처럼 마을을 덮고 있는 안개 속에서 은은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 열기를 레밀리아는 온몸으로 느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생명의 숨결이 소용돌이친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를 눈앞에 둔 그녀는 호기심으로 인해 몸이 욱신거렸다.
이 도시야말로──
레밀리아는 집사에게 지시해 사공에게 품삯을 줬다. 그녀는 이 땅의 물가를 모른다. 소문으로는 심각할 정도로 물가가 폭등했다고 한다. 그래서 레밀리아는 사공에게 건네준 5달러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를 사전에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금액을 받았는지 사공은 놀란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씩 웃으며 성급하게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레밀리아는 느긋이 도시로 걸어갔다.
“저기.”
도시로 들어가려는 레밀리아 일행에게 사공이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돌아갈 때도 저 증기선으로 돌아가십니까……?”
“응. 그렇지.”
“그럼 돌아가실 때 부디 저를 불러주세요. 아가씨를 배까지 쾌적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네. 그때 기억이 난다면 부탁할게.”
사공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레밀리아는 안개 낀 마을로 갔다. 빨라져 가는 우아한 발걸음은 그녀의 기대치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레밀리아의 고결한 품격을 보고 멍하니 있던 사공은 작아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게 말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샌프란시스코에.”
19세기가 반이나 지난 서력 1856년.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길이 꺼지고, 일본은 문고리를 닫고 있었던 도쿠가와 막부가 결국 서양에게 굴복하고 있었다. 대영제국은 세계를 제패했지만 80년 전에 영국에게서 독립한 신흥 국가 미국이 국제사회의 안에서 서서히 두각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시대다.
흡혈귀 레밀리아 스칼렛은 골드러시에 열광하는 신대륙의 서해안── 캘리포니아에 있다.
이변이 시작한 건 1848년의 일이다. 그러나 레밀리아가 그 사회적 변동을 알아낸 것은 그 후로부터 시간이 지난 1854년이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잉글랜드 국왕의 왕성이었으며 지금은 대영제국의회의 의사당이다. 20년 전의 대화재로 인해 궁전 대부분이 소실했으며 빅토리아 왕녀는 버킹엄 궁전으로 이동했지만 새로 지어진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지금도 대영제국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많이도 바뀌었네.”
레밀리아가 이 궁전에 오는 건 대화재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이미 의회의 기능은 하고 있지만 아직도 건축 중인 부분도 많았다. 고딕 양식의 내부는 여기저기가 불완전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불리지도 않은 귀족원에 얼굴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나다.”
“들어오세요.”
작은 방의 문을 노크한 순간 바로 응답이 왔다. 손잡이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니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레밀리아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스칼렛 경.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레밀리아를 반기는 자는 올해로 50세가 되는 중년의 남자. 이름은 벤자민 디즈라엘리. 영국 보수당 소속의 국회의원이다.
“필 급진파 일 이후로 처음인가. 웰링턴 공작이 죽고 난 뒤로 내게 부탁이 오는 것도 오랜만이구만. 이 남작 따위에게 매달리는 자가 아직도 있을 줄이야.”
작은 면회실에는 디즈라엘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만 있는 방 안에서 레밀리아는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전 재무장관이여. 어정뱅이만 잔뜩 있는 보수당에 계속 붙어있는 건 상관없지만 나 같은 일개 남작에게 의지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보는데.”
“잘도 말씀하시는군요. 호그문트 남작.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중에서 얼마 안 되는 생존자 아닙니까.”
“……이 노체의 수명도 얼마 안 남았다고. 곧 후계자를 소개하게 되겠지.”
흑색 연미복을 입고 있어도 몸은 소녀임이 틀림없는 레밀리아 스칼렛의 말을 들은 디즈라엘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유감스럽다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디즈라엘리는 소녀의 넋두리에 맞추고 있는 것도, 정신이 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레밀리아의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레밀리아 스칼렛은 흡혈귀다. 15세기에 왈라키아에서 태어나 4세기 동안 살아왔다.
그녀의 최대 과제는 단 하나, 자신이 귀족인 것. 즉 권력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계속 쥐고 있는 것. 불사의 몸을 얻은 레밀리아는 고향 땅을 나와 무기를 손에 쥐고 진영을 전전하며 수많은 작위와 이름을 얻었었다.
그러나 작위라는 건 왕좌를 가진 인간이 승인해줘야 실효성을 가진다. 불사의 흡혈귀는 몸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받은 이름은 없어진다. 작위를 받은 인간이 반세기나 늙지 않는다면 의심하지 않을 군주는 없다. 그래서 레밀리아는 기껏 손에 얻은 귀족의 이름을 몇 번이나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18세기까지의 일이다. 살아있는 시체에 불과했던 레밀리아 스칼렛은 지금은 뱀파이어가 되었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연기를 덮는다면 타인의 인식을 저해하고 바꿔버리는 것은 간단하다.
40년 전의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영국을 따랐던 레밀리아는 무공을 세워 호그문트 남작의 작위를 손에 얻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약 400년간의 생에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위 계승을 거행하기로 결의했다. 간단한 일이다. 초대 호그문트 남작 레밀리아 스칼렛이란 이름을 없애고 제2대 호그문트 남작 레밀리아 스칼렛을 공표하는 것뿐이다. 그 이치를 맞출 자신이 지금의 레밀리아에겐 있었다.
즉 지금 눈앞의 디즈라엘리에겐 레밀리아의 교체는 그가 의지하는 후원자 스칼렛 경을 잃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웰링턴 공작이 보수당의 당수를 맡고 있어서 레밀리아는 여러 가지로 보수당의 후원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흡혈귀인 그녀에게 있어 인간의 이념 따윈 사소한 일이다. 교체를 기회로 망해가는 보수당을 버리는 것도 선택해볼 만하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의도도 모른 채 디즈라엘리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번에 애버딘 백작 내각이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알고 있어. 수상 각하는 평화 외교가지만 내각에는 파머스톤 자작과 존 러셀 경이 있으니까 강경수단이 나와도 신기하진 않지. 그래서 야당인 자네는 늙은 내게 뭘 바라는 거지? 설마 발칸 반도에서 군을 이끌고 오스만투르크와 가세하라는 건가?”
디즈라엘리는 손에 쥔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펼쳐놨다.
“애초에 전 그런 전쟁에 들이미는 건 반대 했는데 말이죠. 매국노란 비난은 듣고 싶지 않았기에 표면상으론 전쟁 반대를 외치진 않았습니다만 이것이 여당을 공격할 재료가 될 겁니다.”
“역시 정치가구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스칼렛 경은 전쟁과 현재 내각을 향한 명확한 지지를 표출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전쟁의 노장군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특히 귀족원에는 흔들릴 자도 많을 겁니다. 선전은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디즈라엘리는 홍차를 타서 돌아왔다. 레밀리아는 홍차를 마셨지만, 결코 맛있진 않았다.
“……좋아. 그 정도라면 협력하지. 근데 그런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정말 내각을 쓰러뜨릴 수 있겠나? 파머스톤 자작과 존 러셀 경. 둘 다 만만하진 않다고. 그리고 현재 보수당의 대표 더비 백작은 어정뱅이들의 필두 일뿐이지 않나? 애버딘 백작을 수상 자리에서 끌어내더라도 더비 백작은 내각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보는데.”
“……부정할 수 없는 게 좀 그렇군요.”
테이블 위에는 디즈라엘리가 준비해둔 러시아 전쟁에 관한 서류들이 늘어서 있다. 대영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한 지 아직 얼마 안 지났다. 그래서 아직 전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제국 정부나 군의 사무 관련은 최전선과도 같이 매우 바쁜 상황이다. 이 서류들도 디즈라엘리가 인맥을 사용해서 외무성의 관료들에게 거의 강제적으로 뺏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다.
레밀리아는 서류를 쥐고 지루한 듯 바라봤다. 대영제국이 유럽의 문명국들과 분쟁이 일어난 건 1815년에 종결한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다. 그러나 서류에 적혀있는 문장의 내용은 40년 전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느껴졌다. 그리고 뭣보다 이 전쟁은 프랑스 제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공동전선이다. 제해권도 쥐고 있다. 적어도 글에서는 예전 같은 긴장감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안심해주세요. 스칼렛 경. 저희는 절대 굴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올리니 디즈라엘리가 뻔뻔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신에 가득 찬 얼굴이다. 목소리의 억양은 약했지만 그 안에 흔들리지 않은 파동을 숨기고 있었다.
“영국 보수당에는 이 벤자민 디즈라엘리가 있으니까요.”
레밀리아의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빨간 눈동자가 세 번이나 깜빡이다가 킥킥 웃기 시작했다.
디즈라엘리는 유대인 이민자 2세다. 작위가 가진 귀족 계급이 중요한 영국 정계에서 서민 계급에서 대신까지 오른 그의 수완은 굉장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레밀리아가 보수당을── 아니 그를 아직도 후원하는 이유는 그 수완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언젠가 여왕의 은총을 받은 무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기대하고 있겠어. 디즈라엘리. 네 활약을 못 보는 것이 유감이지만.”
하지만 레밀리아의 말과는 다르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매우 긴 시간을 살아온 흡혈귀는 수많은 사람을 봐왔다. 그런데도 400년의 세월이 지난 이 19세기에서도 그녀를 유쾌하게 만드는 자는 계속 생겨났다.
디즈라엘리와 두, 세 마디 정도 나눈 레밀리아는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대영제국이 대치하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는 광대하다. 수도는 바르트 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이지만 전쟁의 주전장이 될 오데사와 크림반도는 흑해이며 동쪽 끝에는 아시아의 끝, 베링 해협과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가 있다.
그러므로 영·프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격돌할 지역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될 것이다. ──서류에는 그런 문맥이 적혀있었다.
“파나마 지협 철도……?”
파나마는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좁고 긴 지협의 일대를 말하는 지명이다. 현재는 누에바 그라나다 공화국의 영토이지만 서류에는 미합중국이 통행권을 가지고 있다고 적혀있다.
“스칼렛 경은 모르고 계셨나요?”
“……처음 듣는군.”
“아직 개업은 안 했습니다만 이게 완성되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짧은 거리로 왕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군에는 이 철도를 이용해 태평양 동안에 병참을 확보하고 알래스카나 극동에 대함대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자도 있었습니다.”
디즈라엘리의 말을 레밀리아는 흥미 깊게 듣고 있었다. 그녀도 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뭐 원래부터 왕립해군의 태평양함대는 빈약한 캄챠카 소함대에 비교하면 충분한 규모를 지니고 있죠. 일부러 새로운 병참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 초안으로 끝날 겁니다.”
“그나저나 이해가 안 되는군.”
레밀리아는 득의양양하게 말하는 디즈라엘리를 무시하고 파나마 지협 철도의 관한 정보가 적혀있는 서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가 안 된다니요.”
“……별 건 아니다. 철도로 두 바다를 이은다는 건 뭐 괜찮아. 근데 태평양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 스티븐슨의 자식이 이집트에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수에즈의 기슭을 오가는 철도조차 완성되지 안 됐잖나. 어떤 유별난 자가 파나마 같은 변방에 철도를 짓겠다는 거냐 이거지.”
레밀리아는 말이 끝나자마자 디즈라일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단정한 외모와는 안 어울리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레밀리아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못 볼 거라도 본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레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니 디즈라일리는 맥빠진 듯 소파에 앉았다.
“……의외네요. 스칼렛 경은 항상 이 섬의 밖을 향하고 계셨는데 말이죠.”
“비꼬는 건가? 디즈라일리.”
“골드러시 말입니다. 스칼렛 경.”
──황금을 향한 열광
그 말은 레밀리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스며들었다.
태평양을 마주한 미합중국의 서쪽 끝, 캘리포니아에 세계의 욕망이 집결하고 있다고 디즈라엘리가 말했다. 들은 하늘 높게 치솟은 로키산맥을 아니면 얼어붙은 혼 곶을 넘어 미국 동부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신대륙의 서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과정에서 파나마 지협 철도의 수요를 발견해낸 자가 나타난 것이고.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금이 발견된 것은 1878년. 그 후로 6년이 지나있다. 그런데도 이 대영제국에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자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나와 런던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스칼렛 저택으로 돌아온 레밀리아는 메이드들에게 잇따라 묻기 시작했다.
──그대, 골드러시를 알고 있는가?
메이드들의 옷이 담긴 세탁물을 들고 있던 메이드가 말하길, 고향 아일랜드의 친척이 캘리포니아에 사금을 캐러 갔다고.
손님의 홍차를 접대하던 메이드가 말하길, 조카가 어렵게 유지하고 있던 런던의 하숙집을 내던지고선 뉴욕으로 가버렸다고.
방에서 서류 정리를 한창 하는 하우스 키퍼가 말하길, 제 오라버니는 안정적인 전문직을 버리고 터무니없는 일확천금을 노리러 갔다고.
“나도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웠었나.”
메이드들의 집안사를 들은 레밀리아는 자신이 세상 물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든 메이드가 그런 말을 꺼냈던 건 아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골드러시는 레밀리아의 생활권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듣고 보니 1848년 이후로 런던의 활기가 조금 쇠퇴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정기를 양식으로 삼는 흡혈귀이기에 알게 된 이변이었다.
“근데 그땐 혁명이 있었으니까. 활기가 없었던 건 그 때문인 줄 알았는데.”
1848년에 또다시 프랑스에서 혁명의 불길이 번졌다. 그 불길은 순식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번지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협조적 국제 질서였던 빈 체제를 붕괴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 독일의 국수주의는 매우 고양되었지만 일전의 유럽 전토를 휩쓸었던 혁명전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1852년에 나폴레옹 3세로서 제 2 제국을 선포했다. 무너져버린 빈 체제는 러시아 제국의 야심을 견뎌내지 못하여 대영제국과 러시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런 구세계의 유럽 열강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신세계의 끝에서 캘리포니아라는 황금향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한번 가볼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런던의 메케한 하늘 저편에는 끊임없는 욕망이 넘치는 대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레밀리아는 캘리포니아를 마치 제 고향처럼 느끼게 되었다. 흡혈귀로서의 본질이 캘리포니아에 이끌리고 있다.
흡혈귀의 주식은 인간의 혈액이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것뿐이다. 흡혈귀가 이를 드러내게 만드는 것은 얇은 가죽으로 뒤덮여있는 육체가 아닌 영혼이다. 인간의 본질이다. 영혼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현세를 살아간다. 그러므로 흡혈이라는 영혼의 간섭은 흡혈귀의 의사에 따라 인간을 죽일 수도 있고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 아무리 결백하게 살아가려 해도 영혼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욕망을 만들어내고, 욕망의 향기는 인간의 영혼을 먹는 흡혈귀를 불러들인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레밀리아 스칼렛은 작위를 가지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영국 귀족이다. 조국이 전쟁이라는 고비에 처한 상황에서 미국으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레밀리아가 미국을 향하게 된 건 그 후로 2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1856년, 러시아령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서의 격전을 치르고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러시아와의 전쟁은 정전을 이루게 되었다. 확실한 승자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야망을 깨부쉈다는 점에서 대영제국의 승리였다. 그리고 정전이라는 것은 곧 레밀리아가 런던에 나갈 수 없던 족쇄에서 해방된다는 것이었다.
제2대 호그문트 남작 레밀리아 스칼렛의 계승은 혼란스러웠던 전쟁 중에 모두 마쳤다. 저택의 지하감옥에 묶여 있는 플랑드르를 하우스 키퍼에게 맡기고 선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잠긴 디즈라일리를 무시한 채 레밀리아는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에 올라탔다.
답답한 외출용 셔츠와 코트를 벗어 던지고 좋아하는 연보랏빛 드레스를 걸쳤다. 동반하는 인물은 신뢰하는 집사 한 명과 소지품을 챙길 메이드 2명뿐이다. 이것은 관광에 불과하다. 큰일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3명만 있어도 레밀리아에겐 충분했다.
뉴욕에서 배를 갈아타 파나마의 대서양 측 항구도시 애스핀월에서 내렸다. 애스핀월이라는 이름은 파나마 지협 철도의 사업주인 미국인의 성이다. 아직 발전이 되지 않은 작은 도시였다.
“미국인은 정말 자기 이름을 지명으로 삼는 걸 좋아한다니까.”
레밀리아는 작은 열기 기관차의 객실 안에 있었다. 차내에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백인들이 신기한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나마의 열대우림은 대부분의 유럽인이나 미국인, 레밀리아조차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태평양 측 항구도시 파나마는 애스핀월과는 달리 대항해시대부터 번영한 대도시였다. 파나마에 도착한 레밀리아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태평양에는 사우샘프턴에서 탔던 고급 여객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민들이 붐비는 여행길에 울분이 쌓인 레밀리아는 캘리포니아에 향하는 광부들이 많이 타는 퍼시픽 메일 사의 증기선──이 기선 회사도 애스핀월이 만들었다고 한다──에 타는 걸 관두고 자신의 작위를 이용해 파나마에 정박하고 있는 영국 해군의 외륜선에 올라탔다.
그 후로 수개월이 흐르고 레밀리아는 드디어 골드러시에 열광하는 캘리포니아의 현관으로 발전한 항구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정말 고귀하신 분이 멀리서도 오셨구먼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어. 생각한 것보다 오래 걸린 건 뭐 사실이긴 해도.”
레밀리아가 있는 곳은 샌프란시스코 안에서도 술과 요리가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주점이었다. 목제 카운터 석에 앉아 있는 레밀리아는 손짓을 섞어가며 대양을 넘은 여행담을 말하고 있었다. 길고 긴 항해 동안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푸념을 내뱉는 주인 레밀리아의 뒤 테이블에 있는 하인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에일을 마시고 있었다.
레밀리아가 들고 있는 잔에는 고급스러운 아르마냐크가 아름다운 호박색을 뽐내며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조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런던의 어중간한 주점보다 샌프란시스코의 주점이 더 진보해있다는 인상을 느끼고 있었다.
런던에 틀어박혀 있던 시절의 레밀리아는 캘리포니아를 고향에서 쫓겨난 난폭한 광부들이 모인 무법자들의 개척지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의외로 레밀리아가 해온 항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구세계와 신세계를 구분하고 있는 건 혼 곶, 아니면 파나마 지협, 아니면 로키산맥이다. 곶이든 산맥이든 세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파나마 지협 철도도 지리적 격절을 근본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했다.
즉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기본 자금이 필요하다. 기본 자금을 준비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은 교양이 있다는 것이다. 광부들은 이미 사회 계급이라는 거름망을 거치고 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양이 있다고는 해도 광부들이 무법자에 아나키스트인 것은 변함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고향에서 벌어온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 끝없는 욕망을 계속 파내고 있다. 그리고 이 캘리포니아는 광부들의, 광부에 의한, 광부를 위한 “왕국”이다. 광부들의 법이 시행되고 있는 “공화국”이다.
주점 주인은 그야말로 광부 같은 체격의 미국인이다. 갑갑해 보이는 커다란 몸으로 레밀리아의 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저도 일단은 1849년에 필라델피아에서 금을 파기 위해서 왔습니다만 이렇게 주점을 운영하는 게 더 돈이 된다는 걸 깨달아버렸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네. 그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여기에 온 거잖아.”
“그것이 이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의 계략입니다. 제임스 마셜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처음 듣는데.”
“48년에 아메리칸강에서 처음으로 사금을 발견한, 뭐 이 골드러시의 계기가 된 남자입니다.”
──금이다! 아메리칸강의 금이다!
그런 마셜의 목소리가 캘리포니아에 울려 퍼진 1848년 1월 말, 그 토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멕시코 합중국령이었다.
“불쌍한 마셜은 캘리포니아의 사금을 처음으로 발견해냈지만 많은 사금을 손에 얻진 못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캘리포니아에 몰려든 광부들에 의해 자신의 토지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죠. 여기서는 일확천금이 여자보다도 귀합니다. 그리고 운 좋게 행운의 여신을 조우한 자는 다 한결같이 파멸을 맞이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금을 위해 캘리포니아에 모이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거네.”
“여기는 틀림없는 약속의 땅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쾌락이 사금이란 형태로 구현돼서 강에 흘러 다니고 있는 겁니다. 이제 와서 고향으로 돌아가 가업을 이으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요.”
주점을 채우는 술잔치의 소리는 주인의 말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 레밀리아의 귀에는 광부들의 말 속에 들어있는 절망이 똑똑히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돌아가지 못한다. 모두가 끝없는 황금의 꿈에 홀려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캘리포니아에 잡아두고 매혹하고 있는 건 거대한 금광맥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 동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제한 없는 자유다. 그것은 분명 일확천금의 꿈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의 절망을 나타낸다.
언젠간 맛볼 일확천금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잔혹한 캘리포니아의 대지는 광부들에게 고향에서 타인에게 부려 먹히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사금을 계속 베풀어 그들을 이 도시에── 골드러시가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커다란 모조품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붙잡아두고 있다. 그러나 사금 위에 솟아오른 광경은 금을 다 파내면 하룻밤 만에 고스트 타운이 될 광경이다. 그것은 캘리포니아의 사람들이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상이다.
브랜디의 알콜이 레밀리아의 몸을 약간 달아오려 이 대지 아래에서 흐르는 용암과도 같이 맥동하는 금광맥의 열정과 일체화한다. 얼음이 짤그랑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리는 샌프란시스코에 금을 캐려고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죠.”
“그래. 관광이야. 신기하려나?”
“제가 이 주점을 운영하면서 관광하러 왔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이런 재밌는 장소가 세상에 몇 있는 것도 아닌데 안 둘러보기엔 아깝지 않나?”
“여기에 어느정도 체류하실 생각인지?”
“모처럼 왔으니까 한 15일 정도는 인간의 꿈이란 걸 보고 다닐 생각이야.”
주점 주인은 새로운 브랜디 병을 집으며 매우 냉정하게 레밀리아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길고 긴 여행길에 울분이 쌓여있는 것인지 눈앞에 있는 남자는 40도나 되는 브랜디를 물처럼 마셔나갔다.
그렇다──남자다. 그가 소녀일 리가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관광으로 찾아오고 더군다나 브랜디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인간이 소녀일 리 없다.
이해가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카운터 석에 앉아있는 대영제국의 귀족이라는 레밀리아 스칼렛이라는 남자에게서 어떻게든 쥐어뜯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엄청난 화제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나리. 샌프란시스코에 그렇게 오래 머무실 거면 하나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돈이라면 필요 없어.”
의도를 파악한 레밀리아는 손에 쥐고 있는 잔을 고개 대신 흔들었다. 그러나 주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감이지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실례하지만 충고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뭐 들어주기는 할게.”
주점 주인은 거북할 정도로 몸을 들이대며 입가에 손을 갖다 다. 큰소리로는 말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레밀리아는 기분이 나쁜 듯 찡그렸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미간의 주름이 더욱더 깊어졌다.
“흡혈귀가 나타난답니다. 이 도시에는.”
“……흡혈귀라고? 비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흡혈귀?”
“글쎄요…… 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습격당한 자들은 모두 흡혈귀가 나타났다고 증언했었습니다.”
레밀리아의 뒤에 있던 하인들의 담소는 어느샌가 끊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레밀리아도 쾌활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술 향기와 사람들이 떠들썩한 주점 안에 그녀의 주위만 어두운 공기가 맴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레밀리아를 본 주점 주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러니까 악질 살인마가 돌아다닌다고 보면 되겠죠. 유감이지만 신원을 파악 못 했거든요. 성별, 연령, 인종이고 뭐고 전부.”
“기묘한 이야기네. 보아하니 그걸 흡혈귀로 단정할만한 생존자는 없는 것 같은데 목격자는 있겠지?”
“네. 그 흡혈귀가 샌프란시스코에 출몰하기 시작한 건 최근 1개월 정도입니다만 2, 3일에 한 번 정도로 누군가를 습격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제대로 봤다는 사람도 많고요.”
“정체를 모르는데 흡혈귀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뭔가 증거가 있어서 그런거지?”
그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와 무의식중에 주점 주인을 타박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레밀리아는 브랜디로 목을 축이며 새빨간 혀로 예리한 송곳니를 어루만졌다.
“경비가 쫓아가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던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기민함을 가지고 있다던가……아, 그리고 흡혈귀에게 죽은 사람들에게 흡혈 자국이 남아있다던가. 그저 소문인 것도 많아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점 주인의 말을 들은 레밀리아는 움직임을 멈추고 쓴웃음을 지으며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주인이 새로운 브랜디 병을 열려는 것을 레밀리아는 손으로 말렸다.
“알고 있어? 흡혈귀에 물린 인간은 흡혈귀가 된다고.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엔 아직도 흡혈귀가 단 한 명밖에 없잖아? 뭐 권속으로 삼지않고 물어 죽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흡혈귀는 어지간히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나보네.”
레밀리아는 빈정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주인을 바라봤다.
“……그건.”
“더 안 말해도 돼. 잘 먹었어. 꽤 맛있었어.”
집사는 이미 테이블에서 일어나 있었다. 와인 잔 속에 손가락을 굴리고 있는 레밀리아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 몇 장의 지폐를 꺼내 들어 당황하고 있는 주인에게 넘겼다. 경솔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돈줄을 붙잡는 것에 실패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대금을 받았는데도 밝지가 않았다.
“그것 좀 빌려줘.”
그리고 레밀리아는 집사에게 지갑을 요구했다. 지갑을 받은 그녀는 뺨에 손가락을 얹으며 생각을 한뒤 1달러 은화 3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놨다. 주점 주인이 레밀리아에게 말한 비장의 흡혈귀 이야기의 값은 하인들이 마신 에일 한 잔의 값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이거뿐인가요.”
은색으로 빛나는 세 여신상의 옆모습은 고귀한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으로 주인이 불경한 말을 내뱉는게 충분할만큼 궁핍한 값어치였다. 그러나 레밀리아는 그를 타박하지 않고 대담하게 웃었다.
“난 영국의 왕에게서 작위를 하사받은 긍지 높은 영국 귀족이야. 안 그래도 불쌍한 왕좌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구식민지의 공화주의자에게── 그것도 환상과도 같은 황금에 얽메이는 서민 상대로 돈 가지고 장난 치진 않아.”
의자에서 일어난 레밀리아와의 시선은 의자에 앉아있을 때보다도 더 낮은 위치였다. 그런데도 주인은 오히려 존대한 인간이 깔보고 있는 것 같은 위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레밀리아가 말하는 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납처럼 무겁게 주인의 몸속에서 울리며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은 지독한 감각이 주인을 뒤덮고 있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방울에 집중하고 있는 의식을 바로잡아 주점 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눈 앞에 있는 남자에게 물어봤다.
“왜 그러십니까?”
“별거 없어. 단순한 거야. 타국민이 강매한 별 볼 일 없는 쓰레기에게 필요 이상의 대가를 낼 필요는 없을 뿐인 거지. 유감이지만 귀족들의 긍지라고 할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당신 서민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막 하는 것도 아니야. 그 긍지를 따라도 당신의 흡혈귀 이야기는 내겐 은화 3개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아.”
레밀리아는 지갑을 집사에게 돌려주고 주점을 나가려고 했다.
메이드가 열은 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레밀리아의 연분홍색 치마를 가볍게 흩날렸다. 마지막으로 출구에서 뒤 돌은 레밀리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 못 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주인에게 새빨간 눈동자로 째려보았다.
“그런 소문은 내게 말할 필요가 없었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