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레밀리아 스칼렛, 엘도라도에 내려서다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1)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2)
-----------------------------------------------
도시가 정적에 잠긴다. 무겁고 차가운 심야를 지배하는 정적이다. 사자 같은 사나운 마도도 밤이 깊어진 지금은 깊은 잠에 들었다.
그렇기에 허공을 향해 올리는 홍 메이링의 노랫소리는 어둠을 개는 것처럼 매우 맑은 소리였다.
好一朵茉莉花 好一朵茉莉花 (아름다운 말리꽃 아름다운 말리꽃)
滿園花香香也香不過她 (뜰 안의 어떤 꽃도 그 향기를 이길 수 없네)
奴有心采一朵戴 又怕來年不發芽 (하나 집어 장식하고 싶지만 내년에 싹이 안 트면 어찌할까)
好一朵金銀花 好一朵金銀花 (아름다운 인동꽃 아름다운 인동꽃)
金銀花開好比勾兒牙 (발톱과도 같은 인동꽃)
奴有心采一朵戴 看花的人兒要將我罵 (하나 집어 장식하고 싶지만 혼나는 건 아닐까)
好一朵玫瑰花 好一朵玫瑰花 (아름다운 장미꽃 아름다운 장미꽃)
玫瑰花開碗呀碗口大 (그릇과도 같이 꽃송이가 큰 장미꽃)
奴有心采一朵戴 又怕刺兒把手扎 (하나 집어 장식하고 싶지만 손에 찔리진 않을까)
아마 화교의 언어일 것이다. 레밀리아는 그 노래가 뭘 의미하는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멋진 노래네.”
“내 고향의 노래야.”
화교 흡혈귀는 벽돌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엔 고향의 대지와 이어진 태평양의 바다가 골든게이트 해협 사이에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태평양으로 떠나가는 캘리포니아의 밤바람이 그녀의 긴 붉은 머리를 휘날리고 있다.
예고도 없이 날라온 목소리에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제 만난 흡혈귀의 목소리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흡혈귀가 오늘 올 거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달빛이 닿지 않는 건물 사이의 어둠 속에서 레밀리아 스칼렛이 나타났다. 홍 메이링은 지붕 위에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밀리아 였던가? 네 이름.”
“맞아. 그럼 넌?”
“홍 메이링. 내 부모님은 날 그렇게 불렀어.”
“홍 메이링인가. 고귀한 흡혈귀에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네.”
그러나 홍 메이링은 이미 레밀리아와 다름없는 흡혈귀가 되었다. 그녀의 등에는 변변찮은 모양이긴 해도 확실히 흡혈귀의 증거인 한 쌍의 박쥐 날개가 자라있다. 뭣보다도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어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저건 이제 완전한 ‘흡혈귀’다.
그래도 레밀리아는 홍 메이링을 흡혈귀라고 인정하질 않고 있다. 한 달도 안 돼서 우연히 탄생한 흡혈귀 따위 그저 웃어 넘길 뿐이다. 흡혈귀는 그렇게 간단히 나와서는 안 된다. 이 힘은 400년을 걸쳐 힘들게 얻어낸 존재 가치이기 때문이다.
천민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 아니꼬웠다. 레밀리아는 날개를 펄력이며 맑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네 사정은 대강 파악했어. 기구한 운명이었네. 동정 정도는 해줄게.”
“나, 흡혈귀가 되어버렸네.”
“맞아. 동양인 흡혈귀. 널 죽여서 박제하고 대영박물관에 걸어놓으면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오겠지.”
레밀리아를 바라보던 메이링의 눈매가 그 말을 듣고 적의로 가득찼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의 기억들은 그녀를 민감하게 만들었다.
“괴로운 건 이제 싫어. 그래서 난 태양을 버렸어.”
“현명한 판단이야. 기뻐하렴. 넌 어울리진 않지만 이매망량의 정점에 서는 괴물이 되었어. 지금까지 널 괴롭히던 인간 따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야.”
“……그럼 넌 어쩔건데.”
“말했잖아. 괴롭히진 않을거라고.”
보름달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달빛을 등으로 받는 레밀리아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상쾌함에 몸이 떨렸다. 좋은 밤이다. 정말로 좋은 밤이다.
“괴롭히진 않지만, 처벌은 내릴 거야. 넌 흡혈귀의 품위라는 걸 너무 우습게 여겨.”
메이링의 시선에선 레밀리아의 모습은 달빛에 의해 윤곽이 희미해서 매우 거만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굳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4세기를 살아온 밤의 왕이 변두리의 이제 막 흡혈귀가 된 자하고 어깨를 나란히 할 필요는 없다.
레밀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뱉은 숨은 사자처럼 조용하면서도 거칠게 떠는 숨소리였다.
그 순간 팔을 벌린 레밀리아의 양팔에서 새빨간 연기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마구 뿜어져나왔다.
흡혈귀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용과 같은 두 갈래의 연기는 좌우로 뻗어 기다란 몸으로 메이링을 둘러쌌다. 두 연기의 앞부분이 메이링의 뒤에서 충돌하더니 우로보로스 같은 거대한 고리가 되어 용의 몸으로 둑을 쌓은 것처럼 붉은 폭포의 벽이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피의 커튼이었다. 메이링의 시야에서 유일하게 뚫려있는 건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빛나는 보름달이 뜬 하늘이었다.
“특제 결계야. 이 안이라면 얼마든지 날뛰면서 저항해도 아무 문제 없어.”
“……하늘은 안 막혀있는데?”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게 좋아. 왜 안 막았냐면 흡혈귀에게 달은 없어선 안 되잖아. 그리고 힘의 근원이기도 하고. 내가 주는 최소한의 자비라고 생각하렴.”
레밀리아를 째려보는 메이링의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삐져나온 송곳니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단도처럼 예리한 엄니가 됐고 날개는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의 흡혈귀에게 달려들려고 날개 치고 있었다.
레밀리아는 조금 걱정하고 있었었다. 화교 흡혈귀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망치지 않았나, 도시 깊숙한 곳에 숨어서 태풍이 멎을 때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모두 기우였다. 도시가 흡혈귀 홍 메이링을 만들어냈기에 단순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녀는 어제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 도망치지도 않고 숨지도 않고 고향의 기억을 부르며 레밀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흡혈귀를 땅에 떨어뜨리기 위해 분발하고 있다.
“……그래. 조금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샌프란시스코가 홍 메이링을 일방적으로 흡혈귀로 만든 것이 아니다. 홍 메이링도 흡혈귀가 되는 걸 원한 것이다. 그게 아무리 제물이라는 배역일지어도 홍 메이링은 그 운명을 끌어당겼다. 죽을때까지 고통받는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부정하고 인외인 흡혈귀가 되어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열어갈려 했다.
레밀리아는 메이링을 보고 씨익 웃었다.
‘좋아. 그 삶을 봐서 이 레밀리아 스칼렛이 보잘것없는 긍지를 쳐부셔주지.’
“달이 이렇게나 아름다우니까 진심으로 죽여줄게.”
‘힘껏 발버둥 치라고. 어중간한 흡혈귀.’
“즐거운 밤이 될 것 같네.”
──밤에, 마력을, 뿜어낸다.
공중에 있는 레밀리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같은 새빨간 관이 사방으로 퍼져 밤하늘을 뒤덮는다. 그건 고동치는 혈관이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거미줄 형태가 되어 보름달을 감쌌다.
그리고 메이링의 시야를 거의 덮은 피의 그물은 혈관에서 수많은 진홍색 수정으로 분열해 탄환 형태로 응축되고 레밀리아를 바라보는 흡혈귀를 향했다.
“힘껏 도망쳐보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개전 신호가 되었다.
붉은 탄환이 주인의 명령을 따라 밤바람을 가르며 메이링을 향해 덮쳐오고 있다.
틈새같은 건 없다. 탄환 하나 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타이밍을 맞춰 지체없이 발사해갔다. 예리한 탄환을 맞은 벽돌 지붕은 으스러지고 땅은 갈라지며 흙먼지가 퍼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 상태로 제압해갔다.
마력을 아끼지도 않았다. 수정 탄환이 발사 된 순간에는 새로운 혈관이 퍼지고 혈액을 탄환으로 응축시켜 메이링을 향해 발사했다.
유일하게 없어지지 않는 굉음이 샌프란시스코의 비명을 대신하고 있다.
“──쳇.”
그러나 메이링은 탄환을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서 있던 건물에서 바로 뛰어내린 그녀는 천변지이의 호우 속을 늑대 같은 몸놀림으로 질주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종횡무진하게 뛰어가던 메이링은 한쪽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달을 등지며 떠있는 상태로 탄환을 계속 발사하는 레밀리아를 봤다.
그리고 살짝 뛰어서 레밀리아에게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피를 응고시킨 단도를 3개 정도 투척했다.
“애송이주제 영리하구만!”
그 단도는 레밀리아가 메이링에게 던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흡혈 충동에 몸을 맡겨 피를 마시기만 하던 괴물이 이 짧은 시간만에 진정한 흡혈귀로 성장했다.
날개 치는 레밀리아는 뒤로 살짝 물러나 다가오는 단도를 피했다. 피하기만 해선 끝이 안 난다고 생각한 메이링이 레밀리아를 방해해 붉은 거미줄에 마력을 보내는 걸 끊어낸 것이다. 레밀리아는 급속하게 시들어가는 혈관에 눈길도 안 주고 오직 땅을 흘러가는 붉은 머리카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링은 탄환의 비가 멈췄기에 일단 움직임을 멈추고 공중에 떠 있는 레밀리아를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서로의 시선이 맞았다.
‘원거리 공격으로 저 녀석을 붙잡는 건 불가능해. 그건 어제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 하늘에 진을치고 있어도 계속 우위를 점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같은 무대에 서주지.’
레밀리아는 메이링의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크게 웃었다. 춤 추듯 몸을 뒤집어 땅을 향했다. 중력이 역전된 것처럼 공중을 힘껏 밟았다. 그리고 다리를 굽히고 거대한 박쥐 날개를 퍼덕였다.
그 순간 흡혈귀는 붉은 유성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뭐 저런 공격이……!”
바로 땅을 박차서 회피한 게 다행이었다. 메이링은 나중에 날아온 충격파에 날아가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아 착지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장소는 캠프파이어가 일어난 것처럼 흙먼지가 자욱하며 하늘 높이 흩날리던 자갈의 우박이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운석이었다. 메이링의 시야 끝자락에 비친 수직낙하하는 레밀리아의 주위에는 붉은 안개가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안개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레밀리아의 기척은 아직도 연기 속에서 건재했다.
사소한 공기의 흔들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메이링은 눈을 집중시키고 흙먼지 속을 살폈다. 그 정적은 오래가진 않았다. 레밀리아는 적에게 쉴 틈 같은 건 줄 생각이 없었기에.
레밀리아 스칼렛은 황토색의 커튼을 뚫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흡혈귀의 손에는 진홍색 장창이 있었다.
“하앗!”
랜스를 쥐고 돌격하는 레밀리아는 그녀 자체가 하나의 포탄이었다. 거대한 창끝은 모습을 보인 뒤 1초도 안 걸리고 메이링을 향해, 그녀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메이링의 판단은 매우 냉정했다.
‘저 포탄을 완전히 피해내는 건 불가능해. 그래도 창의 예리한 끝부분 말고 다른 곳에 맞으면 치명상은 입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그것만 피하는 거에 전념하면──’
눈을 깜빡이고 레밀리아를 충분히 끌어온 시점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빼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랜스를 왼손으로 받아 넘겼다. 랜스에 닿은 손바닥 피부가 벗겨지고 통각이 왼팔을 마비시켰지만 메이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오른팔로 몸을 감싸며 랜스 뒤에 있는 레밀리아의 돌진에 대비했다.
“……아악.”
온 몸을 덮쳐오는 충격에 폐가 멈추고 숨이 막혔다. 땅을 잊고 밤하늘을 힘없이 나뒹굴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회전하는 시야 속에서 새빨간 결계의 폭포에 뒤덮인 보름달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중력이 메이링의 몸을 다시 지배하고 난 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발로 땅에 내려섰다.
“놀라운데.”
메이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밀리아는 창 자루를 땅에 꽂아두고 랜스를 만지며 메이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랜스의 길이는 주인의 키보다 2배 정도 길었다. 새빨간 무기는 달빛을 받아 꺼림칙하게 빛나고 있다.
랜스, 일전에 기마를 몰며 유럽의 전장을 지배한 기사들이 애용한 돌격에 특화된 장창이다.
“팔 하나 정도는 잘라먹을 생각이었는데. 애송이치고는 생각보다 영리하네.”
“……인간이었으면 죽었을 공격이었어.”
“네가 정말로 흡혈귀라면 팔 하나나 둘 정도는 찰과상조차 아니거든. 자, 빨리 치료해. 지금 너라면 그 정도는 간단할 거야.”
거만하게 지시하는 레밀리아를 메이링은 매섭게 쏘아봤지만, 그 순간에도 랜스를 받아낸 왼손은 격통을 호소하고 있다. 한쪽 눈으로 확인하니 피부는 전부 벗겨지고 새빨간 살 속에서 여기저기 하얀 것도 보이고 있었다.
방법 같은 건 눈앞의 선배가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호흡하는 것처럼,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말이 나오는 것처럼 메이링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치료에 의식을 기울이니 흡혈귀의 몸은 그녀에게 반응했다.
그저 땅에 고여있었을 뿐인 혈액이 모기떼처럼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메이링의 왼손을 뒤덮어 있어야 할 장소에 돌아가고 바로 상처가 치유됐다.
“됐어.”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레밀리아는 작게 웃었다.
“난 널 간단히 죽일 수 있어. 그래도 일방적인 살육은 재미가 없단 말이지. 흡혈귀가 인간을 죽이는 건 단순한 사냥이야. 그래도 흡혈귀가 흡혈귀를 죽이려고 하면 설령 상대가 더러운 촌뜨기라도 그 행위는 결투가 되지. 그렇게 생각 안 해?”
결투를 권유하듯 레밀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메이링은 피가 섞인 침을 땅에 내뱉는 것으로 레밀리아의 권유에 응했다.
“후후, 유감이지만 너와 맨손으로 싸울 생각은 없어. 네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말이지.”
주르륵, 배덕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밀리아의 검지에서 흘러내린 혈액은 순식간에 팽창하고 모습이 변하며 응고된다. 한 자루의 길고 가느다란 봉── 검으로 변해갔다.
원리는 지금까지 몇 자루나 뽑아냈던 피의 단도와 같다. 아마도 랜스도 같을 것이다. 그것들은 혈액이면서도 레밀리아의 마력 결정이다. 그걸 맨손으로 만지다간 피부가 날아가는 건 당연하다.
완성된 붉은 장검은 메이링에겐 낯선 조형이었다. 직선으로 된 날에 가느다란 손잡이. 레밀리아는 검을 왼손에 쥐더니 촛불의 불을 끄듯 검에 부드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링에게 그 장검을 던졌다.
메이링은 피하지 않았다. 피할 필요가 없었다. 검은 메이링의 눈앞에 꽂혔기 때문이다.
“이거 줄테니까 받아.”
즉, 이 붉은 검으로 레밀리아의 랜스와 검무를 펼치라는 것이다. 서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분명 공평한 결투가 될 것이다. 메이링도 방금 전의 일격을 맞고난 후 랜스를 맨손으로 받아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메이링은 검에 손을 뻗질 못했다.
‘랜스를 만졌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 장검의 손잡이를 쥐는 순간이 끝. 마력에 의해 팔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경계하지 않아도 돼. 기습 공격은 안 해.”
메이링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레밀리아는 장검을 가리켰다.
“내 마력은 빼뒀어. 네가 만지면 그 검은 네 마력으로 가득 찰 거야. 네 검이 되는거지.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어서 집어.”
조금 전에 했던 건 검에 마력을 뺐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레밀리아의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던 메이링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검에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알 수 있었다.
시선은 레밀리아에게 향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감촉을 확인하기 위해 장검을 휘둘렀다. 피가 통하는 것 같은 감촉이 있었다. 이게 자신의 마력으로 가득 찬다는 것일 거다.
“……아냐.”
그러나 메이링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아냐. 이건 내 무기가 아니야.’
그녀는 장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는 칼은 탄환의 비가 내린 폐가 더미에 내리꽂혔다.
그 장면을 바라본 레밀리아는 불쾌한듯 입이 굳어졌다. 혹시 전의를 상실해버렸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안갔다.
메이링은 검지를 흡혈귀의 송곳니로 깨물었다.
날카로운 고통과는 대조적으로 입속에는 무딘 철의 맛이 났다.
손가락을 휘두른다.
붉은 방울이 샌프란시스코의 밤에 흩날렸다.
“……제법인데. 단도면 몰라도 이 정도까지 가능할 줄이야.”
메이링의 오른손에는 한자루의 검이 있었다. 그것은 양날검도, 사벨도 아니었다. 버드나무 잎의 형태를 가진 넓고 굽은 칼. 홍 메이링의 기억, 고향 광둥의 경치 속에 살아있던 유엽도다.
칼끝을, 확고한 의지를 지닌 눈동자를 레밀리아에게 향했다.
“난──”
그러고보니 메이링은 그 말을 직접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덮치고. 살아남기 위해 흡혈귀가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레밀리아와 싸웠다. 그 행위에 명확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에 닥친 방해물을 넘기 위해 발버둥 친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메이링은 그걸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그저 짐승에서 이매망량으로 승화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뿐이다.
동양인 흡혈귀는 유엽도를 한 손에 들고 위대한 서양의 흡혈귀에게 다시 선전포고 했다.
“난 살아남을 거야. 그러니 널 쓰러트리겠어.”
레밀리아는 비웃었다. 그러나 그 비웃음은 메이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거였다.
“아아, 왜 이렇게나──”
‘──두근거리는 걸까.’
흡혈귀는 분명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물일 거라고 레밀리아는 확신했다.
랜스의 창자루를 차올리고 튀어 오른 손잡이를 집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자세를 잡아 창끝을 메이링에게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형편 좋을 때만 나타나는 자비로운 신은 없어. 여기는 우리들 뱀파이어의 도시야. 운명에 얽메이지 말고 마음껏 싸우라고…… 홍 메이링!”
레밀리아는 외치고 있을 때 이미 도약하고 있었다.
박쥐 날개를 펼치고 도로의 먼지를 회오리치며 흘러가듯 초저공을 미끄러져 갔다.
1초도 안 걸리고 거리를 좁혀온 레밀리아에 맞서 메이링은 오른쪽으로 뛰어 탄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행동도 레밀리아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관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흡혈귀는 메이링의 바로 옆에서 정지했다. 얇은 다리는 땅을 도려내며 레밀리아 주위의 도로가 움푹 파였다.
레밀리아는 등에 흙먼지를 외투처럼 걸치면서 랜스의 창끝을 내찔렀다.
“……읏.”
유엽도를 휘둘러 랜스를 튕겨낸다.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피의 무기들이 격돌해 금속 소리가 울려퍼진다. 칼끝에서 두 사람의 마력이 뒤얽히고 붉은 물방울이 불꽃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메이링이 레밀리아의 찌르기를 막아도 역습의 기회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랜스의 방향을 칼로 튕겨내 버려도 메이링이 틈을 파고들기도 전에 레밀리아는 랜스를 바로잡고 다시 찌르기를 계속했다.
두번째는 똑같이 튕겨내는 것이 가능했다.
다섯번째는 유엽도가 랜스에게 밀렸다.
열번째는 뺨에 랜스가 스쳐지나갔다.
“젠장. 들어갈 수가 없어!”
검극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메이링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인외인 흡혈귀이면서도. 레밀리아는 장창의 사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맨몸의 인간이 다룰 리가 없는 마상 병기, 거대 랜스를 자기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휘둘러서 간격의 우위성을 계속 유지하려 하고 있다.
검극을 몇 초간 더 유지해본 메이링은 정공법으로 뚫는 걸 포기했다. 정확하게 몸속 깊은 곳까지 노려오는 랜스의 창끝을 간신히 피하고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쥐고 온 힘을 다해 유엽도를 내리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랜스가 땅에 내리꽂혔다. 빈 몸으로 돌격해오는 레밀리아가 한순간 정지했다.
메이링은 바로 후방으로 도약하고 거리를 크게 벌렸다.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눈썹을 매우 찡그리고 있었다. 랜스가 단순한 철제봉이었으면 반격의 기회를 찾아내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붉은 랜스를 손으로 받아넘긴다는 건 불로 달구어진 철을 만지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실제로도 검극에서 직격은 전부 회피했지만 메이링의 뺨은 화상 입은 것처럼 문드러지고 움푹 파인 피부에서 피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편 레밀리아는 랜스를 바로잡았다. 레밀리아의 표정은 메이링과는 다르게 희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어쩔거지? 변방의 흡혈귀. 수비에만 전념하면 이길 전투도 못이긴다고.”
“……얕보지마!”
뺨에 묻어있는 피를 왼손으로 걷어내고 상처에 묻혀서 치유시킨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메이링은 자신의 피를 핥았다.
피투성이의 손은 유엽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칼이 드세게 울렸다.
잿빛 눈동자가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진홍색으로 물들어간다.
왜소한 박쥐 날개가 위대한 흡혈귀의 것으로 팽창되어간다.
“……흥.”
그녀의 각성을 지켜보는 레밀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흡혈귀라는 자각조차 없었으면서. 정말 불가사의하고…… 재밌는 존재야. 너란 녀석은.”
메이링의 숨소리가 주위의 공기까지도 떨게 만든다. 자신의 영혼조차 에너지로 바꾸면서까지 레밀리아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고 흡혈귀의 본질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