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려박은 고드름은 충격을 못 이기고 부서졌지만 출혈 몇 방울로 끝나지 않았다. 독니를 꽂아넣은 것처럼 불씨와 냉기가 깊게 파고들어가 몸 곳곳을 돌자 플랑은 격통과 함께 주춤했다. 덕분에 마루가 자신을 밀어내고 치르노를 부축할 때까지 플랑은 이렇다 할 반격을 못했다. 몸 안이 타들어가는 동시에 피가 얼어붙는 기분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기분 나쁜 아픔 때문에 끓어오르는 짜증과 울분은 조금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방금 전 파츄리가 둘을 돕긴 했다지만 말이다. 핏줄기가 타고 흐르는 플랑의 왼손이 불길하게 움직였다.
"왜 방해하는 건데!"
"꺄악!"
주먹이 꽉 쥐어지자 바닥이 단숨에 폭발해 솟아올랐다. 연달아 일어난 폭발이 파츄리를 날려버린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플랑 나름대로 힘조절은 했지만 저멀리에서 나뒹구는 파츄리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정신을 채 못 차리는 치르노를 일으켜세우던 마루는 어이가 싹 날아갔다.
"무슨 놈의 성질머리가 저렇냐 진짜."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가 혼구녕을 내줘야지!"
"그거야 당연히..."
그제서야 마루는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챘다. 평소대로의 피부빛이었다. 뭐가 타서 생긴 건지 모를 잿가루도, 불기운 때문에 갈라지고 붙기를 반복하는 균열도 없었다. 변화는 사라져 있었다. 손가락 끝이 타고 남은 재가 되어 떨어져나가거나 하는 비가역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안도감보다는 위기감이 앞섰다. 다리힘이 완전히 풀려버리자 반대로 치르노가 부축해줘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불의 힘이 없으면 원래 그랬어야 할 몸상태로 돌아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플랑은 한심해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파츄리한테 손찌검까지 하는 사고를 치자마자 저런 꼴이라니.
극심한 반동 때문에 시각까지 먹통이 되어버려 마루는 폭격이 쏟아내는 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급격한 비행의 관성과 치르노의 말은 제대로 느껴졌다.
"잠깐만 쉬고 다시 와야 해! 알겠지!"
짙은 냉기를 연막처럼 뿌리면서 치르노는 마루를 힘껏 내던졌다. 추락은 언제나 아찔했지만 눈에 재차 쏟아진 광채는 그 이상이었다. 곧이어 눈 먼 탄들이 책장과 부딪치며 일으킨 진동이 마루의 몸을 격하게 울렸다. 예리한 결정체 세례와 한번 부딪치자 치르노의 얼음검은 이가 떨어져나갔고 두번째에는 아예 두동강이 났다. 팔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는 와중에도 치르노는 힘껏 탄막을 쏟아내 되받아치고 있었다.
무방비한 추락 때문에 똑바로 숨쉬기가 어려웠지만 마루는 잠시도 바닥에 엎어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데 누워 있다간 다시는 숨쉬지도 못할 것이다. 필사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기어가던 중 마루는 뭔가 떠올랐는지 다급하게 구름을 빚었다.
'아까 그 사람!'
치르노의 얼굴에 빨간 선이 죽 그어질 때쯤 구름에 몸을 실은 마루는 파츄리가 널부러진 곳에 있었다. 탄내가 조금 나고 있지만 파츄리는 간신히 기절을 면한 상태였다.
마루는 파츄리와 자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안전한 곳, 그러니까 책장들 사이로 질질 끌다시피 하며 옮겼다. 피로 때문에 흐르는 뜨거운 땀, 긴장감으로 인한 식은 땀. 억수처럼 흐르는 땀과 피를 연신 훔치면서 마루는 파츄리의 등을 두드려 회복을 도왔다. 얼마 뒤 파츄리는 이제 등 두드리는 건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후...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좀 쉬어.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쉴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촛불에 입김을 부는 것만큼이나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마루는 축 늘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고 파츄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머리가 무거운 건 처음이었다.
"지금 네 몸이 어떤지 모르는 거 같은데."
"...제발 도와주세요. 움직일 수 있게."
"너 이러다 진짜 죽어."
파츄리의 말이 거짓말 같질 않았다. 미친 듯이 어지럽고 똑바로 느껴지는 감각은 하나 없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마루는 땅이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미각이었다. 입가에 흘러내린 뭔가를 반사적으로 핥자 마루는 굉장히 끔찍한 맛을 느꼈다. 불이 꺼지자 더 이상 상처와 피는 불타 말라붙지 않았고, 쉴 틈 없이 혹사된 몸은 피와 땀의 맛을 아주 괴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야 마루의 귀가 소리를 제대로 받아들였다. 종종 자신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려서 마루를 괴롭게 했다.
"플랑 저녀석이 제멋대로 난리치고는 있지만 내가 너 하나는 지켜줄 수 있거든? 넌 이대로 누워만 있어도..."
"별로...믿음직스럽진 않은데요..."
맞는 말이었다. 파츄리까지 무자비하게 날려버린 판국에, 마루와 치르노한테 손대지 말라고 타이른다고 말을 잘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기서 마루의 부정적인 태도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루 자신만을 지칭하는 단어 선택이었다.
"그리고, 꼭 치르노는 요정이라서, 저 혼자만 지켜줄 수 있다는 말로...들리거든요."
"네 친구한테는 미안하지만...지금으로서는 나도 도와줄 수 없어. 그래도 요정이니까..."
"됐어요. 으그그그, 혼자서라도 할 테니까."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왜 사서 고생을..."
머리가 울려대기도 해서 파츄리의 야단은 더 듣지 않기로 하면서, 마루는 허물어진 몸을 움직일 방법을 떠올렸다.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자 느껴지는 위화감, 모래를 씹는 것처럼 뿌득거리는 이물감을 곱씹으며 마루는 손끝부터 움직였다. 온 의식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꿈틀대면서 이 행동을 다른 것에도 적용했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에 맞춰 움직인다는 건 손발과 마찬가지라는 발상이었다. 오늘의 경험상, 원래 체력이란 건 바닥난 것 같아도 쥐어짤 수 있는 것이었다.
파츄리는 처음엔 피가 배어나오는 줄 알았지만 그건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가만히 놔둬도 꺼질 듯한 불씨가 피어오르는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면서 파츄리는 왜인지 불공을 드리는 듯한 경건함을 느꼈다. 조난자가 목숨처럼 지켜온 불씨처럼, 약해졌을지언정 아직 그 열기를 남아 있었다.
정성스럽게 열을 되살리고 다시 온몸으로 보내 다시 불태우는 인고의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가능한 모든 걸 끌어올리자 다 타고 남은 잿더미와 같은 모습이 된 마루는 간신히 자신의 다리로 일어섰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유로움과 그렇지 못할 때의 괴로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체력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플랑이 치르노를 아예 거꾸로 매달아 버릴 텐데. 마루가 똑바로 생각하며 뭐라도 부릴 의식도 남아 있고, 몸이 이정도라도 움직인다면 상관없다는 무모한 생각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잠깐이면 되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나중으로 미뤄둬."
치르노를 상대로 플랑이 어찌나 매섭게 몰아붙이는지, 직접 노리지 않는데도 파츄리는 설마 책장에 걸어둔 마법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치르노가 맞을 결과는 아주 확실했다. 그렇다고 이 상처투성이가 가세한다고 시체 갯수밖에 달라지는 게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경이로운 고집을 지켜본 파츄리는 결국 저 상처투성이 등을 조금 밀어주기로 했다.
...
"네 친구는 어디 갔냐? 드러누워서 잠이라도 자냐?"
"콜록콜록... 으으. 좀 있으면 올 거다 이 나쁜 놈아!"
방금 가슴을 후려친 충격 때문에 치르노의 목소리는 힘겹게 쉭쉭거리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로 만든 건지 모를 얼음검을 움켜 쥔채, 피로 엉킨 파란 머리카락 너머 치르노의 눈빛은 표독스러웠다. 손에서 스며나온 피 때문에 자루에 붉은 빛이 퍼졌다. 그 진한 피냄새를 맡으면서 플랑은 치르노의 나쁜 놈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확실히 플랑은 오늘 하루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나쁜 놈답게 더 해주겠다 생각하며 치르노의 손과 입을 아주 비틀어주려 했다.
플랑이 보기좋게 걷어차여 날아가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싶던 치르노는 자신 앞에 괴로워하는 마루를 내려다 봤다. 날아찬 직후 그대로 등부터 떨어진 탓이었다. 일으켜 세워주려다 치르노는 또 손을 데일 뻔했다.
"아뜨뜨. 다시 뜨거워졌네?"
"작전도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거 좀 빌려도 될까?"
"작전 좋지!"
작전이 뭔지는 몰라도 빌려달라는 말에 치르노는 아주 흔쾌히, 몇 가지를 더해서 마루에게 얼음검을 넘겨주었다. 불타는 마루의 손에서도 녹지 않도록 아주 차갑고, 플랑한테 먹여줄 날카로운 요철들을 더해주자 검은 흉악한 둔기로 변했다. 주홍빛이 된 칼자루를 단단히 잡은 마루는 치르노의 마음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머리를 걷어차이고 화가 단단히 난 플랑이 그걸 놔둘 리가. 덕분에 작전 공유는 돌격하면서 아주 급박하고 간략하게 이루어졌다.
"작전이 뭔데?!"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야! 나쁜 짓하기 참 힘들지?"
"이 새끼가!"
피투성이 치르노는 시간을 벌기 위한 무식한 난투를 보고만 있어야 했고, 파츄리는 작전의 중책으로서 열심히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위해서라지만,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파츄리는 한탄하고 싶었다. 가뜩이나 건강한 몸도 아닌데, 폭발의 후유증이 가시질 않아 원하는 만큼 마법을 쓰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 당장 파츄리가 할 수 있는 건 마루의 요청에 따라 그를 무작정 불지른 것과 약간의 무리까지 감수하며 준비하고 있는 이것 정도였다.
끝장나는 아픔까지 감수하며 화력을 보충했는데도 팔이 천근처럼 느껴지는 마루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끝나질 않는 미움이었다. 자신과 치르노를 이렇게 만든 저 녀석의 상판대기였다. 당한 것 이상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죽어도 편히 못 죽을 것 같아서, 상처가 늘어나는데도 물러나기가 싫었다.
"아까보다 훨씬 미적지근하고! 빈약한데! 입만 살아서! 무슨 배짱으로 또 왔냐!"
"배짱만 갖고 왔을 거 같냐!"
파츄리가 따로 신호를 보내진 않았는데도 마루는 알 수 있었다. 마루는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물을 잘 느낀다고 자신할 수 있으니까. 플랑의 귀에는 이 쏴아쏴아하는 소리가 황충 떼의 날갯소리만큼이나 소름끼쳤고, 모든 방향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같은 부피의 독사 떼처럼 보였다. 고통 또한 앞서 말한 흉물 무리만큼이나 끔찍할 것이다.
흐르는 물 정도로 흡혈귀가 죽는 일은 없겠지만 약점인 만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는 걸 노린 파츄리의 마법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머리 위에서는 소나기까지 쏟아져내렸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 가장 시퍼런 안색으로 변한 플랑을 보자 마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치르노가 넘겨준 무기는 최후의 휘두름을 통해 플랑의 몸에 파고들고 꽂혀 부서지면서 역할을 다했다.
마루는 어금니가 까득거리고 있어 제대로 신호를 보내진 못했지만 치르노는 딱 맞춰서 뛰어들었다. 재밌는 건 뭘 해야 할지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눈치와는 뭔가 다른 게, 꼭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빗방울이 얼어서 변한 우박, 수면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빙하,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뜨거운 증기. 이 모든 것이 아지랑이와 돌풍에 섞여 주변이 저 세상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혹여나 기절하거나 죽더라도 놓치지 않도록 마루와 치르노는 플랑을 단단히 붙잡았다.
서로 간에 아무 말도 안했는데 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플랑에게는 참 안된 일이었다.
방금 무기를 때려박아서 생긴 상처와 눈코입을 향해, 마루와 치르노는 서로 상반되는 힘을 플랑의 몸 속으로 쏟아넣기 시작했다. 소나기와 파도 또한 얼어붙어 플랑을 찌르고, 증기는 높은 압력과 온도에 의해 액화와 기화를 반복하며 플랑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짓을 하는 동시에 발발 날뛰는 플랑을 힘으로 붙잡아두는 건 팔이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파츄리가 쏟아넣은 물이 회오리치면서 플랑을 붙잡아주고 있었지만 수많은 독충 떼가 물어뜯는 듯한 격통에도 플랑은 둘을 난도질하며 끈질기게 탈출을 시도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거라 믿기 어려운 괴성과 함께 정지 상태가 박살났다. 모든 형태의 물이 뒤엉켜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던 파츄리는 이제서야 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갈사 직전 물을 만난 탈수증 환자처럼 플랑은 나머지 둘을 매단 채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맹목적인 직진 앞에는 책장이 있었고, 지금 세 사람은 사실상 하나로 묶인 채 엄청난 힘을 내포한 풍선과 같은 상태였다.
풍선은 큰 충격과 함께 펑 터졌고, 안에 들어 있던 힘은 불꽃놀이처럼 사방팔방으로 퍼지면서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광경을 보여주었다.
책장에 쳐뒀던 마법의 벽과 폭발이 부딪치면서 들리는 청아한 소리는 꼭 유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
파츄리에게는 천만다행히도 저 거대한 지식의 보고엔 손상 하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책장이 무사한 것과 자신의 선견지명에 기뻐할 새가 없었다.
별이 폭발하는 순간을 단숨에 얼린 듯한 형상의 불타는 얼음은 부서질 듯한 위태로움과 압도적인 존재감을 겸비하고 있었다. 환각제를 복용한 후 무지개로 만든 거미줄을 바라본다면 저것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은 모습을 한 채로.
폭발의 중심지에 다다른 파츄리는 미간부터 찌푸렸다. 속이 많이 불편한지 플랑은 핏물을 한 입 토해냈고, 곧이어 마루의 안면에 주먹을 박아주고 있었다. 한술 더 얹어 목덜미를 물어 피를 빨려고 했지만 이내 치르노에게 밀려 힘없이 넘어져버렸다.
차라리 시체가 더 나아 보일 정도로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협공당했던 플랑이 가장 심한 게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만신창이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살이 불타는 동시에 피가 얼어서 툭툭 떨어지는 걸까. 조금씩 온도의 법칙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지만 여전히 플랑은 힘을 전혀 못 내고 있었다. 꼭 평범한 인간처럼.
그래도 플랑은 초월적인 생명력이라도 있지, 저 둘은 그런 것도 없었다. 플랑이 가장 심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면에서였다. 치르노는 겨울 막바지의 고드름와 같이 축축하고 위태로웠고, 거의 식어버린 마루는 거뭇거뭇한 연기를 토해내며 오늘 하루 불을 집어삼키며 얻은 차력의 대가를 통렬하게 치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셋 모두 쥐어뜯고 때릴 힘과 의지는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없어도 짜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완력이 비슷해진 지금 이 상황을, 자기들만큼이나 힘없고 아파하는 플랑을 때릴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기엔 이들에겐 당하고 쌓인게 너무 많은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진흙탕을 나뒹구는 개싸움이었다. 빈사 상태의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의 기술 같은 건 낄 자리가 없었다.
불그스름한 물웅덩이 위에서 올라타 짓누르고 구르며 주먹질을 할 때마다 찰박철썩하는 소리가 퍼지고, 핏방울과 신음 섞인 호흡이 괴롭게 터져나왔다. 안면을 정통으로 맞아 코뼈가 아프면 물러나는 대신 주먹 한대를 돌려주는 게 반복됐다.
이따금씩 피부에 드러난 마지막 잔불이나 냉기가 수면과 맞닿아 치익 소리와 함께 사라지며 마지막이 다가옴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싸움을 끝낸 건 조금 의외의 요소였다.
불과 얼음의 거대한 합작품이 기어이 현실의 법칙에 순응하며 무너져내리자 파츄리는 다급하게 책을 펼쳐 입과 손을 놀렸고, 마법의 돌풍이 세 사람을 파츄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와 뒹굴었다.
다들 죽은 듯 뻗어버렸고, 곧이어 긴장이 풀린 파츄리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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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요이 사쿠야는 침입자들이 달갑지 않은 듯 눈을 흘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 급한 건 됐으니까. 조금 있다가 심문도 해볼게."
"더 필요한 건?"
"일단 약품들 조금 더 부탁할게."
열상, 타박상, 자상, 화상, 동상, 파절, 골절... 그리고 뭐라고 분류해야 할지 모를 외상까지. 일단 위중한 부상은 모두 치료가 끝났다. 죽으면 아무 말도 못할 테니까.
싸움의 소란은 자연히 도서관을 넘어 저택 전체로 퍼졌고 구성원들의 주목은 당연히 낯선 이 2명에게 집중됐다. 집주인인 레밀리아 스칼렛은 잠시 즉결처형까지 고민했지만, 사정은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치료도 해줬으니까 너희들이 쉽게 입을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나도 강제로 실토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파츄리는 기진맥진한 혼잣말과 함께 마루의 팔을 감싼 붕대 위를 쓸어내렸다. 억지로 자백하게 만드려고 마법까지 쓰기엔 파츄리는 지금 이 피로가 너무 무거웠다. 그 전에 깨어나는게 먼저겠지만.
'텅'
"끄아아. 내 머리..."
먼저 들린 건 오늘 하루 참 많이 들은 소리였다. 책장에 걸어둔 방어 마법에 뭔가 부딪치며 유리처럼 울리는 소리. 직후에 들린 목소리로 볼 때 누군가 마법벽에 머리를 부딪친 듯 했다. 여러모로 피곤한 파츄리는 순간 욱했는지 언성을 높여 그 누군가를 불렀다.
"그렇게 가져가고 싶으면 이리 와서 좀 도와주지!"
"헤, 그래야겠네."
둘 다 이 상황이 참 익숙한 듯 했다. 대체 어느 틈에 숨어들어온 건지, 책장 뒤에 숨어 있던 마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난장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파츄리는 골똘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면, 도벽꾼인 마리사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순순히 도와주기로 했다.
"흠흠, 그래서 뭘 도와주면 되는데..."
파츄리가 꽤 오래 치료에 매진했음에도 마리사가 몰랐던 걸 보면 침입은 방금 전인 듯 했다. 그래서 파츄리가 누굴 치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눕혀둔 탁상으로 다가갈수록 마리사의 발걸음이 아주 다급해졌다. 파츄리의 바로 옆까지 왔을 때 얼굴빛이 완전 백지장이었다.
그 얼굴을 본 파츄리가 입을 열기가 굉장히 꺼려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두 마법사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아는 애야?"
"마루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