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레밀리아 스칼렛, 엘도라도에 내려서다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1)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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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기억하고 있다. 대지를 밝히는 태양의 따뜻함을.
소녀는 기억하고 있다. 안개 속에서 비춰오는 태양의 반짝임을.
소녀는 기억하고 있다. 서쪽의 대해양에 잠기는 태양의 아름다움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감각에 지나지 않았다. 태양의 따뜻함도, 반짝임도, 아름다움도 소녀에겐 멀고 먼 세계의 환상. 소리를 지르며 열망해보아도 결코 가질 수 없는 허상.
태양은 모든 걸 평등하게 비춰준다고 예전의 소녀는 믿고 있었다. 인간 사회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모든 것이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해님만큼은 은총을 베풀어준다고. 타향에 있어도 태양만큼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소녀에게 주어진 태양은 목제 벽 사이에서 비춰오는 한 줄기의 가는 빛뿐이었다. 빛 안에는 수많은 먼지가 뛰어들어 벌레와도 같이 태양의 온기에 모이고 있었다. 그녀는 방구석에 앉아 그 광경을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다.
소녀가 몸을 흔드니 어깨에 쌓여있던 먼지가 꽃가루처럼 천천히 흘러내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소녀의 세계 안에서 유일한 빛에 다가가 작은 손을 주뼛주뼛 뻗었다.
──칼에 꽂힌 것 같은 고통이 소녀의 손을 꿰뚫었다.
“……아파…….”
이것도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한 절망이었다. 태양은 소녀를 내버렸다. 검게 그은 손바닥을 꽉 쥐며 소녀는 제자리도 돌아갔다.
시간이 멈춰버린 소녀의 세계를 막고 있는 건 얇은 나무판자뿐이다. 판자 너머에는 소녀가 일찍이 살던 세계. 대낮의 세계. 시간이 흐르는 세계. 인간이 우글거리는 세계. 태양의 세계. 황금에 열광하는 세계. 여기는 세상의 끝 무법 도시 샌프란시스코.
소녀가 이곳을 오게 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수많은 광부가 동쪽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했지만 소녀와 부모는 서쪽에서 찾아왔다. 캘리포니아의 인간 대다수와의 차이는 단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들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틀림없이 소녀는 이제 벽 너머의 세계에 돌아가지 못한다. 태양 빛을 두 번 다시 쬐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암흑에 숨어있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폐허에서 밖의 떠뜰썩한 세계를 매일 그리워하며 밤이 찾아올때까지 견딘다.
“추워…….”
소녀는 고독했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이 샌프란시스코에는 누추한 소녀에게 손을 내밀어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어두운 폐허에서 숨죽이고 있다.
추위를 견디고 있다.
소녀는 꿈의 말로. 꿈의 그림자. 꿈의 시체.
환상의 도시의 소리를 그녀는 어금니를 비틀며 물어뜯었다.
“……으, ……아아.”
등불이 밝게 빛나는 여관의 방 안에서 요염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어깨를 크게 노출한 메이드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레밀리아는 입가에 달라붙은 새빨간 피를 그에 뒤처지지 않는 새빨간 혀로 핥았다.
“술도 좋지만 역시 난 이게 더 잘 맞는다니까.”
브랜디를 물 부으듯 마시며 샌프란시스코의 맛있는 생선을 먹고도 부족한 듯 젊은 여성의 피까지 마시고 나서 레밀리아는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으며 옷을 바로 입는 메이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은 거리를 따라 놓인 가스등이 주위를 밝히며 사람들이 그 안을 걷고 있었다. 태양은 이미 태평양의 저편으로 저물었는데도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좋아. 아주 좋아.’
레밀리아는 거리낌없이 웃었다.
‘밤의 어둠은 흡혈귀의 영역이지만 어리석게 욕망을 아낌없이 낭비하며 흩뿌리는 동안은 무례한 침범을 허락하도록 하지.’
그러나 레밀리아의 표정이 안 좋아지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편하게 즐기기엔 그녀의 머릿속에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 사안이 하나 있었다.
평소라면 흡혈 후에 콧노래를 섞어가며 잡담을 하던 레밀리아가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있는 걸 본 3명의 종자도 주인의 심정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부주의하게 먼저 물어봐 그녀의 기분을 더 해치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거북한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빨간 눈동자의 시선을 받은 집사는 어떤 것이냐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주점 주인이 얘기했던 샌프란시스코의 흡혈귀. 지금 레밀리아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그 정체다.
“그 자가 흡혈귀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외라는 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할 말이 없군요.”
“흠잡을 데 없이 단순한 대답이네.”
“이 이상으로 하기엔 정보가 너무 적습니다. 내일 거리에서 탐문이라도 할까요?”
“됐어. 상대가 상대인걸. 자칫 잘못해서 너희들이 죽기라도 하면 런던으로 돌아가는 게 귀찮아지잖아.”
“허나…….”
“너희들은 스칼렛의 사병이 아니라 종자일 뿐이야. 도를 넘어선 행위는 내가 사양한다고. 명령받은 대로 내 신변의 처리나 하면 충분해.”
“……실례했습니다.”
머리를 숙이는 집사를 보고 힘없는 인간의 종자라는 것도 불편하다고 레밀리아는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저택의 청소와 취사와 세탁, 여행지에서 잡무를 맡기는 것 정도는 충분하지만 레밀리아와 같은 인외와 맞추기엔 너무나도 약하고 덧없고 무르다. 이러한 국면에 맞닿으면 인간은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집사나 메이드라도 있으면 이 걱정도 조금은 줄어들거라고 레밀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흡혈귀가 안락의자 탐정을 연기하기 위해선 신뢰할만한 강인한 인외가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 레밀리아 스칼렛에게는 비숍도 나이트도 폰도 없었다. 체스판 위에는 단 하나의 퀸과 윤곽조차 잡히지 않은 정체불명의 적뿐이다.
“영국에서 아득히 먼 대양과 대륙을 넘어서 온 관광지에서 탐정 놀이에 빠진다는 것도 어떻게 됐나 싶지만 그게 동족일지도 모른다면 역시 신경이 쓰이긴 하잖아. 뭐 지금은 그렇다는 가망이 없긴 해도.”
주점 주인이 말한 이야기를 레밀리아는 신용하지 않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지만 하늘 위로 솟아오른 연기는 그 근원의 정체 이상으로 과도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분명히 이 샌프란시스코에 “뭔가”가 숨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흡혈귀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나도 경솔하다.
뭣보다 고상한 흡혈귀가 굶주린 야수처럼 행동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의자에서 일어난 레밀리아는 창가로 다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창문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있었다. 보름달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결코 뒤처지지 않는 아름다운 달이다.
“달이 아름답네. 제도하고는 차원이 달라.”
레밀리아는 런던의 뿌연 하늘 안에서 출렁이는 희미한 달의 모습을 떠올렸다. 산업혁명의 산물인 공장의 굴뚝이 뿜어내는 연기는 제도에 사는 이매망량을 질식사시키는 독이며 제도를 감싸는 두터운 결계다. 갑작스레 만들어진 대도시 샌프란시스코는 광부들을 위한 도시이며 모든걸 밖에서 가져와 낭비할 뿐인 무생산 도시이기에 런던 같은 문명의 결계를 만들어내는 공업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매우 아름다운 달은 지상을 거리낌 없이 비추며 이매망량을 활발하게 만든다.
낮에 도시를 덮고 있던 안개는 이미 바다로 돌아갔다. 충동적으로 인간을 덮치는 샌프란시스코의 “흡혈귀”에게는 이 시간대가 최고의 컨디션을 뽐낼 수 있는 시간이다.
“뭐 지금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레밀리아는 기지개를 피면서 손가락의 관절을 꺾었다.
“주점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 흡혈귀라는 녀석은 3일에 1번씩 인간을 습격한다고 했잖아. 연비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냐? 뭐 그러면 적어도 며칠 안으로 그 녀석과 만날 수 있겠지. 만나서 혼쭐을 내고 정체를 밝혀내겠어. 단순한 살인마가 흡혈귀 행세를 하며 품위를 낮추는 거면 이 남작 레밀리아 스칼렛이 광장에다가 책형 시켜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리겠어.”
“경이 직접 찾으시겠다는 건가요?”
“그럴 필요도 없어. 잘 알아둬. 예의를 갖추지 못한 야만스러운 인외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면 도시의 공기가 수선스러워져. 불협화음처럼.”
눈부신 달빛을 받은 레밀리아의 옆모습은 자신이 가득차있었다.
밤이다. 밤이다. 밤이다. 희망의 밤이다!
소녀는 환호한다. 소녀는 밤하늘을 우러러본다. 소녀는 달빛을 쬔다.
육체에 힘이 넘친다. 흥분으로 정신이 산만해진다. 영혼이 포효한다.
폐허 구석에서 떨고 있던 소녀의 모습은 이제 없다.
소녀가 사랑하던 태양은 소녀를 거부했다. 그러나 광기를 내뿜는 달은 소녀를 환영했다.
그렇기에 광기는 소녀를 휘감았다.
마도 샌프란시스코의 의사를 대변한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포효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그 있으면 안 될 자가 나타나는 소리가 레밀리아에게 닿게 된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나타났네!”
이상한 기색이 샌프란시스코 밖에서부터 격렬하게 퍼지고 있다. 퇴치당할 걸 두려워하는 느낌조차 없다. 자신만만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지, 그저 무지몽매한 것인지. 아마도 후자일 것이라고 레밀리아는 추측하고 있다. 야생동물의 본능적인 지혜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레밀리아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왼팔에 레이스가 달린 소맷동을 걸치며 붉은 리본이 돋보이는 모자를 썼다. 그리고 등에서 한 쌍의 새까만 박쥐 날개를 펼쳤다. 그것은 밤의 지배자인 흡혈귀의 날개였다.
창틀에 서 있는 레밀리아는 뒤를 돌아보며 종자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인간이 흡혈귀를 걱정 하는 거야?”
레밀리아는 웃으며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느 정도 자유 낙하한 소녀는 칠흑의 날개를 크게 펼치며 중력을 잊은 것처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상승했다. 흡혈귀 레밀리아는 달을 감추는 구름을 뚫고 샌프란시스코의 밤하늘에서 춤을 췄다.
긴 항해 때문에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밤바람의 차가움도, 아직 부족한 불안전한 보름달의 빛도, 귓가에 울리는 공기 소리도 모든 게 다 기분 좋았다. 마도 샌프란시스코도 밤이 깊어진 이 시간이 되고 나서는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레밀리아와 발칙한 인외의 만남을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분이 고양된다. 입가가 흡혈귀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진다. 이대로라면 샌프란시스코의 흡혈귀를 이름을 물어보기도 전에 숯덩이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 자기 자신을 조금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8년 전 골드러시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샌프란시스코는 불과 200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만 명을 지닌 대도시가 됐다. 그물망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수많은 도로는 도시에 사는 인외를 교묘하게 숨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다르다. 절망적으로 상대를 잘못 만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고귀한 흡혈귀의 눈은 모든 그림자를 꿰뚫어 본다. 못 보고 넘기는 일은 절대 없다.
이윽고 레밀리아는 그것을 발견했다.
“저깄군.”
샌프란시스코의 북동, 무법자와 도박꾼들이 모이는 바르바리 해안의 변두리. 인외의 기척은 그곳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도 그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목표에 바로 위에 도달한 레밀리아는 급강하해서 구름을 갈랐다. 나타난 땅을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급상승으로 전환해 기세를 죽였다. 박쥐 날개를 크게 펼쳐 그대로 품위 있게 골목의 정중앙에 착지했다. 회오리치는 먼지가 밤의 왕자의 강림을 연출해낸다.
날개를 하늘거리며 치마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을 바라본다.
“꽤 볼품없는 모습이네.”
인외는 아무래도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던 것 같았다. 땅에 엎드려 젊은 백인 남자의 등에 걸쳐 일심불란 하게 목덜미를 탐하고 있다. 피 웅덩이 속에 잠긴 남자의 손가락은 인외가 난폭하게 물어뜯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외가 걸친 거적때기 같은 외투는 머리부터 다리까지 온몸을 덮고 있었다. 이런 걸 걸치고 있으면 신원 파악이 당연히 안 된다고 레밀리아는 납득하고 있다. 그래도 냉정하게 관찰하니 인외의 키는 소녀인 레밀리아보다 조금 큰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걸스럽네.”
그 소리를 듣고서 레밀리아의 존재를 알아챈 인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뒤집어쓴 외투의 두건이 눈가를 가리고 있어서 인상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유일하게 보이는 입매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붉은색으로 뒤덮인 인외의 송곳니가 빛나고 있었다.
“아…….”
일단 의사소통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성이 느껴지지 않는 인외에게 과연 말이 통할 것인지 주저하고 있던 레밀리아에게 인외가 허를 찌르듯 말을 걸어왔다.
“넌, 누구?”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말이 뚝뚝 끊기는듯한 말투였다. 평민이 귀족에게 먼저 이름을 대라는 불손한 행동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난 레밀리아 스칼렛. 흡혈귀야.”
“흡혈귀라면 강시?”
“강시가 뭔데.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줄래?”
“……그래. 이쪽의 흡혈귀구나.”
일어선 그녀의 발은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드러난 그녀의 맨살은 들개처럼 더러웠었다. 레밀리아는 이런 거지가 흡혈귀의 경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썹을 찡그렸다.
“너, 이름은?”
레밀리아의 목소리가 험악하게 바뀐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인지 인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건 레밀리아의 긍지를 더욱 더 자극하는 행위였다.
“뭐 됐어. 이름따위 들어봤자 뭐가 나아지는 것도 없으니.”
“이제 배부르니까 빨리 돌아가서 자고 싶은데.”
“시끄러워. 말하지 마. 조용히 해. 알겠어?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네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여기서 내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 다른 하나는 야만인은 야만인답게 산속이라도 처박혀서 두 번 다시 인간 앞에 나타나지 말고 다시는 흡혈귀라는 이름을 대지 말 것.”
레밀리아의 눈매와 입가가 꺼림칙하게 치켜 올라가며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어느 쪽이 됐건 먼저 그 더러운 외투를 찢어서 네 정체를 밝혀내겠어.”
“너도 날 괴롭힐 거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더러운 짓은 안 해. 그냥 긴 여행으로 몸이 무뎌져서 가볍게 재활 운동이나 할 건데. 그 재활 운동에 죽어버린다면 뭐, 넌 별거 아닌 가짜 흡혈귀라는 거지.”
담피르인가, 늑대인간인가 아니면 진짜로 흡혈귀인가. 아직 그녀의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날뛰어줄 건 알고 있기에 레밀리아는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해이해져 있다. 진정한 흡혈귀인 자신이라면 인외가 먼저 행동해도 뒤처질 일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역시 괴롭히는구나.”
그래서 인외가 자세를 낮추고 임전태세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눈 앞에 예리한 어금니가 나타나있는 현실에 자만심에 가득 차있었던 레밀리아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뭣.”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머리카락이나 옷의 섬유 한 올조차 뜯어가진 못했지만 레밀리아의 태도를 바꾸기엔 충분한 기습이었다. 레밀리아는 한동안 공중을 돌다가 고양이처럼 사지를 이용해 착지한 인외를 째려봤다.
“이게 뭔 단순한 살인마야……?”
뺨을 닦으니 손에 피가 묻어있었다. 레밀리아의 피도, 인외의 피도 아니다. 인외에게 죽은 백인 남성의 피일 것이다. 인외의 외투에서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일어선 인외는 망연히 서있는 레밀리아를 향해 돌았다.
“굉장해.”
“……뭐?”
“여자애인데 지금 공격을 피한거야?”
“──하.”
레밀리아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었지만 이윽고 미소를 띠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레밀리아는 인식을 저해하는 안개를 두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온갖 인요가 모이는 런던에 있을 때와 비하면 지금의 농도는 매우 엷지만 그래도 어중간한 괴물에게 간파당할 일은 없다. 그걸 저 인외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느낌으로 간파했다. 얇은 종이 같은 안개를 갈라내고 소녀 레밀리아를 인식해냈다.
“너…… 정말로 흡혈귀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방금 인외가 보여준 신체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흡혈귀에 필적할지도 모르는 강대한 힘이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선전포고 같은 건 할 필요 없다.
“얼굴을 드러내는 건 간단할 것 같진 않네!”
레밀리아는 왼손을 크게 휘둘러 혈액을 응고시켜 생성한 단도를 몇 자루나 던졌다. 동시에 몸을 구부리고 다리에 힘을 줘 도약한다. 박쥐의 날개를 펼친다. 땅을 기는 것처럼 초저공을 날아간다. 탄환처럼 밤의 공기를 가르는 단도를 뒤따른다.
레밀리아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인외는 뒤로 크게 물러나며 다가오는 피의 칼날을 피했다. 그걸 본 레밀리아는 날면서 두 번째 단도를 던졌다. 그러나 인외는 공중에서 온몸을 비틀며 모든 단도를 피하고 그대로 땅에 착지했다.
레밀리아는 곧바로 추격했다. 방금 착지한 인외에게 바짝 다가섰다. 손끝이 예리한 발톱처럼 변화한 레밀리아의 오른손이 흡혈귀의 괴력을 이용해 인외에게 크게 내리찍었다.
“쳇.”
레밀리아가 공격하고 난 뒤에 남아있는 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밀리아와 자욱한 모래 먼지뿐이었다.
“재빠르잖아.”
레밀리아의 공격을 모두 회피한 인외는 멀리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방심은 전혀 안 하고 있을 것이다. 첫 공격으로 레밀리아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난 시점에서 그녀는 기회만 엿보고 스스로 판국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네. 공격도 안 하고 도망치지도 않아. 뭘 하고 싶은 거야, 넌.”
“……어디로 도망치는데.”
“미국은 넓잖아. 인외 하나 받아줄 만한 땅은 얼마든지 있어.”
인외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해졌다. 잘 모르는 레밀리아는 방어 태세를 갖췄지만 잘 보니 그녀의 입가가 조금 꿈틀거리고 있었다.
“──없어.”
“뭐라 했니?”
“이 나라에 그런 곳은 없어.”
강한 어조로 단언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니 두건에서 눈이 살짝 보였다. 그 눈은 증오와 분노와 원한이 가득 찬 꺼림칙한 의사로 칠해져 있었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여긴 내 도시야.”
“헛소리마. 이 도시는 널 받아주지 않아.”
“그럼 샌프란시스코를 나만의 도시로 만들겠어.”
레밀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불쾌감이 눈초리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외의 말이 무엇보다도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우쭐대지 마라. 짐승 주제.”
밤을 무서워하는 인간들에게 흡혈귀의 이름을 받는 정도라면 그 존재를 용서해줄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도 매력적인 도시지만, 그것들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해도 레밀리아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도시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건 지배자의 행동이다. 결코 굶주린 들개처럼 사냥감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 따위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밀리아는 치밀어오르는 격노를 억누르고 주위를 살핀다. 이곳에 오래 있을 수도 없다. 이상을 느낀 도시의 자경단이 달려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 전에 저 들쥐의 목덜미를 쥐어 잡고 정체를 밝혀내야만 한다.
그러면 사고력이 없는 짐승에겐 문명의 불꽃이 제격이다. 수렵은 귀족의 소양이다.
레밀리아는 날개를 크게 펼쳤다. 그녀에 주위에 작은 도깨비불들이 떠오른다. 주먹만한 크기의 작은 도깨비불이다. 이윽고 도깨비불들은 명확한 윤곽을 띄우며 팽창한다. 날개가 자라난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에 잿더미가 되어라. 마도의 촌놈.”
──레밀리아의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레밀리아만큼 성장한 박쥐는 주인의 의사를 충실하게 따르며 그중 한 마리가 인외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아.”
장궁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박쥐는 순식간에 인외와의 거리를 좁히고 목숨을 앗아가려 한다. 인외는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의 경고에 따라 뛰어올랐지만. 땅에 닿은 박쥐는 바로 작열탄처럼 폭발해 불꽃을 퍼뜨렸다.
뺨을 태워버릴 정도의 폭풍에 인외는 절망했다. 단 한 마리만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레밀리아의 주위에는 아직 십몇 마리의 박쥐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아아…….”
허탈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인외는 드디어 이해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건 강대한 존재다. 레밀리아라 자칭한 소녀는 분명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전투라는 행위에 말려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것은 일방적인 살육과 살기 위한 식사였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압도적인 힘을 내세우며 그 피를 양식으로 먹어왔다. 그저 평범한 살기 위한 행동이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생물이 되기 전에 흙탕물을 마시며 딱딱한 빵을 먹었던 것처럼.
“지금과 옛날…….”
두 마리째의 박쥐는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갈 곳을 잃은 박쥐가 인외의 등 뒤에서 폭풍을 뿜어내고 퇴로를 막아섰다. 바로 두 마리의 박쥐가 인외를 향해 덮쳐왔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하늘로 뛰어올랐지만 레밀리아가 그걸 지나칠리가 없었다. 자유낙하 중인 인외를 향해 불타오르는 붉은 날개가 돌격해, 폭발한다.
“아악…….”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이 인외를 땅으로 내던졌다. 그녀의 외투는 그을었고 옷자락은 불타없어졌다. 그러나 피부에 입은 커다란 화상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회복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인외는 매우 놀랐다.
‘그래. 옛날의 나는, 태양을 쬘 수 있었던 시절의 나는 지금까지 죽여왔던 인간들과 같은 존재였어. 그런데 지금은 태양을 보는 것도 못 하는 대신에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힘을 얻고 피를 빨며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레밀리아 스칼렛이라 칭하는 인간이 아닌 소녀와 대치하고 있고.’
‘레밀리아 스칼렛은 틀림없는 괴물이다. 그건 이해가 가. 그럼 그녀에게 이런 힘을 휘두르고 있는 난 대체 뭐지?’
‘그녀는 자신을 흡혈귀라 칭했어. 그럼 나는──?’
“끝이야. 죽지 않을 정도로 불태워줄게.”
노는 것도 질려버린 레밀리아의 눈동자는 땅에 쓰러져있는 인외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튕기니 그녀의 주위에 대기하던 박쥐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먹잇감 위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며 돌고있다. 그 광경을 인외는 눈부시듯 바라보고 있었다. 박쥐 무리의 저편에는 열나흘의 아름다운 달이 떠올라 있다.
“……난 이제 태양을 쬘 수 없어.”
그렇기에 달이 그녀의 앞날을 밝히는 유일한 도표다. 유일무이의 신이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는 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렇게 불릴 것이다──박쥐가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붉은 밤하늘이 떨어져 온다──
흩어진 박쥐들은 순식간에 인외를 둘러쌓았다. 앞뒤, 양옆 그리고 하늘. 모든 방향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정렬한 붉은 작열탄은 정체불명의 괴물을 문자 그대로 통구이로 만들기 위해 덮쳤다.
인외의 시야가 불꽃으로 가득 차기 까지 앞으로 1초. 그녀는 그 광경을 느려진 시간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조금이라도 이 자리에 계속 늘러붙어 있으면 그녀의 몸은 바로 불꽃에 뒤덮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