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레밀리아 스칼렛, 엘도라도에 내려서다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1)
[번역] 사금 도시의 흡혈귀 - 사금 도시의 흡혈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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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이 포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그녀의 본질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본질에 몸을 맡겼다.
인간을 버릴 각오를 했다.
그녀의 각성을 환영하듯 샌프란시스코의 밤하늘이 술렁거렸다.
“멍청한 놈……!”
레밀리아의 시선은 이미 땅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인외가 쓰러져있던 도로의 땅에 남아있는 건 땅을 불태운 박쥐의 불꽃과 잿더미가 된 외투 뿐이다. 인외는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다. 사슬에서 해방 되어 있었다.
밤의 허공에 수많은 박쥐가 모기떼처럼 달빛에 모여든다.
그건 폐가에 들어오던 한 줄기의 빛에 모여드는 벌레 같은 먼지와도 같았다.
박쥐가 날개 치는 잡음이 겹치고 겹쳐 위협하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레밀리아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존재를 거만한 흡혈귀에게 과시한다.
레밀리아는 그 광경을 이를 갈며 바라보고 있었다. 레밀리아는 흡혈귀다. 그렇기에 이해했다. 저 박쥐 무리가 인외라는 걸. 그리고 직감했다. 그녀도 또한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걸. 저 박쥐야말로 흡혈귀라는 걸.
그리고 박쥐 무리가 조금씩 하나의 존재로 모여간다. 수많은 박쥐가 몸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손가락을, 눈동자를, 심장을, 자아를 구현하고 있다.
“하게 둘까보냐……!”
레밀리아는 그걸 조용히 방관할리 없다. 곧바로 여러개의 단도를 만들어내 던졌다. 그러나 박쥐 무리는 탄도에서 박쥐를 흩트려 무난하게 단도를 피했다.
“이건…….”
이윽고 그녀는 명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 제대로 된 육체를 이루지 못하고 날아다니는 박쥐의 집합체라는 불완전한 형태였다. 그러나 ‘인외’는 이 박쥐야말로 자신의 피며 육체라는 걸 본능으로 알았다.
이제 그녀를 구성하는 것은 태양을 쬘 수 있었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인간의 육체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요 수년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웃음이 자연스럽게 치밀어올랐다.
“굉장해, 굉장해, 굉장해!”
이 몸이라면 죽는걸 겁낼 필요도 없다. 그 어떤 것이랑 대치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눈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머리의 흡혈귀가 상대여도.
하늘에 떠있는 인외는──샌프란시스코의 흡혈귀는 레밀리아의 모습을 확실히 보고서는 박쥐를 이끌고 그녀를 급습했다.
“뭐야 이거. 굉장해. 인간이 아냐. ……꿈만 같아!”
피하는게 늦은 레밀리아는 늘어난 흡혈귀의 양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막아냈다. 그녀의 손바닥에 박쥐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기분 나쁘……구만!”
수많은 벌레가 들끓는 데스마스크 같은 흡혈귀의 얼굴이 레밀리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기분 나쁜 모습에 레밀리아는 매우 불쾌해졌다.
“나, 변했어! 괴물이 되어버렸어!”
“조용히……해!”
“박쥐가 나로, 내가 박쥐로──정말, 정말, 정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외투는 잃어버렸다. 그녀의 박쥐몸이 완전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그 정체를 레밀리아에게 하나씩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더러운 들쥐같았다.
그리고 뭣보다──
“정말 흡혈귀 같잖아!”
얼굴의 조형이 레밀리아와는 근본부터 달랐었다.
런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요 수년간 급속하게 늘어난 인종이다.
“동양인이야.”
스칼렛의 종자들은 여관에 돌아온 주인의 대응에 고심하고 있었다. 레밀리아에게 눈에 띄는 상처나 옷의 손상은 없었지만 그녀의 어두운 표정이 인외와 만났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피가 스며든 드레스를 벗고 반라 상태로 의자에 앉아있는 레밀리아는 머리를 박박 긁고 있었다.
“잘못 봤을 리 없어. 그 용모는 유일신 교도가 아냐.”
“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이라면…… 화교 일려나요.”
“아, 그래. 화교야. 기억났어. 제국주의자 파머스턴 자작이 청에게서 홍콩을 빼앗고 런던에 광둥의 화교들이 막 늘어났었지.”
테이블 위의 와인병을 상표도 확인 안 하고 가져가서 어금니를 세워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고 그대로 레드와인을 물처럼 병나발을 불었다. 새빨간 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서는 기분이 풀렸는지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지의 존재인 ‘동양인 흡혈귀’를 보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그 화교는 도망가버렸다. 서둘러 뒤쫓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그녀가 더 잘 알고있다. 다시 박쥐 무리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그녀의 기척이 도시 전체에 확산되버려 결국 레밀리아는 포기하고 여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정보가 필요하다. 레밀리아는 빈 와인병을 책상에 갖다놓고 집사에게 명령했다.
“이 여관은 골드러시의 여명기부터 존속 되어 있었지?”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여관 주인을 탐문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내뱉게 만들어. 애매한 기억이 있으면 기억나게 해. ──캘리포니아의 화교들에 대해서”
이 사건은 이제 사냥이 아니다. 전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추세를 결정짓는 건 정보다. 확실한 정보는 군대에 승리의 권리를 갖다 주며, 불확실한 정보는 군대를 참혹한 패잔병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레밀리아는 자신을 패장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화교는 상당히 이른 시점부터 골드러시에 가담했던 것 같습니다. 화교의 수는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2만 정도.”
수십 분 후, 주인의 이야기를 메모에 적어온 집사는 시선을 메모에 고정하며 보고했다.
“그러나 가담하자마자 바로 원주민과 멕시코인과 같이 채굴의 최전선에서 배척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계급 계층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양인을 한 번도 못 봤던 건 그 때문인가.”
“재산을 지니고 있는 자들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것 같군요.”
신세계에 수립한 이민국가 미합중국이라 해도 그 시조인 필그림 파더스의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의 플리머스에서 출발했던 걸 대표로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웨일즈인 등의 영국계 후손이다. 여기는 왕의 지배를 거절한 공화주의자 영국인들의 나라다. 결고 다민족국가도, ‘미국인’이라는 공상속의 민족국가도, 타민족의 국가도 아니다.
1848년의 아메리카멕시코 전쟁까지 멕시코령이었던 캘리포니아도 미합중국에 편입되고 나서는 그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골드러시로 전 세계에서 광부들이 모였다고 한들──아니 사금이라는 유아등으로 미국 동해안에 주민을 입식시켜 민족 구성도를 뒤바꾸는 것으로 캘리포니아는 영국인의 후손이 지배하는 진정한 미합중국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민족의 조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합중국이 만들어낸 ‘미국 문화’에 물든 순종적인 이민만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그렇기에 같은 백인이어도 거부한다면 피차별 계급의 낙인이 찍혀버린다.
“흡혈귀의 관점으로는 브리티시건 게르만이건 아이리시건 다 똑같은 백인인데 그들은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려고 해. 정말 우스워.”
“그게 저희들 인간이죠.”
“잘 알고 있어. 나도 예전엔 인간이었으니까.”
그 서열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불가촉천민은 이 합중국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 역할을 맡고 있던 건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였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면서도 인디오의 피를 영향받은 멕시코인도 십수 년 만에 새로 추가된 최하층 인종이다. 그래도 그들은 미국문화의 접촉을 오랫동안 건네고 받아온 합중국민들에게 친숙한 인종이다.
그러나──
“화교들은 달라. 그들은 합중국에겐 너무 갑작스러웠고, 합중국과는 너무 이질적인 민족이었지.”
레밀리아는 런던에서 봤던 화교를 떠올렸다. 동인도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던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청나라에서 데려왔다는 동양인의 메이드가 일하고 있었다. 그 귀족이 그녀를 고용한 이유는 단순 명백하다. 특이하기 때문. 극동 대륙은 유럽과 미국에게는 아직 세계의 끝이었다.
“다른 인종, 다른 문명,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문자, 다른 종교. 화교는 모든 게 달라. 너무 달라. 그리고 예고도 없이 그들은 금을 원해 캘리포니아에 상륙했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도.”
1848년에 금광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동부까지 퍼져 49년에 모든 걸 내던지고 캘리포니아에 쇄도한 49년 조 광부들은 모두 황금 국가 캘리포니아라는 몽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환상이며 그들은 한정된 강의 사금을 찾아다녔다. 그 격차의 불만은 이단자의 배척이라는 형태로 일종의 배출구를 만들어냈다. 동해안의 광부들은 광부의 왕국인 캘리포니아에 연방정부의 위광과 법률을 적용해도 그들의 박해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럼 그 이단자들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멕시코인과 화교다.
청나라에서 건너온 화교 중에 그 흡혈귀 소녀가 있다.
“아냐…….”
흡혈귀는── ‘뱀파이어’는 정교권인 발칸 반도의 ‘살아있는 시체’ 전설을 바탕으로 서방 교회권의 서유럽인이 수 세기에 걸쳐 상상하고 창조해낸 괴물이다. 세계 각지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 있다는 건 얼핏 들은 적이 있지만 그들은 지금의 레밀리아 같은 ‘뱀파이어’와는 근원이 전혀 다른 존재다.
“강시…… 그 녀석은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듣고 그렇게 답했었지.”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네요…….”
“청나라의 흡혈귀 같은 거야. 오히려 뱀파이어의 근원인 ‘살아있는 시체’의 다른 해석이라 보면 되려나. 나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지만.”
그 소녀가 청나라 출신의 화교라면 뱀파이어라는 말을 듣고 강시를 연상한 것도 문제 될 건 없다.
“근데 그 녀석은 강시가 아냐. 강시가 ‘살아있는 시체’인 이상 절대 나같은 뱀파이어처럼 행동 할 수가 없어.”
그것은 15세기부터 시간의 흐름을 보았던 ‘살아있는 시체’ 레밀리아 스칼렛이기에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뱀파이어와 ‘살아있는 시체’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뱀파이어와 ‘강시’또한 다르다.
“그건 흡혈귀야. 틀림없어.”
레밀리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기억을. 그리고 흡혈귀의 언동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태양을 매우 싫어한다. 밤이 되면 움직인다. 인간을 죽이고 피를 마신다. 인간을 뛰어넘은 힘으로 모든 걸 부시고, 온 세상의 대지를 달리며, 달이 빛나는 밤을 하늘 높이 날아다닌다. 그리고 몸을 수많은 박쥐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틀림없는 흡혈귀의 특징이다. 특징이 이렇게까지 모이면 그 흡혈귀를 뱀파이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물어 죽인 인간은 흡혈귀가 되지 않았다. 그 백인의 시체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인간을 흡혈귀로 만들지 않고 흡혈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레밀리아는 그 흡혈귀만 다르게 생각했다.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못 만드는 것이다.
이상, 이질, 이단.
불완전한 흡혈귀.
──“정말 흡혈귀 같잖아!”
그녀의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울려 레밀리아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은 자신이 흡혈귀라는 자각이 없었어.”
종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없었다. 그녀가 흡혈귀라는 자각을 가지게 된 건 레밀리아 스칼렛때문이었다.
다음 날, 날이 저물기 전에 레밀리아는 종자들을 데리고 여관을 나왔다. 목적지는 그저께 방문했던 주점이었다. 아직 개점 준비 중이었지만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는지 레밀리아는 폐점이라 적힌 표시판을 무시하고 들어갔다.
“이거 참…… 어서오세요.”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돈줄 남작을 다시 눈앞에 둔 주점 주인은 말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저번이랑 같은 걸로.”
“……알겠습니다.”
그는 카운터에 서서 커다란 몸을 웅크려 잔을 정중하게 하나하나 닦는 중이었다. 레밀리아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를 골라 의자에 앉고 다리를 꼬았다. 종자 3명이 주인을 위압하는 것처럼 레밀리아의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어 가게 안에 다른 손님과 종업원이 없는 것 빼면 그저께 광경의 재현에 가까웠다.
선반에서 잔을 꺼내고 브랜디를 따랐다. 레밀리아는 잔을 손바닥으로 아래를 감싸쥐고 흔들어가며 향기를 즐기다가 그대로 호박색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
“저번엔 미안했어.”
레밀리아는 집사에게 받은 지폐 다발을 카운터 위에 올려뒀다. 다발이라기엔 열 몇 장 밖에 안 되는 박력이 부족한 양이었기에 물가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선 놀라울 거리도 아니었다. ──그 지폐가 100달러 지폐만 아니었으면.
주점 주인도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덩치에 안 어울리는 얼빠진 표정을 띄우고 있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께 흡혈귀 얘기의 추가 요금이야.”
“저, 정말 받아도 되는 건가요…….”
“받아. 내 귀족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레밀리아의 표정을 엿보면서 지폐에 손을 주뼛주뼛 뻗는 주인은 떨리는 손으로 몇 장인지 세고 있었다, 주점의 하루 총 매상을 뛰어넘는 액수였다. 새크라멘토 광부의 반 년분 이상, 괜찮은 말을 몇 마리나 살 수 있는 금액이다.
그걸 이 귀족은 진위도 파악할 수 없는 소문의 대가로써 지급했다. 지금은 메이드에게 브랜디를 따르게 시키고 태연하게 향기를 즐기고 있다. 숭경하는 것과 동시에 씻겨내고 싶은 의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영국인은 대체 무슨 작자냐고.
레밀리아는 턱을 괴고 주인을 바라봤다.
“오늘의 용무는 지금부터야. 전의 얘기보다도 더 자세하게 그 흡혈귀에 대해 알려줬으면 해. 특히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에선 주점이 정보가 가장 많이 모일 거 아냐.”
“그,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해드리지요. 근데 갑자기 왜 그러신지요? 소문으로는 어젯밤 흡혈귀의 희생자가 새로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라면 들었습니다만──”
그 순간 주인은 붉은색을 봤다. 그의 시야 안엔 붉은색과 관련 된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붉은색 눈동자에게 모든 걸 간파당한 것 같은 한기가 온몸을 덮쳐 양팔을 비볐다. 레밀리아를 엿보니 조금 지루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둔하네. 네가 받은 1500달러엔 쓸데없이 떠보지 말라는 지시도 포함 돼 있는 거야.”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입막음 비용도 말이지.”
레밀리아의 당돌한 미소에 주인은 쓸데없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거슬러봤자 좋은 게 없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 질문을 듣고 알고 있는 걸 말하기만 하면 돼. 그리고 모든 걸 잊어버려.”
카운터에 놓여진 빈 잔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유리 곡면에 비치는 건 득의양양한 흡혈귀의 옆모습이었다.
“흡혈귀에게 죽은 사람들에게 흡혈 자국이 남아있다던가── 그저께 당신이 한 말이야. 이 말이 뭔가 계속 걸렸었는데 기간을 제대로 특정하고 있잖아. 그건 즉 특정한 시간보다 전에 나온 희생자한테는 흡혈 자국이 없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분명…… 2주 전이었나요. 송곳니에 물린 것 같은 한 쌍의 구멍이 희생자의 목덜미에 보이기 시작해서 진짜 흡혈귀가 나타난 게 아니냐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보다 전에는?”
“질 나쁜 살인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땐 흡혈 자국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뭐 개중에는 이 연속살인의 초기부터 흡혈귀라고 부르짖던 사람도 몇몇 있었습니다.”
“누가 그랬어?”
“유럽에서 온 광부들이 그랬습니다. 프랑스인, 독일인, 아일랜드인…… 저희 미국인들에겐 흡혈귀는 와닿지가 않아서 말이죠.”
“그래?”
레밀리아는 깊이 생각했다. 자신의 가설과 일치하는 확증을 찾기 위해.
흡혈귀는 인간이 아니다. 흡혈귀의 존재가 성립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과 같은 정신이나 육체 같은 게 아니다. 수많은 인간이 흡혈귀가 실재한다고 확신하는 인식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흡혈귀는 그래야 한다’며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으로 흡혈귀는 구현된다. 그렇기에 흡혈귀의 본질은 인간보다 정령이나 요정, 망령에 가깝다. ──조건만 갖춰지면 흡혈귀는 ‘발생’한다.
흡혈귀뿐만 아니라 모든 이매망량이 이 원칙에서 태어나며 살아가고 있다. 그건 화교 흡혈귀도 별 다를 건 없을 것이다.
레밀리아는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는 이제 곧 태평양에 잠기는 노을빛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태양이 잠기면 마물이 사는 밤이 찾아온다. 이매망량이 날뛰는 어둠이다.
“그런데도 샌프란시스코의 밤은 너무 조용해. ……쥐죽은 듯 조용하다고.”
이 도시에는 부외자인 레밀리아를 제외하고는 마물이 단 하나밖에 없다. 인구수 1만, 그것도 대부분이 황금이라는 끝없는 꿈에 몰린 광부들과 그 광부들의 말로라는 거대한 나선상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이 도시에 그 정기를 먹고 있는 게 화교 흡혈귀밖에 없다는 사실이 유럽의 도시에선 있을 수 없는 이상 사태다.
유능한 엑소시스트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소리도, 교회가 세력을 뻗치고 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즉 이 도시에는 오랫동안 인외가 없었다. 예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살아가던 원주민이나 멕시코인은 지금은 최하층민이 됐다. 서양인들은 그들의 인외를 모르고 언급도 없다. 그렇기에 1848년 이후 캘리포니아에는 1847년까지 있었던 인외들이 손쉽게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서양인은 욕망과 정기를 캘리포니아에 가져왔지만 인외를 데려오지는 못했다. 대양을 건너는 증기선, 그레이트플레인스를 다니는 황마차. 인외가 쥐처럼 몰래 서해안을 향한다더라도 가로막는 난관은 너무나 가혹했다.
분명 캘리포니아에는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금맥과 대등한 가치를 지닌 수많은 정기가 있다. 그러나 레밀리아는 자신의 존재가 강대한 흡혈귀가 아니었거나 영국 귀족으로서의 재력이 없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을 거라고 사우샘프턴에서부터 시작한 오랜 여행을 돌이켰다.
“엄청나게 먼 거리는 모든 존재에게 방해가 되고 시련이 돼. 그래도 인간은 그걸 손쉽게 참고 견뎌냈어. 황금향의 꿈은 수평선 너머에 잠긴 세계의 끝, 프런티어에 모든 걸 걸만한 매력이 있다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경험은 미국인에겐 이번이 두 번째구나.”
지금까지의 인외는 배척당하고 외부에서 인외가 새로이 침입하는 경우도 없었다. 세계의 끝에서 사금 위에 치솟은 무법 도시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는 일종의 공백 지대였다. 그 누구도 먹지 못한 시민들의 정기는 1848년부터 수년간 축적과 응축을 반복해 농밀한 마력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레밀리아는 손으로 시선을 내리고 잔에서 흘러넘치는 브랜디를 상상했다. 유리 곡선을 따라 테이블로 흘러넘쳐 조그마한 나뭇결에 코르크스크류처럼 나선을 그리며 스며드는 호박색 액체──
샌프란시스코는 인외를 원했다. 조그마한 마력의 배출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거대한 마력에 들러붙는 수많은 벌레를 하나씩 집어가며 살펴봤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해냈다. 자신의 농밀한 마력을 소화할 수 있는 상위구조체가 될만한 존재를. 샌프란시스코의 괴물이 될 소재를. 무리에서 튕겨 나간 불쌍한 한 마리의 벌레를.
그리고 레밀리아는 핵심에 이르렀다.
“마지막 질문이야. 당신…… 아니 당신들은 화교를 어떻게 생각해?”
레밀리아의 붉은 눈동자는 주인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꼭 그의 입에서── 기독교 신자의 입에서 듣고 싶었다.
“화교 말입니까. ……좀 기분 나쁜 녀석들이죠. 저희하고는 모든 게 다르니까.”
“그거면 됐어. 고마워.”
마지막 브랜디를 마시고 레밀리아는 일어섰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종자 중 한 명이 먼저 출구로 나가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우리들이 여기에 온 것도 뭘 물어봤는지도 전부 누설하지마. 그 대가는 냈으니까. 명심해.”
“……다음에도 또 와주십시오.”
“바라지도 않는 건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니야.”
불어닥치는 밤바람이 레밀리아의 드레스를 흔들며 빈 병 아래에 깔아둔 술값의 지폐를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태양은 저물었다. 밤의 장막이 드리운다. 지금 이 시간은 이매망량을 위한 밤이다. 흡혈귀를 위한 밤이다.
아름다운 달빛이 손을 뻗은 것처럼 주점의 현관을 향해 내리쬐고 있다.
“그래. 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도 돼.”
마지막으로 얼어붙은 표정을 풀은 레밀리아는 주점 주인에게 미소를 띄웠다. 인식을 방해하는 붉은 안개를 뒤덮은 그녀의 모습은 주인에겐 젊은 남성으로 보여지고 있다. 윤곽은 애매모호하며 위화감이 떨쳐지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주인은 레밀리아 스칼렛의 정체를 의심한다는 발상조차 안 했다.
그러나 지금 주인은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주점 출구에 서 있는 레밀리아는 눈 부신 달빛에 비춰지고 있었다. 분명 눈에 보이는 모습은 검은 코트를 걸친 젊은 영국인 남성이었다.
그 윤곽 속에서 연분홍색의 드레스를 휘날리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양초의 불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 소녀의 인간이 아닌듯한 붉은 눈동자는 아지랑이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흡혈귀가 날뛸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그 흡혈귀의 본질은 3개다.
하나, 불행한 화교의 연쇄살인마녀.
둘, 기독교 신자의 화교에 대한 공포.
셋, 외부에서 들어온 흡혈귀 전설.
샌프란시스코라는 거대한 세포조직은 사금의 산에 뿌리를 뻗고 농밀하고 거대한 정기를 주체 못하게 되었다. 그 마력은 3개의 씨앗을 맞붙여 새로운 키메라를 이 땅에 만들어냈다.
어젯밤 그녀는 레밀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건 당연하다. 그녀는 원래부터 인간으로서 살아가다가 인간에 의해 처형당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금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인외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화교 살인마를 흡혈귀라며 겁먹고 있을 때 그녀는 정말로 흡혈귀가 되었다.
“그게 그 녀석.”
화교 흡혈귀도 구조만 알면 미지의 존재도 뭣도 아니다. 그저 미숙한 꼬맹이다.
레밀리아는 오늘 밤 그녀를 인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외를 만들어낸 이 도시에서── 사금같은 욕망으로 빛나는 도시에서 그녀를 단죄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도로에서 레밀리아 스칼렛은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보름달이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달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샌프란시스코의 흡혈귀는 혼자서 밤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힘없는 소녀가 아니다. 불완전한 인외도 아니다. 틀림없는 흡혈귀다.
기분 나쁜 황혼에 겁낼 필요도 없다. 그녀야말로 황혼에 포효하는 이매망량이다.
고독한 밤에 혼자 떨고 있을 필요도 없다. 추위 같은 건 잊어버렸다.
모든 게 변해버렸다.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흘러들어오는 독기가 피가 흐르는 것처럼 온몸을 맴돌고 스며들며 시시각각 변화시켜가고 있다.
그녀는 팔을 추켜 올렸다. 약한 인간의 팔이 아니다. 강대한 흡혈귀의 팔이다. 어둠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팔이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괴롭혀질 일도 없다.
가족, 꿈, 희망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아조차 샌프란시스코는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 힘과 고독을 줬다. 예전의 자신을 받아들이기엔 현재의 존재와 너무 동떨어져 있고,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익숙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나타내는 기호. 가족에게서 받은 인연. 그녀 그 자체.
“……홍 메이링.”
오랜만에 말한 자기 이름의 울림은 존재가 뒤바뀌어 얼떨떨한 정신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게 만들어줬다.
샌프란시스코의 도로에서 홍 메이링은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밤은 보름달이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