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왜 이렇게 날씨가 험한 걸까.'
라는 레이무의 불평과 함께 시작했던 수 일간의 눈보라가 오늘로 끝이 났다. 실내에만 박혀 있는데 지쳤던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환해졌다.
간만에 문을 열고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마신 다음, 경내의 꼬라지를 본 레이무는 환해진 얼굴을 도로 구겨버렸다.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것까지 겹치자 띵하면서 현기증이 왔다.
푹 푹. 뽀드득 뽀드득.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눈밭에 처음으로 발자국이 생겼다.
"뭐부터 치우면 될까요!"
벌써부터 도와줄 생각을 다 하고. 레이무는 그런 마루를 업고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신사를 난잡하게 만든 잔해들은 대부분 나무들이었다. 당연히 예외도 있었지만.
날아다녀서는 안되지만 여기까지 날아와버린 잡동사니들이 한구석에 쌓였고, 마루는 그 중 불에 태울 것들을 골라내던 중 이건 무슨 물건일까 물끄러미 관찰했다.
눈앞에 떨어져 있는 거대한 가지를 보자 새삼 눈보라의 위력이 실감할 수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반토막난 수준의 크기였다. 눈보라는 요괴가 일으킨 게 아녔을까 의심하면서 레이무는 손도끼로 그 가지를 토막냈다.
마루는 자신의 손에 들린 기왓장을 보고는 눈보라가 불기 바로 전날, 어딘가 다녀오겠다고 신사를 떠났던 신묘마루가 생각났다. 이 기왓장보다 가벼웠는데, 괜찮으실까.
"그게 마지막이에요?"
"나무는 이걸로 끝. 나머지는 누나가 알아서 치워둘게. 요 며칠 동안 밖에 못 나가고 답답했을 텐데, 이 나무만 정리하고 마루가 하고 싶은 거 해."
하고 싶은 거라. 날씨만 개면 만사 해결이라고 생각하고만 있었지, 마루는 뭘 할지 생각해 둔 건 딱히 없었다. 그렇게 나무 토막들을 질질 끌어당기던 중 마루는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렁찬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주의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고, 마루의 눈도 저절로 하늘로 올라갔다. 저 까마귀는 저게 폭풍이 갠 후의 첫 비행일까?
마루는 간단하게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정했다. 그것만으로도 동작이 분주해졌다.
...
불타는 나뭇가지와 쓰레기들은 녹슨 고철통에서 불티를 훅훅 뱉어대고 있었다.
불을 쬐면서 탄내를 맡으니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구수함이 더 진해지는 기분이었다.
"춥지 않겠어? 마루도 알잖아. 날면 눈 깜짝할 사이에 추워지는 거."
레이무의 걱정에도 마루는 그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무는 추위쯤은 좀 참고 말겠다는 건 아니라고 확신했고, 그에게 맞춰주었다.
"어떤 걸 준비했길래?"
"본격적으로 해보는 건 처음인데, 잘 되는지 좀 봐주세요."
마루는 심호흡하면서 공손하게 허공을 떠받들었다. 불티가 솔솔솔 마루의 양손으로 날아왔고, 조그만한 불꽃이 여물었다.
불꽃은 호흡에 맞춰 커지면서 흐름이 되었고, 흐르는 불길은 끈끈한 물엿처럼 느리게 양팔, 그 다음엔 몸과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일련의 흐름이 끝났을 때 마루는 아주 조용히 타고 있는 숯불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마루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불꽃이 기분 좋게 일렁거렸다.
"처음치고는 잘 된 거 같은데요."
"불편하거나 뜨겁지 않지? 힘들지는 않고?"
마루는 대답 대신 양팔을 날개짓하듯 흔들었다. 레이무는 무슨 뜻인지 눈치채고는 마루를 꼬옥 안았다.
적당한 따뜻함과 푹신함. 봄날 햇빛에 데워진 솜이불 같았다. 불에 덮인 마루는 굉장히 부드럽고 따스했다.
레이무는 껴안은 채 그대로 말했다. 꼭 붙어 있는 상태에서 말하자 마루의 몸이 간지럽게 떨렸다.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말고, 어두워지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기분 좋아서 놔주기 아쉬웠지만 레이무는 그만 마루를 풀어주었다. 곧바로 어디선가 나타난 희끄무레한 안개가 땅을 덮었다.
눈과 안개의 분간이 애매하다는 감상이 들 때쯤 안개가 개면서 구름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날아오르는 게 신나는지 구름은 불길의 힘을 받아 힘차게 상승했다. 마루는 방금 까마귀가 날아갔던 방향을 따라갔다.
레이무는 불덩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오늘 저녁밥은 뭘로 할지 생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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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함과 해방감에 마루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활력을 쏟아냈다. 구름은 급정거와 동시에 마루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관성을 받아 뛰어오른 마루는 그 기세를 타 허공을 밟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허공에는 마루의 발길에 맞춰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안개와 구름의 징검다리가 생겨났다.
아마 레이무가 저 아슬아슬한 질주를 본다면 위험하다고 야단을 쳤겠지만 징검다리는 마치 맥박이 뛰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튼튼해지면서 마루의 발로 정확하게 끌려왔기에 본인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루의 체온이 오르자 훅훅 뿜어내는 허연 입김은 더 뜨겁고 짙어졌고, 풀무질을 받은 것처럼 불길의 기세는 거세졌다.
불이 내뿜는 빛이 구름과 안개를 투과하자 기묘한 빛깔이 겨울의 허공을 색칠했다.
조금 뒤, 질주의 끝은 요란하면서도 조용했다. 구름길의 끝은 비스듬하게 땅으로 꽂히는 형상이었고, 그대로 눈밭으로 뛰어든 마루는 꽤나 엉성한 자세로 푹 파묻혀 버렸다.
...
흥분에 겨워 한참 동안 뜨거운 질주를 벌인 탓에 마루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자신의 열기에 들뜬 주변의 수증기가 요동치는 게 보일 정도였다.
몸이 너무 차가워졌다 마루는 다시 자신을 불태우면서 일어났다. 눈까지 털어내고 나니 몸도 머리도 완벽하게 회복됐다.
마루는 오랜만에 안개의 호수에 돌아왔다. 그닥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 거대한 빙판을 박살냈던 일도 떠올랐다.
대략 2주 쯤 전에 깨부쉈던 빙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하게 언 채로 불투명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전에 저런 게 있었던가?"
하지만 마루의 눈길은 더 강렬한 색채로 향해 있었다. 전에 여기 왔을 때도 그렇고 방금 전에도 못 봤던 거 같은데.
정말로 없었는지, 그냥 못 보고 지나간 건지. 잠시 뒤 마루는 상식적으로 후자일 거라 생각하면서 넘어갔다.
호기심에 이끌려 다가갈수록 마루는 더욱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큰 저택을 못 봤다는 게 이상하니까. 마루는 그 거대함에 고개를 한껏 올려야 했고, 온통 붉은색뿐인 외관에 아주 특이하다는 감상을 느꼈다.
어느새 높은 담벼락의 정문에 도착했다. 검은빛 쇠창살문만 물끄러미 볼 뿐 마루는 문에 손대지 않았다. 애초에 잠겨 있었지만,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어도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냥 높은 담장을 따라 걸어가면서 저택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마루는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붉은색에 크기의 위압감이 더해지자 저택은 신기한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물론 마루가 집의 본래 용도를 잊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집이면 사는 사람도 많겠지? 누가 사는 집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마루는 조금 늦게 소리가 반응했다.
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 흥흥 거리는 흥겨운 콧소리. 다른 소리들 사이에 섞이는 숨소리.
누군가의 인기척에 마루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는 숨소리를 낮추었다. 상대방은 마루의 소리를 들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루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붉은 벽돌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마루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건너편에 있는 건 인간일까 아닐까? 혹시 사람 해치는 무언가라면 도망쳐야 할까?
딱 딱 딱.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놀라자 마루는 옆구리가 아팠지만 소리가 나오는 걸 꾹 참아냈다. 건너편의 누군가가 돌멩이 같은 걸로 벽을 두드렸다.
"거기 누구야? 혹시 담 넘는 도둑이야?"
반대편의 누군가도 마루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기사 지금 이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둘을 제외하면 동물은커녕 소리를 낼 어떤 것도 없었다.
여자아이의 목소리. 마루는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굉장히 고민됐다. 대답 안하고 냅다 도망칠 수 있을지도 생각했지만, 저쪽은 하필이면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도망가면 그것대로 곤란한 오해를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튀는 걸 보니 도둑은 아닌 거 같고, 소심한 친구네. 이쪽에서 불렀으면 대답은 해 줘야지!"
다행히도 도둑이라는 오해는 사라졌지만 성질 내는 걸 들어보니 대답을 안하면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았다.
마루가 일단 어떤 말이라도 하려던 중에 뭔가가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지만, 가만히 있었더라도 그건 마루 근처에도 안 떨어졌을 것이다.
건너편의 누군가가 담 너머로 던진 눈덩이가 땅에 박혔다. 마루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주워들었다.
"혹시 말을 못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 이렇게 눈덩이라도 던져 봐."
"말은 할 수 있어."
눈덩이는 눈덩이대로 담 위로 던지면서 마루는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온갖 걱정은 자신의 쓸데없는 망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건너편에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치면서 계속 말했다.
"어린애였구나. 얘,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놀아줘. 혼자하는 눈놀이는 질렸어!"
"알았어 알았어. 여기가 네 집이야?"
심심해서 같이 어울려 달라고 하는 게 전에 만났던 치르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친구를 찾는 건데 굳이 거절하자니 마루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같이 놀자는 건데.
"응, 여기가 우리 집이야. 그럼 바깥도 추우니까 우리 집에서 노는 건 어때? 분명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렇게 할까..."
대답하기 무섭게 마루의 고개가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따라간 마루의 시선에 나타난 건 단숨에 담장을 뛰어넘은 건너편의 누군가였다.
마루의 눈에는 눈가루가 투두둑 떨어졌고, 뒤이어 그 사람은 마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마루의 위치를 파악 못한 탓에 일어난 실수는 아니었다.
마루는 정확하게 양쪽 어깨를 짓밟히자 뒤로 무너져내렸고, 뒤통수가 땅에 부딪친 것에 이어 머리를 후려치는 추가타에 완전히 기절해버렸다. 의식의 단절과 함께 불은 완전히 꺼져버렸다.
지금은 구름 때문에 흐렸지만, 혹시 모를 햇빛에 대비해 온몸을 꽁꽁 싸맨 '플랑드르 스칼렛'은 고글과 마스크 너머로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걸로 상호동의된 거지? 이제 우린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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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당장 깨어나라고 몸이 외치는 것 같았다.
헉 하는 비명을 삼키면서 마루는 화들짝 깨어났다. 얻어맞은 머리가 무지막지하게 아팠지만, 마루는 두통을 추스릴 틈도 없었다.
"오, 벌써 일어났어?"
또 붉은색. 방 안은 천장, 바닥, 벽지 죄다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마루는 그 이상 방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시각이 회복됐을 때 플랑은 굉장히 친근하게 말하면서 마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루는 그제서야 플랑의 맨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붉은 저택보다도 더 강렬한 진홍색 눈동자, 마찬가지로 피에 담근 칼끝처럼 붉고 뾰족한 손톱, 그리고 형형색색의 보석들 같은 기묘한 등의 날개. 마루는 흡혈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는 귀기를 느꼈다. 어린아이 같은 겉모습과의 괴리가 더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제 뭐하면서 놀래? 뭔가 재밌는 거 할 줄 알아?"
"대체...무슨 짓을 하려고..."
말도 다 못하고 마루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플랑의 손에서 쏘아진 하얀 광탄이 방금 마루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마법, 혹은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마루는 그제서야 자기가 누워 있었던 자리를 봤다. 다양한 크기의 봉제인형들이 쌓여 있던 자리. 그 중에서 특히 큰 곰인형의 머리에 난 구멍에서 솜이 터져나왔다.
"이걸 피했네! 그럼 이것들도 피해 봐!"
"아까부터 다짜고짜 뭐하는 짓이야!"
푸른색, 파란색, 초록색. 형형색색의 광탄들이 대답을 대신했다. 맞았다간 마루도 인형처럼 터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기세로 벽과 바닥에 튕기거나 부서졌다.
플랑은 아주 재밌다는 듯이 히죽대고 있었고, 마루는 자신의 착각을 정정했다.
같이 놀 친구가 아니라, 장난감을 찾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아주 험하게 가지고 놀려고.
광탄 하나가 마루의 이마를 스치면서 선혈을 뿌렸다. 온통 붉은색뿐인 마루의 시야에 핏방울이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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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달은...너무 길었다... 아무튼 이번 에피소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