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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둥근 벽걸이 시계의 바늘은 밤 11시를 넘어가려는 중이었다.
밝은 갈색의 가구로 채워진 거실은 조용하고, 친숙해진 공기로 가득하다.
빌린 머그컵에 스스로 얼그레이 밀크티를 타내고 커다란 TV 앞에 놓여 있는 하얀 소파에 허리를 걸친다. 나오토는 혼자서 멍하니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액정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여긴 나오토네 집이 아니다. 하루카네 집이다.
사실은 라켈만 하루카네 집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침실을 써서 자기 집에서 반 노숙할 작정이었다만… 그런 건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하루카에게 강제로 떠밀려 이 집에 묵기로 했다.
하야미 가는 맨션 맨 윗층을 전부 집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넓어 하루카와 그 어머니인 유키가 둘이서 살기에는 빈 방이 너무 많다. 나오토는 그 중 한 방을 빌리기로 되어 있었다.
현재, 하루카는 라켈을 데리고 사이좋게 목욕 중이다. 애초에 사이좋게, 라고 생각하는 건 하루카 뿐이고 라켈은 그 경직된 희푸른 낯빛으로 무리라고 호소했지만, 그 부분은 숙박료의 일환으로서 참아 주게 했다.
그렇게 되어 혼자 거실에 남겨진 나오토는 느긋하게 취침 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컵의 내용물은 아직 따듯하고, 기울여 입을 대면 부드러운 우유 향과 얼그레이가 가진 베르가못 향이 코를 빠져나간다. 조금 오래된 찻잎이지만, 아직 충분히 향이 남아 있다. 보존 상태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오토의 기분은 결코 평온하다곤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조용한 밤 시간이 주어지면 아무래도 생각이 나 버린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이것저것.
‘잘 생각해 보면 라켈이랑 만난 거 어제였지….’
깊게 한숨을 토해내며 나오토는 깊게 소파에 기대어 천장을 우러러봤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지만, 라켈과 만나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나고. 무인단지에서 마법을 보고, 거리에서 발켄하인에게 죽여지고, 집에 돌아오니 클라비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다 클라비스와 발켄하인, 레리우스에 의해 집이 반파상태가 되고, 거기다 키이로라는 묘한 여자가 무단침입. 이것들이 전부 어제오늘 일인 것이다.
“아―…, 머리 어떻게 될 것 같아….”
신음하고 나오토는 컵을 테이블에 놓으며 소파에 누웠다.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서 머릿속이 도저히 정리되질 않는다. 휙휙 하고 있었던 일들이 어지럽게 빙빙 돌지만, 딱 그 뿐이다.
이해가 된 거라고 치면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말려들었다는 것 정도.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오토는 스스로의 오른팔을 들어 올려 바라봤다.
티셔츠 소매를 걷어 본다.
‘분명… 이쯤에서 잘렸지.’
그럭저럭 위치는 알겠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자기 팔이고 어디부터가 그렇지 않은지 전혀 모르겠다. 만져 봐도 위화감이 없다. 라켈의 피로 만들고, 그걸 클라비스가 뭔가 개량한 팔.
“흡혈귀… 불사자… 위협, 인가.”
하루카가 없다고 방심해서 말이 새었다.
지금도 거울을 보면 나오토의 머리 위엔 똑바로 『0』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건 나오토가 변질되어 버렸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실감은 없었다. 이 기묘한 눈 탓에 원래부터 스스로 자신이 『평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새로 재생능력이라는 특성이 붙은 것뿐이다.
쿠로가네 나오토라는 자기 자신에 대해선 그다지 크게 변화가 없었던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1년 동안 뿐이다.
1년 지나면, 나오토는 변해 버린다고 한다. 인간이 아닌 것으로. 쿠로가네 나오토가 아닌 것으로.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떤 괴물성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지금의 나오토에겐 알 수 없다.
“아오….”
들어 올린 팔을 털썩 하고 힘없이 내려 감은 눈꺼풀을 덮고, 나오토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아오가 있으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대로, 하루카 곁에서 살 수 있다. 변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로 아오가 있으면, 그걸로 해결되는 걸까. 애초에….
‘아오같은 게, 진짜로 있는 건가….’
어디 있을까,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정보 따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라켈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건, 그 미츠루기 기관의 히카가미 키이로라는 여자다.
“히카가미…, 우연일 리, 없겠지.”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심하게 피곤하다. 생각하는 것마저 피곤해지기 시작해… 나오토는 눈꺼풀을 덮은 자신의 팔의 무게를 느끼며, 그 무게에 잠겨들 듯 어느 틈엔가 잠에 빠졌다.
…노래가 들린다.
흐늘 하고 의식을 녹이는 잠기운 속에서 아직 멍해하면서 나오토는 뚝 하고 그리 생각했다.
‘아아, 나… 잠들었었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며 이해한다. 들리던 건 자장가다. 사실 자장가가 아니라 그냥 동요지만, 그걸 줄곧 자장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나오토는 알고 있다.
하루카다.
처음엔 그녀의 어머니인 유키가 자장가로서 들려주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하루카는 자장가라고 하면 언제나 이걸 부른다. 완만한 멜로디가 멍하니 잠결을 부르는, 상냥한 곡.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마음속으론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기분을 억누르며 나오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우오. 깜짝 놀랐네.”
무심코 목소리가 나왔다.
눈을 뜨니 바로 앞에서 눈에 뛰어 들어온 건 하루카의 핑크색 파자마였다. 그 얇은 천을 산 모양으로 부드럽게 부풀린 채, 하루카의 가슴이 나오토 시야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곧장 하루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부푼 부분까지의 거리는 뜻밖에도 가까워, 혹시 하루카가 조금만 숙이기라도 하면 위를 보고 있는 나오토의 얼굴에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라기 보단.
‘평소엔 그다지 신경 안 썼는데… 의외로 가슴 있네, 이 녀석.’
핑크색 옷감 너머로 엿보이는 실루엣은 브래지어 같은 것으로 받쳐지고 있는 상태완 달라 보였다. 아마, 입고 있지 않은 거겠지.
그리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코끝에 닿을 듯한 부푼 존재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응, 아. 깨웠나?”
문득 눈치 채고 노래를 멈춘 하루카가 풍만한 두 부푼 부분 사이로 이쪽을 내려다본다.
무심코 나오토는 가볍게 움찔해 버렸다. …흔들렸다.
“아니. 근데 깨우라고. 나 아직 목욕 안 했으니까.”
눈앞에 있는 것에서 시선을 피하고 나오토는 얼버무리듯이 대충 말했다.
그리고서야 겨우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다. 아마 소파에 누운 채로 잠든 거겠지. 그걸 목욕하고 나온 하루카가 발견하곤 잠에 빠진 나오토의 머리에 자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빌려준 것이다.
그래서 머리 아래가 따듯하구나. 피어오르는 비누와 샴푸 냄새에 희미하게 손끝이 긴장한다.
하루카는 머리를 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다. 생각해 보면 이 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피곤해 보였거든. 아, 그래도 12시에는 깨우려고 했다?”
“그, 그러냐….”
적당히 맞장구치며 나오토는 어쩌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어나야 하는지, 이대로 해주는 대로 받고 있어야 하는지. 강제로 일어나는 건 하루카를 뿌리치는 것 같아 꺼려지지만, 계속 이대로 있는 것도 그건 그거대로 꺼려진다.
하고… 생각하는 나오토를 부드럽게 어르듯이 하루카의 손이 나오토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손끝이 머리카락 속으로 잠겨들어 천천히 쓰다듬는다.
어느덧 반사적으로 나오토는 깊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루카의 손은 신기하게도 안심하게 된다. 쑥스러움도 부끄러움도 제쳐 두고 닿은 손의 부드러운 감촉에 편안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가볍게 머리카락이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오토는 훔쳐보듯이 하루카를 올려다봤다.
미츠루기 기관의 설명이 한 차례 끝나자, 나오토의 방의 참극은 무인기가 뛰쳐 들어온 사고에 의한 걸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강제적이고 엉망진창인 이야기가 있겠냐 하고 생각했지만, 하루카는 그걸 받아들였다.
라기 보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쪽이 맞을 지도 모른다. 긍정할 수 없는 정도와 똑같을 정도로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런 변명을 저쪽에서 준비해 온 거니까.
하루카는 클라비스에 대한 건 기억하지 못했다. 라켈의 말에 따르면 그런 마법이었다는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 하루카에게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 클라비스가 한 일이니까 이후로도 분명 나쁜 영향은 나오지 않겠지. 그리 생각했다.
“나오가 우리 집에서 자는 거, 왠지 정겹네.”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하루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3년 정도 전이었나. 마지막이.”
나오토가 대답하자 하루카가 크게 끄덕인다.
묵으러 왔던 게 마지막이란 소리가 아니다. 3년 전까지 나오토는 이 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요구해서 다른 방으로 이사했다.
“전처럼 같이 살면 좋을 텐데. 방도 있고.”
그치, 하고 조르듯 말하는 하루카의 말투는 은근히 진심이 담긴 기색이 풍겼다.
나오토는 눈썹을 내리고 뺨을 당긴다.
“너 말야. 그건 아니지.”
“왜?”
“왜냐니… 나랑 넌 이래 뵈도 일단 나이 찬 남녀라고. 이것저것… 좀 그렇잖아.”
“안 그래.”
하루카의 대답은 생각지도 못 했을 정도로 빠르고, 똑똑했다.
“어…?”
기분 탓인가. 하루카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진심을 담아 와서 나오토는 멍청해 보일 정도로 기운이 빠진 목소리를 되돌려줬다.
올려다본 하루카는 묘하게 빤히 이쪽을 보고 있다. 검은자가 커다란 눈은 막 목욕하고 나온 참이라 몸이 덥혀져 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물기를 띈 것 같아 보인다.
쭉 같은 리듬으로 나오토의 머리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이 숨을 참듯이 멈춘다.
“나는 안 그래. 나오는… 좀 그래?”
“하루…”
이름을 부르려고 나오토는 말을 목에 모았다.
올려다본 하루카의 머리 위에서, 숫자가 움직인다. 20 상승.
머리에 있던 하루카의 손이 천천히, 어딘가 쭈뼛쭈뼛 피하듯이, 헤매듯이, 나오토의 뺨에 닿았다. 그 손끝은 뜨겁다.
“나오. 나… 있지…”
말을 끝까지 할 셈은 없었던 거겠지. 혹은 끌어안은 감정에 밀려나간 걸지도 모른다.
천천히 눈꺼풀이 감긴다. 끝이 살짝 올라간 긴 속눈썹. 어렴풋이 열린 입술이, 뭔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안아 올리려 하는 것처럼… 나오토에게 다가온다.
비누 냄새에 어질어질했다. 얼굴 옆에 닿는 부드러운 가슴이, 그 안에 숨긴 고동을 두근두근 하고 나오토에게 전한다. 높아지는 심장 소리는 긴장의 표현이었다.
들리는 이 고동은, 하루카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것일까.
‘위험한데, 이거….’
발밑을 채가는 듯한 흐름에 거역할 수가 없다. 거역할 필요가 있는 건지 어떤지도 생각할 수 없고… 한숨이 닿아―.
“둘 다, 뭐 하는 거야?”
실로 천진난만하게 휙 들여다보는 목소리와 그 주인에 의해, 긴장되어 파열될 것만 같았던 심장이 정말로 파열당하는 줄 알았다.
“우오아와아아아앗?!”
나오토는 서둘러 몸을 굽혀 소파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라고 하기보단 등으로 떨어졌다. 생각하던 것보다 강하게 바닥에 허리를 부딪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 하루카는 일사분란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해 일어섰다.
“라, 라라라라…!”
혀가 꼬여, 갸웃 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침입자, 라켈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하루카를 라켈은 역시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바닥에 미끄러지며 굴러 소파에서 두 걸음 정도 더 멀어진 나오토는 가슴을 터뜨리고 튀어나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듯 가슴에 손을 대고 그 녀석에게 부디 진정하라고 부탁해 본다.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랐다, 근데 위험했어, 방금…!’
바로 몇 초 전, 거기서. 몇 번이나 하루카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던 소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했었나. 떠올리지 말라고 나오토의 뇌가 위험신호를 발한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지금. 분명 자신과 하루카는….
“그런데 하루카, 나오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명백하게 상태가 이상한 하루카와 나오토에 대해서는 가끔 애완동물이 보이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하는 거겠지. 뭐 됐어, 하고 시원하게 흥미를 잃고, 라켈은 자신의 용건을 우선한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아 희미하게 물기가 남은 금발을 베일처럼 등에 늘어뜨리고, 그걸 거실의 빛에 빛내며 라켈은 뒤쪽을 돌아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 여성은 누구지?”
“어―”
무슨 말이냐고, 나오토와 하루카가 동시에 되물어보며 라켈이 가리킨 쪽을― 거실 입구를 본다.
거기엔 복도와의 틈에 있는 문 그림자에 숨어 앉아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주황색으로도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와 정장으로 몸을 감싼, 치켜 올라간 눈초리를 한 여성.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빛내며 이 쪽을 지긋이 관찰하던 그 인물의 모습에, 나오토는 말을 잃고 졸도할 뻔 하고, 하루카는 더욱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외쳤다.
“어… 엄마?!”
거기 있던 건 하루카의 어머니, 하야미 유키였다.
5
하야미 유키는 여자 혼자의 힘으로 하루카를 키우고 나오토를 돌봐준 강하고 속이 깊은 인물이다. 정확한 연령을 나오토는 모르지만, 고등학생 딸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발랄한 미모가 마르지 않은 채 넘치고 있다.
일은 바쁘고 집에 오는 일도 적지만, 그렇더라도 하루카에게도 나오토에게도 차고 넘칠 만큼의 애정을 전신전령으로 보여주는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나오토는 그녀를 진짜 어머니보다도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고, 지금까지 얼마나 사정을 봐 줬는지 생각하면 도저히 고개가 올라가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꺄―악, 뭐야 이거 굉장해, 엄청 찰랑찰랑―! 정―말 아름다운 금발이네, 인형 같잖아! 으~~~, 귀여워! 러블리!”
식탁 의자에 앉아 라켈을 무릎 위에 끌어 앉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부비고, 지긋이 보더니 뺨을 꼬집어 올려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는 유키를, 나오토가 말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나오, 토… 좀…”
공허하게 흐려진 눈을 향하고 라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조를 요청한다.
키이로, 하루카와의 목욕, 그리고 지금 저 유키. 라켈을 습격한 여성진의 맹공을 생각하면 솔직히 불쌍하다고 생각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오토는 어쩌다 지정석이 되어 버린 유키의 대각선 앞쪽 자리에 앉은 채 느긋하게… 도망치듯이 라켈에게서 눈을 돌렸다.
‘미안, 라켈…. 나로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달아올라버린 유키를 누군가가 제어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지금만 해도 하루카가 라켈이 누구인지, 어째서 여기 있는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련의 설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당사자 유키는 어떻게 봐도 딸의 이야기보다 라켈의 용모에 의식이 점령당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기로 해서… 잠깐, 엄마, 듣고 있어?”
결국엔 질려서 양손을 허리에 댄 하루카에게 유키는 라켈의 머리를 맛 좀 봐라 하는 식으로 마구 쓰다듬으면서 얼굴을 들었다.
“응 응,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리고 아까도 미츠루기 뭐시기 하는 데에서 아무개 하는 사람이 와서 그런 말 했거든. 뭐라더라, 무인기랬나? 보상이 어쩌고 기밀보호가 저쩌고…. 잘 기억 안 나지만 진짜 시끄러웠다니까. 말만 많고.”
흐늘흐늘하고 손을 털고 진절머리가 났다는 듯 유키가 과장스레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어린애 같은 행색과 표정에 나오토는 무심코 뿜어 버렸다.
“아… 역시 엄마도 그 말 들었구나.”
하루카가 동정을 담아 쓴웃음 짓는다. 길게 이어진 설명이 끝났을 때의 축 처지는 피로감을 떠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유키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있었다.
“뭐, 둘 다… 아, 지금은 셋인가.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야. 집 같은 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안 되니까.”
그리 말하고, 하얗고 예쁘게 난 이빨을 보이며 웃는다.
유키 상대로는 라켈의 『진홍의 마안(슬레이브 레드)』으로 사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유키는 하루카보다 훨씬 자세하게 나오토의 친척관계에 대해 알고 있을 거고, 라켈 같은 사촌동생이 존재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인기에 대해서도 정말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소란이 났을지, 한 명의 어른으로써 상상할 수 있겠지.
그런데도 유키는 의심을 내보이지 않고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하루카와 나오토의 이야기를 사실로서 이해하고 금색 머리를 한 방문자를 시원하게 받아들여 줬다.
거기다 대고 왜냐, 하고 물으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하루카와 나오토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의심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그래서 있잖아, 엄마. 라켈 말인데, 우리 집에서 자도 돼?”
어머니의 허가를 받기 전부터 자게 할 생각 가득했던 하루카는 미리 묻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유키에게 묻는다.
유키는 꾹 하고 세게 한 번 라켈을 껴안고 나서, 오히려 가족이 늘어난 것을 기뻐하는 모습으로 끄덕였다.
“물론. 오히려 대환영이야, 그냥 여기서 살래?”
“아, 아뇨… 그건 무리…”
뒤에서 들여다보는 유키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라켈이 온몸을 경직시킨다. 마치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과잉반응해서 털을 세우는 새끼고양이 같다.
그런 라켈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유키가 양팔로 가슴에 묶어 버렸다.
“곤란해 하는 얼굴도 귀여워~엇!”
뺨을 문지르는 유키의 시야 밖에서 풀썩 하고 라켈의 목이 뒤쪽으로 떨어졌다.
결국 숨통을 끊은 건가, 하는 생각에 역시 빼내 주는 게 나으려나 하고 나오토는 허리를 들어 올렸지만, 그 전에 하루카가 부드럽게 어머니의 손에서 라켈을 해방시켜 주었다.
“고마워, 엄마. 그럼 우린 슬슬 잘게.”
그러고 보니 하고 생각하고 나오토가 시계를 보자,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은 이미 제일 위를 지나가 있었다. 앞으로 2분만 더 있으면 1시가 되어 버린다.
“나오도 빨리 자야지? 내일 학교 가잖아.”
“어―.”
가볍게 맞장구를 치고 나오토는 거실에서 나가는 하루카를 배웅한다.
하루카에게 재촉당한 라켈은 곤란하다는 듯 나오토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지만, 망설이면서도 하루카의 뒤를 쫓아갔다.
정리하지 않은 긴 금발이 하루카에게서 빌린 오렌지 색 파자마의 등에서 하늘하늘 흔들린다. 몸집이 작기 때문일까. 기가 약한 작은 동물로 보여서 나오토는 피식 웃음을 띠었다.
‘이런 평범한 구석을 보면 제법 귀엽구만, 저 녀석도.’
파자마 차림의 라켈은 낮 때 보다도 어리게 보여서 설마 길거리에서 속옷을 벗으려 한 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다. 이 기세를 타고 옷을 입는 것에 익숙해지면 편할 텐데.
“그럼, 나도…”
슬슬 자야지 하고 나오토도 의자에서 허리를 든다.
하지만 그것을 유키가 가로막았다.
“있지 나오토. 홍차 타주지 않을래?”
“홍차? 괜찮긴 한데요, 유키 씨가 홍차라니 웬 일이래요.”
평소엔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마시는데.
“가끔은 괜찮잖아. 네가 탄 홍차, 맛있으니까.”
그런 말을 듣고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나오토는 어쩔 수 없구만 같은 말을 하면서 찻주전자를 꺼내 와서 전기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끓인다.
나오토와는 다르게 하루카와 유키는 몇 종류씩 홍차를 보관해 두고 하지 않는다. 있는 건 극히 평범한 다즐링 티백과 아까 나오토가 탄 얼그레이, 그리고 하루카가 친구한테서 받은 복숭아 홍차 정도다.
모처럼 부탁받은 거니까 하고 얼그레이 찻잎을 챙겨온 나오토는 향이 넘치는 홍차를 유키가 애용하는 머그컵에 따라 그녀의 앞에 내민다.
“자요. 밀크티로 하실래요?”
“아니, 이걸로 됐어.”
내어진 컵에 손을 뻗으며 유키는 나오토를 보았다. 시선이 전한다.
우선 앉아, 하고.
“…뭐죠?”
거부할 이유도 없다. 나오토는 순순히 유키 정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 유키는 빙그레 심술궂은 웃음을 띠운다.
“아깐 미안~. 좀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뭔…!”
혹시 아까 유키 것과 같이 자기 몫의 홍차도 따라서 지금 입에 대고 있었다면, 백퍼센트 성대하게 뿜어져 넘친 뜨거운 차로 세수를 했겠지.
라기 보다, 갑자기 그 얘기냐. 진지한 이야기를 상상하고 내심 속이 조이고 있었는데, 설마 하던 야리꾸리한 웃음에 나오토는 동요를 드러내고 의자를 크게 들썩였다.
컵을 들어 올리며 유키는 다른 한쪽 손 엄지와 검지로 몇 센티 틈을 만들어 눈높이로 내보인다.
“아주 조금 남았었는데~. 아깝다…. 앞으로 진짜, 요만큼…”
“집어쳐.”
나오토의 뇌리에 좀 전의 광경이 되살아난다. 코끝을 간질인 비누 향기와, 하루카의 멈출 수 없는 날숨.
눈을 돌리려 하는 나오토를 쫓아 유키는 명안이라도 떠올렸다는 듯 밝게 튄 목소리로 추격한다.
“아, 뭣하면 이따 하루카 방에 숨어들래? 뺏어 버려~.”
“당시인! 그게 엄마라는 사람이 할 소립니까?!”
“핫핫하. 젊은 동안에 이것저것 경험해 봐야지.”
깔깔 하고 기분 좋게 웃고, 유키는 머그컵을 기울인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쉬며 맛있다는 듯 깊은 차의 수면을 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진지하게 얘기할게. 하루카한텐 아빠가 없으니까 말야. 가능하면 걘 평범한 남편을 찾아서 평범한 가정이라는 걸 이뤄 줬으면 해.”
그것이 유키의 속내,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다.
나오토는 잘 알고 있다. 유키가 하루카를 얼마나 따듯한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래서 얼버무린 말 사이에 살짝 묻어나온 그녀의 애정 깊은 한마디에 후 하고 안도하듯 나오토가 한숨을 쉰다.
“…그렇죠.”
나오토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카는 행복하게 살아 줬으면 한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러니까, 어때.”
쭈욱 하고 식탁에 몸을 올려 내밀고, 딸에게 유전시킨 부드럽고 커다란 가슴을 팔에 올리고, 유키는 들여다보듯 나오토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데굴데굴 하고 호기심의 시선이 나오토의 반응을 기대하며 쿡쿡 찌른다.
그 훤히 보이는 의도에 나오토는 미간에 주름을 깊게 파서 찡그린 얼굴을 만들었다.
겨우 그럴 듯한 공기가 됐다 하면, 이 사람은 곧바로 이런다.
“어떠냐니, 뭐가요.”
“우리 하루카. 괜찮지 않아?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싱글벙글 어딘가 기분 나쁜 미소로 유키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오토는 한숨을 쉬었다. 유키가 하루카를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쯤은 말 안 해도 안다.
“그럼 그렇게 싸게 팔지 말라고요….”
“상대를 보고 파는 거야.”
더욱이 반격을 당해 나오토는 곧바로 대답을 이어갈 수 없었다.
유키는 어딘가 기쁜 듯 눈을 좁히고 나오토를 보고 있었다. 맛있다는 듯, 홍차를 마신다.
“나오토라면, 하루카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목숨까지 걸 테니까.”
그런 상대가 아니라면, 하루카를 믿고 맡길 수 없으니까.
깊게 한숨을 쉬듯 부드럽게 입을 여는 유키를, 나오토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되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바가지 쓰시는 겁니다, 유키 씨….’
말로 할 수 없었던 생각을 가슴 속에서 중얼거린다.
자신은 하루카의 행복을 바란다.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평온하게 살아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루카를 행복하게 해 준다, 라는 기개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굳이 어느 쪽이냐 하면 그것이 없으니까야말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자신에겐 하루카를 평온한 빛 속에서 행복하게 해 줄만 한 힘이 없다. 딱 잘라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루카의 행복이 누구와 어떻게 해야 생겨날지 보다도 지금의 나오토에겐 아오가 필요했다.
찾아야 할 것을 찾아 손에 넣지 못하면 자신은 1년 뒤엔 하루카에게 행복은커녕 불행을 가져다 줄 존재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지 못하면 안 된다. 다시금 그렇게, 실감했다.
“…얘기. 이제 끝이면 저도 자러 가겠습니다.”
뾰족한 말투가 되지 않도록 일단 주의하며 나오토는 피곤함을 비치며 일어섰다. 사실 진짜 피곤했다. 육체적으로도,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도.
“네, 네. 잘 자~.”
도망치는 건데도 유키는 무리하게 잡아 세우지 않고 가벼운 모양새로 말하곤 잘 마셨습니다 하며 홍차의 컵을 비웠다.
이런 별 것 아닌 부분에서도 그녀 나름대로 나오토를 배려해 준 거겠지. 마치 진짜 아들처럼 받아들여 주는 솔직한 애정에 쓴웃음을 돌려주며 나오토는 거실에서 나가려 했다.
그 등에.
“나오토.”
평소에 부르는 것과는 약간 다른, 희미하게 강한 태도로 유키가 말을 걸었다.
나오토는 어깨 너머로 돌아본다.
유키는 이쪽을 보지 않고, 컵 안쪽을 바라보는 채로 말했다.
“미츠루기 기관을 조심해.”
그건 「알고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무엇을, 이라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도, 뭔가 사정의 편린을 알고 있는 자의 말이다.
얼버무리지도 변명하지도, 더욱이 뭘 알고 있는 거냐고 캐내지도 못한 채 나오토는 유키에게 등을 향했다.
섣불리 유키에게 묻지 못한 건, 물으면 그녀를 이 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알고 있던 당사자가 아니면 부외자다. 하루카에 대해 강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듯 유키에게도 또한 어떤 폐도 끼치고 싶지 않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 말을 남기고 나오토는 거실 문을 뒷손으로 닫았다.
…고요한 밤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좋은 밤이다.
옅고 어두운 구름으로 덮인 달은 보름달. 해가 지고 나서 내린 이슬비에 마을은 젖어 있고, 주변은 어디든 착 가라앉아 있다. 덕분에 가로등은 눈부시고 어둠은 깊다. 일단 짙은 그림자에 발을 들이는 자가 있으면 그 용기 있는 한 걸음에 대한 대답으로 밤과 그림자는 눈 깜짝할 새에 그 자의 모습을 집어삼켜 숨겨 주리라.
이미 심야는 지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비의 습기에다 내려가지 않는 기온 탓에 신카와하마 역 앞은 불결하게 축축하다. 그 덕에 길거리는 평소보다 인적이 없고, 큰 거리를 벗어난 골목길에 있는 오락실 뒤편 같은 공간 따위엔 그 누구의 눈도 붙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습한 밤중에 그가 슬쩍 하고 콘크리트 벽 앞을 가로질러 갔다고 해도 그 이상함이나 기분 나쁨에 신경 쓰는 자 따위 없었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깊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는 듯한 발걸음으로 남자는 주차장 옆의 조촐한 공원에 들어선다.
기분 나쁘게 생긴 남자였다. 새카만, 목까지 꽉 잠군 옷을 차려입은 몸은 가늘고 비쩍 길며 거기서 뻗어 오는 팔다리도 또한 가늘고 길다.
가지런하게 쓸어 올린 잿빛 머리카락은 언뜻 사교계에도 어울릴 듯한 신사처럼 보이지만, 턱이 뾰족한 얼굴의 대부분을 덮은 검은 문신이 그가 밝은 세상의 인간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었다. 옷은 가늘고 날카로우며, 거기에 인간다운 따듯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린다고 하면 냉혹함이나 잔인함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눈동자에 맺힌 감정을 재워 두고, 그는 「흠 하나 없는」 회색 콘크리트 벽 앞에서 발을 멈췄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사소한 장난으로서 그려진 낙서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마치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듯 지긋이 시선을 보내고, 그는 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넓게 펴서 벽을 만졌다.
느긋하게, 벽면을 손바닥으로 덧써 간다.
그러자, 마치 벽에서 피가 스며 나오듯 붉은 문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슥 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는 나타난 문자로 눈을 돌렸다. 하나하나, 문자를 확인하듯이 천천히 읽고, 기억한다.
“…이거야 원, 재미있는 초대장이군요.”
가느다란 눈썹을 끌어올리듯 올리곤 영리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더욱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 붉은 문자에 코끝을 갖다 댄다. 킁, 하고 코를 울리며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듯 문자열을 덧그리고는 뒤이어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었다.
묘하게 긴 혀에는 얼굴과 똑같이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 혀로 끈적하게 벽면을 핥아 올렸다.
“아아….”
납득인지 감탄인지. 깊게 숨을 내쉬고 벽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 발치에, 그림자 저편으로부터 재빠르게 기어오는 것이 있었다.
―키리리릭.
갑충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건 인간의 머리 정도 되는 사이즈의 기괴한 벌레였다. 밤에 녹아들어 똑똑히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칙칙한 파란 색을 하고 있으며 튀어나온 검
붉은 눈동자를 가진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몇 개나 되는 다리를 가진 평평한 몸은 상처를 입은 것 같이 움직임이 기민하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인을 따라 매달리듯 찾아온 이형을 내려다보고, 남자는 실로 억양 가득하게 벌레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의 유인, 수고하셨습니다. 냄새만이라도 괜찮았는데… 덕분에 그녀의 맛까지 알 수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말하며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남자는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려 단숨에 그것을 벌레의 등에 내려찍었다.
단단하고 얄팍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와, 부드러운 고기가 터지는 소리가 심야의 공원에서 부딪혔다. 고기 안쪽에 듬뿍 모여 있던 녹색 체액이 주변에 튀고, 곧바로 주변에 밀려 증발했다. 그 후엔 그을린 듯한 자국만 남는다.
남자는 다시 벽을 향했다. 그 붉은 문자가 떠오른 벽이다. 이미 역할을 다했다는 뜻일 것이다. 문자는 옅게 지워지기 시작하고, 결국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사랑스러워 하듯 남자는 벽에 손을 기게 했다. 그리고 떨리는 한숨을 짓는다.
“훌륭해….”
목에서 삐걱이는 목소리로 툭 내뱉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벽을 향해 괴롭다는 듯 눈가를 좁혔다.
긴 손가락을 굽혀 아까까지의 감촉을 확인하듯 쥔다. 그 숨결은 감탄과 황홀함을 담고 있었다.
“언젠가 들었던 그 투명한 목소리… 그에 어울리는 훌륭한 냄새와 맛이다…. 아아, 빨리, 빨리 이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이 혀로 직접 맛보고 싶어. 그 고귀한 모습을 눈에 담게 되면, 이 몸은 솟는 기쁨에 필시 격하게 떨리겠죠…!”
여기엔 없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열정과 욕망을 담아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기대에 그 어깨를 떨었다.
오래도록 꿈꿔온 순간은 머지않았다. 바로 코앞이다. 원하던 것은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숨쉬고, 피가 돌며, 생명을 새기고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는 크게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른다. 어둡게 탁해진 구름 저편에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는 달을 올려다봤다.
그 달 너머에 말을 건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그 영혼에.
“이 스피너 스페리올, 당신을 위해 최고의 벌레를 준비하겠습니다. …라켈 알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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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새로 등장한 놈도 역시 변태야.
하여간 이 시리즈는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 게 자랑이기라도 한가...
우선 설정화가 있으니 봐야겠죠.
아 젠장, 묘사 보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변태같이 생겼잖아.
스피너 스페리올입니다. 스피이너가 아니라 스피너어 입니다.
큰 특이점은 없습니다만, 언급된 문신이 마치 뭔가에 침식이라도 당한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네요. 본편 라그나 어깻죽지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혀에 있는 저 문신. 라그나의 쇄골 사이와 코트 어깨, 플라티나의 로브 등부분에 그려진 문양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뭔가 관계가 있으려나요.
달리 신경쓰이는 점이라면, 나오토가 키이로에 대해 생각한 부분과 유키에 대해서네요.
히카가미라는 성을 가지고 우연일 리 없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름이나 사람 자체가 아니라 성에 반응한다는 건...
키이로만 떡밥을 가진 게 아니라 나오토도 키이로에 대한 떡밥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유키... 갑자기 튀어나오신 유쾌한 아주머니십니다.
근데 너무 유쾌해. 실질적으로 나오토는 가진 것 하나 없이 친척 빽으로 먹고사는 중인데 딸을 넘기려 하다뇨. 현실을 봅시다.
그런데 나오토의 묘사에 신경 쓰이는 구석이 나왔습니다. 나오토의 친척 관계를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과, 미츠루기 기관에 대한 것을 포함한 뭔가를 '알고 있다'는 점.
실제로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말한다고 그대로 믿어 주는 부분도 그렇고, 역시 마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네요.
이제 3장이 끝나고, 본격 후반부인 4부로 들어갑니다.
시점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파트입니다. 이제 한동안 잊혀져 있던 이사 선생에 대한 내용도 더 나오겠죠.
저 사람 많은 곳에서 나오토가 어떻게 구를 진 두고 봐야 하겠지만.
요즘 페이스가 좀 늦어졌네요. 그래서 두 챕터 올렸습니다 헤헷.
재밌게 보시고 댓글 다세요. 두개 다세요. 다시 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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