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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과 후. 신카와하마 제 1고등학교에서 집인 맨션으로 돌아가는 길. 나오토는 혼자 걷고 있었다.
평소라면 같이 하교했을 하루카는 바쁘니까 라며 먼저 돌아갔다. 거기 동행하지 않은 것은 사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귀가하기 전, 나오토는 먼저 교무실에 들렀다.
목적은 이사였다. 다시 한 번 머리 위 숫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오토가 갔을 때엔 이사는 이미 퇴근한 후였는지 학교 어디에서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듯 한 이유도 없는데 일반 학생이 교사의 주거지나 귀가 경로 같은 걸 물어도 알려 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별 수 없이 포기한 나오토는 평소보다 늦게 교문을 나섰다.
통학로 도중에 있는 번화가로 향하는 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해는 서쪽 하늘을 펴바른 듯 한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한 직후에 비하면 아주 약간 날이 짧아진 듯 하다.
하지만 나오토의 의식은 천천히 여름으로부터 멀어지는 날의 길이도, 선명하게 물든 저녁 하늘의 경치도 아닌 다른 것에 팔려 있었다.
『925』.
평소에는 적극적으로 그 숫자에 대한 건 신경 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런 수치는 있을 수 없으니까.
의식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수준인데, 그런 숫자를 달고 평범하게 두 다리로 서서 수업하고 학생을 비난하고 하는 데에 45분이나 버틸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근데 뭐 확인할 방법도 없고. 아 진짜, 뭐가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갑니다’야, 이사 자식!”
투덜투덜 불만을 목소리로 표현하며 날뛴 뒤, 입이 ㅅ자 모양으로 뒤틀렸다.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 넣고 벅벅 긁…으려고 했는데, 나오토는 그대로 손이 멈췄다. 동시에 다리도 멈췄다.
이사의 이상도 그 순간 완전히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그 이상으로 이상한 것을 일몰이 다가온 거리의 건너편에서 봐 버렸다.
그것은 엄청난 기세로 달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두 명이다. 하나는 남성이다. 등을 둥글게 구부린 듯 한 부자연스런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소녀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오토의 의식을 순식간에 사로잡은 부분은 두 사람의 존재에도 남자의 이상한 자세도 아니다.
그 숫자다.
달려 나가 시야 밖으로 사라진 두 명의 모습을 나오토는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치의 이상은 한 눈에 알았다.
소녀의 머리 위에 보인 수치는 자릿수가 너무 많았다. 보통 인간은 어떤 사람이라도 5자리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소녀의 머리 위에는, 적어도 8자리의 숫자가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를 뒤쫓는 구부정한 남자의 머리 위에 보인 숫자는─ 『0』이었다.
『0』. 그것은 죽은 자를 의미한다.
달릴 수 있을 리는 물론… 살아날 방법 자체가, 없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무리 그래도 있을 수 없는 숫자가 너무 많이 보인다. 눈이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오늘은 빨리 돌아가서 후딱 자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해서 귀가를 서두─
“아니, 아니아니아니, 잠깐잠깐잠깐!”
르려던 다리를 멈췄다.
신경이 쓰인 건 숫자가 아니다. 상황이다.
지금, 한 소녀가 수상한 남자에게 쫓기고 있는 거 아니었나.
인식과 동시에 나오토는 튕기듯이 달려 나갔다. 발견한 두 사람을 쫓아, 찾는다.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오토가 뛰기 시작한 앞쪽은 마치 자연재해가 지나가기라도 한 듯 한 몰골이었다. 전봇대는 꺾여 있고, 도로의 아스팔트는 뒤집혀 있고, 갈갈이 찢긴 가드레일의 조각들이 도로 한중간에 흩어져 있다.
역시. 묘한 납득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이상수치를 단 2인조의 흔적이다.
무참히 새겨진 상처자국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휴대기기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얼마 후면 무수한 영상자료가 T.O.I에 업로드되겠지.
부지런히 좌우를 둘러보며 표적을 찾는 카메라맨들의 옆쪽으로 빠져나가, 나오토는 심상치 않은 흔적이 이어지는 길을 빠져나간다.
언제부터일까. 심장이 싫을 정도로 빠르게 가슴을 두드린다.
긴장이나 공포가 아니다. 끔찍하게 절박한 기분이 퍼진다. 그 소녀가 걱정되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다. 뭔가 굉장히, 설렌다.
‘그 애는…’
아까 그 소녀는, 닮지 않았나.
오늘 아침, 어쩌다 본 백주몽. 아무도 없는 번화가에 나타나 이쪽을 바라보던 금발의 소녀. 차가운, 하지만 어째선가 울 것 같던, 슬프고 덧없는 진홍의 눈동자.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놓쳐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숨이 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리는 멈추지 않는다.
본능에, 아니면 감각에 재촉받는 것처럼 달리고, 달린다. 때때로 굴러다니는 파편을 뛰어 넘어 더욱 달려서… 결국 나오토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곳은 음침한 장소였다.
무인단지.
주택도시로서 개발되고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일어난 어떠한 사건에 의해 계획이 중단되고, 그대로 방치된 폐허다.
거의 완성된 상태면서 전기도 들지 않는 폐허로 변한 네모진 건물이 몇 채나 행렬로 늘어서 있다. 여기저기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이 우뚝 하고 외다리로 서서 크고 홀쭉한 사람 그림자 같은 실루엣을 아무도 없는 거리에 띄운다.
여기에 좋다고 다가오는 놈들은 없다. 불법 범법이 만연하는 자들은커녕 쓸 만한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불량배들도 이 장소만큼은 고르지 않는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면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빈 성이 된 무인단지에는, 스며든 압박감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꺼려진다던가 피하고 싶다던가 하는, 공포라기보다는 불쾌함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려고 했던 나오토의 다리도, 무인단지의 부지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
“윽… 여기냐.”
출입금지 팻말을 건 울타리를 바라보며 나오토는 괴로운 듯이 내뱉는다.
아까 그 남자와 소녀가 여기로 들어갔다는 것은 한눈에 알았다. 빈약한 울타리는 크게 벌어지고 출입금지 팻말은 부자연스럽게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차로 무작정 돌격해서 들이받기라도 한 듯 한 모양새다. 하지만 타이어 자국 같은 것도 없고, 대신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깊게 긁힌 것 같은 흔적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 앞은 위험하다. 딱 봐도 위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림자 색이 짙은 무인단지의 안쪽에서 건물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오토는 날카롭게 숨을 마셨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저녁놀의 주홍색과 그림자의 검은색을 똑바로 갈라 둔 듯 한 바랜 광경뿐이다. 움직이는 모습은 없다. 방금 그 굉음만 아니었다면 살아있는 것의 기척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뒤이어 다시 한 번, 이번엔 아까보다도 제법 커다란 붕괴의 소리가 들려 나오토는 반사적으로 지면을 찼다. 벌어진 울타리의 틈새를 지나 인기척 없는 어둠의 성에 발을 들였다.
그 소녀와 남자가 여기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지금 그 소리는 둘 중 누군가가 원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소녀의 위기를 알린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안쪽 방향에서다. 그 쪽을 향해서, 나오토는 포장된 보도를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주변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도, 사람의 생활이 만드는 온기는 쪼가리도 없다. 있는 거라곤 텅 빈 단지와 잊혀진 가로수, 빠져나가지 못하고 괴인 공기와 눌러붙은 것 같은 그림자.
수많은 괴담이 만들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야 가장자리에 지나가는 경치에 나오토는 무심코 오한을 느꼈다.
이런 곳에, 그 소녀는 왜 온 것인가.
‘쫓기는 게 아닌가? 쫓기는 거면 이런 곳이 아니라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가는 게 안전할 텐데….’
여차하면 경찰서에 뛰어들어도 된다. 번화가에서 비명을 지르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혹시 소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기로 몰아넣어진 것이라면, 이건 이미 일분 일초를 다투는 긴급사태다. 빨리 찾아내서 정말 경찰이라도 불러야 할 것이다.
무인단지는 지어진 직후에 그대로 방치된 만큼 똑같은 풍경이 줄줄이 이어지고, 곧 미로라도 되는 듯이 방향감각이 상실됐다.
표지판으로 쓸 만한 개성 같은 게 있는 건물이 없다. 단지 주제에 지도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는 건 어쩌자는 건가.
“젠장, 어디로 간 거야?!”
똑바로 이어지던 길이 늘어선 마른 나무에 가로막혀 나오토는 당황하며 발을 멈췄다.
길은 세갈래로 되어 있었고 좌우로 나뉘어 뻗어 있다. 재빨리 양쪽의 길을 확인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주변은 다시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다. 조금 나쁜 기분이었다. 서쪽 해의 어슴푸레한 주황색이 무인단지의 바로 이 자리에 들러붙듯이 비치고 있다. 새겨진 그림자는 안으로 들어갔다간 어둠에 삼켜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까까지 방향을 찾는데 의지하고 있던 붕괴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난폭하게 어질러진 자신의 호흡이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주위는 침묵하고 있었다.
“…도망친, 건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듯이 나오토는 중얼거린다.
생각해 보면, 전봇대를 툭툭 꺾어버리며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다. 뒤에서 나오토가 필사적으로 달린다고 해서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곤 할 수 없고, 나오토가 도착하는 것보다 빠르게 소녀가 도망치는데 성공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뭐 하는 거냐, 나….’
무계획한 것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우선 경찰에 연락부터 해야 했던 것 아니었나.
눈꺼풀 위에서 눈에 손을 덮고, 나오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녀는 더 이상 무인단지에는 없는 걸지도 모른다. 목적지도 모르고,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좀 더 주변을 찾아볼까.
망설이면서 발뒤꿈치를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키리리릭.
“읏…?!”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튕기듯이 나오토가 돌아본다. T자 도로의 왼편으로 이어지는 길. 그 앞의 짙은 그림자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어느 새…!’
발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나오토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았다. 반사적으로 머리 위를 확인했다. 『0』. 틀림없다. 아까 그 남자다.
남자는 다 떨어진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줄무늬 넥타이는 반쯤 풀리고 너덜너덜하고, 그게 몸맵시를 굉장히 변변찮게 보이도록 했다. 원래는 그런대로 키가 큰 야윈 체형이었을 몸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구부리고 양손을 늘어뜨린 채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나오토를 관찰하고 있다.
그 눈을 보고, 나오토는 숨이 멎었다. 온몸에 천천히 닭살이 돋는다.
남자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안구가 주먹 수준의 크기로 부어오르고, 눈구멍에서 튀어나와 바깥쪽으로 부풀어 있다. 거기다 검은자 부분이 크게 넓어져 있어, 축축한 광택이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잘 보였다.
그 검은 눈이, 주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바쁘게 상하좌우로 움직인다. 그마저도 정상이 아니다. 오른눈이 오른쪽을, 왼눈이 왼쪽을 동시에 향하는 것이다. 카멜레온이 하는 거처럼 데굴데굴 안구를 움직이다 그 오른쪽 눈이 나오토를 포착한다.
“윽….”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나오토의 입에서 넘쳤다. 무섭다, 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역겹게 느껴졌다.
뭐야 이건 또. 어떻게 봐도 인간이 아니다. 뭣보다… 머리 위 숫자는 『0』이다. 이미 살아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고, 이쪽을 보는 건가.
“키릭키릭키릭”
기계적인 소리가 또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어디서, 무엇이 내는 소리인지 확실히 알았다. 알아 버렸다.
눈앞의 이 남자다. 칠칠치 못하게 반쯤 연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면서, 그 입 안쪽에서 곤충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단순한 혐오감에 의해 나오토의 발이 한걸음 물러선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이끌린 것인가. 부어오른 왼눈마저 나오토를 향하고, 남자는 낡은 양복 차림을 질질 끌 듯이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위험해…!’
도망치는 게 낫다. 공포를 어금니로 꽉 깨물고, 나오토는 몸을 당겼다.
그 바로 옆을, 목소리가 지나갔다.
“방해돼.”
“어─?”
아니, 지나간 건 바람이었다. 검은색과 금색의─ 바람.
바람은 소녀의 모습으로 나오토의 앞쪽으로 달려나가 그 기세 그대로 땅을 박차 허공으로 날았다.
재빠른 도약은 말 그대로 돌풍 같았다. 돌풍은 나오토를 향해 다가오는 양복차림의 남자를 차서 날려버리고, 그 뒤쪽에 서 있던 단지의 벽에 때려 박았다.
가볍게 날아간 남자의 몸은 지진 같은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안쪽으로 파묻혔다.
긴 세월 쌓여있다 갑자기 떠오른 먼지들이 확 피어올라 탁한 잿빛의 커텐을 만들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허리에 힘을 빼는 것도 잊은 채 그저 아연히 서 있던 나오토를, 돌풍처럼 날아든 그 소녀가 돌아보았다.
저녁놀의 주황색과 그림자의 검은색으로 착색된 무인단지에, 윤기가 흐르는 금색이 흩날린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을 높게 모아서, 그 뿌리 부분을 뿅 하고 선 검은 리본으로 묶어 두었다. 피부는 비칠 듯이 하얗고, 비쳐드는 저녁 햇빛을 받아 불타는 듯 한 색을 띄고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금색이다. 머리 색 보다도 호사스런 그 색은 시선을 던져진 순간 한번 본 것만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귀한 것이라 느껴진다.
생각하던 것보다 닮았다. 아침의 백주몽에서 한순간 본 둘로 나눠 묶은 금발에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토끼 소녀와.
하지만 지금 나오토와 대치한, 한 묶음의 머리와 금색의 눈동자를 한 그녀 쪽이, 몇 살 정도 나이가 위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나오토 또래 즈음일 것이다.
얇은 입술, 작은 어깨. 키는 나오토보다 꽤 작고, 가볍게 턱을 당기고 있는 탓에 커다란 눈동자가 살짝 올려다보듯이 이쪽을 보고 있다. 발치까지 닿는 긴 검은 망토를 걸친, 화사한 지체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아낌없이 보여…
보여―
"…하아?!”
눈에 들어온 것이 갑자기 믿을 수가 없어져서 나오토는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내며 턱을 들어 올리고 머뭇머뭇 소녀를 봤다.
열린 입이 닫히지 않는다. 다른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옷이. 화사한 몸을 확 감싸 안는 검은 망토 아래에 당연히 몸에 걸치고 있어야 할 옷이… 없다. 백주몽 때의 소녀가 입고 있었던 검은 드레스 같은 건 무슨, 블라우스 한 겹, 스커트 한 벌, 아니 애초에 속옷 하나… 안 입고 있다.
걸치고 있는 거라곤 검은 망토뿐이다. 그런 몰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소녀는 숨김없는 허리에 손을 대고, 흥, 하고 작게 콧소리를 냈다.
“뭘 얼빠진 표정으로 흘깃흘깃 보고 있는 걸까. 당신… 변태?”
희미하게 앳됨이 남아있는 달콤한 목소리다. 하지만 말투는 앳됨과는 거리가 멀고, 명백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울림이 있었다.
네가 말하지 마 이 노출광아. 그리 돌려주려고, 나오토는 말을 목에 모았다.
나오토의 눈이 소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숫자를 봤다. 소녀의 꼬라지는 믿을 수 없지만, 그 이상으로 나열된 숫자에 경악한다.
아까 느낀 『이상』은, 확실히 현실이었던 듯 하다.
“파, 팔천만?!”
터무니없는 숫자다. 몇 번 세어 봐도 8자리 수다. 머리 위에 보이는 숫자로 이런 자릿수까지 나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이레귤러다. 그건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수치로 봐도, 방금 전 남자를 한번 차서 날려버린 심상찮은 힘으로 봐도 명백하다.
“…뭐야?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믿을 수 없다고 눈을 크게 뜨고, 흠칫흠칫 머리 위를 주시하고 있는 나오토에게 소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예쁘게 생긴 눈썹을 좁혀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눈앞에서 시선을 맞출 상대가 있고 그 상대 쪽을 보고 있으면서도, 왠지 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못 박혀 있는 상태니까.
끌어당겨지듯이 시선을 소녀의 눈동자로 돌리고, 나오토는 어떻게든 얼버무리려 말을 골랐다. 머리 위의 숫자 어쩌고 하는 건 아무리 이런 이상한 소녀라도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 아니, 그… 가슴. 없구나~ 해서.”
경악으로 굳은 머리로는 딱 좋은 말을 찾지 못하고, 나오토의 입에서는 무심코 본심을 흘려 버렸다.
자연스레 나오토의 시선은 조금 내려간다. 비칠 듯이 하얀 피부. 그곳에 여성스런 라인을 그리는 부푼 부분은… 조금, 찾기 힘들다.
한 순간,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이해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게, 나오토의 안면에 소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크흡!”
짜부러지는 소리가 흐른다. 미간에 꽂혔다. 주먹으로.
반론으로선 너무 강렬한 펀치에 쓰러질 듯 하면서 나오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시야가 좁혀든다. 옷도 안 입고 다니는 주제에 가슴 크기엔 신경 쓰는 거냐. 걸고 넘어지고 싶었지만, 아까 그 남자처럼 저 뒤쪽 건물에 처박힐 것 같으니 그만두었다.
소녀는 때린 건 금세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인형 같은 얼굴을 무표정으로 되돌리고 나오토를 쳐다본다.
“이런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방해돼. 빨리 사라지도록 해.”
“사라지라니, 너 뭐하는 놈인데….”
“아아, 그런데.”
불만을 담아 되돌려주려고 한 나오토의 말을 끊고,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금색의 눈동자를 향한 쪽에는, 아까 막 부서진 단지 벽 파편의 산이 있다. 노려보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진다.
“이미 늦었네.”
중얼거린 소녀의 말꼬리에 겹쳐 뿌득뿌득 하고 딱딱한 것이 맞물리는 듯 한 소리가 났다. 쌓인 콘크리트를 밀어 올리고, 아까의 양복 남자가 기어나온다.
그 모습에 나오토는 말을 잃었다.
남자의 얼굴이, 인간이 아닌 것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한 단어로 예를 들면 벌레다. 부풀어 튀어나온 안구는 답답한 눈구멍에서 해방되어, 얼굴을 타고 오르는 듯이 검붉은 눈알로 변해갔다. 코는 없어지고, 대신 개미 같은, 씹어 자르기 위한 턱을 갖춘 입이 얼굴의 아래쪽 반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위협하듯이 턱이 크게 열리고 그 안쪽에서 무수한 이빨이 손처럼 꿈틀댔다.
“장난, 하냐…? 뭐야 저건 또!”
악몽이라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같은 백주몽이라면, 아무도 없는 번화가에서 모르는 소녀랑 서로 바라보는 굴곡 없는 꿈이 더 낫다.
주춤한 나오토의 앞에서, 망토 한 겹 걸친 금발의 소녀가 괴물 남자를 향하며 고요하게 몸을 추스렸다.
“보이는 대로, 괴물이야.”
“뭘 침착하게 말하고 앉았어! 위험하잖아 저거, 도망치는 게…!”
나오토의 충고는 갑자기 허리를 잡아당겨지면서 끊어졌다.
다음 순간, 나오토의 눈앞을 뭔가가 범상찮은 속도와 풍압으로 가른다. 곧바로 나오토의 등 뒤편에 있던 단지의 벽이 폭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튕겨 흩어졌다. 굉음이 흐르고, 폭풍은 모래먼지와 함께 나오토의 옆얼굴에 불어왔다.
“좋, 겠…어?”
지금, 뭐였지.
폭발한 단지를 흘끗 옆눈으로 확인하고, 어떠한 예감에 젖어 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1층 벽이 박살난 단지에 등을 향하고 양복 차림의 곤충남이 서 있다. 그 팔이 원래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나서, 관절을 이리저리 이상한 방향으로 틀고 있었다.
묘하게 딱딱한 움직임의 팔은 빈약할 정도로 긴데, 그에 반해 너무나 가볍게 들어 올린 것은 등 뒤에 쌓여 있던 막 박살난 단지의 벽 파편이다. 검붉은 눈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턱을 움직여 키릭키릭 하고 기분 나쁜 음색을 울리며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다.
“우와, 와, 장난 아니잖아!”
얼어붙은 나오토의 팔을 소녀가 당겼다. 반 강제적으로 주저앉혀진 나오토의 머리 위를 던져진 평평한 돌덩이가 날아가고, 또 등 뒤에서 단지의 벽이 박살난다.
돌덩이의 무거움에 더해, 그걸 저런 속도와 위력으로 던져 날린 완력은 심상한 것이 아니다. 혹시 소녀가 팔을 당겨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오토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저 무너진 파편 더미에 섞여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당신 탓에 저 녀석한테 쓸데없는 무기가 생겨 버렸잖아.”
“엥, 나 때문이냐?!”
소녀가 말하는 무기라는 건 즉, 저기 산처럼 쌓여 있는 돌덩이들을 가리키는 거겠지. 그렇다면 저걸 만든 건 소녀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평불만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고 후딱 집에 가서 씻고 잘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보내주실 수 없…”
나요, 는 소리로 나오지 못했다.
갑자기 돌아선 소녀가 나오토의 가슴께에 발차기를 넣어, 그 충격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폐 안에서 강렬한 파열음을 느끼면서, 나오토는 뒤쪽의 땅바닥에 세게 몸을 부딪혔다. 다행히도 소녀가 힘 조절을 해 준건지 가볍게 날아간 나오토의 몸은 포장된 도로를 약간 벗어나 흙바닥에 낙하했다.
구르면서 입에 약간 흙이 들어갔다만 그것에 얼마나 적은 피해였는지를 나오토는 고개를 들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오토가 서 있었던 장소에, 날아온 파편이 박혀 있었다. 마치 공원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는 예술품이 박혀 있는 것 같이.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감화시키거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거나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난폭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행위에서 태어난 것이지만.
식은땀이 옆얼굴에 흐른다. 생각없이 끼어든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위험하다. 이건 진짜 위험하다. 이유도 사정도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관련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또 다시 둔한 소리가 울려 시선을 향하니, 날아오는 파편을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려함으로 도약해 피해내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흘끗 하고 한 순간, 소녀가 이쪽을 본…듯 했다.
‘이건….’
자신이 미끼가 될 테니 지금 도망쳐라. …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말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완전한 자기해석을 바탕으로, 나오토는 충격에 신음하는 몸을 끌어 일으켰다.
아까 그 차 날리기. 그것도 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녀로서는 몸을 날려 감싸준 것이었겠지. 제법 착한 소녀다. 온몸이 엄청 아프지만.
여기선 소녀의 의사를 존중해 도망쳐야 할 것이다. 분명 그녀도 그러길 바라고 있…을 터이다.
“조, 좋아, 빨리 도움을 요청하고 올게…!”
일어나서 몸을 숙이고 달려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선 나오토는 또 경직된다.
무거운 풍압이 다시 나오토의 바로 옆을 찢었다. 뭐가 날아온 건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바로 앞쪽, 겨우 2미터 정도 앞에 있던 가로등을 뽀작 하고 반쯤 부러뜨리듯 찢고, 하얗게 칠이 된 콘크리트 벽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이번엔 잡아 끌어주는 팔도 차 날려주는 다리도 없었다. 아마 몇 초만 빨리 나오토가 달려 나갔더라면 저것에 직격 당했을 것이다.
“어, 어라…?”
나오토는 뒤쪽을 돌아본다. '이 틈에 도망쳐'는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자기해석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나오토를 감싸려고 한다기보다는 곤충남의 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까지 일일이 신경써줄 여유는 없어.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키라구.”
안면곤충남이 또 입가에서 키릭키릭 하는 소리를 내면서 길다란 팔을 뒤쪽으로 휘둘렀다. 관절의 방향을 무시하고, 등 뒤에서 돌덩이를 하나씩 집어 든다.
“자, 잠깐만, 설마 하고 생각하는 건데…”
불안한 예감이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곤충남의 검붉은 눈이 나오토를 노려보고 있다. 이상하게 긴 팔이 하얀 돌덩이를 붙잡은 채 높이 휘둘러진다. 주저 따윈 없다. 강하게 내리치고, 돌덩이는 낮은 소리를 울리며 날아온다.
“으아아아악!”
한심하게 비명을 지르며 나오토는 필사적으로 옆으로 뛰었다. 몸을 지면에 던지고 넙죽 엎드린다.
직후 바로 근처에서 폭발음 같은 소리가 작렬했다. 역시 이쯤 되면 무슨 소린지 당연히 안다. 거기에 서 있던 단지의 벽이 무너져 구멍이 뻥 뚫리는 소리다.
제 6감에 이끌려 나오토는 주저주저 고개를 든다. 찾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다. 바로 찾았다. 긴 금발을 춤추게 하며 소녀는 바람처럼 질주한다. 나오토도 곤충남도 아니고, 처음에 곤충남이 부순 건물의 뒤편을 향해서.
이유는 알 것 같다. 의미도 알겠다. 저 괴물의 배후로 돌아갈 작정이다.
근데, 그렇다는건 말이지.
“역시 내가 미끼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겨우 몇 십초 전까지 눈에 띄지 않게 도망치려던 자신을 서랍에 고이 접어 넣고 나오토는 목소리가 닿는 데까지 외쳤다.
곤충남은 또 돌덩이를 던진다. 나오토를 향해서.
다행히도 이번에 들어 올린 돌덩이는 튼튼하지 못했는지, 던져지자마자 공중에서 부숴져 대단한 질량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맞으면 그냥 끝나진 않는다. 나오토는 땅을 구르며 도망 다닌다.
“아파….”
가까운 도로에 손을 대고 일어난다.
그 순간에,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본다. 곤충남의 팔이 더욱 늘어나 채찍처럼 변해 뒤를 잡으려던 소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맞다, 하고 나오토는 혀를 찬다. 녀석의 눈은 아직 곤충처럼 변하지 않았을 때부터 좌우가 따로따로 돌며 주변을 보는 게 가능했다. 나오토 쪽을 보면서도 바로 옆을 다른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는 것이다.
남자의 팔이 강하게 당겨지고, 위로 휘둘러진다. 소녀의 몸이 공중에 매달리고, 남자는 팔을 단숨에 내려친다.
“그만둬!”
“큿…!”
나오토의 외침과 소녀의 신음, 그것들을 덮어씌우듯이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러자, 소녀의 작은 몸은 둔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내리쳐졌다. 그렇지만 거긴 멋대로 쑥쑥 자란 잔디밭 위다. 조금만 빗겨났어도 콘크리트 벽에 격돌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볍게 튕겨 오를 정도의 힘으로 내리쳐졌다. 소녀는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킨다.
먹잇감을 붙잡은 기분일까. 곤충남은 시원스럽게 나오토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소녀 쪽을 향했다. 남자가 힘껏 팔을 당기니 소녀의 몸은 너무나도 가볍게 지면을 미끄러지고, 엉망진창인 도로변에 부딪혔다.
“으앗…!”
둔한 충격음과, 고통을 머금은 소녀의 작은 비명.
그 순간에, 나오토는 뛰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방향을 돌리고, 소녀에게 등을 향한 채 달려나간다.
‘지금이다… 지금밖에 없어!’
이 몇 초. 곤충남의 의식은 완전히 소녀에게 향해 있다. 애초에 나오토는 여기에 어쩌다 말려든 변수였지, 곤충남의 표적은 처음부터 저 소녀였다.
고작 나오토 하나가 어딘가로 모습을 감춰 버린다고 해서 아무 상관 없을 것이다.
달리고 수풀을 뛰어 넘어, 아까 무너져서 커다란 구멍이 뚫린 단지의 한 동으로 들어갔다.
햇빛을 막는 두꺼운 벽과 천장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음울하게 어둡다. 짙은 그림자는 곧바로 나오토의 모습을 숨겼다. 똑바로 달려 사라지는 나오토의 발소리도, 곧 그림자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소녀는 옆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오토의 모습이 건물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대로 소녀는 엷게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어딘가 자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안심한 듯 한 표정이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에, 인간은 약하며 겁쟁이라고 소녀에게 말하던 인물이 있었다. 지금, 소녀는 그 말을 떠올리고, 그리고 깊이 이해했다.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간다. 저 흉물스런 괴물의 손이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인데도 손끝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갖추고 있고, 그것이 확실하게 소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뻗은 팔은 재차 소녀의 몸을 공중에 들어올렸다. 매달리듯이 작은 몸이 떠오르고, 허공을 가른다.
소녀는 끈질긴 팔에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몸을 비튼다. 하지만 발목에 파고든 손가락은 풀리지 않는다.
아까 전보다도 훨씬 높게 크게 팔을 들어 올리고,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노림수를 정한다.
이형의 눈이 탐색하는 목표는, 처음에 자신의 몸이 묻혔던 무너진 건물의 벽이다. 턱을 떨며, 온몸을 울리는 듯이 먹잇감을 포박한 채로 한 번에 내려친다.
그곳에….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폐허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나오토가 무거운 뭔가를 곤충남의 뒤통수에 힘껏 내리쳤다. 둔한 금속성 소리가 울린다.
반동을 이용해 다시 한 번. 이번엔 머리를 바로 옆에서 찍어, 뭔가가 부서지는 기분 나쁜 감촉이 나오토의 손에 전해졌다.
괴상하게 변한 머리가 찌그러진 채로 곤충남은 크게 몸을 떨더니 천천히 쓰러진다.
쓰러진 몸에 이끌려 소녀의 발목을 붙잡은 손가락이 힘없이 풀렸다.
허공에 들어 올려진 채로 이번엔 놓아진 소녀의 몸은 땅을 향해 떨어진다. 검은 망토가 바람을 받아 시끄럽게 펄럭인다.
그것을 쫓아서, 나오토는 한껏 팔을 벌렸다.
눈이 마주쳤다. 금색의 눈과.
그리고 일부 벽이 무너진 건물 앞에서 나오토가 다리에 힘을 줌과 동시에 뻗은 팔 안에 소녀의 몸이 떨어진다.
“엇, 차, 차차….”
생각하던 것만큼 무게가 없어서 나오토는 의아해하면서도 받아 든 것을 바삐 살폈다.
만져봐서 알게 된 상당한 질감의 망토 건너로 호리호리한 몸의 부드러움을 느낀다. 어깨도 팔도 다리도, 어딘가 이상한 감촉은 없었다. 뺨과 망토에 약간 흙먼지가 묻어있지만 흐르는 피 이전에 작게 긁힌 상처조차 없다.
“무사, 해보이네?”
확인하기 위해 나오토가 끌어안은 소녀에게 물었다.
무사할 리가 없다. 분명 상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 그런 의문은 어쨌든 나중에 풀기로 했다. 애초에 인간의 얼굴이 벌레로 변하고 작은 소녀가 성인 남성을 콘크리트 벽이 박살날 정도의 힘으로 차대는 쪽이 더 비현실적이다.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한 건 아니다. 공중에 던져졌던 때부터 계속, 그녀의 커다란 보석 같은 눈동자는 나오토를 바라보고 있다.
“야? 괜찮냐?”
너무 오래 아무 말도 안 하니 걱정되어 나오토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겨우 어질러진 앞머리 아래에서 눈을 한번 깜빡인 소녀가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
“…어째서?”
돌아온 것은 속삭이는 듯 한 물음이었다.
나오토는 한 박자 쉬고 눈썹을 좁혔다.
“뭐가?”
“돌아 왔어.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너 말야….”
그런 뜻인가. 나오토는 맥이 풀려 덜컥 어깨를 떨궜다.
거기엔 신경쓰지 않고 소녀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본 것은 도로 옆에 던져져 있는 붉은 물체다. 나오토가 끌어안고 달려와서, 그걸로 곤충남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방치된 단지 안에서 쓰이지 않고 잠들어 있던 소화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하나 덜렁 놓고 도망칠 순 없잖아. 일단, 생명의 은인이고.”
소화기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소녀에게, 나오토는 질렸다는 기분을 담아 대답햇다.
금색의 시선이 돌아왔다. 깜빡 하고 다시 눈꺼풀이 오르내렸다. 인형 같은 눈이네, 하고 나오토는 생각했다. 커다랗고 색이 선명한데, 따듯함이나 감정이 어딘가 멀다.
“이상한 말을 하네. 나는 당신이 은혜를 느낄 만한 일 따윈 한 적 없는데.”
눈동자처럼 거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백한 말투로 소녀는 말했다.
어딘가 어이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오토는 약간 불만을 느낀다.
“너야말로 이상한 말 하지 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처음에도 그랬고, 그 다음도 그랬어.”
소녀가 뛰어든 그 때의 강렬한 발차기는 나오토를 공격하려고 한 남자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춰 줬다. 그 다음 투척 공격으로 돌덩이가 날아다닐 때도 팔을 잡아끌고 결국 차서 날려버리기 까지 하면서 직격으로부터 지켜 줬다.
소녀가 옆에서 떨어진 다음에 날아든 돌덩이도 나오토의 반사신경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하나도 직격되지 않았던 건 돌덩이의 궤도가 무언가에 의해 빗겨나간 덕분이었다.
어떡하면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나오토에게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으로라도 도와준 것은 이 소녀 이외에 있을 수 없다.
나오토의 지적을 무시하듯이, 소녀는 또 다른 쪽을 향했다.
수줍어 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소녀다운 구석도 있구만. 하고 감탄한다.
뭣보다, 소녀다움을 발휘할 거라면 우선 자신의 의상 상태에 대해 인식을 다시 해주길 바라는 부분이지만.
소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고, 나오토는 또 눈썹을 좁혔다. 이번엔 의아함이 아니라, 불쾌감 때문이다.
쌓아 올려진 돌덩이 쪽에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굴러다니는 머리 위에 직각으로 떠 있는 숫자는 역시 『0』이다.
이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것처럼 남자의 몸에 노이즈가 생긴다. 상태가 안 좋은 TV처럼 가로선이 몇 줄씩 쳐지고, 꺼지기 직전의 가로등처럼 몸 전체가 몇 번 깜박인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된다. 하얀 종이가 먹에 물들어 가듯이, 남자의 몸이 가장자리부터 점점 검게 물들어간다. 모래가 흐르는 듯 한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결국 몇 초 안에 남자의 몸은 단순한 검은 덩어리로 바뀐다.
완전한 죽음이 거기 있었다.
이미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니다. 인간이라던가, 어디 사는 누구고 성씨는 뭐고 이름은 뭐고.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가정에서 자라고. 그런 정보의 조각마저도 갖지 못하는, 그냥 검은 물체.
이것이 나오토가 아는, 숫자가 『0』이 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나오토 뿐이다. 이 눈구멍에 들어있는 이 눈이. 그 안에서 빛나는 수정체가. 『사냥꾼의 눈』이, 나오토에게 시체를 그저 검은 덩어리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 광경은, 이 기분 나쁜 광경은… 한 가닥의 실을 타고 오르듯이 나오토의 머릿속의 더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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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히로인이다-
아, 초반에 이사의 이상 이상의 이상, 이거 노리고 한 거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우선 히로인 양 설정화도 보죠.
어머야해. (CV.우에다 카나)
설정화랑 묘사랑 묘하게 차이가 있네요. 눈 색이라던가.
이 히로인에 대해 개인 소감으로 잡설 좀만 하자면. 무능합니다.
엄청 무능해요. 진짜 무능함. 나오자마자 벌레한테 잡혀 죽을 뻔 했어요. 본편 레이첼이 위엄있어 보이는 건 나름 능력이 받쳐주니까 그렇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됨.
근데 그러면 어떱니까. 귀여운데. 고생하는 건 어차피 나오토고.
하지만 이 챕터, 저는 약간 아쉽게 생각합니다. 긴장감 조성까진 어떻게 됐는데 길이가 짧아서 맥이 풀려요.
상하 2권으로 온갖 얘기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나 싶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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