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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세상은 부조리하다.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오토는 세상의 무정함을 곱씹고 있었다.
탁자 저편 소파에는 라켈이 허리를 걸치고 있었다.
참 얌전도 하다. 하루카가 최소한의 응급처치로 목욕 수건을 둘러 아까보다는 좀, 정말 미미하지만 약간 나은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있다.
그 눈앞, 즉 나오토의 바로 정면에는 하루카의 모습이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등을 곧게 펴고 앉아 무릎 위에 손을 겹치고 들러붙은 웃음으로 나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관자놀이는 욱신거리고 눈빛에는 찌르는 듯한 차가움이 있었다.
“자, 그럼 설명해 주세요.”
재판관처럼 냉정한 목소리에 나오토의 위장이 조여든다.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나오토는 살피듯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카의 쿡쿡 찌르는 눈빛에 가슴이 아프다. 아니라고 무죄를 호소하고 싶지만 그래봤자 헐벗은 소녀를 소파에 덮쳐누르고 「흐하핫」 같은 웃음소릴 내고 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 함부로 변명할 수 없는 것이 참 곤란하다.
“어─… 그 뭐냐. 그녀는 라켈 알카드 양이라고 하는데요….”
결국 설명하는 혀는 꼬이고 시선은 돌아간다. 꺼림칙한 건 아니다. 아닌데,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거기서 라켈이 움직였다. 그때까지 지긋이 조각상처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하루카 앞에 선다.
“하야미 하루카라고 했지.”
“응?”
“야 라켈, 가만있어 지금은…!”
부탁이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렇게 말하려고 한 나오토의 말을 제지하듯이 라켈은 돌아본 하루카에게 날카롭게 명령한다.
“내 눈을 보도록.”
고해진 순간, 하루카의 몸이 움찔 하고 굳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약간 입을 연 채로 마치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라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 하루카를 역시 시선으로 붙잡듯이 똑바로 바라보며 라켈은 침착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라켈 알카드.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쿠로가네 나오토의 사촌이야.”
“하?!”
갑자기 뭔 말을 하는 거냐 하고 나오토가 깜짝 놀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라켈은 그것을 무시한 채 다음 말을 이었다.
“실은 갑작스럽게도 일본에 올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지낼 곳이라던가 이것저것 준비하는 데 시간이 부족했거든. 그래서 한동안 나오토네 집에 신세를 지기로 한 거야. 그런데 여기 오는 도중에 사고를 당해서 가지고 있던 짐을 모조리 잃어버렸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라켈의 『자기소개』에 나오토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도 그렇게 적당한 핑계가 준비해 놓은 듯이 튀어나오는구나. 감동하는 동시에 질려서 얼굴을 감싸고 싶어졌다.
당연히 라켈은 나오토의 사촌이 아니다. 오히려 라켈이 지금 이야기하는 하루카가 진짜 나오토의 사촌이고, 라켈 같은 사촌이 나오토에게 없다는 건 하루카도 알고 있다.
덤으로 짐을 잃어 버렸다는 것도 처음에 입고 있던 옷이 있을 테니 알몸으로 서성이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런 막나가는 변명으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아무리 하루카라도 안 통한다고!’
아까까지 그녀가 쥐고 있던, 지금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잘 찔리는 부엌칼』이 휘둘러지는 결말이 될 지도 모른다.
나오토는 몸을 떨며 지금까지의 전개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귀에, 믿기지 않는 말이 날아든다.
“그렇…구나. 고생했네, 라켈!”
“…네에에에?!”
다시 한 번 자신이 이런 목소리까지 낼 수 있구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높고 가느다랗게 튄 목소리가 나오토의 목과 표정을 당겼다.
하루카는 일어서서 라켈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설마 하던 동정심에 넘치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그래 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한테도 연락해 줬으면 좋았을 걸. 옷 문제도 빨리 말해 줬어야지. 잠깐 기다려봐, 바로 입을 만한 거 찾아 올 테니까.”
좋아, 하고 작게 기합을 넣고 하루카는 발 빠르게 나오토의 방에서 나가 버렸다.
기다려봐 라고 할 만한 시간도 안 걸렸다. 서두르듯이 바로 허둥지둥하는 발소리가 돌아오고 마치 자기 집이라는 것처럼 거실까지 성큼성큼 들어온다.
“라켈, 이리 와봐. 나오, 방 좀 빌릴게.”
“응? 어, 야!”
재빨리 말하고 하루카는 라켈의 손을 잡고 반쯤 끌고 가듯이 나오토의 방으로 사라졌다.
소용없을 거라고 알고 있음에도 건 나오토의 말은 당연하다는 듯 무시당하고 눈 깜짝할 새에 혼자 남겨진다.
왜 굳이 남의 침실을 탈의실로 써먹는 건가. 화장실을 써도 괜찮고 자기가 방에 들어가고 하루카와 라켈이 거실에 남는 패턴도 괜찮지 않은가. 몇몇 불만은 있었지만 지금부터 자기 방으로 달려가 문 너머로 여자애 둘에게 항의하기엔 배짱도 기력도 부족했다.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고, 정리라도 할까 하며 찻잔에 손을 뻗는다. 덤으로 그 『잘 찔리는 부엌칼』도 회수해 두려다 손이 미끄러졌다.
“아얏….”
실수로 칼날을 쓰다듬듯 만져 버려서 손가락 안쪽을 살짝 베였다. 스윽 하고 칼날이 지나가는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더 소름끼쳤다.
베여서 빨간 속살을 내보인 상처가 비디오를 거꾸로 되감듯이 다시 붙어버린 것이다.
방금 뭐였지 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오토는 컵을 내려놓고 방금 베인 부분을 만져 봤다. 역시 상처는 없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은 있지만 베였다는 사실 째로 지워져 버린 듯 했다.
그리고 흠칫했다. 베인 건 오른손이었다.
어젯밤 꿈인지 현실인지 아직도 애매한 무인단지에서의 사건이 뇌리를 스쳐갔다. 양복 남자의 머리에서 나타난 기괴한 벌레. 그것이 일격으로 팔을 빼앗아 갔을 때의 감촉.
“말도 안 돼….”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입에서 흘렀다.
형태나 감촉을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만져본다. 어떻게 만져 봐도 팔은 자신의 팔 그 자체다. 하지만 문득 생각나 손목에 손가락을 대 보고 흠칫 하고 몸이 굳는다.
‘맥이… 없어?’
원래는 누른 손가락 아래에서 고동에 맞춰 피가 흐르는 맥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당황에서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숨을 멈추고 찾으니 손바닥에 희미하게 심장 박동을 느낀다.
시험 삼아 왼손에 맥을 찾아보았다. 맥이 있다. 똑바로.
‘오른손만….’
보기엔 평범한 팔인데도 자신의 다른 부위와 뭔가가 다르다.
감각은 제대로 느껴지는데도 갑자기 의수를 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내 팔이 아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막연한 불쾌함이 가슴을 채운다.
그 때였다. 갑자기, 적어도 나오토의 귀엔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딱히 꺼림칙한 짓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무심결에 튕기듯 고개를 들린다.
그 눈이 바라보는 쪽에 기분 좋아 보이는 하루카와 그녀에게 팔을 잡혀 끌려 나오는 라켈이 있었다.
“기다렸지, 나오!”
“어, 응….”
신이 난 목소리를 내는 하루카에게서 그 뒤로 시선을 옮기고. 나오토는 희미하게 멈칫했다.
나오토에게 덮쳐지면서도 결코 옷을 입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라켈이 똑바로 의복을 착용하고 거기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미니스커트라는 구성이다. 가슴께를 장식하는 빨간 넥타이가 괜찮은 포인트가 되어 있다. 피부가 하얀 탓인지 아니면 인상적인 금발 탓인지, 뭐랄까 마음속으로 깊게….
“잘 어울리네.”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기분 나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라켈이 턱을 당긴 채로 강하게 노려봤다.
나오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다. 칭찬했는데 노려보다니 무슨 뜻이지.
“라켈한테 맞는 옷이 있어서 다행이네.”
아무래도 몇 개인가 후보를 가져온 모양인지 하루카는 아직 다른 옷이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벌써 아까까지의 분노는 어딘가로 휙 날아간 듯하다. 그렇다면 좀 더 쓸데없는 말로 아예 돌아오지 못하도록 해 두는 게 좋겠지, 하고 나오토는 결심했다.
“그런 옷도 있었네?”
라켈의 모습을 흘깃흘깃 보며 나오토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블라우스도 스커트도 캐주얼한 디자인인데도 라켈이 입으니 어딘가 드레스 같은 고귀함이 생긴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하루카가 평소에 입는 옷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사실 이거 우리 엄마 취향이야.”
“유키 씨가?! 진짜?!”
“의외지?”
하루카의 말에 나오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키는 어느 쪽이냐 하면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성격이다. 미니스커트는 그렇다 치고 하얀 블라우스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이건 왠지 친척 아주머니의 숨겨져 있던 일변을 엿보고 만 기분이었다.
“자, 그럼. 이제 나갈 거야?”
짝, 하고 한번 손뼉을 치고 하루카가 나오토와 라켈을 번갈아 보았다.
“나가다니, 어딜?”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무슨 얘기냐고 고개를 젓는 나오토에게 하루카는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향한다.
“어라, 얘기 안 했어? 라켈이 이것저것 서류처리가 있으니까 시청에 가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오가 보호자 입장으로 같이 간다며.”
“어, 아… 그, 그랬지!”
처음 듣는데요. 애초에 보호자라니 뭐야. 캐묻고 싶은 것은 잔뜩 있었지만 그래도 라켈의 의도는 대강 알았다. 하루카 빼고 둘이서만 다른 데로 장소를 바꾸고 싶은 거겠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는 건 좀 싫지만 어쩔 수 없다. 하루카가 있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깜빡했네.”
실수로 너무 국어책을 읽었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하루카는 딱히 의아해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배려하듯이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따라갈까?”
“아니, 됐어. 가는 김에 여기저기 구경시켜주고 올게.”
갑자기 일본에 온 친척이라는 설정이면 이런 구실도 괜찮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하루카에게 할 거짓말을 늘리는 건 괴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도 없다.
나가기 전에 거실의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나오토는 지갑을 가지러 방으로 돌아갔다. 하루카가 따라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침대 아래에서 걸레짝이 된 교복을 꺼낸다.
만에 하나 들켰다간 영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반사적으로 넣어 둔 것인데, 지금은 그 때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어쨌든 라켈에게 들을 얘기 다 듣고 돌아오면 우선 무엇보다 이것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새 교복을 사야 하나 하고 약간 우울해지면서 나오토는 다시 그것을 침대 밑 가장 안쪽까지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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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능력 발현했습니다.
이제 어차피 안 죽을 테니 그거 믿고 데굴데굴 굴리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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