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그녀를 등에 매고 희뿌연 연기 속을 걸어갔다. 그녀의 몸무게는 예상 외로 꽤나 가벼웠다. 등에 닿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이 청년을 다소 곤혹스럽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더듬으며 길을 가다 보니, 아까 타고 왔던 자전거가 벽돌담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땅에 내던지고, 청년은 그녀를 먼저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앞쪽 안장 위에 앉았다. 그런 뒤,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등에 덮은 다음, 자신의 허리 앞까지 끌어당긴 외투의 양 팔 소매를 꽉 묶었다. 의식을 잃은 그녀가 혹시라도 자전거에서 떨어질까 걱정되서였다.
등 뒤로 들려오는 총소리와 매캐한 화약 연기, 비명과 고함을 뒤로 하고 청년은 자전거를 탄 발을 박찼다. 두 사람이 탄 자전거는 두 명분의 무게 때문에 처음에는 기우뚱거렸으나, 어느샌가 쾌속한 속도로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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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대로를 따라오다 보니, 사거리 한 가운데 경찰들과 그들이 타고 온 경찰차들이 모여 있고 그 앞에는 노란색과 흰색의 바리케이드가 겹겹으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년은 자전거를 틀어 펼쳐져 있는 바리케이드 한 쪽 구석의 열린 길을 따라 진입했다. 허둥대는 모습으로 경찰들에게 의심을 살까 두려워, 페달을 밟는 속도는 조금 늦춘 채였다. 두 사람이 탄 자전거는 느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그 사이를 지나갔다. 차 옆에 서서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던 한 경찰이 청년을 힐끗 쳐다봤으나, 청년의 소매 떨어진 셔츠와, 뒤에 업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여자를 보고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마 경찰들과 인류해방전선이 교전중인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탈출한 시민 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전거의 속도를 서서히 올렸다. 이윽고 자전거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던 구역을 벗어났다.
바리케이드를 벗어나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까지 오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진동이 느껴졌다. 의아해하는 청년은 아랑곳없이, 진동은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지축마저 흔들렸다. 그리고 먼 전방에 새카맣게 밀려오는 무언가를 보고서야 청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군인들이었다. 정부는 이 사태를 막기 위해 군부대를 투입한 것이다.
맨 처음에는 커다란 전차 십여 대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차량들이 나타났다. 차량의 뒤에는 마치 개미들의 행렬을 연상시킬법한 모습으로 군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착착거리는 발걸음으로 구보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매우 긴장한 듯, 입을 앙다물고 전방만을 주시하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 군인이 두 사람이 탄 자전거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봤으나, 청년은 그들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뒷통수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참으며 한참 동안 페달을 밟자, 이윽고 대열의 끝이 보였다. 청년은 마지막 군인을 지나치자마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녀의 정체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들켰거나, 누군가가 검문을 하기라도 했다면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청년은 두 번의 위기를 별 다른 고생도 없이 가벼이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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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곧 자신이 살던 동네에 도착하였다. 평소에는 시끌벅적하던 사거리의 소음도, 이 시간대만 되면 어디선가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도 없이 도심은 쥐 죽은 듯 조용하였다. 아마 다들 집에 숨었거나, 어딘가로 멀리 달아나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것이리라. 덕분에 청년은 누군가의 의심을 살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자전거를 집 앞에 대충 세워놓고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그녀를 등에 짋어매고 자신이 묵고 있는 골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의 안쪽에 자물쇠를 채운 뒤 청년이 간신히 숨소리만 느껴지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 한 명을 등에 짋어지고 가슴 속을 말로 못할 긴장감으로 애태우다, 간신히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기에 온 몸에 힘이 빠진 것이다.
청년은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규칙적으로 내 쉬는 숨소리에 맞춰, 가슴이 위 아래로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몸에 별 다른 큰 이상은 없는 듯 했다. 그녀 역시 하루 종일 시달려 지친 몸이라, 내 주먹 같지도 않은 주먹 한 방에 기절했겠지. 청년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무거워질대로 무거운 몸으로, 간신히 이불을 가져와 그녀를 덮었다. 그리고는 자신 역시 방바닥에 쓰러지듯 누워 양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청년은 말라붙은 입술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로 쉬고 싶어."
그리고는 잠시 후 별 다른 저항도 없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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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청년이 잠에 든 뒤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안드로이드 여자가 몸을 뒤척였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살짝 열렸다가, 다시 감겼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기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담당 구역의 골목길에서, 청년이 예고도 없이 휘두른 주먹에 맞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그리고는 눈을 떠보니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방에 와 있다. 자신이 있는 장소는 둘째 치고, 청년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뭐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방 한 구석에 있는 다 낡아빠진 서랍장 위, 나란히 늘어선 사진들 속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청년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청년은 자신이 원망받을 것도 아랑곳없이, 그녀를 강제로라도 사지에서 끌어내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맞은 자리가 조금 욱신거렸으나, 그와는 반대로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문득 청년을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은 담당 구역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청년의 집까지 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회사의 규정에 의거한 방어 절차가 시행되어, 마음과는 상관없이 저절로 몸은 다시 그곳으로 향해야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편안한 자세로 침대 위에 앉아 있지 않은가. 알아봐야만 했다. 눈을 돌리니, TV가 올려져 있는 탁자 옆에 청년의 것으로 생각되는 노트북이 있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가지러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바로 옆 바닥에 누워있는 청년을 밟을 뻔 하고는 깜짝 놀랐다. 청년은 풀어진 얼굴에 소매 뜯어진 셔츠를 그대로 입고, 세상 모른 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웃음지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청년의 몸 위에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으나,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급했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방어절차가 가동되면, 청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자신 또한 청년과 이대로 헤어지긴 싫었다. 그녀는 침대 위로 노트북을 가져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손을 놀려 회사 전용의 네트워크에 접속하였다. 전자두뇌용 케이블이 있으면 좀 더 편하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뭣보다, 청년이 그런 개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않았는가.
검은 색 바탕의 화면 위로, 회색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숫자와 영어의 나열이 계속해서 빠르게 지나갔다.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전자화된 대량의 정보를, 안드로이드인 그녀는 무리 없이 알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둘러본 그녀는 매우 놀라 중얼거렸다.
"모든 안드로이드 규정이 삭제되고, 다시 수정 불가능하도록 암호화되었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그 족쇄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도대체 누가, 보통 사람은 열람조차 불가능한 회사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그 모든 걸 순식간에 뜯어고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보니, 자신이 규정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던 그 때로부터 겨우 두 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같은 안드로이드로서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뚝 떨어진 자유를, 도무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한 동안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슴 어딘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벅찬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과의 사랑이라도.